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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인문학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5. 28.

인문학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어제저녁에 “선교와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선교 영역에서 수고하신 분들이 함께 모여 선교리더십을 토의하는 과정 중에 나눈 강의였습니다. 선교와 인문학을 접목하는 시도에 대해 낯설어하거나 난감해하는 참석자가 혹시 있을까 봐 시 한 편을 감상하고 시작했습니다. 김광규 시인의 “생각의 사이”라는 시입니다. 김 선생님은 제 대학 은사이십니다. 대학 1학년 때 교양과정을 수강하던 중 접한 독일어 수업을 지도하신 교수님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보니 참 신선했습니다. 어느 교수님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제안을 접했던 게 새로웠습니다. “여러분은 대학생이므로 자기가 자기 삶을 결정해야 한다. 이 독일어 수업 시간 중 20%는 결석해도 된다고 학교가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마라. 다시 말하면 이번 학기 동안 여러분의 결정대로 20%를 결석하면서 누려야 할 대학생활이 있다면 그렇게 하라고 권한다.” 그런 교수님이 그 이듬해인가 서울 한양대로 전근하게 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가슴 한 군데가 텅 비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만약 이 1연 1행에 “목사[혹은 그리스도인]는 오로지 목회[혹은 선교]만을 생각하고”를 넣고, 3연 1행에 “목회[혹은 선교]와 시 사이”를 넣으면, 4연 1행에는 어떤 단어가 등장할까요? 아마도 “소음”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선교만을 생각하면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변혁될 것 같지만, 사실은 선교와 시[문학], 선교와 정치, 선교와 경제, (...) 선교와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없다면 다만 소음만 남을 것이라고 저는 이해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선교 현실이자, 전 세계적인 선교 활동의 결과를 참담하게 시사해 주는 예언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 제가 주안점으로 삼은 것은, 선교하는 데 있어 인문학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사실상 지난 세월 동안에도 선교 영역에서 인문학이 사용되었지만,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인문학은 선용할 것인가 아니면 오용할 것인가의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어제 강의 중 그동안 선교 영역에서 인문학이 오용된 예로 소개한 것들을 몇 가지 나누겠습니다.

 

첫째, 성경 각 권의 성격이나 목적이나 기록 상황이나 콘텍스트를 무시한 경우가 왕왕 있었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예컨대 디모데후서 4:2 말씀입니다. “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이 말씀을 누가 제시한다면, 우선 질문해야 할 것은, 이 디모데후서가 어떤 성격을 띤 글인지 혹은 어떤 장르에 속하는 것인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이 글은 서신서이지요. 그렇다면 발신자와 수신자가 드러나게 됩니다. 발신자는 사도 바울이요, 수신자는 그의 믿음의 아들이자 선교사요, 목사인 디모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4:2 구절의 ‘’는 바로 디모데인 것을 알 수 있지요. 더구나 그는 전도의 은사를 받아 ‘전도자’의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라는 점을 4:5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런데 이 ‘전도자’라는 직함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전도의 은사를 부여받은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단 세 번만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예사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21:8[빌립]/에베소서 4:11[교회의 직분 중 하나]/디모데후서 4:5[디모데]). 만일 누가 이 말씀을 일반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취지로 제시한다면, "prooftexting" 사례에 속하지요. 흔히 ‘증거 본문’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자주 있지만, 사실상 “문맥을 무시한 성경 본문 인용”(using decontextualized or isolated, out-of-context quotations from a document [often a book of the Bible])으로서 영어 사전에도 이미 등재되어 있는 용어입니다. 그만큼 기독교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의미이겠지요.

