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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時)-장기적 시간 관점을 품으라

품위 있는 인생의 향연, 윌리엄 사로얀의 “인간 희극”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11. 7.

품위 있는 인생의 향연, 윌리엄 사로얀의 “인간 희극”

-인간과 공동체-

인간을 정의하는 데에는 반드시 공동체가 포함됩니다. 두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a social animal)로 규정했습니다. 영국 신학자 존 스토트는 성경적인 인간관을 소개하면서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영육을 가진 존재"(a body-soul in a community)라고 주장했습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은 그의 “정치학”(Politics)에 등장합니다. 그 문맥은 이러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자연적이고도 본질적으로 비사회적인 개인은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없거나 인간 이상의 존재이다. 사회는 개인을 앞서는 어떤 것이다. 일반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거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자족할 수 있어 사회의 일원이 되지 않는 존재는 동물 아니면 신이다.”(Man is by nature a social animal; an individual who is unsocial naturally and not accidentally is either beneath our notice or more than human. Society is something that precedes the individual. Anyone who either cannot lead the common life or is so self-sufficient as not to need to, and therefore does not partake of society, is either a beast or a god.)

 

이 인용문에서 ‘사회적 동물’에 해당하는 그리스 원어가 ‘zōon politikon’이기 때문에 ‘정치적 동물’ 혹은 ‘폴리스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하지요. 그래서 김홍중 교수는 이 표현이 가리키는 바가 인간들이 단순히 함께 모여 군집 생활하면서 상호 부조하는 사회적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과제나 비전을 함께 나누면서 논의하고 토론하는 정치적 측면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리스인들이 전자의 삶을 ‘조이’(zoē)로, 후자의 삶을 ‘비오스’(bios)라고 부르며 이 둘 사이를 구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지요. 더 흥미로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그의 윤리학의 연장이라는 것입니다. 김용석 교수가 지적한 대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결론에서 그가 “이제 입법과 국가 체제에 관한 연구를 함으로써 우리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인간성에 대한 철학을 완성하자”라고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을 이해하려면 윤리학을 고찰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과 연관하여 정치학을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윤리학의 핵심 개념이 ‘행복’(eudaimonia)이었기 때문에 정치학을 통해 “어떤 삶이 좋은 삶, 행복한 삶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면서, 그러한 삶을 형성해 줄 수 있는 “‘좋은 국가’ 혹은 ‘좋은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곧장 이어집니다.

 

스토트의 정의는 그의 책인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에 소개됩니다. 인간이란 그 영원한 구원을 필요로 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만도, 그 의식주와 건강을 돌보아주어야 할 신체를 가진 존재만도, 그 공동체 문제에 몰두해야 할 사회적인 존재만도 아니라면서, 그 세 가지 층위를 모두 품은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는 문맥에서 나온 정의입니다. 성경적인 시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그런 삼중적인 층위를 가진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우리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그들의 무한한 가치 때문에 섬기려 한다면, 그들의 “총체적인 복지”(total welfare), 즉 그들의 영혼과 신체와 공동체의 복지 전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복음 전도(evangelism), 구제 활동(relief) 및 개발 사업(development)과 같이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 영역들에 대한 특별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스토트의 이런 발언과 주장은 지난 세월 동안 세계의 기독교계에 큰 영향력을 미쳐, 영적인 복지에만 전력투구하던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이웃들의 육체적 필요와 사회적인 필요들을 채워주는 일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기독교 사역의 균형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상에서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 사상 모두 인간됨의 요건으로 공동체성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한편으로 행복한 인생은 좋은 공동체 속에서 꽃 피웁니다. 다른 한편으로 좋은 공동체는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는 이들로 형성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이란 최고선을 이룰 방도로 제시하는 것이 ‘아레테’(arete)라는 탁월성, 그 탁월성 중에도 ‘성격적 탁월성’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각 개인이 이런 탁월성을 추구하며 살 때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로 형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삶과 좋은 공동체라는 두 가지 화두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는 소설 한 가지를 독해해 보려 합니다. 윌리엄 사로얀의 “인간 희극”(The Human Comedy)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가상 도시 한 곳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의 다양한 삶의 여정들과 사건, 사고들을 중심으로 엮은 소설입니다. 특정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뚜렷한 기승전결이 전개되지 않는 대신, 그 도시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모저모와 그들이 서로 어우러져 사는 일상적인 모습이 모자이크처럼 연결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이 작품은 먼저 영화를 위한 각본으로 집필되었지만, 그 내용이 너무 길어 난색을 표하는 제작사의 반응을 접한 후에 사로얀이 소설로 발전시킨 경우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제 마음을 사로잡은 단어 하나가 있었습니다. ‘품위’(decency 혹은 nobleness)라는 단어였습니다. 그 마을 공동체 곳곳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은연중에 드러나는 품위였습니다. 어른은 어린이들을 존중해 주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존경할 뿐 아니라 그 마을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에게도 기꺼이 마음을 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그들을 위로해 줍니다. 물론 악한 의도를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존재가 너무 작아 보일 만큼 마을 공동체 속에는 서로 간의 신뢰와 사랑이 넘치고 거짓은 진실의 광휘에 가려지고 맙니다. 도시 밖에서 진행되는 세계 대전이 그 마을을 비껴간 것도 아닙니다. 매일 전사자를 알리는 전보가 속속 도착합니다. 그렇게 숱한 죽음이 날마다 가까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그들은 인생의 아름다움과 삶의 진실을 포착하고 그것들을 누리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작고한 이병주 작가가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이런 평을 남긴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착한 악인, 악한 선인, 착한 선인들이 갖가지로 등장하여 인간으로서의 희극 또는 희극으로서의 인간을 엮어나가는 때론 경묘한 듯도 하고 때론 주먹으로 가슴을 맞은 충격 같기도 한 기분”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선인 가운데 악한 선인이 있고 착한 선인이 존재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리고 악인 가운데도 착한 악인이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소설 독해를 통해 고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인간의 공동체성에 주목하면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을 통해, 품위 있는 인생의 향연을 맛보시길 기원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작품 속에서 품위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과 품위를 잃은 사람들의 면모를 일별한 후에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는 열쇠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인간 희극” 줄거리(호머 이야기)-

