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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직 수행 위해 목숨 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2. 16.

천직 수행 위해 목숨 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계속되는 코비드 팬데믹 가운데 많은 확진자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2021년 2월 16일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가 109,688,038명이고 사망자는 2,418,255명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확진자 84,325명과 사망자 1,534명이 기록되었습니다. 이분들의 죽음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분들을 돌보고 섬기는 중에 사망한 의료인들도 적지 않다는 점은 더욱 슬픈 소식입니다. 지난해 9월에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최소한 7천 명의 의료종사자들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했습니다. 멕시코에서 1,320명이나 죽은 것을 비롯하여, 미국 1,077명, 영국 649명, 브라질 634명 순으로 의료인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격리 해제된 84,331,092명 가운데, 자신의 천직인 의료업 수행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의사와 간호사들 덕분에 다시 생명을 얻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자신의 천직을 수행하는 분들 소식을 접하며 떠오른 작품이 한 편 있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입니다. 1951년에 집필을 시작한 지 8주 만에 탈고한 후 무려 2백 번씩이나 재독하며 글을 가다듬은 것으로 알려진 그의 대표작입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탈고했지만 이 작품이 그의 마음속에서 무르익은 기간은 적어도 15년이나 걸렸습니다. “에스콰이어”(Esquire)라는 잡지의 1936년 4월 호에 그가 카를로스라는 쿠바인 낚시 동호인에게서 들은 한 노인의 얘기를 소개했는데, 그 노인이 바로 이 작품 속의 어부 산티아고와 유사한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할 수는 없다.”라는 모토로 평생 어부의 길을 걸어 간 산티아고는, 천직을 수행하면서 살신성인의 원리를 몸으로 실천하던 중에 이생을 마감한 숭고한 의료인들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스웨덴 한림원은 1954년에 “노인과 바다”가 “폭력과 죽음으로 가득한 현실세계에서 의로운 투쟁을 전개한 모든 사람에게 의당한 존경심”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노벨상을 수여한다고 밝혔습니다. (번역은 “열린책들”<이종인 역>과 “미르북컴퍼니”<베스트트랜스 역>의 것들을 참조했음.)

 

-“노인과 바다” 줄거리-

나이 많고 경험 많은 어부 산티아고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84일이나 보냈기에 ‘살라오’(salao), 즉 가장 운이 없는 사람(the worst form of unlucky)으로 여겨진다. 처음 40일까지는 마놀린이라는 소년 견습생이 그와 함께 있었지만, 그가 너무 불행해 보인 나머지 그의 부모조차도 그가 노인과 함께 고기 잡으러 가는 것을 금하고 그 대신 더 성공적인 어부와 함께 가도록 지시한다. 그 소년은 매일 밤마다 산티아고의 판잣집을 찾아가 그의 어구를 잡아당겨주고 음식을 준비해 주며 미국 야구와 그가 좋아하는 선수인 조 디마지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산티아고는 마놀린에게 85는 행운의 숫자라며 그 이튿날 먼바다로 나가 5백 킬로그램 이상 되는 고기를 잡으면 어떨 것 같으냐고 묻는다.

 

드디어 그의 불행이 이어지던 85일째 되는 날, 산티아고는 자기 조각배를 멕시코만 속으로 깊이 몰고 가서 낚싯줄을 팽팽히 당겨 설치해 둔다. 정오가 되자 자기 미끼를 청새치로 보이는 큰 물고기가 문 것을 발견한다. 그가 그 거대한 청새치를 끌어당길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대신 그의 조각배가 청새치에 끌려 다니는 상태가 전개되어 그는 이틀 낮과 밤 동안 낚싯줄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비록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상처가 나기도 하고 극한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되지만, 그는 자기 대적 물고기에 대해 동정심을 표하면서 시시때때로 그 물고기를 형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그 청새치의 위대한 품위를 접하고는 아무도 그 청새치를 먹을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

 

