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갑질의 희생자, 토마스 하디의 “더버빌가의 테스”
소설이나 희곡을 읽을 때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줄거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그 작품의 전모를 다 파악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줄거리를 세세하게 알고 있어도 그 내용 곳곳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문학적 묘사와 다 방면의 주제에 대한 세세한 논의를 파악하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입니다. 실제 상황 속으로 들어가 등장인물들이 직면한 일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나름대로 반응하는 일은 또 다른 독서의 면모이기도 합니다. 마치 자기가 그 일들을 직접 통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절절하게 체험할 수가 있지요. 이런 간접 체험과 반응들이 쌓일 때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고 확장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간단한 줄거리는 트로이아 전쟁이 마감된 후에 무려 10년간이나 해상에서 떠돌며 고난과 역경을 겪던 통과하던 오디세이아가 귀향해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아내 페넬로페와 재결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상세한 줄거리는 제가 제시한 것처럼 7개의 문단으로 정리할 수도 있고, 24개로 구성된 그 책의 장별로 더 세세한 내용을 줄거리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줄거리 속에 오디세이아가 체험한 고난의 구체적 실상과 그것을 통과하면서 그가 겪었던 고뇌의 전모를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각 상황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등장인물들의 외모나 처지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알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각 장면의 물리적 환경을 문학적으로 묘사한 내용이나 곳곳에 등장하는 비유적 표현도 다 생략되어 있습니다. 마치 고소한 살코기나 영양가 넘치는 육수는 다 빠져 버린 소뼈 같은 상태입니다.
이번에 다루는 토마스 하디의 “더버빌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대로 줄거리는 간단하게 세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테스라는 빈농의 딸이 알렉이라는 불한당에게 겁탈당해 아이를 낳고 사회적 낙인이 찍혀 살아가는 중에 그 아이도 잃은 채 힘겹게 살아가다가 새롭게 만난 에인절이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됩니다. 자기의 과거를 알고 난 후 태도가 돌변한 에인절과 헤어져 살다 그의 행방을 알 수도 없고 그와 연락도 닿지 않아 고통당하던 중에 다시 알렉을 만나게 된 테스는 그의 집요한 압력과 회유에다 가난한 집안을 건사할 길이 막막해 그의 정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해외에서 돌아온 에인절이 자기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재회하게 되자 테스는 자기를 두 번씩이나 속인 알렉을 죽인 후 에인절과 재결합하게 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체포되어 사형당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세 문장의 줄거리를 일곱 문단으로 확대한 아래의 줄거리를 참고해 보세요. 테스와 알렉과 에인절과 연관된 상세한 정보를 더 접할 수는 있겠지만, 이 작품을 통해 작가인 토마스 하디가 논의하고자 하는 핵심을 붙잡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작가가 공들여 묘사한 영국 남서부 웨섹스 지방의 풍광과 그 속에서 극심한 빈곤을 감내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농부들의 신산한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체득하기란 더욱 힘듭니다. 그 아름다운 자연의 묘사와, 빈곤한 환경 속에서도 생존할 뿐 아니라 소박한 삶을 즐기는 지역민들의 삶에 대한 서술이 서로 비교되고 대조되는 것도 하디가 의도한 것이라면 이 작품의 중요한 포인트 한 가지를 놓치는 셈이 되겠지요.
줄거리만 읽는 것과 원전을 읽는 것의 차이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가까이서 관찰하는 것과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이 작품 속에서 에인절이 탤보세이즈 낙농장에서 견습 농부로 일하는 동안 새롭게 인식한 것 한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낙농장 사람들과 일하고 사귀면서 진심에서 우러나온 기쁨을 맛봅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품고 있던 편견이 깨어집니다. 멀리서 시골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는 그저 “불쌍할 정도로 무식한 시골뜨기”(the pitiable dummy known as Hodge)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과 사귀어 보니 “그런 전형적이고 불변하는 시골뜨기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The typical and unvarying Hodge ceased to exist.) “단조로움 대신 다양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variety had taken the place of monotonousness) 그들 각자가 품고 있는 개성적인 면모가 새록새록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갖가지 마음과 개성과 차이점을 지닌 인간”(beings of many minds, beings infinite in difference”)으로, “저마다의 길을 걷다 죽어 흙으로 돌아갈 인간”(men every one of whom walked in his own individual way the road to dusty death)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모쪼록 망중한을 내어 고전 문학을 한 작품씩 온전하게 읽어가는 기쁨과 보람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줄거리 내용은 영문 위키피디아 “더버빌가의 테스” 편을 번역했음.)
