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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我)-나를 알라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5. 22.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유명한 김영민 교수가 쓴 책 중에 "공부란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공부는 돈을 더 벌고, 더 유식해 보이고,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쓸모를 추구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지식 탐구를 통해, 어제의 나에게서 도망치는 재미를 느끼며 과거의 나보다 더 성숙해진 나를 체험할 것을 기대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런 자기 갱신의 체험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 의식을 부여해 주고, 타인의 지배를 받는 삶을 거부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식을 탐구하게 되면 자신의 어떤 측면이 달라지길래, 이런 자기 갱신이 이루어진다는 말일까요? 그가 주장하는 요점은, 지식이 심화되면 "섬세한 인식"이나 "섬세한 구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몽골인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서양인이나, 백인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와인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시간을 들여 그 대상들에 대한 지식을 심화하면, 그(것)들을 섬세하게 판별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섬세한 대상 판별로 아름다움과 추함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오는 저주도 감내해야 하지만, 이런 섬세한 판별은 문명이 존재하도록 할 뿐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포착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돕는다는 것이 김 교수의 결론입니다. 즉 과학의 세계에만 정교한 구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의 의미를 포착하는 일과 타인을 깊이 이해하는 일에도 "섬세한 언어"와 구별이 절실하다는 것이지요. 물리적인 세계도 그러하지만, 자신의 인생과 타인의 삶도 결코 단순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거를 알 수 없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자신과 타인을 재단하거나, 상투적인 시각으로 개인적인 처지와 사회적인 상황을 단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성 어린 섬세함을 결여한 안목과 언어로는 자신도, 타인도, 사회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섬세한 언어야말로 자신의 정신을 진전시킬 정교한 쇄빙선이다." 카프카의 은유를 활용한 그의 언명입니다. 섬세한 언어를 잘 활용한다면, 우리 자신이 체험하는 우주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섬세한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공부를 고무"하는 사회를 꿈꿉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김 교수는 이런 공부의 도구로서 독서의 의미를 다룹니다. 우선 "책은 사회와 자아의 중간에 있다."라고 봅니다. 독서에 몰입함으로써, 자아나 사회로부터 도피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은 자신과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도 제공해 준다는 것입니다. 독서를 통해 언어가 풍부해지면 사람들과 직접적인 소통이 없더라도 소소한 축제를 누릴 수가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아이디어들 간에 상호 교류가 이루어져 새로운 상상이 떠오르고 혁신적인 시각이 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위해서라도 다독이 필수입니다. 단순히 어느 책이 정독할 만한 책인지 분별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다독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다독도 해야 하고 정독도 해야 하니, 빠르게 다독하면서 정독할 거리를 찾아야 하겠지요. 정독에는 적어도 세 가지 훈련 과정이 있다고 김 교수는 제안합니다. 첫째, "그 책의 저자가 침묵하는 내용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김 교수는 일반적으로 책 저자들은 '관심종자'라면서, 진정한 관심종자는 자기 이야기를 드러내기보다는 숨기는 데 관심을 둔다고 지적합니다. 둘째, "책 내용을 근저에서 뒷받침하고 있는 가정과 전제들을 재구성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시대와 문화가 다른 곳에서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가치관을 갖고 있을 저자가 품고 있는 전제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의 글을 오독할 가능성은 그만큼 커지겠지요. 셋째, "비판적 독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읽을 때는 트인 마음으로 책 내용을 수용하는 것이 미덕이지만, 읽은 후에는 그 저자의 주장들을 다른 경쟁적인 주장들과 견주어 보며 재구성하고 통합하는 과정이 절실합니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그 저자의 주장의 타당성이 판가름 나겠지요.  

 

공부와 독서에 대한 김 교수의 제안을 염두에 두면서, 이번에 함께 독해할 책은 헤르만 헤세(1877-1962)가 1919년에 발표한 "데미안"입니다.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 시절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3주 만에 탈고한 이 작품은, "청년 운동의 성경"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BTS 멤버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작품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절실한 당면 과제인 정체성 형성이나 개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만 이 작품은 작가가 그 격동의 시기 속에서 개인적으로 겪은 정신적 고뇌와 신체적 고통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헤세가 당시 전쟁과 과도한 민족주의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인해 매국노로 몰렸을 뿐 아니라, 전쟁 포로 후원 센터에서의 과도한 업무, 부친의 사망, 부인과 아들의 병력으로 인해 자신의 심신이 피폐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17년에 프랑스의 베르됭과 솜 강변에서 전개된 전투의 여파로 무려 백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을 목격한 후에, 그는 이 "데미안"을 쓰게 되었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완벽한 서술 능력을 보여 주는 순수 문학의 본보기"라고 상찬하고, 토마스 만이 "더없이 정확하게 시대의 정곡을 찌르고, 지극히 심오한 삶의 선포자가 자신들 가운데서 나타났다고 믿고 고마워한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문학"이라고 기렸던 작품입니다. (번역은 "열린책들"<김인순 역>의 것 참조.)