삼 일째 되는 날, 즉 “노인이 바다로 나온 후 세 번째로 해가 바다에서부터 솟아오르고 있던” 때, 그 고기는 그 조각배 주위를 돌기 시작한다. 산티아고는 정신착란을 느낄 정도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자기의 남은 힘을 다 써서 그 고기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물 위로 드러난 거대한 가슴지느러미 바로 뒤쪽 옆구리를 작살로 내리 찌른다. 그 “물고기는 마치 배에 타고 있는 노인의 머리 위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보이더니, 잠시 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떨어졌다.” 너무도 거대한 청새치라서 그 조각배에 실을 수가 없어, 산티아고는 그 물고기를 자기 조각배의 뱃머리와 뱃고물과 배 허리께에 단단히 비끄러맨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고기가 시장에서 얼마나 가격이 나갈지, 그 고기로 몇 명을 먹일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그 돌아오는 길에 그 청새치의 피에 끌려 상어들이 몰려든다. 산티아고는 자기 작살로 맨 먼저 찾아온 거대한 마코 상어를 죽이지만 그 작살을 잃어버린다. 그는 노 하나의 끝에다 자기 칼을 묶어 새 작살을 만들어, 다음으로 공격해 대는 상어들을 쫓는 데 활용한다. 삽살코상어 2마리, 신락상어 1마리, 갈라노상어 2마리를 죽이고 다른 여러 마리들을 쫓아버린다. 그러나 상어들은 계속 다가왔고 자정께쯤에는 상어 떼가 몰려온다. 이번에는 싸워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몽둥이로 상어들을 후려치다가 몽둥이마저 빼앗기고 만다. 이번에는 키에서 손잡이를 떼어 내어 그것으로 상어들을 정신없이 두들긴다. 결국엔 그 손잡이마저 부서지고 만다. 몰려든 상어 떼의 마지막 놈을 해치우자 그놈들이 뜯어먹을 물고기도 더 이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그 상어들이 그 청새치의 모든 사체를 거의 다 먹어 버리고 뼈대만 남아 그저 고기 등뼈만 앙상하게 붙어 있는 모습만 띠게 된다. 그 이튿날 새벽이 되기 전에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산티아고는 그 고기 대가리와 뼈를 해변에 그대로 놓아둔 채 무거운 닻을 자기 어깨에 메고 자기 판잣집으로 향했지만, 너무 피로한 나머지 5번씩이나 앉아서 쉬면서 근근이 발을 옮겨 나아간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침대에 털썩 몸을 던지고는 깊은 잠에 빠져 든다.

 

그 이튿날 일단의 어부들이 그 고기의 뼈대가 여전히 붙어있는 조각배 근처로 모여들어 그 고기의 잔해를 구경하며 감탄한다. 그 어부 중 한 사람이 그 고기의 코부터 꼬리까지 길이를 재어 보니 18피트(550센티미터)나 된다고 소리친다. 근처에 있는 카페에 있던 관광객들은 그 고기를 상어라고 착각한다. 마놀린은 그 노인에 대해 염려하면서 그가 안전하게 잠든 모습과 부상당한 손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신문과 커피를 가져다준다. 노인이 깨어나자 그들은 함께 다시 고기 잡으러 나갈 것을 약속한다. 산티아고가 다시 잠이 들자, 그동안 자주 자기에게 임한 꿈을 꾸는데 그것은 아프리카 해변에서 노닐던 사자들에 대한 꿈이었다.

 

-청새치/상어들과 투쟁하는 노인-

산티아고는 백전노장인 어부로서 홀로 이틀 낮과 밤 동안 청새치를 잡기 위해 투쟁했을 뿐 아니라 만 하루 동안 온갖 상어들과 잡은 청새치를 지키기 위해 혈투를 벌입니다. 먼저 그는 마른 몸매에 주름살이 깊이 패어 있는 목덜미, 갈색 반점이 곳곳에 나 있는 두 볼, 오래되고 깊은 흉터가 군데군데 나 있는 두 손을 갖춘 노인입니다. 머리는 매우 늙어 보였고, 얼굴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지만, “그의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색을 띠고 있었고 쾌활함과 불패의 의지를 담고 있었습니다.”(except his eyes and they were the same color as the sea and were cheerful and undefeated.) 맨발로 다니는 것이나 수차례나 깁은 셔츠나 얼룩덜룩한 기워 붙인 천 조각이 눈에 띄는 옷차림새만 보면 영락없이 가난한 어부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희망과 자신감은 사라진 적이 없었습니다.”(His hope and confidence had never gone.)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마놀린이 “그럼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잡을 만한 충분한 힘이 아직 있으신가요?”(But are you strong enough now for a truly big fish?)라고 묻자, “그럴 게다. 게다가 많은 요령도 있으니까.”(I think so. And there are many tricks.)라고 답했으니까요. 아마도 주위에 사는 어부들이 노인을 놀렸지만 화내지 않은 것도 이런 희망과 자신감의 발현일 것입니다. 무려 84일이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탓에 나이 많은 다른 어부들이 노인을 보고 서글퍼할 정도였지만, 그는 내색하기 않고 해류나 날씨나 다른 경험들을 나누며 점잖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 청새치와 대치하면서 자신이 고백한 대로 그에게는 “의지와 지혜밖에 없었습니다.”

 

