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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서양 고전소설 20+α편 읽기 탐험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8. 8.

서양 고전소설 20+α편 읽기 탐험

지난 8월 1일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 블로그를 운영한 지 꼭 2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우선은 약 10개월간 신앙생활의 근간이 되는 주제들의 이모저모를 다루었습니다. 트인 마음을 견지하면서 각 주제와 관련된 성구들을 근접 문맥 이해 혹은 신학적 성찰이라는 접근 방식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음으로는 지난 2년간 국내 혹은 국외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들에 주목하면서 그것들의 의미를 묵상하는 에세이도 틈틈이 집필했습니다. 블로그의 취지에 따라 인문학적 시각과 성서적 안목을 통합하여 그것들에 접근해 보았습니다. 세 번째로는 서양 고전소설을 독해해서 논평해 보았습니다. 지난 2년 중 약 1년 5개월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작년 3월 15일부터 오늘까지 읽은 작품은 중∙장편 소설 19편, 희곡 1편에다 한 작가의 단편 소설이 다수 포함되고 있고, 다룬 작가는 20명입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시작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까지 읽었습니다. 작가 20명 각각 1편씩 20편 정독을 목표로 한 결과입니다. 다만 조지 오웰의 경우에는 “1984”와 “동물 농장”을 함께 읽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되어 두 편을 다루었고, 오 헨리의 경우에는 여러 편의 단편 소설들을 한데 묶어 독해했습니다. 앞으로도 서양 고전소설 읽기는 지속되겠지만, 이 정도의 시점에서 숨 고르기를 하며 지난 읽기 탐험 여정의 소회를 정리해 두는 것이 의미 있겠다고 생각됩니다. (아래에서 이전 블로그에 소개된 구절들이 인용 부호 없이 인용되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람.)

 

그동안 이 서양 고전소설 독해하는 동안 배운 교훈들을 몇 가지 나누겠습니다. 첫째, 신선한 사고와 섬세한 언어의 지평을 넓혀주었습니다. 창의적인 이야기와 매력적인 인물들과 설득력 있는 묘사로 빚은 소설이나 희곡을 읽는 과정은 신비로운 힘이 있습니다. J. R. R. 톨킨이 “하위 창조”(Sub-creation)라고 부르던 것의 힘입니다. 독자들의 심령에 감동을 선사하면서, 독자들이 새로운 안목과 섬세한 언어를 발휘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제임스 사이어가 언급한 대로입니다. “‘이차적’ 세계를 창조하는 능력으로 (...), 좋은 소설과 시(詩)는 일상 경험이라는 우리의 ‘일차적’ 세계에 창을 내줍니다.” 즉 이 소설과 시는 상상력이라는 의미 기관(organ of meaning)을 통해 내적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익숙함의 베일”에 가려진 온전한 의미를 밝히 드러내는 작업이요, 도구인 것이지요.

 