-“데미안” 줄거리-

(제1장 두 세계) 열 살 무렵에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내(에밀 싱클레어)가 어느 날 이웃에 사는 아이와 노는 도중에, 열세 살가량인 프란츠 크로머가 우리와 합세하게 된다. 재단사의 아들로 일반 공립학교에 다니던 그는 다 큰 어른처럼 굴면서 우리를 주도했다. 그가 나를 다른 아이들과 같이 대해 주어 나는 기뻤고 우리는 그의 말에 복종했다. 그가 강변에서 주어 오라는 물건들도 그에게 주어다 주고 함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른 두 아이가 나를 무시한 채 그에게 바짝 붙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본 나는 그들로부터 내팽개쳐질까 두려워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밤에 길모퉁이 방앗간 옆 과수원에서 친구와 함께 사과 한 자루를 훔쳤다고. 그 거짓말을 듣던 크로머는 그게 사실인지 내게 확인한 후에 다시 맹세까지 시켰다. 그 거짓말을 꼬투리 삼아 그는 내 집 문 안에까지 들어와 내게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 과수원 주인이 과일을 훔쳐 간 놈을 알려 주면 2마르크를 주겠다고 했다면서, 자기가 그 주인에게 이르지 않는 대신 내가 그 돈을 가져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당장 그 돈을 마련할 수 없었던 나는 그것이 내내 부담이 되어 이튿날 아침 토하기까지 해서 학교도 결석한다. 잔돈을 넣어 둔 내 저금통을 엄마 몰래 열어 얼마 되지 않는 65 페니히를 크로머에게 갖다 준다. 그 나머지를 받을 때까지 크로머는 번번이 내게 욕설하고 바보 취급하면서, 자기 아버지의 심부름을 내가 하도록 부려 먹는다.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가위에 눌려 식은땀을 흘리는 신세가 된다.

 

(제2장 카인) 얼마 전 라틴어 학교에 나보다 한 학년 위인 학생 하나가 전학 온다. 그의 이름은 막스 데미안으로서 우리 도시로 이사 온 부유한 미망인의 아들이었다. 어른이나 신사처럼 성숙하게 처신하면서 선생님들 앞에서도 단호하고 당당하게 말하곤 해서 아이들의 마음에 들었다. 한번은 함께 수업 듣는 시간에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집에 가는 길에 그가 내게로 다가와 그 이야기에 대한 자기 의견을 피력해 준다. 우리가 배우는 것들이 대부분 진실이긴 하지만 선생님과는 다르게 볼 수도 있다면서 말문을 연 뒤, 카인의 경우에는 표식이 먼저 있었고 그 표식을 토대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즉 강자가 약자를 때려죽인 후 다른 약자들이 두려워하며 신세를 한탄하자, 누군가가 왜 그들이 그 강자를 죽이지 않느냐고 묻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때 그들이 자기들은 겁쟁이라고 답변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에겐 하나님께서 표식을 주셨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고. 카인이 고매한 인간이고 아벨이 겁쟁이라고 해석한 데미안의 접근 방식은 얼토당토않은 소리였지만, 그의 말은 내 어린 영혼이라는 우물 속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로 작용했다.

 

데미안에 대한 온갖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에도 나는 여전히 크로머의 종으로 살고 있었다. 특히 내 꿈속에서 그는 내 그림자처럼 살면서 내게 군림했다. 내가 훔친 잔돈으로 그에게 빚진 돈을 다 갚았으나, 이제는 내가 그 돈을 훔친 사실을 빌미로 나를 자기 손아귀에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데미안이 그에게서 협박을 당하고 돌아가는 나를 보고는 다가와 그와의 비밀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나는 거절한다.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일이 있어선 결코 안 된다면서 다른 방법이 없으면 죽여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얼굴만 봐도 비열한 그런 녀석과 어울리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면서. 그 날 이후로 크로머는 다시는 내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어느 날 길에서 마주쳤는데도 그는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발길을 돌려 가버렸다. 그때 다시 만나게 된 데미안에게 크로머가 자취를 감춘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가 손을 쓴 거냐고 묻자, 그는 그냥 나하고 이야기하듯이 이야기했을 뿐이고 다만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신상에 좋을 거라고 일깨워 주었다고만 답변한다. 내 문제를 해결해준 데미안을 나는 무시해 버린 채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그 대신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확신한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께 참회를 한다. 이전에 가족들이 누리던 화기애애함 속으로 도망친 것이다.