-“더버빌가의 테스” 줄거리-
1부(처녀<The Maiden>): 무학자 농부인 존 더비필드(Dubeyfield)는 트링험 목사에게서 자기 가문이 이미 사라진 노르만 계통의 성인 ‘더버빌’(d'Urberville)일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다. 같은 날 존의 장녀인 테스는 마을에서 열리는 오월제 댄스(May Dance)에 참여해서 처음으로 제임스 클레어 목사의 막내아들인 에인절 클레어와 만난다. 당시 에인절은 자기 두 형들과 함께 도보 여행을 하고 있던 중에 그 댄스 모임에 참가하게 되어 몇 명의 처녀들과 함께 춤을 추게 된다. 테스와 함께 춤을 추려고 할 때는 이미 늦어 형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테스는 무시를 당했다고 느낀다. 그런데 테스는 너무 취한 아버지가 그날 밤 벌통을 이웃 동네로 갖다 줄 수 없어 남동생과 함께 집안에 유일한 말인 프린스를 타고 떠난다. 가는 도중에 과속하는 마차 때문에 프린스가 심하게 다쳐 결국 죽고 만다. 프린스의 죽음과 그것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 가책을 느낀 테스는 트랜트리지 근처의 시골 저택에 살고 있는 부유한 미망인인 더버빌 부인을 방문해서 자기 가족이 친척인 것을 알리기로 동의한다. 사실상 그 미망인의 남편인 시몬 스토우크는 진짜 더버빌가와 아무 연관이 없었지만 그저 그 성을 채택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 테스 일가는 모르고 있었다. 더버빌 부인을 만나지 못한 테스는 우연히 그녀의 바람둥이 아들인 알렉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테스가 마음에 들어 그 저택의 닭 사육을 맡긴다. 그가 자기를 유혹할 게 두렵다고 테스가 부모에게 말하지만, 그들은 테스가 그 일을 맡도록 격려한다. 속으로 알렉이 그녀와 결혼해 주기를 바란 것이다. 테스는 알렉을 싫어하지만 자기 집 말을 다시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 동안은 원치 않는 그의 집요한 관심을 참아내기로 결심한다. 그가 잔인한 행동과 속임수로 치근덕거렸으나, 테스가 경험이 부족하고 거의 날마다 일상적으로 그와 만나는 탓에 테스의 정절을 위협하는 그런 알렉의 시도가 때로는 흐릿하게 느껴지곤 했다. 어느 날 밤늦은 시각에 트랜트리지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내에서 집으로 걸어오던 중, 테스는 무심코 칼 다쉬라는 여자의 반감을 사게 되는데 그녀는 최근에 알렉에게 차인 여자였다. 테스가 위험한 처지에 놓인 그때 알렉이 말을 타고 와서 그녀를 구해주겠다고 제안한다. 테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그는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대신에 안개 사이를 헤매며 달리다가 체이스라고 부르는 숲에 도달하게 된다. 알렉은 자기도 길을 잃었다며 방향을 잡기 위해 앞쪽으로 걸어갔다 돌아온다. 그런데 그때 테스는 피곤을 이기지 못해 잠이 들어 있었고, 그는 그녀를 겁탈한다.
2부(정조를 잃음<Maiden No More>): 그 사건이 발생한 지 몇 주가 지난 후 테스는 알렉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기도 했고 처녀성을 잃어버린 게 부끄럽기도 해서 그저 자기 방에서만 머문다. 이듬해 봄에 그녀는 아들을 낳게 되지만 그 아이는 몇 주 밖에 살지 못한다. 그가 죽던 마지막 밤에 테스는 자기 아버지가 목사의 방문을 허용해주지 않자,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을 아기의 운명을 염려하여 자기가 직접 세례를 준다. 세례를 받은 그 아이에게 소로우라는 이름이 부여되지만 그 아이는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을 위해 지정된 교회 부속 묘지 한 곳에 묻힌다.