 

인문학 오용 사례 두 번째는 이 세상의 창조 시점을 계산한 역사적 시도들입니다. 가장 유명한 경우는 1650년에 아일랜드 제임스 어셔 주교가 그 시점을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오후 6시로 정한 경우입니다. 그것보다 덜 알려져 있지만, 독일 철학자인 나탈리 크납에 의하면, 마르틴 루터도 기원전 3960년부터 세계가 시작된 것으로 계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총 세 번에 걸쳐서 세상 종말 시점을 오판했습니다(1532년, 1538년, 1542년). 특히 1542년에 대해서는 이렇게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해(1540년)는 정확히 세계가 생긴 지 5500년이 되는 해로, 그리하여 이제 세상의 종말이 올 것으로 보인다. 6천 년이 완전히 채워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로 인해서 새로운 개신교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이렇게 창조 시점을 대충 정하고 어림짐작으로 곧 세상의 종말이 임한다고 세 번씩이나 오판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라는 것이 믿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어셔 주교와 루터의 오판은 성경, 특히 창세기의 기록 목적을 상기하지 않은 인문학적 판단 착오였습니다. 창세기는 인류의 모든 조상들의 생사 기록을 담은 족보가 아닙니다. 그 족보에 나와 있는 인물들의 생년과 사망 연도를 활용하여 덧셈을 거듭해서 창조 시점을 포착할 수 있도록 계시된 책이 아니지요. 도리어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사역의 시발점을 열어 밝히는, ‘시원’(始原)에 관한 책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이 창세기를 부르는 이름이 “태초에”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의 기원과 타락의 시발점을 다룰 뿐 아니라, 인류의 구속에 관한 약속을 부여받은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기원과 위상을 묘사한 계시인 것입니다.

 

이참에 성경 족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 잠시 나누었습니다. 구약학자인 월터 카이저가 지적한 것처럼, 성경 곳곳에 등장하는 족보를 접할 때 먼저 취해야 할 자세는 그 속에 많은 생략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 예컨대 마태복음 1장 족보 중에서 8절(“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에 등장하는 ‘요람’과 ‘웃시야’ 사이에는 무려 3명의 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아하시야[열왕기하 8:25], 요아스[열왕기하 12:1], 아마샤[열왕기하 14:1]). 구약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의 아버지는 ‘아므람’이고, 할아버지는 ‘고핫’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레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출애굽기 6:16-20). 그런데 민수기에서는 고핫의 자손 수가 무려 8,600명이나 됩니다. 그것도 1개월 이상 된 남자 수만 그렇습니다(3:27-28). 그 다음 장에 보면 30세에서 50세에 속한 남자의 수만 2,750명이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34-36). 고핫이 삼 대에 걸쳐 이렇게 많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듭니다. 고핫과 모세 사이에 다른 자손의 이름이 생략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지요. 그렇다면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A가 B를 낳고”라는 표현이 반드시 A가 B의 아버지(혹은 어머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A는 B의 할아버지(혹은 할머니) 혹은 증조할아버지(혹은 증조할머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야곱의 부인 네 명(레아, 실바, 라헬, 빌하)의 경우에, 각각의 손자[손녀]들까지 그들이 낳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들의 아들[딸]들로 불리고 있습니다(창세기 46:15[레아], 46:18[실바], 46:22[라헬], 46:25[빌하]). ‘레아’의 경우만 한번 주목해 보세요.

 

(창세기 46:15) “이들은 레아가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난 자손들이라 그 딸 디나를 합하여 남자와 여자가 삼십삼 명이며”(These are the sons of Leah, whom she bore to Jacob in Paddan-aram, with his daughter Dinah; all his sons and his daughters numbered thirty-three.)

 

한글 번역에서 ‘자손들’, ‘남자와 여자’로 표현된 단어들은 원래 각각 ‘아들들’,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레아가 이 아들, 딸들과 손자, 손녀들을 다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성경은 족보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스라엘 모든 사람의 이름이 다 기록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각 책의 성격과 목적상 필요한 대로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 주요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들을 부각시키면서 전개되는 책이지요. 사정이 이러한데도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들의 생년과 사망 연도를 근거로 합산에 합산을 거듭하면 창조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문학의 오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교 영역에서 인문학을 오용한 사례 세 번째는 ‘지상명령’에 대한 것입니다. 선교계에서 오래 전부터 ‘지상명령’으로 회자된 성경 구절은 바로 마태복음 28:18-20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And Jesus came up and spoke to them, saying, "All authority has been given to Me in heaven and on earth.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the nations,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the Son and the Holy Spirit,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at I commanded you; and lo, I am with you always, even to the end of the age.) 문제는 이 구절이 과연 ‘지상명령’(The Greatest Commandment) 일까 하는 점입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상명령’은 따로 있지요. 마태복음 22:37-38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And He said to him, "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the great and foremost commandment.) 예수님께서 명명백백하게 ‘크고 첫째 되는 계명’, 즉 ‘지상명령’으로 밝혀주신 것이 엄존하는 데도 불구하고, 누가 마태복음 28:18-20 말씀을 ‘지상명령’으로 명명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이 구절을 지칭하는 영어권 표현인 “The Great Commission”(대위임령)을 오역한 이의 과오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간단한 표현의 오역이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우리나라 선교계에 회자되면서 끼친 폐해는 광범위하고 심각했습니다. 이 대위임령이 많은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의 목적으로까지 등극했기 때문입니다(본 블로그 중, “지상명령: 대위임령이 지상명령이다?” 참조).