호머 매콜리는 이차세계대전 중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호아퀸 밸리에 있는 도시 이타카에서 아버지(매튜) 없이 자라 가고 있는 14세 소년이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그의 형 마커스가 집을 떠나 전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집안의 가장이 될 필요를 강하게 느끼고 있다. 그래서 주급 25달러나 되는 돈을 벌기 위해 저녁 시간을 활용하여 전보를 전해 주는 일감을 맡게 된다. 지역 전신국에서 근무하는 스팽글러 사무국장과 전신 기사인 그로건 씨의 사랑과 신뢰를 힘입어 날마다 보람 있게 근무한다. 곤혹스러운 점은 행복한 어떤 가정에 그 집 아들이 전쟁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taking the message of death into the happy home”)이다. 그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슬퍼하고 고뇌하지만 그는 자기의 일상적 삶을 계속 영위해 나간다. 학교에 가서 헬렌을 두고 짝사랑도 하고 2백 미터 장애물 달리기 경기에서 휴버트와 경쟁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사귀고, 교회에 가며, 영화 보러 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그는 사랑하는 자기 가족들의 격려와 그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랑과 기대를 누리며 자란다. 하프를 연주하는 엄마(캐이티)와 아주 젊은 형(마커스)과 피아노 치는 누나(베스)와 호기심 많은 남동생(율리시스)이 바로 그의 가족들이다. 자기 가정의 기품 있는 전통에 흠뻑 물든 그는 거의 본능적인 분별력으로 선악을 파악하여 정직하고 희망찬 삶을 영위해 간다. 그런데 어느 날 호머는 형의 전사 소식을 전보로 접하게 되어 충격을 받는다. 그렇지만 형이 전장에서 만난 친구 고아 출신 토비가 이타카에 도착하여 자기 집 앞에 와 있는 것을 보고 가족들을 불러 그를 집안으로 초대해 들어간다.

 

-품위 있는 인간-

(1) 호머 매콜리

품위 있는 인간 소개는 먼저 호머 매콜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매콜리 가정의 둘째 아들로 14세이며 야간 전보 배달원으로 일하면서 가계를 돕고 있지요. 모든 사람들이 “이타카 고등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the smartest guy at Ithaca High)으로 꼽는 소년입니다. 작가 사로얀이 그가 꿈속에서 장애물 달리기에 임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캘리포니아 주 이타카에서 가장 훌륭한 인간인 호머 매콜리”(Homer Macauley, perhaps the greatest man in Ithaca, California)로 부르는 소년입니다.

 

학교 교실에서는 여느 아이들처럼 장난도 치고, 수업 중에 방해도 하지만, 집에서는 엄연한 가장 노릇을 하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집안의 경제적 사정을 돕기 위해 대학 다니는 누나가 직장을 알아보려고 하자, 집에서 필요한 돈은 자기가 벌어 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제발 일을 찾겠단 생각은 그만둬!”(Never mind finding a job)라고 만류하면서, “이 동네에서 해야 할 일은 어느 것이나 남자들이나 하는 일이야. 아가씨들은 집에서 남자들을 돌보아주면 된다고. 피아노 연주하고 노래 부르다가 남자가 귀가하면 그가 보기에 예쁘게 보이면 돼. 그게 아가씨가 할 일이야.”(Any work that has to be done around here, men can do. Girls belong in homes, taking care of men, that's all-just play the piano and sing and look pretty for a fellow to see when he comes home. That's all you need to do.)라고 제지합니다. 세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정신 나갈 이유는 없다고 하면서 그냥 집에서 엄마를 도우라고 덧붙입니다.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말을 하고 있지만, 당시의 사회상을 암시해주는 주장일 것입니다. 어린 그가 최근에 전보를 배달하면서 호텔에서 베스 또래의 아가씨들이 남자들과 함께 히히덕거리는 것을 접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누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내뱉은 말일 소지도 큽니다.

 

14살인 그가 4살짜리인 동생 율리시스를 높이 평가해서 칭찬하는 것은 단연 돋보입니다. 대개 막내는 집에서 무시당하기 쉬운 존재인데, 호머는 율리시스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들에 대해 무한한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있는 어린아이다운 측면을 높이 삽니다. 그래서 그의 아이다움을 간직하며 성장하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생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의 어린 면모를 사랑 어린 안목으로 존중해 주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이지요. 이런 호머가 다른 사람의 아픔에 연민과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샌도벌 부인 집에 그 아들이 전사했다는 전보를 전달하러 갔을 때 그는 그 부인의 슬픔과 아픔을 목격하고 깊은 연민을 느낍니다. 특히 그녀가 자기를 앞에 앉힌 후에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볼 때 “그는 사랑이나 미움도 아니고 메스꺼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면서 그 가련한 부인뿐 아니라 모든 것들과 그것들이 견디고 죽어가는 터무니없는 방식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낍니다.” (He felt neither love nor hate but something very close to disgust, but at the same time he felt great compassion, not for the poor woman alone, but for all things and their ridiculous way of their enduring and dying.) 그의 감정을 전해 들은 엄마가 언급한 대로 그는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진정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호머가 꿈꾸는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는 “다른 세상,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사람들, 일하는 더 나은 방식”(a different world, a better world, a better people, a better way of doing things)입니다. 자기나 자기 가족은 행복하고(happy) 강인하지만(tough), 강인하지 않아서 외로워하고 아파하는 다른 사람들을 호머는 아낍니다. 그에게는 이 세상이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낍니다. 야간 전보를 돌리며 여러 곳의 집들을 둘러보며 깨닫게 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헬렌이 자기를 좋아해 주지 않는 것쯤은 상관없다고 하면서, 세련된 태도를 가진 헬렌이 훌륭한 태도를 지닌 휴버트를 좋아하게 되어도 자기는 괜찮다고 술회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수업 시간에 쓸 데 없는 우스갯말을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모두가 슬퍼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모든 상황이 너무 느리고 잘못 돌아가고 있으니 자기가 가끔 우스갯소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기 지론을 소개합니다. “저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즐거움을 좀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I guess we ought to have some fun out of being alive.)