자신감과 의지와 지혜로 산티아고가 실행하고자 희망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소망은 다음 한 문장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생명을 죽이는 게 옳은 일은 아니지만,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인간이 얼마나 역경에 잘 이겨 낼 수 있는지를 저놈[청새치]에게 보여 주고 말겠어.”(But I will show him what a man can do and what a man endures.) 그동안 그는 마놀린에게 자기가 "이상한 노인"(a strange old man)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청새치와 투쟁하는 상황이야말로 자기의 소망을 증명할 수 있는 적기로 본 것입니다. 사실상 이전에도 그는 천 번이나 그것을 증명했으나 그에게는 그때가 다시 그것을 증명할 기회로 보였습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상어들과 투쟁할 때에도 노인은 “싸우는 거야. 죽을 때까지 싸울 거야.”(Fight them. I'll fight them until I die.)라며 전의를 불태웁니다. 만약 한밤중에 상어가 덤벼들어도 죽기까지 싸우겠다는 것이지요. 이 작품의 유명한 한 문장도 마코상어와의 투쟁 후에 내뱉은 말입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할 수는 없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패배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게 아니기(man is not made for defeat.)에 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패하는 존재로 태어난 게 아니기에 패배할 수 없다는 말이 진실일까요? 얼핏 보면 산티아고는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비록 얼굴과 손과 어깨와 등에 갖은 상처를 입었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애써 투쟁하여 잡은 청새치를 상어 떼에게 다 빼앗겨 버렸으니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파괴될 각오를 하고 청새치와 상어 때와의 투쟁에 임했고, 그것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먼저 길이 5.5미터나 되는 거대한 청새치를 이틀에 걸친 투쟁 끝에 잡았습니다. 마코상어를 처치한 후에 이어진 5마리의 상어와의 전투에서도 노인은 승리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떼로 몰려온 상어들과의 투쟁에서도 마지막 상어까지 마지막 남은 도구인 키 손잡이로 끝장내버렸습니다. 그때쯤에는 “놈들이 뜯어먹을 물고기는 더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That was the last shark of the pack that came. There was nothing more for them to eat.) 그다음에 덤벼든 상어 때는 “식탁에 남은 찌꺼기를 주우려는 사람”과 같아서(as someone might pick up crumbs from the table) 노인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이 파괴되어 죽은 것은 아니었지만, 산티아고는 “자신이 이제 결정타를 입어 구제될 길도 없다”라고 생각하는(He knew he was beaten now finally and without remedy)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84일의 불운을 마감하는 홈런 행운을 만끽할 절호의 기회를 붙잡았지만, 그것은 한바탕 불어 닥친 바람에 죄다 흩어져 버리는 구름처럼 한 떼의 상어들에 의해 결단이 났습니다. 아무도 그 실상을 믿지 않을, 일장춘몽으로만 남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패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물고기를 끝까지 인내함으로 포획하여 조각배에 매달아 오는 행운을 누렸을 뿐 아니라, 그 고기를 넘보는 상어 떼와 사투를 벌여 승리한 경우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의 찬란한 승리는 증거가 온전히 보존된 승리였습니다. 그가 낚은 그 행운의 어마어마한 규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고기 대가리와 등뼈로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인간이 얼마나 역경에 잘 이겨 낼 수 있는지를’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할 수는 없다.’라는 원리를 온 세상에 널리 선양하는 명예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산티아고를 이러한 영광의 자리로 이끈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노인은 어부로 사는 것을 자신의 천직으로 여겼습니다. 자기가 어부가 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때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물고기가 물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나는 어부가 되려고 태어난 거야.”(You were born to be a fisherman as the fish was born to be a fish.)라는 확신을 다시 붙잡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그의 소명 의식이었던 셈입니다. “그가 물고기를 죽인 것은 다만 살기 위해서라든가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긍지를 위해서, 또 어부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죽인 것입니다.”(You did not kill the fish only to keep alive and to sell for food, he thought. You killed him for pride and because you are a fisherman.)

 

이전에 노인이 카사블랑카에 있는 술집에서 한 흑인과 팔씨름한 적이 있었는데 그 흑인은 부두에서 가장 힘이 세기로 유명한 이었습니다. 그의 손을 움켜잡고 시작한 그 팔씨름은 무려 만 하루 만에 끝이 났지요. 일요일 아침에 시작해서 월요일 아침에야 끝이 났던 것입니다. 돈을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두에 나가서 설탕 부대를 지거나 아바나 석탄 회사에 나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무승부 선언을 청했던 그 찰나에, 그 노인이 마지막 힘을 다해 흑인의 손을 점점 아래로 꺾어 내리더니 마침내 테이블에 닿게 만들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를 ‘챔피언’이라 불렀고 봄에는 복수전도 있었지만, 그는 몇 차례 더 시합을 하고는 다시는 시합하지 않았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이길 수 있었지만 “이런 시합이 고기잡이를 해야 하는 오른손에는 해롭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요.” ‘챔피언’이 되는 명예도 자신의 천직인 고기잡이를 위해서 희생한 것입니다.

 