 

이 대위임령과 연관하여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이 구절에서 “너희”는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낳은 제자 공동체, 즉 교회였습니다. 어느 특정 제자에게 위임한 내용이 아니라,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까지 포함된 제자 공동체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이었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재연하고 있는 사도행전에서 제시된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but you wi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has come upon you; and you shall be My witnesses 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even to the remotest part of the earth.-사도행전 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모인 사도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등장하는 ‘증인’이 단수가 아니라(‘개역개정성경’의 경우) 복수(witnesses)인 것이지요. 이번에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하면서 ‘제자 개인의 증인 됨’이 아니라, ‘제자 공동체의 증인 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최근 한국갤럽이 ‘한국인의 종교’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2021년 현재 우리나라의 개신교 신자가 17%, 불교 신자가 16%, 천주교 신자가 6%를 기록한 데 반해 비종교인이 무려 60%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우선 놀라움의 대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놀라움은 그다음 조사 결과에 비할 바가 못 되었습니다. 이 비종교인들에게 호감이 가는 종교를 묻는 설문에서 개신교를 선택한 사람들이 겨우 6%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불교: 20%, 천주교 13%, 호감 가는 종교 없음: 61%). 불신자 백 명 중 단지 여섯 명만이 기독교를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 선교 상황의 현실입니다.

 

이런 참담한 현실 배후에는 대위임령을 ‘지상명령’으로 둔갑 시킨 채, 그 대위임령의 내용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모든 민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지키는 제자 공동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복음 전도하고 교회 개척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올인한 지난 수십 년간의 선교 활동이 있습니다.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혹은 성장)이라는 오도된 대위임령이,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지상명령 혹은 인생의 목표 자리를 꿰찬 형국이 된 것이지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중에 당신께서 인도해 주신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사정을 읽고 이해하여 그들의 깊은 필요들을 살펴 실제적으로 섬기는 교회 본연의 사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대신 이웃들을 복음 전도의 대상으로만 파악한 채 그들을 교회 혹은 선교 단체라는 조직 안으로 포섭해 들이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불사하는 맹목적인 사역이 판을 쳤지요. 현실이 참담해도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나라 교회들과 저를 포함한 성도들 모두가 진정한 지상명령을 공동체적, 개인적 삶의 지향점으로 재조정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지정의를 포함한 우리의 인격 전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고 갈망하는 일과 당신께서 인도하시는 이웃을 섬기는 길에 교회 공동체와 개인의 삶의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지 모르겠습니다. 복음 전도는 대위임령에 명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마가복음 16:15[“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다른 성경 본문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느냐고. 인문학적인 질문이니 인문학적으로 응답해야겠지요. 첫째,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마가복음상의 대위임령은 사본상의 증거로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도 이미 이 사실을 명기해 두고 있지요. 마가복음 16:9-20 말씀은 초기 사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난외주 참조]. 그러므로 적어도 대위임령을 이야기할 때는 마가복음 본문은 제외해 두고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것들을 참고하는 것이 올바른 독법이 될 것입니다. 둘째,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및 사도행전의 대위임령 본문에는 복음 전파가 선교의 핵심 요소이자 제자 훈육의 전제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복음 전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신 주님(마태복음 28:18)과 선교 과정을 총지휘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누가복음 24:49. 사도행전 1:8) 진행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대위임령 본문도 선교 사역이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성령의 인도와 통치하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20:20, 22). 그리하여 그 선교 사역의 길을 자신의 온 생애를 드려 걸어 간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통해 복음 전도 방식에 관한 한 가지 선명한 지침을 우리에게 현시해줍니다. 성령께서 전도의 은사를 허락해 주신 일꾼들은 준비된 영혼들에게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해야 하지만, 일반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의 장 속에서 복음을 빛내는 삶을 영위하는 중에 반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 힘쓰라는 준칙입니다(본 블로그의 “복음전도의 시기와 방법: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참조).  