3부(회복<The Rally>): 트랜트리지 대참사가 있은 지 2년여 후에, 이제 거의 스물이 된 테스는 자기 과거를 모르는 동네 밖에서 일자리를 발견한다. 크릭 씨 부부가 운영하는 탤보세이즈라는 낙농장에서 젖 짜는 여자로 취직하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테스는 이지, 레티와 마리안이라는 세 여자 동료와 에인절 클레어를 다시 만나게 된다. 지금 그는 낙농업 운영을 배우기 위해 탤보세이즈로 와 있는 견습생 신세였다. 비록 다른 여자 동료들이 에인절과 사랑에 빠져 있지만 그는 테스를 꼭 집었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4부(결과<The Consequence>): 에인절은 며칠간 낙농장을 떠나 에민스터에 있는 자기 가족들을 방문하러 간다. 그의 형들인 펠릭스와 커트버트는 둘 다 영국국교회에서 안수받은 목사들로서 에인절의 투박해진 몸가짐에 주목하지만 에인절은 그들이 근엄하고 편협하다고 여긴다. 클레어 씨 부부는 오랫동안 그가 경건한 여선생인 머시 챈트와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에인절은 농장 생활을 아는 아내가 더 실제적인 선택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부모에게 테스에 대해 이야기해 주자 그들도 그녀를 만나보기로 동의한다. 아버지 제임스 클레어 목사는 지역민들에게 복음 전하는 자기의 노력에 대해 에인절에게 이야기하면서, 알렉 더버빌이라는 고약한 청년을 개심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언급한다. 에인절은 탤보세이즈로 돌아와 테스에게 자기와 결혼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것 때문에 테스는 고통스러운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에인절은 분명히 자기를 처녀로 생각하는데, 그녀는 자기 과거 고백하기를 자꾸 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테스는 마침내 결혼하는 데 동의하면서, 자기가 망설인 이유를 에인절이 오래된 가문들을 싫어해서 그가 더버빌 가문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그렇지만, 에인절은 그 뉴스를 듣고 기뻐하면서, 자기들의 결합이 자기 가족들의 눈에 더 적합하게 보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이 가까워오자, 테스는 더욱 가슴 아파한다. 자기 어머니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쓰지만, 어머니 조안은 과거를 묻어두라고 말한다. 그때 트랜트리지에서 온 그로비라는 남자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상스럽게 그녀의 과거에 대해 언급한다. 에인절이 그것을 엿듣게 되자 그 답지 않게 격노한다. 테스는 에인절에게 진심을 알리겠다고 결심하고는 더버빌과 연관된 일들을 설명하는 편지를 써서 그의 방문 밑에 밀어 넣는다. 이튿날 아침에 에인절이 여전한 애정을 표시하며 테스에게 인사하자, 그가 자기를 용서했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그 편지가 에인절 방 카펫 밑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직 그가 그것을 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그 편지를 찢어 버린다. 결혼식 날 오후에 수탉이 갑자기 우는 나쁜 징조가 있었을 뿐, 결혼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테스와 에인절은 오래된 더버빌 가문의 저택에서 결혼식 날 밤을 보내는데 에인절이 테스에게 자기 대모에게서 받은 다이아몬드들을 선사해 준다. 그때 그가 런던에서 어떤 나이 든 여인과 짧은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고 이야기하자, 테스도 결국엔 그가 모든 걸 이해하고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알렉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느낀다.
5부(여인의 대가 지불<The Woman Pays>): 에인절은 그 폭로에 경악한다. 비록 테스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그 죄의 피해자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알렉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인격상의 흠일 뿐 아니라 테스가 더 이상 자기가 생각한 여자가 아니라고 느낀다. 그는 소파에서 첫날밤을 보낸다. 어색한 상태에서 며칠이 지난 후에, 어안이 벙벙해 있던 테스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서로 헤어지자고 제안한다. 에인절은 그녀에게 돈을 조금 주면서 그녀의 과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시도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자기가 그녀를 부를 때까지 자기에게 오지 말 것을 당부한다. 자기 부모와 잠시 지낸 후, 에인절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브라질로 가는 배를 타고 간다. 떠나기 전에 테스의 동료였던 이즈를 만나게 되어 충동적으로 자기와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그녀가 승낙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묻자 그녀는 아무도 에인절을 테스만큼 사랑할 수는 없다고 대답한다. 이 말을 들은 에인절이 변덕스럽게 자기 제안을 철회하자, 이즈는 슬피 울며 집으로 돌아간다. 테스는 집으로 돌아와 잠시 지냈지만, 돈이 곧 다 떨어지자 한 번 더 부모를 돕기 위해 나서야 했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플린트코움애쉬라는 농장에서 마리안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하고 나중에 이즈도 함께 동참하게 된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그로비라는 남자가 다시 그녀를 알아보고는 모욕을 준다. 나중에 보니 그가 바로 새 농장의 주인이었다. 그 농장에서 이 세 친구들은 신체적으로 고된 노동을 감수하게 된다. 어느 겨울날에 테스는 실제적인 도움을 얻기 위해 에민스터에 있는 에인절 가족을 방문하려고 한다. 그곳에 가까이 갔을 때 에인절의 형들과 머시 챈트와 마주친다. 그들은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그들이 에인절의 지혜롭지 못한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어 감히 그들에게 접근하지 못한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순회 설교자의 설교를 듣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사람이 바로 알렉 더버빌이었다. 에인절의 아버지인 제임스 클레어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다.