-행운을 고대하고 준비한 노인-

미신을 많이 신봉하는 아바나 어부들에게 산티아고는 ‘살라오’, 즉 운이 없는 사람으로 불립니다. 84일이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인도 그 말을 믿고 있었던지, 그 이튿날부터 다가올 행운을 고대하면서 “85는 행운의 숫자야.”라고 마놀린에게 언급하기도 하지요. 85가 행운의 숫자라면서 끝자리가 85로 된 복권을 한 장 사 두자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행운을 파는 곳이 있다면 좀 샀으면 좋겠군.”(I'd like to buy some if there's any place they sell it.)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바다에서 지낸 84일이란 값을 치르고 행운을 사려고 했어. 행운이 거의 손에 잡힐 뻔했단 말이야.”(You tried to buy it with eighty-four days at sea. They nearly sold it to you too.)라고 독백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바다 깊숙이 너무 멀리 나왔을 때 이미 행운을 깨뜨린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행운에 대한 그의 상념의 결론은 “행운이란 여러 형태로 찾아오는 것인데 누가 그것을 미리 인식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나는 행운이 어떤 형태로 오든지 그것을 좀 취하고자 하므로 행운이 요구하는 값을 치르겠다.”(Luck is a thing that comes in many forms and who can recognize her? I would take some though in any form and pay what they asked.)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운이 찾아올 때 준비된 상태가 되어 있도록”(when luck comes you are ready.) 애를 씁니다. 먼저는 기운을 내기 위해 거북의 하얀 알을 먹으며 힘을 길렀고, 상어간유를 마시면서 건강관리를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실제 고기잡이하는 현장에서 낚싯줄을 정확히 팽팽하게 드리움으로써 행운 맞을 준비를 합니다. 고기를 잡을 때 낚싯줄이 해류에 떠다니도록 방치하는 다른 어부들과는 달리 그는 낚싯줄을 팽팽히 드리워 자기가 의도하는 물속 정확한 지점에 미끼를 내려 물고기가 그곳을 지나가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85일째 되는 날에 청새치라는 행운을 낚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산티아고의 경우, 행운에 대한 그의 생각 자체는 미신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행운이 다가올 때 포착하기 위해 그가 취한 실제적인 준비는 지혜로운 처사였습니다.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해서 불운한 사람이라는 게 말이 될까요? 그 이전에 “87일 동안 한 마리도 못 잡다가 3주 내내 매일같이 큰 놈을 잡았다.”라고 마놀린이 이전 기억을 되살려 말하듯이, 그런 불규칙성이 고기잡이의 한 측면일 것입니다. 행운을 파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거나 너무 먼바다로 진출했기에 행운이 깨뜨려진 것이라는 상념은 어떨까요? 바다에서 조업하는 특성이 내포하고 있는 한계성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어부들의 좌절감을 지적한 표현일 것입니다. 회사에서 생산해내야 할 업무가 확정되어 있는 회사원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자영업자나 프리랜서나 예술가들도 동일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즉 산티아고가 겪은 업무 상황의 불규칙성이나 업무의 한계성이나 업무에 대한 좌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식당이나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의 숫자가 들쑥날쑥한 상황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고, 잘 써지던 시나 소설에 대한 영감의 샘이 일시적으로 마르는 경험을 한 예술가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게다가 코비드 팬데믹이 예고 없이 닥치듯이 극심한 주위 환경의 변화를 야기하는 사건들이 언제 다가올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산티아고는 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몸과 건강을 잘 챙기면서, 매번 고기잡이를 할 때마다 가장 효과적인 방도를 모색하여 실행했습니다. 그러던 중 청새치를 낚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85일 혹은 88일째 되는 날의 역사만큼이나 84일, 87일을 어떻게 보냈느냐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날들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면 그 거대한 청새치를 낚는 일은 꿈에 불과했을 테니까요. 그 청새치는 그의 생애에 있어 최고로 큰 고기였습니다. 이전에도 오백 킬로그램 이상 나가는 큰 물고기를 두 마리나 잡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혼자서 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는 홀로, 육지도 보이지 않는 먼바다에서, 평생 처음 접하는 거대한 물고기와 싸워야 했지요. 그는 그 고기를 낚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물고기야. 나는 죽을 때까지 너하고 같이 있으마.”라고 혼잣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결국엔 눈 아래가 찢겨 피가 흐르고, 낚싯줄에 베여 손의 살이 터지고, 무거운 줄을 잡은 손은 오그라들어 쥐가 나며, 등에 큰 상처를 입으면서 그놈을 포획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어쩌면 여기가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상어가 오면 이제 너[청새치]나 나나 볼 장 다 본 거다.”라고 염려하는 심정으로 넋두리한 대로 결국엔 그 고기를 탐내어 덤벼드는 상어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나 그놈들을 물리치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써야 했으니까요. 그리하고도 남은 것은 그 고기 대가리와 앙상한 등뼈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것들 덕에 백전노장 어부라는 그의 명예가 고스란히 보존됩니다. 그것들마저 없었다면 그가 그토록 거대한 청새치를 잡은 것은 오직 하늘과 바다만 아는 비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마지막까지 보존된 것도 노인의 용의주도한 준비의 결과였습니다. 청새치를 포획한 후에 산티아고는 그 고기를 뱃머리와 뱃고물과 배 허리께에 단단히 비끄러맸을 뿐 아니라 밧줄을 한 가닥 끊어 물고기의 주둥이가 벌어지지 않도록, 아래턱을 주둥이에 감아 묶어 두었습니다. 그 덕에 그렇게 많은 상어들이 달려들어 그토록 무자비하게 잡아 뜯어먹은 후에도, 청새치의 커다란 몸통이 배의 뱃고물 뒤에 높이 솟아 있고 그것의 꼬리가 빳빳이 서 있었으며 뾰족하게 튀어나온 주둥이가 달린 검은 머리통과 희끄무레한 등뼈 선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 사이는 앙상하게 텅 비어 있었지만.