 

자기는 별다른 매너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자기는 그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I just do what I think is right and what I've got to do.) 그러면서 세련되거나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진정으로 임하지 않는다면 예의 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I don't suppose I could be refined or polite on purpose even if I wanted to be. I couldn't be polite if I didn't mean it.”) 결국 호머가 주장하는 것은 예의나 품위라는 성격적 탁월함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즉 진정성을 품고 반복해서 실행할 때 자기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리하여 자기는 품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호머의 고백은, 옳은 일이라면 해 내고야 마는 그의 태도와 예의를 취할 때 진정성 있게 접근하려는 그의 매너로 인해 도리어 그의 겸허한 자세를 돋보여 줍니다.

 

(2) 마커스

마커스는 매콜리 가의 장남이자 호머의 형으로서 참전 중인 군인입니다. 그의 품위 있는 모습은 고아 출신 전우인 토비와의 대화에서 빛을 발합니다. 토비는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엄마, 아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아이에게는 부모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던 외톨이 중 외톨이였습니다. (“I didn’t know kids had mothers and fathers until I went to school and heard the other kids talk about them.”) 이름도 고아원에서 지어주었고 국적도 오리무중인 상태여서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하던 전우였습니다. 그런 토비에게 마커스는 자기 가족을 소개하면서 그를 고향 이타카로 초대합니다. 여동생 베스의 사진을 선사해 주며 나중에 이타카로 와서 베스와 결혼한 후에 함께 살자고 초대하기도 하지요. 서로 가정을 꾸린 후에 서로 왕래하며 음악을 즐기고 노래도 부르며 인생을 함께 보내자(we’ll visit each other once in a while, have some music and songs—pass the time of life.)고 통 큰 제안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한 토비는, 베스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이미 결혼해 있더라도 나중에 이타카로 가서 그곳에서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이타카가 이제 자기 고향으로 느껴져 생애 처음으로 자기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Ithaca seems to be my home now, too.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I feel that I belong somewhere). 그리고 자기 가족이 이제 매콜리 가라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면 자기가 원하는 가족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지요(I feel that my family is the Macauley family, because that’s the kind of family I’d want for myself if I could choose.).

 

고아인 전우에게 이런 통 큰 제안을 할 수 있는 품위가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일반적으로 군대에서는 자기 여동생 사진을 보여 주는 것도 삼갈 판인데, 근본도 모르는 천애의 고아 출신 전우에게 그 사진을 선사하면서 여동생과 결혼해서 고향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하는 기품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일단을 시사해 주는 마커스의 편지 한 통이 있습니다. 호머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그 속에 보면 마커스의 가치관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자기는 전쟁의 가치를 믿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필수적인 경우라도 어리석다고 보지만, 이타카라는 자기 고향과 가족을 품은 자기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언급합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적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로 인식한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떤 피부색을 갖고 있든, 믿는 바가 아무리 잘못되었든(Whoever he is, whatever color he is, however mistaken he may be in what he believes), 그는 자기와 다를 바 없기(he is no different from myself)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태도가 바로 토비와의 우정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출신 가정이나 피부색이나 심지어 신조의 차이까지도 개의치 않고 단지 서로 인간이라는 한 가지 조건 때문에 누구나 수용할 수 있다는 품위를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미 있는 문장을 하나 남깁니다. “내가 싸우는 상대는 그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어떤 것, 즉 내가 먼저 내 안에서 파괴하려고 애쓰는 것 바로 그거야.”(My quarrel is not with him, but with that in him which I seek to destroy in myself first.)

 

마커스의 이 문장을 접하며 마음이 멍해졌습니다. 무릇 전쟁이나 투쟁은 상대를 먼저 악한 존재로 설정해 두고 그 대상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기 마련인데, 마커스의 생각은 이런 입장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타인의 오점과 악한 면모를 바라보면서 먼저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동일한 결점과 해악의 요소를 파악하여 처단하는 것이 자신이 참여하는 투쟁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투쟁은 세상 시류를 따라서는 이룩되지 않습니다. ‘적과 우리’(them and us)를 확연하고 구분지은 후 적을 절대 악으로 우리를 절대 선으로 규정해두고 진행되는 싸움이기 때문이지요. 마커스가 고백한 대로 “자기 자신의 마음의 명령 외엔 어떠한 명령에도 순종하지 않겠다”(I shall be obeying no command other than the command of my own heart)는 각오 없인 시작도 할 수 없는 처연한 투쟁입니다. 이런 소신을 지닌 그가 안타깝게도 전쟁 중에 산화해 버렸지만,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이런 자신의 신념을 실천에 옮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삶을 대신할 전우 토비를 자기 고향으로 파송합니다.

