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주의자 오디세우스는 없다” 외 1권 출간
오늘 일자로 '부크크' 플랫폼을 통해 두 권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인본주의자 오디세우스는 없다"와 "온전한 나를 찾아 가는 순례자"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입니다. 지난 해부터 지속해 온 서양 고전소설 및 희곡 독해 과정의 중간 결산입니다. 각각 한 두 편의 서론 격의 에세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8편씩의 소설(한 편 희곡 포함)을 정독하고 논평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들은 모두 이곳 블로그를 통해 선보인 것들입니다. 다만 동일 주제별로 각각 9편과 10편씩을 정리해서 편집했습니다. 아래에 두 권의 책 서문에 해당하는 '들어가는 말'을 소개해 두었습니다. 그동안 이 블로그를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본주의자 오디세우스는 없다"
-서양 고전문학이 열어 밝히는 르네상스의 시대정신-
들어가는 말
중세가 기독교 시대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시대는 ‘암흑기’(The Dark Ages)였으나, 인본주의가 꽃핀 르네상스 시기는 ‘광명기’(The Light Ages)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무근이다. 비록 르네상스 시기가 초점이 다소 분화된 시기이긴 했지만, 두 시기는 여전히 연속된 기독교 시대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초점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재성찰한 것에 근거하여 인간의 크낙한 가능성을 모색하고 인간의 복지를 제고하는 초점이 확연히 존재했다. 이 두 초점은 상호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하는 것이다. 그러한 두 초점을 유지한 르네상스는 지금도 계속 되어야 한다. 돌이켜 보자면 그것이 인류 역사의 본류였기 때문이다. 신이 죽었다고 여기며 인간의 이성을 신격화한 계몽주의 시대는 역사의 서자에 불과하다. 중세를 암흑기로, 르네상스를 광명기로 덧칠한 것도 그들의 작품이다. 그 서자가 낳은 열매를 보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었다.
"인본주의자 오디세우스는 없다"는 이 두 초점을 서양 고전 소설 독해에 적용한 실례들을 담고 있다. 하향식 접근 방식(top-down approach)으로 이 두 초점을 각 작품에 강제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리어 상향식 접근 방식(bottom-up approach)으로 본문을 정독하고 그 행간을 읽는 치열한 작업이 기본이었다. 그 바탕 위에서 본문이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으로 드러낸 내용을 해석하는 데는 이 두 초점이 주효했다. 이러한 상향식과 하향식 접근 방식의 상호작용은 우리 각자가 세계관을 형성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세계관은 먼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관찰하고 탐구한 것들에 근거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통해 형성된다. 상향식으로 형성되는 세계관인 셈이다. 한편 그렇게 형성된 세계관은 우리가 세상의 다른 것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안경이 되기도 한다. 하향식 방식의 세계관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의 세계관이 교호 작용하여 세상의 온갖 것들을 관찰하고 해석해 가는 것이다.
이 책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 블로그에 연재한 글들을 편집한 것이다. 먼저 중세기와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역사적 실상과 오해들을 살펴본 후에 8편의 서양 고전소설 및 희곡을 독해해 간다. 대개는 먼저 각 작품과 연관된 시대적인 문제점이나 사회적인 쟁점을 한 가지씩 소개한다. 소설이나 희곡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각 작품의 줄거리를 조금 상세하게 살핀다. 그 작품을 읽어 보지 않은 독자라도 그 내용 중 중요한 모티프들과 전개 과정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본격적으로 작중에 확연하게 드러난 모티프들을 각각 본문 중심으로 살펴본 후에, 그것들을 성서적인 시각으로 조명해 본다. 하늘과 땅이 만나도록 돕는 지점이다. 소개된 책 순서는 “오디세이아”부터 “반지의 제왕”까지 각 작품이 출간된 해 순이다. 모쪼록 트인 마음과 밝은 눈을 가진 독자들이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을 회복하여 오디세우스와 같이 경천애인하는 복을 누리길 빈다.