 

-자연 세계를 대하는 노인의 영성-

산티아고는 평생토록 자기와 함께 한 바다와 새들과 고기들에 대해 남다른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바다를 늘 ‘라 마르’(La mar)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표현은 사람들이 바다를 정겹게 부를 때 쓰는 스페인어였습니다. 어업으로 돈을 많이 번 젊은 어부들이 바다를 ‘엘 마르’(el mar)라며 남성으로 취급하는 것과는 대조되는 표현이었지요. 그들은 바다를 경쟁 대상 혹은 일터로 심지어는 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노인은 항상 바다를 큰 호의를 베풀어 주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 여성으로 여겼습니다. 바다가 성나게 날뛰는 경우를 보더라도, 마치 달이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바다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산티아고는 연약한 새들에 대해서도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바다가 잔인해지기도 하고 휘몰아치기도 하는 가운데 구슬픈 목소리로 울면서 물속 먹이를 찾아다니는 연약한 새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것이지요. 심지어 그는 날치도, 만새기도, 청새치도 자기와 서로 형제간이라고 고백합니다. 특히 포획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청새치에 대해서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 거대한 청새치를 죽이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마치 해나 달이나 별을 죽이는 것과 같다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 고기가 조각배 주위를 빙빙 돌면서 자기 공격을 교묘하게 피해 갔기 때문에 노인의 정신이 아찔해지고 현기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고기가 자기를 죽인다고 생각하면서, 어서 와서 자기를 죽이라고 합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형제인 그 고기가 자기를 죽일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 고기보다 “더 거대하고 더 아름답고 더 침착하고 더 위엄이 있는 물고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Never have I seen a greater, or more beautiful, or a calmer or more noble thing than you, brother.) 나중에 그 고기를 포획한 다음에도 그 고기의 행동거지나 품위 있는 태도(the manner of his behaviour and his great dignity)를 고려해 보면 이 세상에 그 고기를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그 고기를 죽여야만 했던 것에 대해 강한 가책을 느낀 나머지, 급기야 성모 마리아에게 그 경이로운 물고기의 죽음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간구를 드립니다. (Blessed Virgin, pray for the death of this fish. Wonderful though he is.)

 

형제 청새치를 죽인 것에 대한 산티아고의 상념은 물고기를 낚고 죽이는 것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묵상으로 연결됩니다. 그는 물고기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나 여전히 사랑했기 때문에, 물고기를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물고기를 잡아 죽이는 일은 불가피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실제로 모든 존재들은 다른 모든 존재들을 어떤 형태로든 죽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everything kills everything else in some way)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고기잡이가 자기를 살아가도록 해 주는 바로 그만큼 자기를 죽이기도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하지요. (Fishing kills me exactly as it keeps me alive.) 고기를 잡아 죽이는 자기도 그 고기잡이로 인해 죽어 가고 있다는 점을 간파한 것입니다.

 

이렇게 바다를 여인으로, 그 바다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을 형제로 친근하게 바라보는 산티아고가 꿈만 꾸면 바다와 연관된 장면들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84일째 날에 잠들었을 때도 어김없이 어린 시절에 갔던 아프리카 꿈을 꾸었습니다. 황금빛 해변과 새하얀 해변과 높이 솟은 곶과 거대한 갈색 산들이 보였고 그 해안가에서 밤마다 살았습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파도를 헤치고 다가오는 원주민의 배도 보았습니다. 갑판에서 풍겨 오는 타르와 뱃밥 냄새와 아침마다 물 바람에 실려 오는 아프리카의 냄새도 맡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잡기 원한 큰 물고기나 여자 혹은 죽은 아내는 꿈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폭풍우나 큰 사건이나 힘겨루기나 싸움에 관한 꿈도 없었습니다. 다만 별천지 같이 온갖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면들이 총망라되면서 그것들이 시각, 청각, 후각과 연계된 총천연색 꿈이 펼쳐졌던 것이지요.

 

그 꿈속에 등장하는 동물이 딱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사자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낚시 기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행운이 다가올 때를 84일간이나 노리던 산티아고의 꿈속에 나타나야 할 것은 정작 거대한 물고기였겠지만 실상은 사자였습니다. 그 사자는 그가 마놀린만 한 나이였을 때 선원이 되어 가로돛을 단 큰 배를 타고 다니다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본 것이었습니다. 그 아프리카 해변에서 저녁이 되면 사자를 보곤 했던 것이지요. (I have seen lions on the beaches in the evening.) 그런데 노년이 되어 불운이 연일 겹치는 상황에서 “이제는 여러 장소들과 해변에 있는 사자들 꿈만 꾸었습니다. 사자들은 황혼 녘에 새끼 고양이처럼 뛰놀았고, 그는 소년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사자들을 사랑했습니다. 소년 꿈을 꾼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He only dreamed of places now and of the lions on the beach. They played like young cats in the dusk and he loved them as he loved the boy. He never dreamed about the boy.) 자신의 유일한 절친으로 늘 그리워하던 소년도 꿈에 나타난 적이 없는데도 어김없이 사자만 꿈꾸었습니다. 그 소년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새끼 고양이 같이 뛰노는 사자들을 사랑했다고 느낍니다.

