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선교와 문화: N-STAR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4. 14.

선교와 문화: N-STAR

지난달에 원주에 계신 분들에게 원격으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제는 “선교와 문화”였습니다. 그분들에게 강의한 내용 중에 선교와 문화를 접목할 수 있는 실제적인 제안거리로 나눈 사항들에 대해서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트인 마음으로 관찰하고 청취하며 질문하라: Noblemindedness

트인 마음은 사도행전 17:11에서 베뢰아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을 때 취한 태도입니다. 역본에 따라 ‘너그럽다’, ‘고상하다’, ‘신사적이다’라는 단어들로 표현된 그들의 태도는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자세와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고 증명한 결과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르는 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난동을 피운 것은 시기 때문이었습니다(17:5). 진리냐 아니냐가 문제가 된 게 아니라, 잘되느냐 못되느냐가 그들의 관심거리였던 것이지요. 바울의 설교가 아무런 파급 효과를 낳지 못했다면 그들이 그렇게 난리를 피웠을까요? 그렇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시기심 대신 신사적인 태도로 응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울의 설교 내용의 진리성(眞理性)이 문제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바울의 말씀을 수용하고는 그 내용의 진리성을 확증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던 것이지요.

 

다른 문화를 접할 때 본으로 삼을 만한 자세입니다. 그 문화의 실상이나 본질을 깨달으려면 이렇게 트인 마음으로 그 문화를 다각도로 관찰하고 그 문화에 속한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게 절실합니다. 잘 이해되지 않을 때는 속단하는 대신 그들에게 질문하는 게 필수적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말한 대로, “문제는 당신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인식하느냐”(It's not what you look at that matters, it's what you see.)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보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그 문화에 속한 신기한 것들을 바라본다고 해서 그것들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언급한 대로입니다. "진정으로 무언가를 발견하고자 하는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다."

 

유명한 그림 세 가지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 속에는 각각 두 가지 형상이 포함되어 있지요. 첫째 그림에서는 젊은 여자의 얼굴 옆모습과 늙은 여자의 얼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림에서는 토끼의 머리와 오리의 머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각각의 그림에서 그 두 가지 모습을 한꺼번에 볼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한 가지 모습을 보고 멈춘 다음에야 비로소 다른 한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어령 교수가 지적한 대로 마치 숨쉬기를 할 때 날숨과 들숨을 한꺼번에 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날숨과 들숨 사이의 멈추는 순간, 즉 지식(止息)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날숨이 들숨으로 바뀌고 들숨이 날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를 이해할 때에도 우리가 지금껏 품고 있던 생각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귀 기울여야 합니다. 질문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그림 속에 그어진 두 선분은 서로 평행하는 직선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들여다보아도 직선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 배경에 있는 그림 때문에 왜곡되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문화를 접할 때에도 그 문화 현상 중에 이렇게 왜곡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지점을 염두에 두고 관찰하고 경청하고 질문해 가야 합니다.

 

(2) 상투적인 시각을 버리라: No Stereotyping

유럽중심적인 재담 한 가지가 있습니다. “천국이란 경찰은 영국인, 요리사는 프랑스인, 수리공은 독일인, 애인은 이탈리아인이면서 이 모든 것을 스위스인이 관장하는 곳이다. 지옥이란 요리사는 영국인, 수리공은 프랑스인, 애인은 스위스인, 경찰은 독일인이면서 이 모든 것을 이탈리아인이 관장하는 곳이다.” (HEAVEN is where the police are British, the cooks French, the mechanics German, the lovers Italian, and it's all governed by the Swiss. HELL is where the cooks are British, the mechanics French, the lovers Swiss, the police German, and it's all governed by the Italians.) 유머러스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지나치게 일반화한 내용 때문에 유럽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상처 받을 수도 있는 재담이지요. 그런데도 일본인은 “수수께끼 같다”(inscrutable), 러시아인은 “촌스럽다”(boorish), 프랑스인은 “속물근성이 있다”(snooty), 아랍인은 “변덕스럽고 불안정하다”(volatile and unstable)라는 고정 관념들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하고 무감각한 관념이고 발언들인지요.