“반지의 제왕”에는 아라고른이 속한 이실두르 가문 후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임무는 모르도르뿐 아니라 가운데땅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던 사우론의 부하들을 사냥하는 일이었습니다. 평화와 자유를 지키는 자기들의 과업에 대해 고맙다는 말 대신 자기들을 경멸하는 ‘스트라이더’(Strider-성큼 성큼 걷는 사람이란 뜻)라는 별명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자기 일족의 임무로 알고 은밀하고도 신실하게 감당해왔습니다. 그들을 통해 자기 은사로 이웃을 고요하고 신실하게 섬기는 삶의 가치와 보람을 배웠습니다. “더버빌가의 테스”의 주인공 테스를 통해 자신을 대할 때는 타인의 이목 대신 자기의 내적 본질과 고유성에 주목해야 하고, 타인을 대할 때는 그(녀)가 이룬 성취뿐 아니라 그 목적과 동기와 의도까지도 살펴야 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인간 희극”의 스팽글러를 통해 변함없는 품위가 낳는 열매를 보았습니다. 권총 강도 청년의 고백이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거나 불친절했는데, 참으로 인간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사람을 접한 후에 자기가 혼란에 빠졌다고. “돈키호테”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통해 이성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자율적 의사에 의한 것이어야 하고, 거절하는 의사를 존중해야 하며, 사랑은 홀로 설 줄 아는 사람의 것이라는 점과, 낭만적 사랑에는 건전한 것과 불건전한 것이 엄존하므로 분별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사고의 지평뿐 아니라 언어의 지평도 확장되었습니다. 예컨대 인간의 근원적인 죄악의 문제를 자기기만(self-deception)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오만과 편견”에서 배웠습니다. 즉 오만과 편견이 바로 이 자기기만의 양태인 것이지요. 이 자기기만(to cheat myself)은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인 핍이 절감하는 자신의 기본적 결함이기도 합니다. 또한 죄악의 산물이 탐욕이며 바로 이것에서 ‘보바리즘’, 즉 권태감과 무책임이라는 심리적 용종이 비롯된다는 점을 “보바리 부인”의 사례에서 깨달았습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주제넘고 경박하고 오만한 자세 대신 ‘희망을 품는 비범한 재능’ 혹은 ‘낭만적으로 채비하는 자세’라는 보다 고귀한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은 “위대한 개츠비”에게서 배웠습니다. “햄릿”의 생사관(生死觀)에서 ‘사후무사’(死後無死), 즉 ‘죽음 이후에 그 죽음이란 게 없다.’라는 개념을 익혔습니다.

 

둘째,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한편으로 집필 시기가 각각 다른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인간 사회의 문제들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속에 드러난 미국 사회의 빈부 격차, 사회 계층화, 학벌 문제, 인종 문제들은, 각각 다른 양태로 다른 나라 속에서도 전개되었습니다. 100년이 지났어도 미국 내 경제적 불평등, 학벌 계급화, 인종 차별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은 어느 한 가지 제대로 개선된 게 없습니다. “아메리칸드림”(American Dream)은 이미 백 년 전에 끝났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라도,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들을 통해 이런 유사한 사회 상황을 낳은 인간이란 존재의 내면을 깊이 천착해보고 싶은 열망이 사무쳤습니다. 사무엘 존슨이 지적한 대로, 소설가들이나 극작가나 시인들은 “보편적인 자연을 올바르게 재현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찰스 디킨스의 특기인, 관찰력과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공감대’와 ‘통합적인 세계관’을 형성하여 ‘인간성 회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는 점(헤스케드 피어슨)은 모든 작가들이 꿈꾸는 작품의 방향일 것입니다.

 