 

청새치를 잡은 후에 그 고기에 끌려 다니던 기간에도, 노인은 그 고기가 잠들고 자기도 잠들어 사자 꿈이나 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때 노인은 그 순간에 어째서 갑자기 사자가 중요한 것으로 느껴지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합니다. 나중에 밤이 되어 잠시 잠들었을 때 마을로 돌아와 침대에서 자는 꿈을 꾸던 중에 어김없이 길게 뻗은 황금 해안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초저녁에 사자 한 마리가 바닷가로 내려왔고 연이어 다른 사자들도 내려왔는데, 노인은 배의 이물 쪽 판자에 턱을 괴고 앉아 아주 즐거운 심정으로 더 많은 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뿐 만이 아닙니다. 청새치 포획과 상어 떼와의 사투를 뒤로 하고 자기 판잣집으로 돌아와 잠을 잘 때에도 꿈속에서 사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사자들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the lions.)가 소설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산티아고는 자연 세계, 특히 바다와 해변을 좋아해서, 바다를 여성으로 바다에서 만나는 새들과 고기들을 자기 형제로 여깁니다. 그런데 꿈을 꾸면 아름다운 해변과 그 주변의 산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주로 사자가 나타납니다. 산티아고가 사자들을 처음 본 때는 어린아이였을 때고, 본 곳은 아프리카 해변이었으며, 그 시각은 저녁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서도 저녁 시각에 해변에 사자 무리가 모여 새끼 고양이 같이 뛰노는 꿈을 꿉니다.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도 이 사자 꿈을 꾸었고, 청새치를 잡은 후 고전하고 있을 때도 이 사자 꿈을 꾸었으며, 상어 떼와 사투를 벌인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도 사자 꿈을 꿉니다. 자기에게 사자가 왜 중요하게 느껴지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연거푸 사자 꿈을 꿉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마놀린만큼 사자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꿈속에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놀린도 등장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어부의 어획 목표인 물고기조차도 등장하지 않은 채, 자연 세계, 특히 바다와 해변과 사자들만 등장하는 꿈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저녁’(evening)이나 ‘황혼 녘’(dusk)이라는 단어가 그 단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꿈속에서 사자들은 한결같이 저녁 혹은 황혼 녘에 해변에 무리 지어 나타나 어린 고양이처럼 뛰놀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은 이 세계가 저무는 시점이자, 세상에 사는 모든 동물과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낮 동안의 고되고 분주한 노역의 삶을 접어 둔 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노는 시간입니다. 노인의 꿈 장면을 묘사하는 세세한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곳은 이승의 세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황혼 녘이자 이 세계의 종말의 시간대입니다. 결국 산티아고가 꿈꾼 세상은 죽음 이후의 세상 혹은 내세의 세상인 것입니다. 자신이 귀착할 세계일 뿐 아니라 온 인류가 다다를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황금빛 해변과 어린 고양이처럼 뛰노는 사자들이 대변하는 그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상을, 산티아고는 평생 무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적으로 가장 그리워하고 열망하며 지낸 셈입니다.

 

-소년과 우정 나누는 노인-

노인이 사투를 벌이는 청새치 낚시 이야기와는 대조적으로 제게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마놀린의 동정심 어린 우정이었습니다. 84일간 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 처음 40일간은 마놀린이 산티아고와 함께 있었지만 산티아고의 운이 다했다고 여긴 부모가 마놀린을 다른 배로 옮겼지요. 그리하여 그 배로 나간 첫 주에 마놀린은 큰 고기를 3마리나 잡았습니다. 그렇지만 “소년은 날마다 빈 배를 저으며 돌아오는 노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It made the boy sad to see the old man come in each day with his skiff empty.) 그래서 늘 물가로 내려가서 노인을 도왔습니다. 그와 산티아고 간의 신뢰는 여전했던 것입니다.

 

산티아고는 마놀린과의 관계를 “같은 어부끼리”(between fishermen)로 여깁니다. 노인이 그를 다섯 살 때부터 견습생으로 받아들였지만, 다른 어부와는 달리 노인은 그 나이 때부터 “물건을 나르게 했습니다.” 그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린 나이 때부터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는 것을 훈련시킨 셈이지요. 소년은 그 어린 때 산티아고와 함께 고기를 잡던 장면을 세세하게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처음 함께 나갔을 때부터 모든 걸 다 기억하는데요.”(I remember everything from when we first went together.) 그 말을 들은 노인은 햇볕에 탄 눈에 애정과 신뢰를 담아 소년을 바라보면서 한 마디 하지요. “네가 내 자식이라면 너를 데리고 나가 모험을 해 볼 텐데.”(If you were my boy I'd take you out and gamble.) 다섯 살부터 그와 함께 배를 타기 시작한 소년은 이제 벌써 어른이 다 됐다고 산티아고가 지적할 정도로 성숙해졌습니다. 85일째 날 새벽에도 노인이 소년을 깨우면서 “미안하구나.”라고 말하자, 소년은 “남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죠.”(It is what a man must do.)라고 대답하면서 일어나 그를 돕기 시작합니다.