 

(제3장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내 소년 시절에 대해 더 이야기하자면, 내가 나 자신에게 닿기 위해 나아간 삶의 발걸음만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렇게 나를 추동한 자극들은 항상 ‘다른 세계’에서 혁명적으로 다가와 기존의 내적 평화를 위협했을 뿐 아니라,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도 수반했다. 특히 성(性)에 대한 원초적 본능이 유혹하는 죄악이 되어 나를 위협했다. 이 본능은 “자신만의 삶의 요구와 주변 세계가 가장 가혹하게 갈등을 빚는 지점”으로서, 모든 이가 평생 단 한 번 죽음과 신생을 체험하는 영역이다. 어린 시절을 끝내면서 깨닫게 된 것은 이전에 프란츠 크로머가 대표하던 “어두운 세계” 혹은 “다른 세계”가 이제 내 안에 숨어 있었을 뿐 아니라, 외부에서도 “다른 세계”가 나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내 변두리에 머물러 있던 데미안이란 존재가 천천히 다가와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를 피했고 그도 무리하게 내게 접근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와 달랐던 그는 처음에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교회에서 견진례를 받지 않으려 했다가 나중에야 합류하게 되었다. 같이 수업받던 그와 나는 수업에 주목하지 않는 불량 학생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 신앙심에도 균열이 많이 생겼지만, 그것은 단순히 불신앙을 표출하는 학우들의 경우와는 달랐다. 그들처럼 삼위일체와 동정녀 탄생과 같은 교리들을 허튼소리로 간주하는 대신, 나는 종교적인 것에 깊은 경외심을 간직하면서도 데미안의 영향을 받아 그 교리들을 더 자유롭고 유희적이며 환상적으로 해석하곤 했던 것이다. 예컨대 십자가상의 두 강도 중에 회개한 강도를 감상적인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는 한편, 다른 한 강도를 “끝까지 제 갈 길을 가는”, “지조 있는” ‘카인의 후예’로 상찬하는 식이었다.

 

데미안은 이 이야기가 바로 기독교의 결함이  똑똑히 드러나는 것 중 하나라면서, 선하고 고귀하고 아름답고 숭고한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배한다면 다른 절반의 세상과 연관된 존재인 악마에 대해서도 예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반쪽 세계는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으며, 영원히 금지된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의 말은 내가 소년 시절 내내 품고 있던 수수께끼, 즉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라는 “두 반쪽 세계”에 대한 생각을 명중시켰다. 비록 반년 동안 견진례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나는 데미안이 그 대표나 사절인, 교회와는 전혀 다른 “사상과 개성의 교단”에 입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죄악이므로 거북이처럼 자기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어 가야 한다는 그의 말대로 실행해 가면서 내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데미안이 도달한 그 먼 곳에는 미치지 못한 것을 깨닫는다. 방학이 끝나면 나는 다른 학교로 전학가야 할 상황이었다.

 