 

(3) 매콜리 부부: 매튜와 케이티

다음으로 살펴볼 품위 있는 사람은 호머와 마커스를 낳고 키운 매콜리 부부인 매튜와 케이티입니다. 이 작품의 축을 이루고 있는 가족을 이끄는 이 두 사람 중 매튜는 이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상태입니다. 그의 품위 있는 면모는 직접 접할 수는 없지만 마커스의 회고를 통해 그 단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 전우인 고아 토비에게 마커스는 가족을 소개하면서 먼저 아버지를 언급합니다. 무척 훌륭하신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했다거나 중요한 직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변변한 직업도 없고 자기가 소유한 가게도 없이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해 식구들의 양식을 댔습니다. 주로 포도밭이나 통조림 공장, 양조장에서 일한 탓에 길에서도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그의 가족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중 극적인 경우는 어머니가 하프를 꼭 갖기를 원하자 몇 달간 번 돈으로 첫 달 할부금을 지불하고 하프를 사 왔고 그 할부금을 갚는 데 오 년이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유일한 딸인 베스를 위해서는 피아노를 사 주었습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악기를 즐기는 모습을 보며 그는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는지는 나중에 마커스가 다른 아버지들을 만나보며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찍 남편을 잃은 케이티 부인은 슬픔을 감추고 네 남매를 키우는 데 열과 성을 다합니다. 포장 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어 딸을 대학에서 공부하도록 배려합니다. 남편이 피땀 흘려 사준 하프와 딸이 연주하는 피아노로 그 가정에서 노랫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이 하프를 연주할 때마다 케이티는 자기보다 일곱 살 많은 훌륭한 남편 매튜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을 것입니다. 케이티는 마커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날에도 베스와 옆집 메리와 더불어 노래를 부르지요.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기도 합니다. ‘자기 집’으로 여기며 찾아온 마커스의 전우인 토비를 집 밖에서 만난 호머가 슬픔일랑 다 잊어버린 채 그를 집 안으로 인도하면서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엄마! 베스! 메리! 음악 좀 연주해 봐. 그 군인 토비가 귀가했단 말이야! 그를 환영해야지!”(Bess! Mary! play some music. The soldier's come home! Welcome him!) 그러자 집 안에서는 음악이 시작됩니다. 그러자 토비는 거기 잠깐 서서 듣고 싶다고 합니다. 함께 음악을 듣는 중에 토비는 부드러운 고통을 느끼고 호머는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며 미소를 짓지요. 그때 율리시스가 집에서 나와 토비의 손을 잡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케이티 부인, 베스 및 함께 있던 옆집 메리가 나와 문을 열어 줍니다. 그리고 작품의 대단원은 그녀가 토비를 자기 아들로 맞아들이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어머니는 서서 지금은 죽은 아들을 아는 군인이자 낯선 청년의 양옆에 서 있는 남은 두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이해했다. 그녀는 그 군인에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이제 그녀의 아들이 된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마치 마커스인 것처럼 그녀는 미소 지었고, 그 군인과 그의 두 남동생은 문 쪽으로, 따듯하고 빛나는 집 쪽으로 움직였다.” (The mother, standing, looking at her two remaining sons, one on each side of the stranger, the soldier who had known her son who was now dead, smiled and understood. She smiled at the soldier. Her smile was for him who was now himself her son. She smiled as if he were Marcus himself and the soldier and his two brothers moved toward the door, toward the warmth and light of home.)

 

호머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아이로 성장한 데는 이 두 부모의 역할이 큽니다. 아버지 매튜는 기품 있고 성실한 삶의 본을 그에게 아낌없이 보여 주었습니다. 남편을 존경한 어머니 케이티는 아이들이 아빠를 닮아 품위 있는 사람으로 자라 가도록 배려해 줍니다. 우선 그들을 하나하나 존중하면서 그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격려해 줍니다. 호머가 동생 율리시스를 칭찬하면서 그가 앞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며 엄마의 동의를 구하자, 케이티는 이렇게 답변하지요. “어쨌든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러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당연히 율리시즈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 지금도 훌륭한 사람이니까.”(No, I don’t think so—not in the eyes of the world at any rate—but he is going to be great of course, because he’s great now.) 즉 나중에 율리시스가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는 게 아니라 이미 그가 훌륭한 아이라는 인식을 품고 있는 것이지요. 그 아이의 모습 속에 남편의 평소의 모습이 그대로 각인되어 있었으니까요. (“Ulysses is like your father as your father was all his life.”) 남편을 존경하고 존중하지 않았다면 이런 인식이 형성될 리 만무합니다. 이런 대화 중에 케이티는 넘치는 행복감으로 가득 찹니다. 그 행복은 지금까지 발생한 적 있는 모든 일이 어떠했고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어떠할지라도 그것들과는 무관한(in spite of anything that had ever been, or anything that ever could be) 만족과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 나는 운이 아주 좋았어. 그래서 감사해. 내 아이들은 단지 어린이일 뿐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기도 하니까.”(Oh, I’ve had good luck, and I’m thankful. My children are human beings, besides being children.)

 