그동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되뇌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어디서부터 왔는가?’였습니다. 이를테면 성장 소설이라는 면모를 띠고 있는 작품들, 즉 “마의 산”이나 “데미안”이나 “위대한 유산”에서 제기되는 단골 이슈였습니다. 특히 “마의 산"에서는 생명 자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제시됩니다. 생명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생명은 무생물계가 보유하고 있지 않은 고도로 발달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러면서 생명의 근원에 관해 논의하려면 두 가지 기적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첫째는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생겨난 것’을 푸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비물질에서 물질의 발생이라는 또 다른 우연 발생의 문제’로서, 전자보다 ‘훨씬 더 수수께끼 같고 모험적인’ 사건입니다. 즉 과학의 한계를 벗어나는 차원이라는 것이지요. “데미안”에서는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것만이 내 운명이라고 고백하고 투쟁하는 길이 모든 인류에게 열린 길이라는 점을 감동적으로 그려 냅니다. 싱클레어가 모든 젊은이들도 각자 알이라는 세계를 산산이 부서뜨리면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애써 투쟁하고 있는 거대한 새와 같은 존재라는 점을 전장에서 목격했다는 점이 경이로웠습니다. 날마다 죽음과 직면해 있는 전장에서 말이지요. 내 생명의 기원과 의미가 죽음이라는 귀착지와 직결된 이슈라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지요. “위대한 유산”에서는 우리 각자가 특정 부모와 사회 환경 가운데 태어난다는 실존을 열어 밝혀 줍니다. 특히 영국의 산업 혁명 기간 동안에 곳곳에서 발견된 대로, ‘확실한 파멸’이 기다리고 ‘교수형에 처해질 자격’을 갖춘 ‘수많은 아이들’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의 조국, 부모나 가정 형편, 사회 상황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됨됨이와 역량을 무시하지 않고 진심으로 수용할 때,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과 기여할 수 있는 삶의 현장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의 유래에 담긴 신비를 수용하고 그 실상을 받아들여 우리의 신원으로 삼을 때야 비로소 우리 인생이 다음 세대에 전수해 줄 가치 있는 유산을 마련해 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마의 산”에서 제시된 계몽주의의 이모저모와 정신분석학 이론을 접하면서, “이성의 한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먼저 이성의 한계에 무지하여 이성에 경도된 정신이 인간의 죄성과 보편적인 도덕 원리와 초자연적인 영적 실재를 백안시하고 치달은 결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명 살상과 문명사회의 기반 붕괴였습니다. 다음으로 다양한 사랑의 면모를 단지 성적인 사랑과 성적 욕구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사랑으로 나눈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모든 병은 가면을 쓴 사랑의 활동’이라거나 ‘성(sexuality)의 문제가 질병에 이르도록 한다’라는 정신분석학적 주장이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애정관은 인류의 역사에 방향과 동력을 공급해 준 사랑이란 다차원적인 대상을 성애라는 한 측면으로만 접근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도리어 그 다양한 측면을 네 가지로 분류한 C. S, 루이스의 접근법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가족 간의 애정을 가리키는 스토르게, 친구 사이의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 ‘사랑에 빠진’ 사람들 사이의 낭만적인 사랑을 일컫는 에로스 및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입니다. 게다가 “변신”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와 “직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깊이 사색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습니다. “기생충”의 시대 너머 다가 올 “변신”의 시대를 멀리서 바라본 카프카를 통해 핵가족의 붕괴라는 묵시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공적인 시’가 긴요합니다. 소설은 개인적인 내적 성찰과 사변의 세계를 초월합니다. 우리 각자가 외로운 섬이 아니며 공동체의 일원임을 일깨워 줍니다. 월트 휘트먼에 의하면 시인은 “다양성의 중재자”이며 “자신의 시대와 영토의 형평을 맞추는 자”입니다. 시인의 넓은 상상력이 “남자들과 여자들을 꿈이나 점으로 보지 않는” 대신 “남자들과 여자들 안에서 영원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인의 자질로 인해 공적인 시(public poetry)가 필요하다는 그의 요구는 그의 시대뿐만 아니라 현시대에도 적절합니다. 잘 쓴 소설의 역할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헨리 제임스가 언급한 대로 문학적 상상력은 공적인 삶에 대한 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 어떠한 것보다 더 나은 기쁨이 없을 때, 최상의 것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고귀하고 구현 가능한 경우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 최상의 것이 현실 속에서 수용되거나 구현되지 않더라도 조악한 것과 둔감한 것 곁에 내내 서 있기만 한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정의와 탁월성을 잊지 않고 상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기만에서 탈피한 제인과 다아시, 묵묵히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다 왕이 된 후에도 호비트에게 절할 줄 아는 아라고른, 빅 브라더에 맞서 고독의 시대를 감내하는 윈스턴,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다 108명이나 되는 무도한 자들과 맞짱을 뜨는 오디세우스, 사후무사를 계시하는 햄릿, 품위 있는 호머/마커스/매콜리 부부/스펭글러, 뗏목 모험인생의 자유를 구가하는 허클베리 핀, 천직 수행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산티아고,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진실을 삶으로 구현하는 유로지비 미쉬낀 공작. 증기 해머 같은 신사 그리스도인 조 가저리. 이런 인물들이 우리의 상상 속에 살아 숨 쉬면서 조악하고 비열한 현실과 나란히 서 있는 한, 정의롭고 아름다운 사회를 함께 더불어 갈망하고 추구하는 우리의 여정은 이 세상 끝 날까지 내내 이어질 것입니다.