 

이런 상투적인 개념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밝혀 주는 그림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그림은 프랑스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엡솜의 경마”로서, E. H. 곰브리치가 그의 “서양미술사”에서 소개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경마 장면이 제대로 그려진 것일까요? 특히 달리는 말들이 네 다리를 쭉 뻗고 공중에 떠 있는 모습에 한번 주목해 보세요. 사실상 달리는 말은 결코 그런 포즈로 달리지 않습니다. 말은 다리를 차례대로 땅에서 떼었다가 다시 내리는 식으로 달리지요. 실제로 말이 질주하는 순간을 스냅 사진으로 찍으면 바로 알 수 있지만, 조금만 멈추어 생각해 보아도 이런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가들이 이것을 깨달은 후에 자기 그림 속에 적용해서 질주하는 말을 그리자, 그 그림이 잘못되었다고 불평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지요.

 

이런 인식상의 오류는 드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곰브리치는 그림에서 하늘은 푸르러야 하고 풀은 초록색이어야 한다고 우기면서 다른 색채를 보면 화를 내는 사람들은, 별을 오각형으로 생각하는 아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들[화가들]은 세상을 새롭게 보고 사람의 살은 살색이고 사과는 노랗거나 빨갛다는 기존의 관념과 편견을 버리고자 애쓴다. 이러한 선입견을 버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단 거기에 성공한 미술가들은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낼 때가 많다. 이러한 화가들은 우리들에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의 존재를 자연에서 찾으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 그들로부터 배우고 우리 자신의 창에서 벗어나 그들의 세계를 한번 힐끗 내다보기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감동적인 모험이 될 것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최대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3) 문화 속의 보편적 원리에 주목하라: The Tao

모든 문화 속에는 전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녹아 있습니다. 예컨대 갈라디아서 5:22-23에서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맺을 인격적인 열매의 속성은 어디서나 환영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카렌 암스트롱이 제안한 ’동정심 헌장’(Charter for Compassion)이란 것도 사실상 아브라함에서 비롯된 유대교, 기독교 및 이슬람이라는 세 종교가 황금률이라는 보편적 원리에 입각해서 서로를 대우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자는 것입니다. 이 동정심(compassion)이라는 영어 단어는 원래 라틴어 ‘compati’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com-'[together=함께]과 'pati'[to suffer=고통을 겪다]의 합성어로 ’함께 고통을 겪다‘라는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석영중 교수에 따르면 러시아로 '동정심’ 혹은 ‘연민’이란 단어는 ‘sostradanie'인데 이 단어도 'so-'[함께]와 'stradanie'[고통]를 합성한 단어라고 합니다. 언어와 지역이 달라도 사람들 속에 작동되는 원리는 동일하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석 교수는 타인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함께 고통당하는 것이 연민인데, 이런 연민이 없다면 그 어떤 윤리나 철학 및 문학도 허망한 미사여구에 불과할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4) 그들의 깊은 필요들을 채우라: Active Love

다음 두 가지 중 어느 것이 더 성서적일까요? ‘복음 전도 목적으로 우정 쌓기’(Friendship for the sake of evangelism) 대 ‘우정 쌓는 가운데 복음 전도하기’(Evangelism in the course of friendship). 지난 세월 우리나라 교회는 후자보다는 전자에 치중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을 지상명령(the Greatest Commandment)으로 착각하고 대위임령의 내용도 ‘모든 민족을 제자 삼기’(마태복음 28:19)가 아니라 ‘만민에게 복음 전파’(마가복음 16:15)로 이해한 가운데, 그것을 자신과 자신이 속한 교회의 목표로 삼은 경우가 허다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따로 있었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지상명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위임령도 이 지상명령의 정신과 맥락 속에서 실행되어야 하겠지요.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진행되어야 할 사역인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게 아니라 ‘행동과 진실함’으로 하는 실천적인 사랑이요, 이웃의 깊은 필요를 채우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요한일서 3:18).