이에 덧붙여 케이티는 세상 사람들의 슬픔에 대해 함께 가슴 아파하는 호머의 고뇌를 접하며 자신이 깊이 성찰한 내용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를 울게 한 건 연민이었다고 전제하면서, 그 연민은 “고통당하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모든 것들, 즉 모든 것들의 그 본질에 대한 연민”(Pity, not for this person or that person who is suffering, but for all things— for the very nature of things)이었음을 일깨워 줍니다. 연민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덧붙이면서, 만일 사람이 세상의 고통에 대해 울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가 밟고 다니는 흙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역설합니다. 왜냐하면 흙은 식물의 씨부터 시작해서 꽃에 이르기까지 식물의 전모를 배양해 주지만, 연민 없는 사람의 영혼은 불모의 상태여서 아무것도 맺지 못하거나 선한 것과 인명까지도 죽여 버리는 교만만 낳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사에는 항상 고통이 따를 텐데, 이 고통에 대한 태도가 선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및 악한 사람을 구분 짓는다고 부연합니다. 선한 사람은 좌절하는 대신에 세상사에서 고통을 경감하려고 애쓸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고통 외에는 그 고통을 깨닫지도 못할 것이며, 악한 사람은 세상사에 고통을 더 밀어 넣어 자기가 가는 곳이 어디든 그것을 퍼뜨릴 거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의의 결론이 더욱 심오한 차원이어서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결론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 모두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이 세상에 태어나겠다고 요청한 바 없었고, 우리 각자는 무(無)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많은 세상들과 많은 사람들로부터 태어난 존재(“did not come alone, from nothing, but from many worlds and from multitudes”)이기 때문입니다. 일리가 있지 않나요? 돌이켜 보면 우리 각자가 무에서 창조된 것은 맞지만 이전 오랜 시대에 걸쳐 수많은 조상들의 삶이 얽히고설켜 형성된 생명체라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지요. 우리 각자는 홀로 존재하지만 수많은 세계와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라도 그 속엔 악한 요소가 존재하고 악한 사람이라도 그 속엔 선한 요소가 존재하는 법이지요. 그래서 자신의 자유로운 삶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선 스스로 책임을 져야겠지만, 남의 선택과 결정에 대해선 관대한 자세로 그들의 처지를 읽고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게 필요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허물을 대할 때 늘 기억해야 할 바람직한 시각입니다. 케이티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중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None of us is separate from any other.)고 말하면서, “농부의 기도가 내 기도이고 암살자의 범죄가 내 범죄야.”(The peasant’s prayer is my prayer, the assassin’s crime is my crime.)라고 천명합니다. 그러면서 어젯밤 호머가 운 것은 이러한 것들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을 맺지요.

 

매튜와 케이티의 삶과 사상을 고려해 보면, 그로건 씨가 호머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한 말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열네 살 먹은 위대한 인간이란다. 누가 너를 위대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니 너는 그것이 참이라는 걸 알고 그 앞에서 겸손하고 그것을 지켜야 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니?” (You are a great man, fourteen years old. Who has made you great, nobody knows, but as it is true, know that it is true, be humble before it, and protect it. Do you understand?") 호머가 위대하게 자란 배후에는 우선 바로 그러한 부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스팽글러

다음으로 고찰해 볼 인물은 스팽글러입니다. 호머가 일하는 전신국의 사무국장이지요. 그는 우선 전신국의 전보 배달원의 연령 자격이 16세이지만 14세인 호머를 직원으로 받아들입니다. 나이에 비해 더 어른스럽고 책임감이 넘치는 호머의 면모도 높이 샀겠지만, 그가 주급 25불을 벌어 자기 가정의 경제적인 면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사정을 더 깊이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호머의 아버지는 사망했고 어머니는 여름에 포장회사에서 일하고 형은 군 복무 중이며 누나는 주립 대학에 다니고 있는 사정인 것을 헤아린 것이지요. 저녁 먹지도 못하고 야간에 일하는 호머에게 자기 돈으로 파이를 사 먹이는 아량도 베풉니다. 그가 돌아보는 사람은 호머만이 아닙니다. 아직 신문을 다 팔지 못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오거스트의 신문을 다 사주기도 합니다. 오거스트가 사람들이 잠시 후에 저녁 먹고 시내로 들어와 극장으로 몰려들 때 남은 신문을 팔아 그날 벌어야 할 돈 75센트 중 25센트를 벌 작정이라고 말하자, “아이고, 극장에 버글거리는 사람들 생각만 해도 지겹구나. 남은 신문을 나한테 다 주고 이제 너는 집에 들어가라. 자, 여기 이십오 센트다.”라면서 돈을 건네고 그 신문을 죄다 사버린 것이지요.

 

다음으로 그는 전신국을 찾는 고객들의 깊은 사정을 이해하는 면에서 탁월성을 발휘합니다. 한 번은 스무 살쯤 된 청년이 자기 집으로 전보해달라고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전보 내용이 어머니에게 돈을 30불 보내 달라는 요청인 점을 확인하고, 스팽글러는 전보 값도 자기가 대신 내주고 그에게 동전 한 줌과 지폐 한 장과 삶은 계란 한 개를 선물로 주면서 격려해 줍니다. 자기 어머니에게 돈이 도착하면 그때 갚으라고 하면서, 그 계란은 일주 전에 술집에서 가져온 건데 자기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며 정답게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돈 보내달라는 전보를 보내던 그 청년이 나중에 다시 전신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예상외로 권총 강도로 돌변한 상태였습니다. 스팽글러를 향해 사무실에 있는 모든 돈을 내어 놓으라고 권총으로 위협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스팽글러는 당황하지 않고 그 모든 돈을 내어 주면서, 그것은 자기에게 위협해서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권총을 자기에게 주고 이제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라고 권면해 줍니다.

 

이 말을 들은 권총 강도 청년은 권총을 자기 주머니 속에 넣더니, 자기가 그런 행동을 취하게 된 사정을 설명해 줍니다. 이전에 스팽글러의 호의에 놀란 그는 이타카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전신국을 찾아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오직 품위 있는 태도 그 자체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품위 있게 대한 유일한 그 한 사람이 참으로 품위 있는 사람인지”(if the only man in the world I have ever known who has been decent to another man just to be decent - just for itself-was truly so.)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한 사람들은 죄다 두려움에 떨고 있거나 불친절했는데(Everybody in the world is afraid or unkind.), 참으로 인간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사람을 접한 후에 그는 혼란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실하지 않은 것 투성이고 인간이란 존재는 희망을 품을 수 없을 만큼 썩어 빠져 다른 사람의 존중을 받을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자기가 품고 있던 가치관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 준 스팽글러를 만나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타인을 품위 있게 대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한번 스팽글러의 진면목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합니다. “이 세상에 의해 부패하지 않은 사람 한 명을 찾아내자. 그러면 나도 타락하지 않을 수 있고,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야.”(Let me find one man uncorrupted by the world so that I may be uncorrupted, so that I may believe and live.)라는 것이 자신의 소신이었으니까요.