(제4장 베아트리체) 김나지움으로 전학한 나는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채 방황한다. 혼자 산책하는 동안 몇 살 위인 기숙사 동료인 알폰스 베크를 우연히 만나 대화하다가 교외의 작은 술집으로 간다. 포도주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술을 마시며 내 안에 창문 하나가 활짝 열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현실 생활의 경험이 많은 베크에게서 여자애들이나 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꿈도 꾸지 못한 샘물이 거기서 샘솟는다는 것을 느낀다. 금지된 것들에 대해 반항하면서 무절제한 삶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바흐의 음악과 아름다운 시를 사랑하던 내가 술에 취해 자제력을 잃고 자기 파괴적인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된다. 비참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봄기운 같은 해방감을 느꼈지만, 외면적으로는 호되게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함께 어울리던 패거리들과 술을 마시고 대화하고 지냈지만, 그 녀석들처럼 여자들을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방탕한 나의 행실이 모든 이들에게 알려져 그들은 나를 피했을 뿐 아니라, 나를 가망 없는 문제아로 보았다. 퇴학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가운데서도 나는 친구를 아쉬워했다. 지저분한 분위기에서 맥주를 마시며 냉소적으로 수다를 떨며 밤을 지새웠지만, 나는 불안과 괴로움에 시달리며 고독감을 느꼈다. 그 길은 하느님이 나를 외롭게 만들어 나 자신에게로 이끌어 주신 많은 길들 중 하나였고, “그 당시 하느님은 나와 함께 그 길을 가셨다.” 내적으로는 “나 자신을 향한 향수”가 깨어나기 시작했지만, 외적으로는 세상이 나를 필요하지 않는다면 내가 망가지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되면 세상만 손해가 아닌가라고 거드름을 피우며 세상과 싸웠다. 데미안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도 적지 않았다. 두 번씩이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전에 알폰스 베크를 만난 그 공원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젊은 숙녀를 만나게 되었다. 키가 크고 몸매가 늘씬하고 옷차림도 우아한 그 숙녀는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어서 내 상상력을 자극했다. 직접 인사하거나 대화해보지도 않았지만, 내가 그녀를 베아트리체[단테의 애인]로 부르며 연모하고 숭배하기 시작하자, 내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술집 출입을 그만두고, 혼자 지내며 다시 책도 읽고 산책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너져 버린 내 삶의 파편들을 모아 다시 “밝은 세계”를 일구어 내기 위해 애를 쓰면서, 쾌락 대신 순결을, 행복 대신 아름다움과 정신성을 목적으로 삼아 새롭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내 신념을 표현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상상력을 가미하여 그림을 그린 결과로 드러난 것은 소녀의 얼굴이 아니라 젊은 청년의 얼굴에 가까웠다. 나중에 보니 그것은 바로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그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 그림이 결국 나 자신이라는 느낌이 서서히 들었다. 나를 닮지는 않았지만, “나의 내면, 나의 운명 혹은 나의 악령”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독서하는 동안 데미안을 향한 그리움이 밀려들었을 때, 방학 때 그를 잠시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한결같이 나이 들어 보이면서도 한결같이 젊어 보인” 그와 함께 술집에서 대화하던 중, 술집을 드나드는 것이 진짜 속물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데미안의 말에 나는 발끈했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탕자의 삶이 신비주의자나 예언자가 되는 최고의 준비 단계일 수 있다는 데미안의 말에도 나는 항의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낀 데미안은, 내가 왜 술을 마시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하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면 좋아.”라는 말을 남기고 자기 집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데미안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를 그리워하면서 그와 관련된 추억을 돌이키며 꿈꾸던 중에, 이전에 그가 우리 집 현관문 위에 있던, 낡고 흐릿한 문장에 주목하면서 흥미로워하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그가 두 손에 문장을 들고 있는 꿈을 꾼다. 처음에는 작고 회색빛이었던 그 문장은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색채로 변하기도 했다. 그가 내게 그 문장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바람에 그것을 삼키게 되었다. 그 문장에 “그려진 새가 내 안에서 살아나 나를 가득 채우고 안에서 나를 쪼아 먹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밤중에 깬 나는 새 종이에 문장의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매의 머리를 한 맹금으로서, 그 몸뚱이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반쯤 어두운 지구에 파묻혀 있었지만, 그것은 “마치 거대한 알에서 나오듯 지구를 깨고 나오는 중이었다.” 그 그림을 데미안에게 보냈다. 내 안에서 생긴 변화는 나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지만, 그 변화는 “멀리 있는 운명”인 데미안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5장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내가 보낸 새 그림에 대해 기묘한 방식으로 답장이 왔다. 내 책상에 놓인 책에 꽂힌 쪽지를 통해서였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이 답장을 읽는 동안, 내 심장은 마치 혹한을 만난 듯이 운명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특히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라는 구절에 꽂혀 지내는 동안, 종교 수업 시간에 폴렌 박사에게서 참고가 되는 설명을 듣게 된다. 고대 종파나 신비적 합일에 대한 견해는 단순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철학적이고 신비적인 심오한 사상이 담긴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락사스교 설이 바로 그 예가 된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 이름은 미개한 종족들이 섬기거나 마술을 부리는 악마의 이름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 임무를 지닌 신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이전에 데미안이 이야기한 것과 일맥상통했다. 즉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라는 “두 반쪽 세계” 전체를 숭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악마이기도 한 신을 숭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 신이 바로 아브락사스인 셈이었다.

 

이 신의 흔적을 추적했지만 아무런 진척을 보지 못하던 중에, 내 안에 형성되기 시작한 “사랑을 향한 동경”이 꽃을 피워 새로운 목표와 영상을 요구했다. 특정한 꿈이나 환상이 거듭 반복되었지만 그것들 중에 가장 의미심장했던 것은, 고향 집에 돌아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어머니를 안으려 했지만 그녀는 한 번도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인물임을 깨닫게 된 꿈이었다. 데미안을 닮았지만 키가 크고 강인하면서도 여성적인 인물이었다. 그 인물의 포옹은 “모든 경외심에 위배되는 것이었지만 더없는 행복이었다.” 그 사랑은 “천사의 영상이며 악마였고, 남자인 동시에 여자였고, 인간인 동시에 동물이었고, 최고의 선인 동시에 극단적인 악이었다.” 그런 사랑을 맛보는 것이 내 운명처럼 느껴졌다.

 

이듬해 봄에 나는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무엇을 어디에서 공부해야 할지 막막해하고 있었다. 다만 “내 안의 목소리, 꿈의 영상”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내 임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작업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외면적으로는 안전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이제 제대로 한번 살면서 내 안의 뭔가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고 세상과 싸워 보고자 하는 갈망이 용솟음쳤다. 그러다가도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며 내 연인을 만나게 될 거라는 기대를 걸고 있다가, 거듭된 실망에 직면하면서 자살할 생각까지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특이한 피난처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교외의 작은 교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피스토리우스라는 음악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와 대화를 하던 중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단지 “인간이 천상과 지옥을 뒤흔드는 게 느껴지는 그런 음악”뿐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신이 있어야 한다”는 걸 그가 알고 있는지 묻게 되었다. 이어진 만남 속에서 그 오르간 연주자는 저명한 목사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신학 대학 출신이었으나, 국가고시를 눈앞에 두고 자퇴한 사람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자기 아버지 집에서 벽난로 앞에 함께 엎드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던 중, 그 연기가 만드는 형상들과 재가 빚어내는 영상을 주시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우리의 내면과 자연에서 활동하는 것은 바로 불가분의 동일한 신성이다.” 피스토리우스는 우리가 개성의 경계를 너무 좁게 그리는 경향이 있다면서, 우리 모두가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의 몸이 오랜 세월 동안 진행된 진화의 계보를 품고 있듯이 우리의 영혼도 그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면서, “일찍이 존재했던 모든 신들과 악마들이 우리 안에 함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단순히 세계를 품고 있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알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격렬하게 외친다. 비록 그와의 대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내게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내 안의 같은 지점을 마치 나지막이 줄기차게 망치질하듯 계속 두드려 줌”으로써 나를 제대로 형성하도록 도와주었다. 즉 그와의 모든 대화가 “내가 허물을 벗고 알껍데기를 깨도록 도왔다.” “마침내 나의 노란 새가 세계의 껍데기를 부수고 아름다운 맹금의 머리를 치켜들 때까지.”