 

(5) 반응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라: Responsive Evangelism

신약성경에서 제시하는 복음전도의 원리는 애매하지 않고 아주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복음전도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즉 복음전도의 은사를 받고 전문적인 훈련을 경험한 선교사, 목사 및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전도의 문을 통해 직접적으로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Direct Evangelism). 한편 다른 은사를 받은 일반 성도들은 각자에게 허락된 삶의 현장 속에서 복음을 빛내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기회를 잘 살려 복음의 소망을 묻는 이들에게 말씀을 나누어야 합니다(Responsive Evangelism). 본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말씀 드린 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기와 같이 직접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라는 권면을 한 적이 없습니다(복음전도의 시기와 방법: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한다? 참조).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사적인 태도로 성경, 특히 바울의 서신서를 상고하면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결국 말씀을 전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두 경우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자의 경우는 전도의 문이 열린 곳이므로 직접적이고도 선언하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전도의 문이 열린 곳이란 말씀을 기꺼이 듣기 위해 준비된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에게 말씀 전하기를 부탁했던 유대인의 회당(사도행전 13:15)이나, 말씀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던 아레오바고 광장(사도행전 17:21-22)이나, 말씀 듣기 원하는 이들이 찾아오던 ‘두란노 서원’(사도행전 19:9)과 같은 곳이지요.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이런 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방식으로 복음전도해야 하지요. 복음을 빛내는 삶을 통해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복음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관심과 질문에 반응하여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지요. 작금의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문제는 전자의 일꾼들이 전도의 문을 얻을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로 지원해 주는 일이나, 후자의 일꾼들이 자신들의 일상의 장 속에서 복음을 빛내는 삶을 살도록 격려해 주고 뒷받침해 주는 일이 너무 희귀하다는 데 있습니다(골로새서 4:2-6).

 

노르웨이 국민 시인으로서 노르웨이의 해안 마을 울빅에서 평생을 사과 과수원을 일구며 시를 쓴 올라브 H. 하우게(1908~1994)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물론 당신이 하는 말은

옳다, 너무 옳아서

그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소음이다

언덕 속으로 들어가라

그곳에 당신의 대장간을 지으라

그곳에 풀무를 세우고

그곳에서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우리가 그 노래를 들을 것이다

그 노래를 듣고

당신이 어디 있는지 알 것이다

 

대장장이는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덕 속에 있는 대장간이라는 자신의 장 속에서 풀무를 저으며 쇠를 달구고 망치질 하는 사람이지요. 그렇지만 그가 성실하게 일에 몰두하면서 기쁨에 겨워 노래하면, 그 노래에 감동받은 사람은 그 사람에게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기 위해서 말입니다(베드로전서 3:15).

 

현 세대가 그리스도의 존귀한 복음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은 저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사회의 모범이 되기보다는 사회의 부담으로 자리 잡고, 연약하고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필요를 섬기기 위해 진력하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발 빠른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상 복음의 선양은 요원한 일입니다. 에토스와 파토스를 결여하고 로고스만 앙상하게 남은 우리의 전도나 설교는 허공을 칠 뿐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삶 속에서 구현되는 현장을 일구어 내야 합니다. 진리와 사랑이 근간을 이루는 품위 있는 삶과 대인관계가 교회 안팎에서 흘러 넘쳐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고통 당하는 이웃들의 자리에 함께 머물며 그들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깊은 필요를 진실하게 섬겨 주어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삶의 순간들이 살아 숨 쉬는 복음의 메시지, 진선미의 편린들이 빛을 발하는 은유와 비유가 넘실거리는 설교와 대화로 이웃들의 심금을 울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처럼 삶의 매순간을 주의 깊게 누릴 뿐 아니라 깨어 있는 성정으로 온 세상에 충만한 하나님의 음성과 지혜를 찾고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마땅히 대답해야 하는 대로 응대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성경뿐 아니라 시와 소설을 통해 세상에 넘실대는 진리와 은혜의 파편들을 붙잡아 아름다운 양탄자도 만들고 싱그러운 뗏목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 일에서 획기적인 진전을 누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영문 지침에서 밑줄 친 고딕체 철자를 다 모으면 ‘N-STAR’가 됩니다. 'The North Star' 혹은 'Pole Star' 혹은 ‘Polaris'라고 불리는 북극성을 가리키는 의미로 조합되어 있습니다. 북극성이 작은곰자리의 알파별로서 천구의 북극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여행자들이 방위를 찾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듯이, 이 지침들이 선교와 문화에 관한 원리들을 적용하는 데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소중한 참고가 되길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로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만 선교 대상자들의 문화를 이해해야한다는 생각보다 더 고귀하고 바람직한 시각은,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품고 사랑하며 그들의 문화를 익혀 가는 중에 복음 전할 기회를 얻고 그들을 제자 삼아 가야한다는 관점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세계복음화가 아니라 우리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당신의 주권을 밝히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