 

스팽글러의 품위를 다시 확인한 그 청년은 자기에게 더 이상 다른 선물을 줄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자기는 고향으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스팽글러에게 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가 된 셈이지요. 그러면서 이제부터 자기 걱정은 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인 고향집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살겠다고 합니다. 비록 당장은 병든 몸이지만 죽지는 않을 테고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 공부도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납니다. 만일 그날 스팽글러가 그에게 불친절하게 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청년은 그를 쏘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속적이고 일관된 스팽글러의 성격적 탁월함이 자기도 살리고 그 좌절한 청년도 살린 셈입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감명 깊게 다가온 장면이었습니다.

 

스팽글러를 접하며 마음속에 든 생각이 있습니다. 세상에 믿을만한 사람 없다고 말하는 대신 먼저 저부터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대신 먼저 저부터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고 말하는 대신 먼저 저부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사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대신 먼저 저부터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되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소 지을 줄 모른다고 말하는 대신 먼저 저부터 미소 짓는 사람이 되어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혹시 이렇게 먼저 제가 시도한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세상 사람들을, 그리고 자기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삶에 지쳐 인생을 포기하려는 사람이나 거친 세상에 복수하겠다며 다른 사람들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제가 먼저 시도한 것으로 인해 새로운 인생의 길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품위 잃은 인간-

(1) 바이필드 선생

품위를 잃은 인물의 대표로는 바이필드를 필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는 이타카 고등학교 육상부 코치입니다. 어디를 가나 문제만 일으키는 코치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가장 부각되는 면모는 사람 차별입니다. 부잣집 도령인 휴버트에게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하며 장애물 달리기 연습을 마친 후 “샤워하고 오후까지 쉬라”(Go to the shower now and take it easy until this afternoon.)고 배려해 주면서도,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태도가 표변하지요. 휴버트에게 사용했던 말투와는 완전히 다른 어조로(in an altogether different tone of voice) 이렇게 외칩니다. “야, 이 녀석들아, 계속 움직이라고. 너희는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자부심 느낄 만큼 잘하는 게 아냐. 너희들 위치로 돌아가서 다시 시도해 봐.”(O.K., you guys—keep moving. You’re not so good you can stand around and be proud of yourselves. Get to your marks and give it another try.) 휴버트는 오후까지 푹 쉬도록 해 주고 다른 아이들은 더 연습시켜 힘 빠지게 해서 휴버트가 그 경기에서 이기게 하려는 코치의 교묘한 작전인 셈이지요.

 

나중에 힉스 선생의 고대사 수업 시간에 호머와 휴버트가 서로 언쟁을 벌인 탓으로 수업 후에 교실에 남게 되었을 때에도 바이필드는 편파적인 방식으로 개입합니다. 교장 선생을 찾아가 힉스 선생에게 요청해서 휴버트가 장애물 달리기 경기에 참여하도록 해달라고 압력을 넣습니다. 사실상 호머도 그 경기에 참여하기 원하는 상태였지만 휴버트에게만 신경을 씁니다. 호머와 비교하면서 휴버트는 결코 ‘버릇없는 아이’(an unruly boy)가 아니라 도리어 ‘완벽한 작은 신사’(a perfect little gentleman)라고 변호해줍니다. 힉스 선생이 자기 은사이기도 하고 그 선생의 공정한 면모를 익히 알고 있는 교장이 난감해 하자, 그는 힉스 선생 교실로 와서 마치 교장 선생이 휴버트를 해방시킬 수 있는 권한을 자기에게 부여해 주었다는 듯이 말하고는 휴버트만 데리고 나가 버립니다.

 

이런 상황을 접한 힉스 선생은 처음엔 할 말을 잃었다가 결국엔 바이필드의 전모를 밝혀줍니다. 그는 자기 같은 얼간이들(jackasses)에게나 운동을 가르치기에 적합한 인물이라면서, 무지할 뿐 아니라 거짓말쟁이라고 지적합니다. 마커스와 베스도 이전에 가르친 적 있던 힉스 선생은 그들과 바이필드 같은 인간들을 비교합니다. 즉 마커스와 베스는 정직하고 덕성을 갖추었지만, 단지 바보에 불과한 이 세상 속의 바이필드류(類)는 열등한 인간들(these inferior human beings, these Byfields of the world who were never anything but fools)로서 힉스 선생 같은 사람을 늙은 여자로 여기고 속이기나 한다고 비판합니다. 바이필드는 이전에 자기 교실에서 공부할 때도 몇 번이고 자기에게 거짓말을 해댔으며,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파렴치하게 아첨하는 외에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He has learned nothing except to toady shamelessly to those he feels are superior.)고 공박합니다.

 

바이필드의 패악질의 끝장판은 장애물 달리기 경주 때 일어났습니다. 호머가 휴버트를 앞서서 달리는 것을 확인한 그는 호머를 제지하기 위해 달리고 있는 그에게 달려듭니다. 그래서 둘 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지요. 바로 그때 휴버트의 품위가 드러납니다. 달리기를 멈추더니 다른 세 명의 주자들에게도 그 “자리에 멈추어 있으라.”(Stay where you are)고 소리친 후에, 호머를 일으켜 세워 계속 달리게 해 줍니다. 그래서 다 합류해서 마지막 순간을 질주한 결과, 호머와 휴버트가 비슷한 순간에 결승선에 들어오게 되지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바이필드 코치가 호머를 훈계하려고 교무실에 가 있으라고 하자, 옆에 있는 호머 친구 조 테라노바가 호머 편을 듭니다. 그때 바이필드가 “이 더러운 이탈리아 녀석, 입 다물어!”(You keep your dirty little wop mouth shut!)라고 조에게 외치며 그를 밀쳐 대자로 드러눕게 합니다. 조가 기가 막혀 “이-탈-리-아놈이라구요?”(w-o-p?)라고 반박하자 옆에 있던 호머도 자기 친구에게 욕하지 말라(“You can’t call a friend of mine names.”)고 합세하며 그에게 태클을 걸지요. 그때 교장이 달려와 말리면서 결국엔 바이필드 코치를 향해 조에게 사과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도 없게, “사과합니다.”(I apologize)고 속삭이고는 황급히 사라지지요.