 

(제6장 야곱의 싸움) 피스토리우스에게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 이르는 여정에서 또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이었다. 괴짜였던 그는 내게 자신을 존중하는 자세와 용기를 갖도록 도와주었다. 나의 말, 꿈, 상상 및 생각에서 늘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고는, 늘 그것들을 진지하게 수용하고 진지하게 논평해주었다. 다른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하지 말라면서, 우리 신은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품고 있는 아브락사스이기에, 내 영혼 속의 목소리가 어떤 생각이나 꿈을 제시하든 그것들을 따라 나 자신을 맡기도록 하라고 조언해주었다. 아브락사스를 안다면 우리 영혼이 갈구하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거나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품고 있는 본연의 세계만이 진정한 현실이라면서, 그 세계를 좇는 길은 어려운 길이지만 우리 함께 그 길을 가보자고 권면한다. 그리고 우리 신앙은 새롭고 멋지긴 하지만 아직은 젖먹이 단계의 고독한 종교라면서, 공동이 소유하는 진실한 종교가 되어 열광적인 예배와 비밀 종교의식을 갖추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어느 날 저녁 귀가하는 중에 크나우어라는 학우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한다. 내가 심령술사 혹은 접신론자인지 묻고는 자기도 구도자라고 고백한다. 나는 내 꿈속에서 살고 있다고 응답하자, 자기는 백주술(白呪術)로 자기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고백한다. 자기가 2년 한 달 조금 넘게 한 것처럼 금욕해야만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덧붙인다. 내가 금욕이 그렇게 엄청난 중요성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는 드높은 정신적인 길을 가려는 사람은 반드시 순수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내가 성적 욕구를 금지함으로써 생각과 꿈에서 성적인 것을 몰아낼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밤마다 자기에게도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꿈을 꾸지만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이런 일은 서로 도와줄 수 없기 때문에 그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서 그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응답한다. 그는 내가 위선적으로 살고 있다면서, “너는 돼지야. 나와 똑같이 돼지라고. 우리 모두는 돼지야!”라고 외친다.

 