 

그 두 사람의 대화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노는 단계까지 가기도 합니다. 투망을 벌써 팔아 치웠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지만 마놀린이 투망을 가져가도 되는지 산티아고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노란 쌀밥과 생선이 없었지만 산티아고가 마놀린에게 좀 먹겠느냐고 제의하는 대화를 재미 삼아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85가 행운의 숫자라면서 끝자리가 85로 된 복권을 한 장 사 두자고 산티아고가 말하자 다른 대기록을 세운 숫자인 87은 어떠하냐며 되묻는 마놀린과의 대화가 정겹기만 합니다.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지만 노인에 대한 소년의 신뢰와 존경심은 지극합니다. 소년은 노인을 자기 “자명종”(my alarm clock)이라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솜씨 좋은 어부도 많고 대단한 어부들도 있긴 좀 있어요. 그래도 최고는 할아버지뿐이죠.”(There are many good fishermen and some great ones. But there is only you.)라고 그를 격려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노인이 응대하지요. “고맙다, 너는 참으로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Thank you. You make me happy.)

 

마놀린이 산티아고의 필요를 섬기는 모습은 놀랍습니다. 산티아고가 부탁하지 않아도 자기가 카페에서 맥주를 사 주겠다고 하고, 산티아고가 그 이튿날 낚시하는 데 필요한 정어리를 미리 좀 가져다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산티아고가 사양해도 기꺼이 도우려고 애씁니다. “그래도 가져다 드리고 싶어요. 같이 물고기를 못 잡으니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은 거예요.” 노인이 낮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저녁을 준비해 와서는 노인을 깨운 후 저녁을 먹이는 소년의 정성이 감동적입니다. “저녁을 드셔야죠. 어서 드세요. 드시지 않으면 물고기를 잡지 못해요. (...) 제가 살아 있는 한 할아버지가 빈속으로 물고기를 잡게 되실 일은 없을 거예요.” 소년의 머릿속에는 온통 할아버지를 섬길 생각뿐입니다. “할아버지께 물을 가져다 드려야겠어. 소년은 생각했다. 비누와 좋은 수건도 말이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겨울에 입으실 셔츠와 재킷도 한 벌씩 있어야겠고. 신발과 담요도 하나 구해 드려야겠어.”

 

산티아고가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마놀린은 아침마다 늘 노인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그의 조각배를 한번 둘러본 후에 그의 판잣집을 찾아왔습니다. 곤하게 잠든 산티아고 곁으로 다가가 그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 마놀린은 “노인의 두 손을 보고 울기 시작했습니다.”(he saw the old man's hands and he started to cry.) 산티아고를 위해 커피를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밖으로 나와, “길을 따라 내려가면서도 소년은 내내 엉엉 울었습니다.”(all the way down the road he was crying.) 노인의 조각배 근처에 갔을 때도 그곳에 있던 어부들이 “자기가 울고 있는 것”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He did not care that they saw him crying.) 그러면서 “절대로 할아버지를 깨우지 마세요.”라고 부탁합니다. 카페로 내려가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주인과 대화하면서도 “소년은 말하다 말고 또다시 울기 시작했습니다.” (the boy said and he started to cry.) 그러면서 자기가 곧 돌아올 거라면서 사람들에게 산티아고 할아버지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전해 달라고 가게 주인에게 부탁합니다. 뜨거운 커피가 든 깡통을 들고 노인의 판잣집으로 와서 노인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보자 밖으로 나가 나무를 가져와서 식어 버린 커피를 따뜻하게 데워서 노인이 깨어났을 때 제공합니다. 노인과 대화를 하고 난 후 “소년은 문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닳아빠진 산호초 길을 내려가면서 또다시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As the boy went out the door and down the worn coral road he was crying again.) 자기를 위해서 이렇게 울어 줄 수 있는 친구를 가진 산티아고가 부럽습니다.

 

소년이 이제는 자기와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제안하자 산티아고가 자기는 더 이상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응대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는 소년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 소리 말라며 이제부터는 자기가 운을 가지고 가겠다고 제안합니다.(The hell with luck. I'll bring the luck with me.) 가족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면서 아직 산티아고에게 더 배울 것이 많으니 자기와 함께 같이 고기 잡으러 나가자고 제안한 것이지요. 산티아고의 칼이 이미 부러졌다고 하자 자기가 다른 칼을 하나 더 구해 오고 자기 고물 차의 스프링도 갈아 오겠다고 제안합니다. 그가 부탁하지도 않은 깨끗한 셔츠와 음식과 신문을 가지고 오고, 약방에 가서 그의 손에 바를 약도 사 가지고 오겠다고 합니다.

 

이런 절친을 두고 홀로 고기잡이에 나선 산티아고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 아이가 여기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I wish the boy was here.)라는 말을 노인이 몇 번이나 연거푸 외쳤는지 모릅니다. 바다 위에서 자기를 위로해 주는 새들과 물오리들과 자연현상들이 있었지만, 노인은 거듭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깨닫게 됩니다. 상어 떼와의 투쟁을 마감하고 자기 판잣집이 있는 아바나 해안이 눈에 들어오자, 또다시 소년을 떠올립니다. “이제는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을 거야, 노인은 생각했다. 아무도 너무 걱정들을 안 했으면 좋겠어. 그 아이만은 나를 걱정하고 있겠지. 그러나 아이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어.”(I cannot be too far out now, he thought. I hope no one has been too worried. There is only the boy to worry, of course. But I am sure he would have confidence.) 이렇게 격심한 그리움을 느끼고 있던 중에 소년과 만나 대화하면서 노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지요. 그동안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I missed you.) 바로 그 순간에 노인은 새로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지요. 자신과 바다만을 상대로 대화를 하다가 진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how pleasant it was to have someone to talk to instead of speaking only to himself and to the sea.)