"온전한 나를 찾아 가는 순례자"
-서양 고전소설과 성서가 열어 밝히는 나와 인생의 의미-
들어가는 말
신형철 평론가가 얀 마텔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논평하면서, 문학과 종교와의 관계를 짚은 대목이 있다. 자기는 “인간의 삶에는 정답 없이 반복되는 근본 물음이라는 것이 있고 문학이란 그 물음을 잘 묻는 작업이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종교와의 성숙한 토론이 불가피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여기에서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 물음이란 것은 아마도 지난 세월 동안 인문학이 담지해 온 역할일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업 말이다. 그리고 그 물음을 보다 섬세한 시각과 언어로 다듬어 일관성과 통일성을 갖춘 상상의 세계를 통해 열어 밝히는 것이 문학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소설과 희곡과 시는 이 물음들에 대해 의미 있는 답변들을 시도해 오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문학과 종교와의 대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믿음의 영역이라는 점은 부인하긴 어렵다. 그러나 이 믿음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대체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를 거론할 것도 없이, 후기실증주의(postpositivism) 시대가 도래한 지 무려 반세기가 흘러 갔어도, 여전히 과학주의(scientism) 타령을 하는 지식인들의 굳건한 믿음이 놀랍기만 하다. “자연 과학적 지식이 유일한 참된 지식이며, 과학적 방법만이 올바른 방법이기 때문에 모든 지식이 이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굳세게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믿음에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을 자기들만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밝히는, 문학과 종교 간의 대화는 과학주의를 뛰어 넘어 초자연적인 영역을 전제한다. 이러한 시도는 결코 반이성적이거나 무가치한 시도가 아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연면하게 이어 온 전통이었다. 사이비 과학자들이나 과학주의자들만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이들에게 과학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갈이 통할지 의문이다. “가치 있는 모든 것이 다 셀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셀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Not everything that counts can be counted, and not everything that can be counted counts.)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 블로그에 연재한 것들이다. 먼저 인문학과 그리스도교 신앙과의 관계를 고찰하는 2편의 에세이가 소개된다. 그후부터 내내 인문학이 던지는 단골 질문 한 가지를 탐색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을 서양 고전소설을 통해 탐구해 본다. 그리고 그 탐구 과정을 성경이라는 그리스도교 경전의 빛으로 조명해 본다. 이러한 시도가 지닌 의의를 백낙청 교수가 벌인 지적인 탐색 과정과 한번 비교해 보겠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영국 소설가 D. H. 로런스 전문가다. 이런 그가 프로이트와 니체 및 미국문학을 논의하면서, 겸허하면서도 솔직하게 이러한 자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자기에게 D. H. 로런스라는 ‘베이스캠프’가 없었다면, 그런 주제들에 대한 지적인 탐구를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서양의 개벽 사상가 D, H, 로런스”). 즉 로런스가 그러한 주제들에 대해 의미 있는 언급을 했거나 책을 집필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논의하는 방식으로 자기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더 멀리 봤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은 덕이다.”라고 언급한 아이작 뉴턴의 말에 빗대어 보자면, 백 교수에게는 한 명의 거인이 있었고 그 거인이 바로 로런스였던 셈이다. 백 교수에게 로런스라는 ‘베이스캠프’가 있었다면, 필자에게는 성경이라는 ‘베이스캠프’가 있었다. 약 1,500년 동안 약 40명의 저자에 의해 집필된 유일신 하나님의 계시인 그 ‘베이스캠프’를 통해, 서양 고전소설 8편 속에 담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그 답변을 조명해 보겠다.
각 작품마다 주인공(들)의 자아 발견의 여정과 성숙의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오만과 편견”에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자기기만이라는 요소가, “위대한 유산”에서는 자기 존재의 신비로운 유래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그를 성숙한 인간으로 이끈 모험 철학이 소개되고 있다. “더버빌가의 테스”에서는 테스와 에인절이 진정한 인격적 성숙으로 나아가는 도정이, “데미안”에서는 고유한 나 자신 되기가,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개츠비의 감성적, 심리적, 영성적 면모의 형성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백치”에서는 자존감 없는 삶, 질투하는 사랑의 노예로 살아 가는 인물들과 타인보다 더 약삭빠른 범인의 삶이 세세하게 묘사된다. 각각 칼날 아래 살기, 무덤 속에 살기 및 검은 구름 아래 살기라는 은유로 대변된다. 끝으로 “이방인”에서는 뫼르소가 육체적 욕망과 무의미성의 화신임을 밝힌다. 한 발 더 나아가 카뮈가 뫼르소를 ‘절대에 대한 진실, 진실에 대한 정열’이 충일한 인간 혹은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인식한 것이 적어도 본문 내용과는 동떨어진 논평임을 논의한다. 카뮈와 그의 ‘부조리 철학’ 추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한 마디가 있다. 양자 역학의 아버지인 닐스 보어가 한 말이다. “인생의 의미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 속에 존재한다.”(The meaning of life consists in the fact that it makes no sense to say that life has no meaning.) 나 자신과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성서인문학적 순례의 길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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