그와 헤어진 후에 집으로 돌아와 내 꿈속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그린 결과, 전에 그린 얼굴이나 데미안 혹은 내 얼굴 비슷한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그 그림 앞에서 가슴속까지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 그림에게 묻고, 기도하고, 그 그림을 원망하고 애무했다. 그 그림을 어머니, 연인, 창녀, 아브락사스라 부르는 동안, 피스토리우스나 데미안이 말해 준 야곱의 말이 떠올랐다. 하느님의 천사와 싸움하면서 그가 외친 고백이었다.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 그림을 앞에 두고 온갖 상념과 기억으로 괴로움을 당하던 중, 한밤중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집을 나서서 골목길, 광장들, 내 친구의 교회, 사창가 변두리를 거쳐 교외로 나갔다. 몽유병자처럼 배회하는 도중에 만난 이는 바로 자살하려던 학우 크나우어였다. 지난번의 만남에서 내게 흉측하게 군 것을 사과하는 그에게 나는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한다. 그가 길을 잘못 들었고 우리는 돼지도 아니라 사람이며, 우리는 신들을 만들어 신들과 싸우고 있지만 그 신들은 우리는 축복해 준다고 지적해주었다. 그 후에도 크나우너는 “충실한 하인이나 개처럼” 내게 매달리며 맹목적으로 나를 쫓아다녔다. 그런데 그가 내게 가져온 기이한 질문, 소원들이나 발상, 관심사가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를 성가시게 생각했지만, 그는 내게 “안내자이고 길”이 되었고 내가 그에게 준 것의 두 배나 되는 혜택이 내게로 돌아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친구인 피스토리우스를 무조건 인도자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 내 안에 생겨났다. 그의 말이 설교조로 들렸을 뿐 아니라, 그가 이해하는 것은 내 일부뿐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악의 없이 단 한 마디만 던졌을 뿐인데, 그 말이 우리 사이의 환상을 산산조각으로 깨뜨렸다. 언젠가 그가 자신이 연구한 비밀 종교의식과 형식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내게는 그것들이 그저 호기심을 자극하는 현학적인 흥밋거리로만 들렸다. 게다가 그렇게 신화를 예찬하고 전래된 신앙 형태들을 모자이크와 같이 맞추는 놀이에 대한 혐오감이 치밀었다. 그래서 한 마디 한 것이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은, 그리니까 뭐랄까,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어요.”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그는 그 말을 긍정하면서, 다시는 고리타분한 것들로 나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응대했다. 사실상 과거를 향한 구도자요 낭만주의자였던 그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점을 내가 건드린 상황이었다. 그동안은 나를 인도했지만, 이제는 내가 그를 넘어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처음으로 내 이마에도 카인의 표식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피스토리우스와 화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으나, 그가 혼자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 소망은 사제가 되는 것이지만, 오르간이나 다른 방식을 활용하여 사제로서의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자기는 자신의 운명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성스럽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오르간 음악이나 비밀 종교의식, 상징, 신화 같은 약간의 온기와 먹이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처럼 오직 운명만을 원하는 사람은 본이나 이상도 없이 오롯이 홀로 존재하는 법이며, 끝까지 자기의 길을 가려한다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고 특이한 것을 원한다는 은밀한 쾌감마저도 버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때 나는 눈먼 사람처럼 사방을 헤매고 다녔지만, 끝없는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종이에 썼다. “안내자가 저를 두고 떠났나이다. 저는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습니다. 저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뗄 수가 없사옵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제7장 에바 부인) 드디어 내 김나지움 시절이 막을 내렸다. 방학 동안 데미안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을 찾아갔다가, 노부인 한 사람을 통해 데미안 가족 앨범을 보게 되었다. 그 속에 있던 데미안 어머니는 내가 그동안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모성적이고 엄격하며 정열적인 측면을 고루 갖춘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었을 뿐 아니라, 내게는 “악령인 동시에 어머니였고 운명인 동시에 연인이었다.” 그 후에 짧은 여행길에 올랐다가 돌아온 나는 H 대학에 등록했다. 실망스러운 강의들로 인해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로 나는 자유를 느끼며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동안 니체의 책이 위로가 되었다. 그와 함께 살고 그와 더불어 괴로워하면서도 “그토록 냉엄하게 자신의 길을 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 날 시내를 배회하던 중에 한 일본인과 함께 대화하면서 가는 데미안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내 모습이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카인의 표식’은 더욱 뚜렷해졌다고 일러주었다. 내가 온 것을 그의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라면서, 데미안은 유럽의 정신과 당대의 징후에 대해 언급했다. 도처에서 유대 관계가 형성되고 패거리를 짓는 일들이 전개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과 자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기에 서로에게로 도망치고 있는 형국에서, 누구라도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기만 하면 매장시키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큰 충돌이 야기되어 현재 존재하는 이 세계는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우리도 함께 몰락하겠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의 의지” 혹은 “인류의 의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으로서 우리 각 개인 안에, 예수와 니체 안에 쓰여 있던 것이라고 역설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데미안의 집으로 찾아가 만난 데미안의 어머니는 나를 금방 알아보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깊고 따뜻한 목소리, 고요한 얼굴, 그윽한 검은 눈, 생기 넘치는 입, 표식이 찍힌 위엄 있는 이마를 지난 여인이었다. 지금까지 세상을 헤매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 같다고 내가 언급하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집에는 절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면서 “친밀한 길들이 마주치는 곳에서 잠시 온 세상이 고향처럼 보이죠.”라고 답했다. 그녀가 내게 어떤 존재[어머니, 연인 혹은 여신]로 자리매김하든 내 길이 그녀의 길 가까이에 있기만 하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며 새롭게 다가온 나의 운명과 행복을 만끽했다. 그녀는 내가 그린 새매 그림을 가리키며, 그 그림이 데미안을 아주 기쁘게 했다면서, 그 그림을 통해 내가 그들을 향해 오는 중이라고 알아차렸다고 말했다. 당시에 내게 아주 힘든 일이 닥치게 되어 사람들 속으로 도망치려 하겠지만, 결국엔 카인의 표식이 나를 은밀히 불태울 것이라고 데미안이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내가 데미안과 헤어진 후에 마음의 연인 베아트리체와 안내자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났지만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만큼 그 길이 힘들었다고 응답하자, 그녀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애쓰는 과정이 그토록 치열하듯이, 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고 지적해 주었다. 그러면서 누구든 자신의 꿈을 찾아내야 하고, 그 꿈이 자신의 운명인 한 그 꿈에 충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예외적으로 자기를 처음 접한 내게 자기 이름을 에바 부인이라고 알려 준 그녀를 만난 그날부터 나는 아들, 형제 혹은 애인처럼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다. 밖에는 ‘현실’이 있었지만, 그 집 안에는 동화와 꿈이 살고 사랑과 영혼이 존재했다. 그곳에서 표식을 지닌 사람들의 비밀을 전수받게 되었는데, 우리의 과제는 “세상에 하나의 섬” 혹은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하는 것으로서 “다른 가능성을 예고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점점 더 완벽하게 깨어 있음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인류는 “우리 모두가 찾아가고 있는 먼 미래”였다. 온갖 다양한 구도자들이 우리 모임을 이루고 있었다. 점성술사, 카발라 교도, 톨스토이 백작 추종자, 인도 요가 애호가, 채식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제각기 서로 상대방의 삶의 꿈을 존중한다는 점”만을 공통적인 정신으로 품고 있었다.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 제시된 인류의 꿈들과 기독교 이전의 갖가지 고대 신들의 무리와 종교의 종파들을 섭렵한 것을 토대로 “우리의 시대와 현재의 유럽을 비판했다.” 유럽은 막강한 무기를 생산하여 전 세계를 얻었으나, 그 대가로 정신을 황폐화시켜 영혼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모든 종파나 구원론이 죽은 것이었기에, “제각기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우리의 의무이고 운명”이라고 느꼈다.