 

인문학 오용 사례 네 번째는 번역 성경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사는 집 근처에 있는 상가 2층에 교회가 한 곳 있습니다. 어느 날 그곳 옆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 교회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입구에 인쇄되어 있는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 교회는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유일한 성경으로 믿는 독립(...)교회입니다.” 처음에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특정 성경 번역, 그것도 영어 번역 성경 한 종류를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보존하신 성경으로 믿는다는 것을 기치로 내 건 교회가 있다니. 당장 떠 오른 질문은, “킹제임스 성경만을 믿는 교회이니 예배도 킹제임스 번역본만으로 진행될까?”였습니다. 그 영어 번역본만을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마당에 그것을 다시 번역한 한글 성경을 사용한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적으로 이 문제를 접근해 보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영감으로 인 치신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성경 원본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이 원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원본의 내용을 신빙성 있게 복원할 수 있을 만큼의 사본들이 다양하게 존재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기독교권에서는 믿음직한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의 성경은 회교의 꾸란과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꾸란의 경우엔 그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는 사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남겨 두고 다 제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담긴 이 성경이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각 나라 혹은 민족의 언어로 번역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언어가 히브리어와 헬라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권에서 영미 교회와 영어라는 국제어가 차지하는 위상으로 인해 그동안 숱한 영어 번역본이 출간되었습니다. 그것들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영국 제임스 1세의 지원으로 완성된 흠정역, 즉 킹제임스 번역(King James Version)이었습니다. 그 성경은 출판된 이후로 오랜 세월 동안 영국과 미국뿐 아니라 전 영어권에 대한 문화적이고도 문학적인 기준이 되었고, 그 기준을 통해 문자적으로 통일된 성경적인 메시지가 사방팔방으로 전해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기독교 역사학자인 마크 놀에 의하면, 이 킹제임스 성경은 “그다지 신빙성이 높지 않은 헬라어 사본”(not-so-reliable Greek manuscripts)을 사용한 탓에 그 이전에 번역된 다른 영어 성경보다 번역이 부실한 측면도 있었고, 난외주를 함께 제공한 또 다른 성경(The Geneva Bible)을 선호한 그리스인들에게 외면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임스 1세라는 통치자의 정치적 의도와 감독들의 종교적 입김이 강력하게 작동되어 번역과 편집이 진행되었고, 유력한 출판업자들이 자기들의 상업적 이익 확보를 위해 다른 번역본 배급을 통제하면서 그것만을 독점적으로 배포한 흑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 번역의 추종자들이 흑인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데 이 번역을 활용하기도 하고, 보다 다양한 다른 영어 번역본 활용을 강제로 막은 행태는 특히 미국 역사 속의 오점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이해하자면, 그 영어 번역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성령의 영감으로 형성된 원어 성경의 권위를 뛰어넘거나 동등한 위치를 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더구나 완벽한 성경 번역이란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1611년에 번역된 그 성경이 오늘날에도 원래와 동일한 단어와 어구와 표현으로 과연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전달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무려 400여 년 전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활동하던 시기에 번역된 그 성경 이후 지금까지, 성경 원어 연구나 신학적인 측면에서 어떠한 의미 있는 진전이나 새로운 발견이 없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 긴 기간 동안 영어라는 언어가 그 단어와 구절들의 의미나 어법이나 활용 측면에서 고정불변하는 상태로 남아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또 다른 번역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말입니다.