 

넷째, 메타포(‘은유’) 한 가지가 그림 천 개의 가치가 있습니다.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이 한 말입니다. 소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은유 제작자(metaphor makers)와 이야기 창안자(story tellers)로 창조하셨음을 보여줍니다(수잔 갤러거와 로저 런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사고와 경험을 특정한 은유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탁월한 은유와 직유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위대한 유산”에서 엄청난 유산으로 산산조각 난 핍의 인생이라는 배, 증기 해머 같은 조 가저리의 품위, 거울 앞에 선 미스 해비셤의 통곡과 참회를 목격했습니다. “백치”에서 유로지비 미쉬낀 공작, 칼날 아래 살아 간 나스따시아(자존감 없는 인간의 대표), 묘지 속에서 살아 간 로고진(질투하는 사랑의 노예의 대표), 검은 구름 아래 살아 간 가브릴라( ‘훨씬 더 똑똑한’ 범인(凡人)의 대표)라는 인물들을 체험했습니다. “돈키호테”에서 좁은 길을 가는 편력 기사, 제정신을 가진 미치광이, 상상력과 ‘다오’에 승부를 거는 용사로 묘사된 돈키호테의 면모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언급된, 유령들이 꿈을 들이마시며 방황하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북극성의 역할을 담당할 것입니다.

 

다섯째, 인생과 피조 세계는 탐험하고 즐겨야 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언제라도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한 번뿐인 인생을 염두에 두면서, 매일 치열하게 일하고 음식과 성과 음악과 자연 만물을 즐기고 찬양하는 것이 긴요하다는 점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해 주신 이 세상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진선미가 계시되어 있는 현장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의를 깨닫게 되고 그 혜택들을 누리며 삽니다. 그렇지만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헛된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것들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인식한 채, 그것들을 취하는 것을 인생의 주된 목적으로 여기게 될 때입니다. 그러므로 해 아래 있는 삶을 올바로 수용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합니다. 그 길은 결코 회의주의나 비관주의가 아닙니다. 그 길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헉과 짐에게는 이 세상에서 단 한 곳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장소들이 너무 비좁고 답답해서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한 곳만큼은 자기들에게 엄청난 자유를 선사해 주고 안락하고 쾌적한 기분을 만끽하도록 해 주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바로 뗏목이었지요. “뗏목과 같은 안식처는 없네.” 이 작품 속에서 발견한, 가슴을 시원하게 틔워주는 생수 같은 문장입니다. 뗏목 모험인생의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이 뗏목 위에서 헉은 인생의 온갖 묘미를 맛보았을 뿐 아니라 모험 속 대인관계의 비결도 터득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넓은 아량으로 품는 관용의 자세였습니다. 사기꾼들만 만난 게 아니라 자기를 따뜻하게 반겨주고 보살펴 준 손길들을 접하면서 타인들에 대한 인식을 재조정하게 됩니다. 진실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감동받아 더욱 이타적인 삶의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이것들 모두 헉이 누린 모험의 혜택이었습니다. 인격적 성숙의 여정이었습니다. 결국 뗏목 모험 여정은 생존, 자유 및 관용을 기반으로 하여 반면교사들의 사례와 성숙한 사람들과의 교우 관계를 통해 헉이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도정(道程)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섯째,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한 인생의 의미가 엄존합니다. 빅브라더가 사람들의 삶의 전 부면을 옥죄고 있는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1984”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마지막 인간’으로 묘사됩니다. 어떠한 독재자, 권력가도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정신(spirit)이나 보편적 원칙(principle)이 이 세상에 엄존함을 믿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에 그런 존재는 이미 멸종되었지요. 본능이나 사회적 관행을 초월한 보편적인 원리는 인간이 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선양되었습니다. 그 보편적 원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실천적 사랑과 진정성 있는 자세라는 양대 기둥입니다. “인간 희극”에서 고대사 선생인 힉스 선생이 예부터 사람들이 추구해 온 미덕이요 교양의 핵심으로 짚은 것이었습니다. 즉 진실과 사랑이 충만한 내적인 자질이었습니다. 이 자질들로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과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심이 비롯됩니다. 오 헨리가 그의 단편 속에 담은 것이 바로 이런 자질들이 다양한 삶의 정황 속에서 펼쳐지는 스토리였습니다. 돈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영향력의 한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과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인간애와 진실의 힘이 존재한다는 점을 온 세상에 증언했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해도 사랑과 진실이 우리 인생을 관통하고 있다면 인생은 살 만하다는 직관이 생깁니다. 서로 사랑하고 각자가 가치 있는 일을 도모하는 진정성 있는 삶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조금 불편하고 궁색한 것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용솟습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의 시기마다 결말은 열려 있고 그 결말도 외적 조건보다 내적 조건에 더 영향받고 있다면, 더욱 치열하게 실천적인 사랑과 진정성 있는 삶을 추구해갈 일입니다. 게다가 인생의 각 시기마다 어떤 결말이 전개되더라도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보다 더 위로가 되는 건 없을 것입니다.