 

“오래전부터 사슬에 매여 있는 짐승”과도 같은 유럽의 영혼을 일깨워 새로운 변화를 일구는 일에, 그 영혼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가 올 것이라고 데미안은 덧붙였다. 새로운 안내자나 입법자로서가 아니라, “길을 함께 가다가 운명이 부르는 곳에서 멈춰 설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를 필요로 할 거야.”라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인류를 협소하고 목가적인 삶에서부터 넓은 위험한 세상으로 몰아가기 위한 표식이 카인에게 새겨져 있던 것처럼, 유럽의 영혼에 대한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표식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모세, 부처,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와 같이 인류의 행로에 영향을 미친 이들은 모두 다 “운명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 중에 에바 부인은 직접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은 채, 우리 모두에게 신뢰와 이해심으로 가득 찬 “경청자”요 “메아리”로 존재했다. 그녀의 성숙함과 그녀 영혼의 분위기에 동참하는 것이 내게는 행복이었지만, 나는 계속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에 시달리면서 꿈을 꾸며 고뇌하는 시간을 보낸다. 이런 내게 그녀는 “별을 사랑하게 된 젊은이의 이야기”와 “가망 없는 사랑을 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자의 이야기는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젊은이 이야기로서, 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바닷가의 높은 절벽 위에서 별을 향해 몸을 날려 허공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해변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몸을 날리는 순간에 사랑의 성취를 믿을 수 있는 영혼의 힘이 있었다면, 그는 높이 올라가 별과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후자의 이야기는 자기 영혼 속으로 움츠러들어 사랑 때문에 불타 죽는다고 생각하는 젊은이 이야기로서, 그에게는 세상이 사라지고 없었을 뿐 아니라 자신도 가난하고 비참해졌다. 그렇지만 그의 사랑이 점점 더 자라나면서 막강해져서 계속 끌어당기게 되어, 그 대상인 아름다운 여인은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의 앞에 섰을 때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으나, 그녀는 잃어버린 온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한 여인을 얻는 대신 온 세상을 마음속에 품게 된 것이다. 사랑하면서 자기를 잃어버리는 대부분의 사람과는 달리, “그는 사랑했고,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에바 부인은 향한 내 사랑은 날마다 모습을 달리 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현실과 상징이 서서히 중첩되면서, 관능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도 거듭 겹쳐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와 대화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녀가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되지 않는 순간들도 있었다. 비유적인 방식으로 그녀와의 합일을 성취하는 꿈도 꾸었다. 그녀가 별이 되고 나도 별이 되어 그녀를 향해 간다든지, 그녀는 바다가 되고 나는 물살이 되어 그 바닷속으로 흘러드는 꿈이 이어진 것이다. 어느 날 데미안이 깊이 침잠해 있는 모습을 접한 후에 그 집을 나와 산을 향해 걷던 도중에,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고 구름이 낮게 흘러가는데 높은 곳에서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정경이 펼쳐졌다. 그때 누르스름한 옅은 구름이 하늘 멀리에서 몰려와 잿빛 구름의 벽 앞에 고이더니, 순식간에 바람이 불어 새의 형상을 만들어 내어 “새는 푸른색의 혼돈을 뚫고 나와 크게 날갯짓하며 하늘로 사라졌다.” 그 후 우박 섞인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섬뜩한 소리를 내뱉은 후에 다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다시 데미안의 집으로 돌아가 그에게 얼마 전에 구름 속에서 본, 거대하고 노란 새매 형상이 검푸른 하늘로 날아간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는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관계된, 충격적인 사건 혹은 “운명의 한 걸음”을 뜻하는 전조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같은 꿈을 꿨다면서, 사다리를 타고 어딘가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도시들과 마을들이 불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낡은 세계가 붕괴하는 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즉 세계가 새로워지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나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죽음의 냄새가 나고 있지만, 죽음 없이는 새로운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꿈의 전모를 이야기해 줄 수 있느냐고 내가 묻자, 데미안은 안 된다고 단언한다. 그림자 하나가 우리를 뒤덮었다는 것을 느끼며 그와 헤어진다.