6부(개심자 알렉<The Convert>): 알렉과 테스는 서로 놀란다. 알렉은 테스가 자기에게 마술을 걸었다고 주장하면서, 크로스인핸드라고 불리는 불운의 돌 곁에 둘이 서 있을 때 그녀가 다시 자기를 유혹하지 말 것을 맹세하게 한다. 그렇지만 알렉은 계속 그녀를 뒤쫓아 플린트코움애쉬까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미 자기는 결혼한 몸이라고 말해도 그는 계속 그녀를 스토킹 하기 시작한다. 반복되는 퇴짜에도 불구하고 캔들마스에 돌아와서도 그랬고 테스가 탈곡기와 힘겹게 씨름하는 이른 봄에도 계속 이런 짓거리를 계속 해댄다. 신앙도 저버린 채 자기는 더 이상 설교자가 아니라면서 테스가 자기와 함께 있어 주기를 원한다. 그가 에인절을 모욕했을 때, 테스가 그를 때려서 피가 흐르기도 한다. 그때 테스는 동생 리자루에게서 아버지가 아프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집으로 달려가 그들을 돌보러 간 덕으로 어머니는 곧 회복되었으나 아버지는 예기치 않게 심장 문제로 죽게 된다. 아버지 생애 동안에만 사용하기로 된 자기 집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한 채 그 가난한 가족은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녀를 뒤쫓아 고향 마을까지 온 알렉은 그녀의 남편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 자기 저택에 그들이 살 집을 마련해 주겠다고 테스를 설득한다. 테스는 여러 차례 그의 도움을 거절한다. 이전에 테스는 에인절에게 사랑과 자기혐오와 긍휼을 간청하는 내용으로 가득 찬 편지를 보내면서 제발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도록 자기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에인절이 자기에게 부당하게 대우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잊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겠다는 편지를 급하게 써 갈겨 보낸다. 더버빌가 조상의 영지인 킹스비어에서 셋방을 얻으려는 더버필드 가족의 계획이 무산되자, 아무것도 없는 그들로서는 더버빌가의 창문 아래에 있는 교회 부속 묘지에서 쉴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테스가 그 교회에 들어가자, 알렉이 또다시 나타나 그녀를 추근대기 시작해서 테스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한편 에인절은 브라질에서 아주 아픈 상태로 지내게 되었고 농장을 세우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는 영국으로 돌아오는데, 한 번은 어느 낯선 사람에게 자기 문제를 고백하니, 그는 에인절이 아내를 떠난 게 잘못되었다고 말해 주면서, 그녀의 과거는 그녀의 미래보다 덜 중요하다고 일러 준다. 그때 에인절은 테스를 잘못 대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한다.