 

일곱째, 인간에게는 시원적 근원에 대한 향수가 엄존합니다. “노인과 바다”와 “오디세이아”에서 이런 초자연적인 향수를 조우하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노인의 바다”의 산티아고가 자주 꾼 꿈속에는 항상 사자가 나타납니다. 산티아고가 사자들을 처음 본 때는 어린아이였을 때고, 본 곳은 아프리카 해변이었으며, 그 시각은 저녁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서도,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도, 청새치를 잡은 후 고전하고 있을 때도,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인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도 이 사자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 꿈속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놀린도 등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 꿈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저녁’(evening)이나 ‘황혼 녘’(dusk)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이 시점은 이 세계가 저무는 시점이자, 세상에 사는 모든 동물과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낮 동안의 고되고 분주한 노역의 삶을 접어 둔 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노는 시간입니다. 노인의 꿈 장면을 묘사하는 세세한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곳은 이승의 세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황혼 녘이자 이 세계의 종말의 시간대입니다. 결국 산티아고가 꿈꾼 세상은 죽음 이후의 세상 혹은 내세의 세상인 것입니다. 자신이 귀착할 세계일 뿐 아니라 온 인류가 다다를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황금빛 해변과 어린 고양이처럼 뛰노는 사자들이 대변하는 그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상을, 산티아고는 평생 무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적으로 가장 그리워하고 열망하며 지낸 셈입니다.

 

‘오디세이아’의 전 24권 중 절반에 해당되는 12권이 귀향 이후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주목거리입니다. 그 복잡다기한 귀향 여정에 비하면, 귀향 이후의 상황은 단순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내를 넘보는 구혼자들만 처단하면 되었으니까요. 그렇지만 호메로스는 무려 작품 절반을 이 상황에 할애하면서, 그 문제의 실상을 밝힙니다. 그 구혼자들에 대한 제우스와 아테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타케’는 그저 오디세우스가 귀향해야 할 물리적인 장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신적 통치와 공의(公義)가 살아 숨 쉬는 이상적인 곳’이기도 하지요. 이런 작품 속 상황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시원적(始原的)인 본향을 그리워하는 보편적 갈망에 대한 힌트를 제공해줍니다. ‘신적 통치와 공의(公義)가 살아 숨 쉬는 이상적인 곳’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합니다. 비록 현세에서 누리는 삶의 요소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이기에 그것들을 흡족하게 누리는 게 우리의 분복이지만, 그것들에 함몰되지 않고 ‘생명의 시원’을 찾고 구하며 갈망하는 여정을 지속해 가는 게 인간의 도리입니다. 현세의 달콤한 것들을 즐기는 데만 몰입하는 인생들을 향해, 호메로스는 그러한 삶은 돼지의 삶에 불과하고 뼈와 살이 썩어가는 과정이라고 교훈해줍니다. 그리고 과학지상주의에 사로잡혀 본향에 대한 갈망을 상실한 현대인들에게, 아인슈타인은 ‘생명의 시원’을 모색하는 여정을 통해 현세의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그 갈망의 공간을 채워가야 한다고 권고해줍니다.