 

벤 위더링턴 삼세 교수에 의하면, 현실은 사뭇 다릅니다. 영어의 경우만 따져볼 때, 신약 전체 혹은 부분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 총 9백 종 이상이 됩니다. 보다 진전된 성경 본문 연구가 진행되는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신빙성 있는 사본[히브리어, 아람어 및 헬라어 사본]에 근거한 번역을 시도해 온 결과입니다. 에라스무스가 편집하여 출간한(1516년) 헬라어 신약 성경을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했을 때(1522년), 에라스무스가 참고할 수 있는 헬라어 사본은 소수에 불과했고(only a handful of Greek manuscripts), 그것들조차도 그렇게 오래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이 번역될 때(1611년)도 거의 동일한 문제에 봉착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5천 개 이상이나 되는 신약 성경 사본이 존재합니다. 그것들 대부분은 지난 150년 동안에 발굴되었고, 그것들 중에는 2, 3세기에 필사된 것들도 좀 있을 정도입니다. 구약 성경 사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해나 다른 지역에서 발굴된 사본들 덕택에 이전 시대보다 구약 원본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히브리어 성경의 표준 본문으로 알려진 마소라 본문”[the Masoretic texts, 서기 5세기 말부터 바벨론과 디베랴에서 일한 마소라<전승자란 뜻>로 알려진 학자들에 의해 마련 된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9세기 경의 것으로 추산됨.]보다 구약 원본에 무려 천 년이나 더 근접한 것들이 현재 학자들 손에 놓이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로 제공된 이런 경이로운 사본들을 눈앞에 두고도, 성경의 원문 내용을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무려 4백 여 년 전에 이루어진 번역을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교회의 안내문의 행간을 읽어 굳이 그 긍정적인 측면을 포착하자면, 번역 성경 중 킹제임스 성경과 같은 ‘직역’ 혹은 ‘축어역’의 효용을 지적한 것입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해석하고 폭넓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원문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본래의 뜻에 충실하게 번역한 ‘직역’ 성경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가장 소중한 번역이라든가,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유일한 성경이라는 주장은 도가 지나치다고 하겠습니다(영어 성경 종류에 대해서는 본 블로그의 “선교와 영성, 그리고 성경 묵상” 참조).

 

이상에서 논의한 요점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따라 선교를 해가는 이상, 인문학적 접근 방식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경의 목적이 과학적(scientific)이거나 문학적(literary)이거나 철학적(philosophical)인 것은 아니지만(존 스토트), 성경은 문학(literature)이기 때문이지요(리랜드 라이컨). 우리가 인식을 하든 못하든 성경을 읽을 때 이미 우리는 각자의 인문학적 소양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경을 읽을 때 무슨 신학이 필요하냐면서도 사실상 자기의 신학적 소양에 따라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을 오용 대신 선용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요? 더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에게 받아쓰기를 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 능력, 체험과 그들이 처한 현실을 활용하여 그들이 당신의 뜻을 올바르게 표현하도록 성령을 통해 역사하신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기록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도 그들이 취한 문학적 표현이나 논리적인 전개 방식이나 그들이 처한 시대 상황에 유의하면서 진행해 가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 하나님과 성경 저자 사이에 전개된 이런 교호작용을, 존 스토트는 성경의 “이중 저작”(double authorship)이란 표현으로 묘사했습니다. 즉 성경은 우선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사야 1:20)이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이라는 것이지요(사도행전 3:18, 21). 그래서 이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는 “이중적인 접근”(a double approach)이 필요합니다.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on our knees, humbly, reverently, prayerfully, looking to the Holy Spirit for illumination) 그 내용을 읽어야 합니다. 동시에 성경이 인간의 말이기도 하기에, “다른 모든 책을 읽듯이”(as we read every other book),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고, 생각하면서, 숙고하고 고찰하면서, 그 문학적, 역사적, 문화적, 언어학적 특성에 깊이 주의하면서”(using our minds, thinking, pondering and reflecting, and paying close attention to its literary, historical, cultural and linguistic characteristics) 그 내용을 읽어 가야 합니다. 즉 인문학적인 소양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존 스토트는 “이러한 겸허한 공경과 비판적인 고찰은 불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필수 불가결하다.”(The combination of humble reverence and critical reflection is not only not impossible; it is indispensable.)고 역설하기까지 합니다. 선교에 있어 인문학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선용하는 길을 모색하고 개발해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