7부(완료<Fulfilment>): 집으로 돌아와 보니 두 장의 편지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스의 화난 편지와 이지와 마리안으로부터 온 비밀스러운 편지였는데, “친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대적”(an enemy in the shape of a friend)에게서 자기 아내를 보호할 것을 경고하는 편지였다. 테스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 그는, 이젠 옷도 잘 입고 쾌적한 집에서 살고 있는 테스 어머니를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는 에인절이 묻는 말에 애매하게 답한 후에, 테스가 고급 해변 휴양지인 샌드본에 살러 갔다고 일러 준다. 거기에서 그는 테스가 “더버빌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비싼 셋집에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에인절이 테스를 찾자, 그녀는 놀랍게도 우아한 옷을 입고 초연하게 서 있는다. 그가 부드럽게 용서를 구하지만, 테스는 고뇌하면서 그가 너무 늦게 왔다고 말한다. 에인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테스는 결국 알렉 더버빌의 설득에 굴복하고는 그의 정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에인절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 것을 부탁한다. 그가 떠나자 테스는 자기 침실로 가서 무릎을 꿇고 통곡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에인절의 사랑을 두 번째로 잃게 만든 것에 대해 알렉을 비난하게 된다. 왜냐하면 에인절이 결코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 집주인인 브룩스 여사는 테스와 알렉의 방에서 들려오는 그들 간의 언쟁을 접한 후에 테스가 집을 떠나는 것을 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천정에서 붉은색 자국, 즉 핏자국이 번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도움을 요청하여 알렉이 칼에 찔려 침대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상심한 에인절이 샌드본을 떠날 즈음에 테스가 달려와 자기가 알렉을 죽였다고 이야기한다. 자기들의 인생을 망친 그 인간을 죽임으로써 에인절의 용서를 얻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에인절이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못하다가 그녀를 용서하고 자기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해변으로 향하지 않고 그들은 내륙으로 걸으면서 테스에 대한 수색이 끝날 때까지 어디에선가 숨어 지내다가 외국으로 도주할 것을 계획한다. 빈 저택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천상의 행복을 누리며 닷새를 보낸다. 그렇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것이 그곳을 관리하는 여인에게 어느 날 발각된다. 그들은 계속 걸어가다가 한 밤중에 무심코 스톤헨지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테스는 고대 제단에서 누워 쉬게 된다. 그녀가 잠들기 전에, 테스는 에인절에게 자기 여동생인 리자루를 돌보아줄 것과 자기가 죽으면 그녀와 결혼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이튿날 새벽에 경찰이 그들을 둘러싼다. 결국 그도 테스가 정말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닫고 그 사람들에게 그녀가 자연스럽게 깰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한다. 그녀가 눈을 뜨고 경찰이 와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에인절에게 자기가 “이제는 오래 살아 당신에게 경멸받는 일도 없을 테니 정말 잘 된 거”(now I shall not live for you to despise me)라며 “도리어 기쁘다”(almost glad)라고 말한다. 그녀가 헤어질 때 한 말은, “이제 준비됐어요.”(I am ready)였다. 테스는 윈톤체스터 감옥으로 호송된다. 테스의 처형이 감옥에서 진행되는 것을 알리는 검은색 깃발이 올라갈 때 근처에 있는 언덕에서 에인절과 테스 동생 리자루가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맞잡고 자기들의 길을 떠난다.
-순결에 대한 이해-
이 작품의 원제는 “더버빌가의 테스: 순결한 여인”(Tess of the d'Urbervilles: A Pure Woman)입니다. ‘순결한 여인’이라는 부제 때문에 이 책이 출간될 당시에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조를 잃고 아들을 낳아 기른 적도 있고 정식으로 결혼한 이후에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정부로 살다 그 남자를 죽인 여자를 어떻게 순결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지요. 이런 세평에 대해 작가 토마스 하디는 단호했습니다. ‘순결한’이란 형용사의 개념을 “문명의 법령에서 유래한 인위적이고 이차적인 개념”(the artificial and derivative meaning which has resulted to it from the ordinances of civilization)으로만 관련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그들은 “자연 상태에서 부여된, 더 나아가 미학적으로 그 단어에 부여된 의미를 무시했다”(They ignore the meaning of the word in Nature, together with all aesthetic claims upon it.)고 공박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기독교의 가장 고매한 면모가 제공하는 영적인 해석”(the spiritual interpretation afforded by the finest side of their own Christianity)을 무시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어느 쪽의 주장이 맞을까요?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Learner's Dictionaries")에서 'pure'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정의가 등장합니다. (1) 뭔가 섞이지 않은, 뭔가 첨가되지 않은<not mixed>(2) 맑고 해로운 물질이 포함되지 않은<clean> (3) 완전하고 절대적인<complete> (4)(색깔, 소리, 빛이) 매우 분명한<very clear> (5) 악한, 특히 성적으로 악한 생각이나 행동이 없는<morally good> (6) 지식을 실제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그 과목의 지식을 증가하는 것에 대한<subject you study> (7) 다른 종 혹은 인종이 섞이지 않은<breed/race>. 