 

이런 7가지 교훈 외에도, 읽기와 쓰기는 병행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도 이번 서양 고전소설 읽기의 큰 수확이었습니다. 읽기와 쓰기와 연관하여 절감한 교훈 세 가지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많은 책을 대충 통독하기보다 소수의 좋은 책을 숙독하는 게 더 낫습니다. 영국 작가인 D. H. 로런스의 조언입니다. 그 10여 권의 책이 고전소설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의 말에 동감합니다. 대충 읽어 줄거리와 내용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그 작품의 전모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줄거리를 세세하게 알고 있어도, 그 내용 곳곳에 산재한 다양한 문학적 묘사와 다방면의 주제에 대한 세세한 논의를 파악하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입니다. 실제 상황 속으로 들어가 등장인물들이 직면한 일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나름대로 반응하는 일은 또 다른 독서의 면모입니다. 마치 자기가 그 일들을 직접 통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절절하게 체험할 수가 있지요. 이런 간접 체험과 반응들이 쌓일 때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고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실한 본문 읽기가 주된 독서 방향이었습니다. 이런 읽기가 지속되다 보니, “문학 작품은 고정된 의미를 가진 텍스트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다양한, 가능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모태라고 간주하는 것이 제일 좋다.”라는 테리 이글턴의 입장이 옳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정확한 의미를 짚은 유일한 한 가지 해석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리어 도출된 그 의미는 공적인 성격을 띠게 될 뿐 아니라 설득력 있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해석은 본문상의 증거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에 대해서도 작가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자기 해석만이 독점적인 권위를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셈입니다. 그 작품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해석은 앞으로 많은 동시대인들이나 미래의 세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이나 “데미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카뮈나 헤세가 한 말이나 그들이 쓴 글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본문을 정독한 것에만 근거한다면, 과연 카뮈가 논평한 대로 뫼르소를 ‘절대에 대한 진실, 진실에 대한 정열’이 충일한 인간, ‘그 어떤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한 인간’, 급기야는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게 타당할까요?

 

둘째, 읽는 도중에 떠 오르는 새로운 안목이나 질문거리를 바로 적어 두는 게 유익했습니다. 독서 내용이 마중물이 되어 내면 속 참신한 아이디어가 터져 나오는 순간이나, 창의적인 연상 작용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 있는 질문거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바로 포착해 두지 않으면, 바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장차 어떠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창의적인 안목과 반추할 질문들을 간직해 두는 것은 소중한 내적 자산이 됩니다. 이 과정이 바로 정약용이 자기 독서 활동에서 활용한 '질서'(疾書)입니다. 질서의 기본 의미는 깨달은 것이나 질문거리를 빨리 적는 것이지만, 주견을 품고 본문을 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셋째, 읽은 것을 압축해서 요약하는 게 긴요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작품의 모티프나 주제들을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장(章) 혹은 작품 전체라는 맥락에서 특정 세부 사항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생깁니다. 요약하는 과정 중에 이런 안목들을 계속 기록해 가는 것이 차후에 작품에 대한 논평을 하거나, 그 작품의 시각에 대해 자신의 입지를 세울 때 큰 도움이 됩니다.

 

네째, 읽은 내용 중 선택해서 발췌하는 게 주효했습니다. 읽는 도중에 의미 있는 구절에 밑줄을 긋거나 그것을 색깔 있는 펜으로 처리해 두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을 선택해서 어떤 주제 하에 정리해 두어야 할지에 대해선 계속 묵상해 가야 합니다. 글의 전모를 파악해 감에 따라 설정할 주제들이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이 셋째와 네째 사항이 바로 정약용의 '초서'(抄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서라는 것 자체는 기본적으로 베껴 쓰기이지만, 정약용의 경우에는 다른 저술을 염두에 둔 독서법이었습니다. 