 

(2) 중국 선교사

다음으로 품위 없는 인물로 거론해야 할 사람은 다소 의외입니다. 이 작품 속에는 교회 예배 장면을 묘사하는 곳이 있습니다. 헌금 시간이 되자 라이어널(Lionel)이 헌금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 라이어널은 네 살짜리 율리시스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네 바보(the neighborhood half-wit)로 불리지만, 신실하고(faithful), 관대하고(generous), 상냥한(sweet-tempered) 위대한 인간(a great human being)으로 묘사되고 있는 소년입니다. 나이도 여덟 혹은 아홉 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라이어널은 헌금을 거두면서 전도지(a religious pamphlet)를 나누어줍니다. 그냥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꼭 질문 한 가지를 던집니다. “구원을 받으셨나요?”(Are you saved?) 먼저 율리시스에게 이 질문을 하고 소책자를 전달해 준 그는 통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노신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구원을 받으셨나요?”(Are you saved?) 그러자 그 노신사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우선 그는 라이어널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성급하게도 저리 가라고 중얼거립니다. (“The man looked at the boy severely and then whispered impatiently.”) 하지만 라이어널이 이에 굴하지 않고 순교자의 자세로 그에게 소책자 한 부를 들이밀자, 그가 또 짜증을 내면서(irritated) 라이어널의 손에서 소책자를 조용히 홱 쳐내는 바람에(“quietly slapped the pamphlet out of Lionel's hands”) 그것이 바닥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라이어널을 겁주니 그는 더 위대한 순교자 중 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scaring the boy and making him feel like one of the greater martyrs”). 그때 옆에 앉아 있는 그 노신사의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속삭이자, 그는 라이어널이 자기에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으며 전도지를 주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 소책자를 집어 들어 아내에게 내밀지요. “그놈이 내게 이것을, 이 소책자를 건네주는 거야!” (He handed me this-this pamphlet!) 또다시 그 노신사는 짜증을 내면서(with some irritation) 거기에 적혀 있는 문구를 읽었습니다. “구원받으셨나요? 결코 너무 늦은 게 아닙니다.”(Are you saved? It is never too late.) 바로 그때 아내는 남편의 손을 토닥이며 한 마디 덧붙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         )는 걸 그 아이가 어떻게 알겠어요?”

 

이 괄호에 무슨 표현이 들어갈까요? 그가 과연 누구이기에 이렇게 8-9세 된 어린이가 헌금함을 돌리는 망중한을 타서 전도지를 권하는 것을 이렇게 타박하고 있을까요? “구원을 받으셨나요?”란 질문이 그렇게 실례되는 질문이었을까요? 그것도 교회 안에서, 예배 중에 받은 질문인데 그렇게 연소한 전도인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무례하게 짜증 내며 응답하고, 건네주는 소책자를 홱 쳐서 땅에 내동댕이치고는 기막히다는 듯이 또 짜증을 내며 전도지에 적힌 문구를 읽어대는 이 남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괄호 안에 들어갈 정답은, “중국에서 삼십 년 동안 선교사였다”(you've been a missionary in China for thirty years)입니다.

 

이 선교사는 “구원을 받으셨나요?”라는 질문이 정말 필요했던 사역자였습니다. 30년 중국 선교 사역을 제외하고는 그에게서 구원받은 증거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 말씀 일꾼에게 대하는 그의 매서운 표정과 무절제한 감정과 과격한 행동과 정제되지 않은 말투를 보세요. 사실상 그 중국 사역이란 것도 그 자체만으로는 구원의 조건이나 증거가 될 수 없지요. 구원은 어떠한 선행으로도 얻을 수 없고 구원받은 증거도 어떠한 선행 자체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마련되어야 하고 그 선행은 내적인 사랑의 발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 결실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용섭 목사가 “목사 구원”이란 책을 집필한 것도 바로 이런 사역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요? “구원의 과정으로서의 목회” 혹은 “구원의 과정으로서의 선교 사역”이란 개념을 파악하는 게 목회자나 선교사의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고민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으니까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but I discipline my body and make it my slave, so that, after I have preached to others, I myself will not be disqualified.-고린도전서 9:27) 즉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도를 전하고 다니면서도 정작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에서 실격될(disqualified)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입니다.

 

-품위 있는 인생의 비결-

품위 있는 인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이 작품 속에서 그 단서를 찾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마커스와 호머는 그 부모인 매튜와 케이티의 품위 있는 삶의 자세에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다른 품위 있는 어른들에게서도 그 본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어른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힉스 선생(Miss Hicks)입니다. 호머의 고대사 선생이지요. 이타카 고등학교에서 35년 동안 고대사를 가르치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영향을 끼친 교사였습니다. 호머의 형이나 누나뿐 아니라 바이필드 코치와 에크 교장 선생까지도 가르친 노장이었습니다. 수업 중에 서로 티격태격하던 호머와 휴버트를 수업 후에 남으라고 한 힉스 선생은 바이필드 코치가 2백 미터 장애물 달리기 경기를 위해 휴버트만 데리고 나가자 남아 있던 호머에게 자기가 해 주고 싶었던 조언을 나눕니다. 그 조언의 핵심은 고대사 공부에서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 즉 품위 있는 삶을 사는 길이었습니다.