이 정의들 가운데 도덕적인 개념과 연관되는 것은 다섯 번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정조를 잃은’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적으로 악한 생각이나 행동이 없는’(without evil thoughts or actions, especially sexual ones)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테스에게는 결코 적용될 수 없는 단어이지요. 그녀는 알렉이라는 불한당에게 강간당한 피해자이지 성적으로 방종한 생각을 품고 그와 놀아난 탕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단어가 이 책이 출간되던 1891년 당시 영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이 ‘성적으로 순결한’, 한 발 더 나아가 ‘정조를 잃지 않은’이란 아주 실제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말은 결국 그 당시에 이 단어가 하디가 지적한 대로 ‘인위적이고 이차적인 개념’으로 전용(轉用)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제 그 ‘인위적이고 이차적인 개념’인 ‘성적 순결’이 한편으로 존중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희화화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하는 시대가 된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위적이고 이차적인 개념’인 ‘순결’의 의미를 각 사람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적용하는 것에는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순결을 잃은 피해자와 그 사태를 초래한 가해자를 구분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정은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결과만, 그것도 피해자인 여성이 정조를 잃은 처지만을 주목하는 것이지요. 테스가 자기를 신뢰하지도 않고 곁을 주지 않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알렉은 그녀가 가장 연약하고 난감해 하는 틈을 타서 강제로 유인해 추행했습니다. 우연하게 실수로 이루어진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집요한 집적거림에 대해 테스의 거듭된 거절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결정적인 틈을 노린 의도적이고도 계획적인 강간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젊은 여성이 남성우월주의 시대의 피해자가 된 사정만 개입되는 게 아닙니다. 그 가해자인 남성이 부자라는 측면도 함께 결부되는 것이지요. 즉 부잣집 아들인 알렉이 가난한 집 딸인 테스에게 가한 성적 가해 사건이었기에 유야무야 되었습니다. 테스의 부모는 그런 사건이 벌어졌어도 알렉에게 항의를 하거나 그를 고소하지 않고 도리어 왜 테스가 그와 결혼하지 않았는지 애석해할 뿐이었습니다. 만일 당시에 알렉이 가난한 청년이었고 테스가 부잣집 처녀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알렉의 인생은 그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결국 ‘순결’이라는 이 한 단어 속에 1890년대의 영국이라는 곳에서의 ‘시대적 갑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입니다.
요즘 같으면 ‘성폭력’이라는 죄목으로 처벌될 일이었습니다. 가해자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저촉되어 어떤 형태로든 처벌을 받을 범죄입니다. 그렇지만 알렉의 성폭력은 19세기 말 영국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피해자인 테스가 덤터기를 다 뒤집어쓴 채 고통스러운 생애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종류의 ‘시대적 갑질’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성 간의 부당한 성행위와 성희롱과 관련된 갑질 사범들이 법적 처벌을 받는 경우는 이전보다 더 흔해졌지만, 피해 여성들이 일방적으로 사회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여전히 비일비재합니다. 심지어 매스 매디어와 SNS로 인해 피해자가 이차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젊은 유명 여자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경우까지 생기겠습니까?
19세기 말 영국 사회가 편협하고 편파적이며 자의적인 규정으로 사회적인 성 도덕을 통제하려 한 시도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테스와 같은 희생자가 존재했음은 분명합니다. 하디가 그 사실을 고발한 것을 당대의 사회는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는 대신 불쾌해하고 의아해했습니다. 즉 도덕적인 근거로 볼 때 ‘타락하고’(ruined) 부도덕한 그 여자를 순결하다는 하디의 말에 불쾌감을 느낀 이들도 있었고, 지적으로 볼 때 그녀를 순결하다고 말하는 하디의 근거가 무엇인지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외면적인 순결”(outward purity)과 “본질적인 순결”(innate purity)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비록 테스가 알렉의 겁탈로 인해 사회가 설정한 도덕 기준에 따라 외면적인 순결을 잃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내적 품성에 따라 규정되는 테스의 “본질적인 순결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her innate purity remained intact to the very last)는 하디의 주장을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테스의 내적 품성을 한번 살펴볼까요? 테스는 오직 에인절만 사랑했습니다. 그 외에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테스는 남의 것을 탐하거나 넘보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이 탐욕이나 시기로 오염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누구의 도움에 기대어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행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열심히 그리고 신실하게 살았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경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마음이 교만으로 물들지 않았던 것이지요. 도대체 ‘순결한 사람’이란 용어가 이러한 품성을 품고 실행해 간 테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또한 그렇지 않다면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요? 결국 당대의 영국 사회는 그 편협하고, 편파적이며, 자의적인 의미의 순결, 즉 처녀성 유지라는 순결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입니다. 그야말로 터널 시야(tunnel vision)에 사로잡힌 도덕 사회에 불과했습니다. 본말이 전도된(the tail wagging the dog) 도덕 사회였던 것입니다.