 

작년 연초부터 몰아닥친 코비드 팬데믹의 길목에 여전히 서 있습니다. 초유의 사태로 여겼지만 제가 인생을 너무 짧게 산 데다 너무 좁게 본 탓이었습니다. 100살이나 살았어도 사정은 오십보백보입니다. 100년을 넘어 그 이전 시대를 돌아보지 못하면 맹인이긴 매한가지입니다. 결국 얼마나 나이 먹었느냐가 관건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 멀리 돌아보았고 돌아보려고 하느냐가 핵심이 됩니다. “마의 산” 독해를 통해 200년 전까지를 돌아보기도 하고 “햄릿”이나 “돈키호테” 읽기를 통해 400년 전을 회상해 보기도 했으며, “오디세이아”를 통해서는 2천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서양 세계만 일별했지만 그것으로 얻은 수확이 쏠쏠했습니다.

 

"소설과 희곡과 시는 인간과 세계와 삶을 탐구하는 가공할 만한 도구이다. 지도자라면 인간과 세계와 삶에 대해 당연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국민들에게 말한다. ‘효과적으로 이끌고 싶다면, 책을 광범위하게 읽어야 합니다!'"

 

“파이 이야기”(Life of Pi)의 작가인 얀 마텔이 외친 이 언명이 어찌 정치 지도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과 세계와 삶에 대해서 알아야 할 사람은 지도자들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깨닫고 누려야 할 지식이요, 체험입니다. 지난 1년 5개월에 걸쳐 진행된 서양 고전읽기 탐험 여정에 동참해 주신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α편 제목과 각 작품에 대한 에세이 사이트를 집필 순서대로 아래에 소개함.) 

 

-서양 고전소설/희곡 20+α편-

1.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드러난 영적 각성

https://hubil-centre.tistory.com/36

2. 우울한 날의 청량제 오 헨리

https://hubil-centre.tistory.com/43

3. 20세기 코헬렛,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https://hubil-centre.tistory.com/45

4.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선사하는 일상의 원동력

https://hubil-centre.tistory.com/46

5. 무늬만 낭만주의의 잔혹한 결말, 귀스타프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https://hubil-centre.tistory.com/56

6. 정치적 글쓰기가 예술로 승화된,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1984”

https://hubil-centre.tistory.com/57

7. 보편적인 미덕의 화신,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https://hubil-centre.tistory.com/59

8. ‘사후무사’(死後無死)를 계시한 선지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희곡)

https://hubil-centre.tistory.com/62

9. 시대적 갑질의 희생자, 토마스 하디의 더버빌가의 테스

https://hubil-centre.tistory.com/63

10. 품위 있는 인생의 향연, 윌리엄 사로얀의 인간 희극

https://hubil-centre.tistory.com/64

11. 부조리한 야만의 시대를 뛰어 넘는 교양 소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https://hubil-centre.tistory.com/67

12. 본말 전도된 사상의 순교자를 자처하는,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뫼르소

https://hubil-centre.tistory.com/69

13. 뗏목 모험인생의 자유를 구가하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https://hubil-centre.tistory.com/71

14. 천직 수행 위해 목숨 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https://hubil-centre.tistory.com/73

15.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유로지비,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미쉬낀 공작

https://hubil-centre.tistory.com/75

16. 인생의 유래와 유산을 열어 밝히는 공적(公的) 서사,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https://hubil-centre.tistory.com/79

17. 상상력과 다오’[the Tao]를 양식으로 삼은 편력 기사,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https://hubil-centre.tistory.com/83

18.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https://hubil-centre.tistory.com/86

19. 환상적인 초록 불빛에 자신을 던진 로맨티시스트,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https://hubil-centre.tistory.com/92

20. 벌레와 같은 현대 직장인 가장의 실존을 열어 밝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https://hubil-centre.tistory.com/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