 

(제8장 종말의 시작) 어느 날 온 의식을 집중해서 에바 부인을 생각하며 그녀를 내게 끌어당기려고 하던 중, 데미안이 말을 타고 내게 왔다. 그와 함께 거리를 따라 내려가는 중에, 데미안에게서 독일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곧 터질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이것은 다만 시작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것이 시작될 텐데 나는 어떻게 할 거냐고 그가 물었다. 모르겠다는 내 대답을 듣고 데미안은 자기는 소위이기 때문에 동원령이 떨어지면 즉시 입대할 거라고 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커다란 수레바퀴”에 휩쓸려가게 될 것이고, 나도 징집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되느냐고 내가 묻자, 그는 어머니는 안전하다면서, 자기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하냐고 물었다. 내가 오늘 어머니를 불러 끌어당기려 했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자주 이야기했던 전쟁이 이제 시작될 것을 앞둔 나도 스스로 준비되어 있었다고 느꼈다. 시내 곳곳에서도 “전쟁”이라는 단어가 난무하면서 흥분이 들끓었다. 에바 부인 집으로 가서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불렀지만 가지 못한 사정을 내가 알 것이라면서. 표식을 지닌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부르도록 하라고 권면해 주었다. 이윽고 전쟁이 발발하여 데미안은 전장으로 떠났다. 나는 에바 부인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녀와 작별했다. “그녀는 내 입술에 키스하고 나를 잠시 꼭 안아 주었다.”

 

전장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탄 많은 얼굴들에서 표식을 보았지만, 우리의 것은 아니었고 “사랑과 죽음을 뜻하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표식이었다.” 겨울이 다가왔을 즈음에 나도 입대했다. 처음에는 총격전을 비롯한 모든 것이 실망스러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사람들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장엄하게 운명의 의지에 다가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헌신된 자세를 가리키는 단호한 눈빛을 통해, 그 깊은 곳에서 “새로운 인간성 같은 것이” 생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죽고 죽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살인 행위는 “내면의 발산, 내적으로 분열된 영혼의 발산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영혼들도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우듯이”, 새로 태어나는 것을 갈구했던 것이다. “그 알은 세계였고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야 했다.”

 

이른 봄 어느 날 농장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동안에, 바람이 불고 구름이 빨리 지나갔다. 그 어두운 초소에서 지난 내 인생의 정경들, 특히 에바 부인과 데미안을 간절히 생각했다. 그때 약해진 내 맥박과 비바람에 무감각해진 피부와 번쩍 깨어난 내면을 느끼면서, 나는 “인도자가 내 주변에 있음을 감지했다.” 구름 속에 보인 커다란 도시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광활한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한가운데에 신의 형상이 나타난다. 사람들의 행렬이 에바 부인을 닮은 거대한 그 형상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꿈이 바닥에 웅크리고 앉은 여신을 덮치는 듯하자, 눈을 감은 여신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면서, 여신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른다. 그때 그녀의 이마에서 별들이 튀어나와 수천 개의 빛나는 별이 되어 검은 하늘 너머로 날아오른다. 그 별 하나가 내게로 쏜살같이 날아와 나를 찾는 듯하더니, 울부짖음과 함께 수많은 섬광이 되어 산산이 부서진다. 그래서 나는 들어 올려졌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우레 같은 소리와 함께 세계가 내 위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흙으로 덮여 있었다. 지하실로 옮겨진 나는 머리 위의 포성을 들었다. 깊이 잠들수록 나를 끌어당기는 뭔가를 강렬하게 느꼈다. 수레와 들것에 실려 밤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홀의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에 누워 있었다. 그곳으로 불려 왔다는 느낌이 든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내 매트리스 옆에 있던 다른 매트리스에서 누군가가 몸을 숙여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마에 표식이 있는 막스 데미안이었다. 우리는 말하지 않았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데미안은 나를 “꼬마 싱클레어”라고 부르면서, 자기는 떠나야 한다고 일러 준다. 앞으로 ‘프란츠 크로머’나 다른 일로 자기를 필요로 하는 날이 언젠가 올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자기가 달려오지 않겠다면서, 그 대신 내 안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권고했다. 그러면 자기가 내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될 거라면서, 그리고 에바 부인이 전한 키스를 나에게 전해줄 테니 눈을 감고 있으라고 했다. “피가 조금 맺혀 있는 내 입술을 살짝 스치는 입맞춤이 느껴졌다.” 그 후 잠들었다가 아침에 깨어나 상처에 붕대를 감을 때 주위를 둘러보니, 옆의 매트리스에는 낯선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 후로 내게 일어난 일들이 죄다 고통스러웠지만, 가끔 열쇠를 찾아서 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면, 나 자신의 모습이자 “나의 친구이면서 인도자인 그와 똑같은 모습”이 보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