 

-산티아고가 그리스도라고?-

이종인 번역가는 산티아고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읽습니다. 우선 산티아고라는 이름이 성 야고보(St. James)를 스페인 식으로 읽은 이름인 데다가,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성인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어부였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와 산티아고는 둘 다 어부이고 도덕적 교사라고 지적합니다. 다음으로 그는 물고기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로 눈을 돌립니다. ‘이크티스’(ichthys)라는 그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의 그리스어 표현 중 두문자를 조합한 말이라는 것이지요. 이와 더불어 산티아고가 바다에서 84일이나 고생한 것은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보낸 40일과 유사하고, 바다에서 청새치와 사흘간 씨름한 것은 그리스도가 사흘 동안 고통을 당한 것과 유사하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에다 산타아고의 등이 낚싯줄로 찢긴 것, 그가 심한 두통을 앓는 것, 그가 해변으로 돌아와 돛대를 메고 오두막으로 돌아가는 것, 그가 판잣집의 침대에 누운 것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연관 지워 설명합니다.

 

사실상 이런 내용들은 토마스 포스터 교수가 언급한 대로, 서구 문학 작품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원용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사례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지배적인 종교에 큰 영향을 받는 문화의 장 속에서 집필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그 종교의 가치와 원칙을 자기 작품 속에 반영하는 것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작중 인물의 희생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면, 그 희생에 대해 우리가 인식하는 수준이 더 심화될 것이고 그 작품은 자연스럽게 “구원이나 희망, 기적”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산티아고가 뭍으로 돌아와 돛대를 지고 자기 오두막으로 가는 장면이나, 그곳 침대에서 양팔을 뻗고 손바닥을 위로 한 채(with his arms out straight and the palms of his hands up) 엎드려 자는 모습은,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연관 지으려는 작가의 의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번역가의 지적에는 오류가 몇 가지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부가 아니라 목수이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도덕적 교사라는 말은 산티아고가 도덕적 교사라는 말만큼이나 모호한 발언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사흘 동안 고통당하신 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바로 사망하셨습니다. 한밤중에 시작된 재판과 이어진 주먹질, 손바닥 치기, 채찍질을 당하신 후 이튿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에 덧붙여 산티아고가 이전에는 고기잡이를 시도해 보지 않은 먼바다로 나가 분투한 것을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시험 당한 상황과 연결 짓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고기를 잡지 못한 기간인 84일과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지내신 40일을 숫자상으로 연관 짓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더구나 물고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이크티스’, ichthys)로써 이 작품과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연결 지으려 한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지점입니다. 산티아고는 물고기를 잡으러 심해로 나가 청새치라는 거대한 물고기를 포획한 후 상어 떼를 만나 사투를 벌이다 귀가한 어부였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오신”(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 ransom for many.<마가복음 10:45>)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구세주(Saviour)'이셨습니다. ‘이크티스’(ichthys)라는 그리스어가 이러한 면모들을 상징했던 때가 초기 기독교 역사 속에 있었지만, 이 작품의 텍스트 속에서는 물고기가 그런 의미를 띤다고 명시하거나 시사하는 부분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산티아고가 지닌 도덕적 교사의 면모와 상응된다는 그리스도의 도덕적 교사라는 측면도 이 근본적인 신원(身元)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 속에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겪으신 고통을 연상시키는 산티아고의 신음 소리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 그가 크게 소리쳤다. 이 말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가 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못이 손을 뚫고 나무판자에 들어가 박힐 때 사람이 무심결에 낼 법한 그런 소리였을 게다.” (“Ay,” he said aloud. There is no translation for this word and perhaps it is just a noise such as a man might make, involuntarily, feeling the nail go through his hands and into the wood.) 여기에서 언급된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지요. 십자가에서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인류를 위해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신(having become a curse for us-갈라디아서 3:13)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작품 속에는 예수(Jesus)라는 이름이 노인의 판잣집 벽에 걸려 있는 ‘예수 성심 채색화’(a picture in color of the Sacred Heart of Jesus)라는 표현에서와 성모송 읊을 때 딱 한 번 등장합니다. 그나마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시사하는 유일한 장면인 이곳에서도, 그리스도의 단말마적 비명은 그저 어부 산티아고가 삽살코상어 2마리가 다가올 때 느낀 좌절감과 비견되고 있을 뿐입니다. “노인과 바다”에는 ‘이크티스’(ichthys)가 상징하는 그리스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어부 산티아고가 자신의 소명과 천직을 위해 신명을 다하는 영광스러운 면모가 부각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그리스도다운 면모'(Christ figure or Christ-image)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