 

우선 힉스 선생은 자기 학생들이 참된 인간성, 즉 따뜻한 마음씨를 품고(“has a heart”) 진리와 명예를 사랑하며(“loves truth and honor”), 하급자를 존중하고 상급자를 사랑하기(“respects his inferiors and loves his superiors”)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 학생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각자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다른 사람들만큼 훌륭하지는 못하다는 현실에 주목하기를 바라면서, 그들이 무엇보다도 선을 행하고 품위 있게 자라기(“to do good and to grow nobly”) 위해 노력해 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들의 외모나 외적인 행동거지보다는 그것들의 배후에 있는 내적인 태도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둘째로 힉스 선생은 자기 학생들이 각자 자기 자신이 되길(“to be himself”) 원합니다. 각자가 독립된(“separate”) 존재, 특별한(“special”) 존재, 그리고 모든 다른 사람들 중에서 유쾌하고 흥미진진하며 독특한 사람(“each one a pleasant and exciting variation of all the others”)이 되기를 원한 것이지요. 학생들이 그저 자기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나 자기 일을 수월하게 해 주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닮길 그녀는 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교실은 완벽한 작은 신사 숙녀들로 가득 차게 될 텐데 자기는 그런 상황에 곧 싫증이 날 거라고 말합니다. 이런 측면이 그녀와 바이필드류를 구분짓습니다. 바이필드가 휴버트를 가리켜 '완벽한 작은 신사'라고 했듯이, 후자는 그 작은 신사 숙녀들, 즉 부잣집 자녀들로 구성된 교실을 선호할 테니까요. 반면에 힉스 선생은 학생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인간다운 존재이기만 하다면, 각자가 본질적으로 타고 난 개성과 그 다양한 면모는 인생을 즐기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데 혁혁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지요.

 

셋째로 힉스 선생은 자기 학생들이 “각자 다른 학생을 자연스럽게 좋아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서로를 존중할”(in spite of your natural dislike of one another, you still respect one another) 때 각자가 “참된 인간이 되기 시작할” 거(begin to be truly human)라는 점을 깨닫기 원합니다.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천명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것이 바로 덕성을 갖춘다는 것, 즉 우리가 고대사 공부에서 배워야 할 것의 의미야.”(That is what it means to be civilized-that is what we are to learn from a study of ancient history.)라고 덧붙입니다.

 

결국 그녀가 품위 있는 삶으로 이끄는 요소들로 꼽은 것은, 진실과 사랑이 충만한 내적인 자질,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심입니다. 이러한 자질들이 바로 예부터 사람들이 추구해 온 미덕이요 교양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힉스 선생은 호머의 형인 마커스와 누나인 베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들이 “정직하고 덕성을 갖추었다”(honest and civilized)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적이고 윤리적이며 합리적인 교양이나 덕성을 갖춘 상태를 가리키는 ‘civilized’라는 단어에 꽂혀서 그것을 아주 주의 깊게 강조합니다. 고대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들이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로 성장하기 위해 애썼다는 점을 다시 일깨워주지요. 이런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역설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논의된 품위라는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역설한 ‘아레테’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용어일 것입니다. 즉 성격적 탁월성은 좋은 습관의 반복으로 형성되는 것으로서 우리 품성이 ‘중용’의 원칙과 일치할 때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예컨대 ‘만용’과 ‘비겁’이라는 양극단의 중용은 용기). 이 중용이 바로 품위와 같은 범주에 속한 단어입니다. 과연 힉스 선생의 이런 품위 있는 교육 철학이 우리나라 교실에서 메아리치고 있을까요?

 

-이타카 마을 공동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도시 이름이 이타카입니다. 기억이 나시는지요? 이타카는 오디세우스가 집을 떠난 지 20년 만에 돌아가는 고향 이름입니다. 호머의 남동생 율리시스는 오디세우스의 라틴어식 이름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호머를 비롯한 품위 보유자들은 죄다 이타카라는 도시 공동체에서 빚어졌습니다. 지난 1996년에 당시 미국 대통령 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책을 한 권 냈습니다. 그 제목은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였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이라고 하지요. 클린턴의 요점은 어린이를 성공적으로 키우려면 사회가 서로 책임을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뿐 아니라 조부모, 이웃, 교사, 목회자, 의사, 고용인, 정치인, 비영리기관, 사업가 및 국제 정치 그룹들을 포함하여 아이들을 키우는데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는 기관들에 주목하면서, 정부 주도의 사회 개혁과 보수적인 가치관의 통합을 아이 교육의 바람직한 방안으로 역설합니다. 사로얀의 “인간 희극”을 읽고 나니 클린턴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매튜와 케이티가 자기 자녀들을 훌륭한 인격을 가진 아이들로 아무리 잘 키웠다고 하더라도, 그 됨됨이를 알아주고 격려해주는 성숙한 이웃들이나 교사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모들을 꼰대로 여기고 적당히 시류를 따라 살아가는 인물들로 변모했겠지요. 집안의 도덕과 교훈이 사회 속에서 거부당하거나 조롱당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도 그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지속해가기란 수월한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힉스 교사 같은 이는 존재하지 않는 반면 바이필드 코치 같은 이가 학교를 장악하고 교장도 그의 편에 서 있다면, 어떻게 호머나 마커스 같은 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제대로 자랄 수 있겠습니까? 14세 소년의 처지는 고려해주지 않고 냉대하며 4세 어린이는 무시하고 학대하는 분위기가 지배하는 공동체라면, 호머가 어떻게 일하며 돈을 벌어 가계를 돕고 율리시스는 어떻게 마을을 자유롭게 오가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겠습니까? 작품 중에서 커빙턴 스포츠 용품점에 율리시스가 구경하러 갔다가 그만 동물 잡는 덫에 갇혔다가 간신히 풀려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아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였다면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생겨 유괴되거나 학대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입니다. 결국 가족 공동체뿐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사회 공동체가 품위를 갖춘 다음 세대를 낳은 것이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이 작품을 읽으며 계속 고개를 드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 도시 및 나라는 과연 이런 보편적 가치를 갖추고 실행하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과연 품위 있는 다음 세대를 계속 낳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