-당시 기독교의 가르침-
안타깝게도 순결에 대한 왜곡된 의식은 당시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맹목적이고도 기계적이며 자의적인 기준으로 순결의 의미를 정의할 뿐 아니라 성에 대한 왜곡된 시각으로 신도들의 성적인 삶을 길들이려 하였습니다. 특히 청춘의 피가 끓는 젊은이들의 도덕적인 측면을 통제하기 위해서 당시의 교회가 두려움을 일으키는 성구들을 이용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예컨대 테스가 알렉의 집에서 봉변을 당한 후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한 남자가 빨간 페인트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적당한 널빤지가 보이자 성구 한 가지를 써넣는 것이었습니다. “너의, 멸망은, 자지, 아니 하느니라”(THY, DAMNATION, SLUMBERETH, NOT)라는 베드로후서 2:3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여름, 그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벽과 대문과 목장 난간마다 닥치는 대로 그 계명을 써놓았다고 자랑했습니다. 그 계명이 너무 잔인하다(horrible, crushing, killing)는 테스의 말에 그는 그게 바로 그 계명이 목적하는 바라면서 자기가 항구나 빈민굴에 써 붙이려고 준비해놓은 계명들을 한번 보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것들은 정말 무서워서 보기만 해도 몸부림칠(make ye wriggle) 거라면서, 테스 또래의 위태로운 아가씨들이 주의를 기울이면 좋을(be good for dangerous young females like yerself to heed) 성구라고 장담했지요.
테스가 낳은 아들 소로우가 병이 들어 죽게 될 즈음에 그녀는 온갖 죄의식에 사로잡힙니다. 자기가 한 행위 때문에 화형당해야 한다면 그녀는 죽어야 할 것이고 그것으로 끝이 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작가 하디는 이런 문제 많은 시각의 발단을 암시해 줍니다. 테스가 같은 마을에 살던 모든 처녀들처럼(Like all village girls) 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well grounded in the Holy Scriptures)는 점과,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역사’(the histories of Aholah and Aholibah)에 대해 충실하게 공부한 적이 있으며 거기에서 비롯되는 추론의 결과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언급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여인들의 역사가 자기에게 적용되며 또 그 적용의 결과가 자신의 화형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상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에스겔 23장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과 유다의 영적 간음 상태를 지적하기 위해 활용하신 비유상의 여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아내로 묘사하신 경우가 많았습니다(예-에스겔 16:1-13). 마치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듯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에스겔 16장에서는 애굽(이집트)과 앗수르(앗시리아) 및 바벨론과 간음을 저지른 음란한 아내로 묘사되고 있고, 23장에서는 나누어진 이스라엘의 북왕국은 앗수르와, 남왕국은 바벨론과 간음을 범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국제 관계 속에서 다른 나라의 종교와 신조 및 관행을 쉽게 흡수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교류로 인해서 여러 가지 이방 사상에 노출되어 그것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방적인 관행들 중에는 우상 숭배나 자녀 희생 제사와 같은 것들 외에도 제의적인 성행위나 매춘도 포함된 게 사실입니다. 테스의 경우와는 판이한 상황이었지요. 더구나 그 핵심은 영적 의미상의 간음이었습니다. 유일신 하나님 대신 다른 신들을 좇았기에 그 신들이 가르치는 가증하고 부도덕한 행위들을 공공연히 자행한 것이었지요.
테스의 영적 무지와 오해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 소로우가 세례도 받지 못하고 사생아의 신분("lack of baptism and lack of legitimacy")이기 때문에 지옥의 맨 밑바닥(the nethermost corner of hell)에 떨어질 것을 염려합니다. 자기 집안의 수치가 알려질 것을 염려한 아버지가 목사의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테스의 뇌리 속에는 “이 기독교 국가에서 시시때때로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세부적인 갖가지 망측하고 별스러운 고문 장면”(many other quaint and curious details of torment sometime taught the young in this Christian country)이 잇달아 떠올랐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젊은이들의 믿음을 고취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통제할 목적으로 이런 비성서적이고도 미신적인 방식까지 동원하여 사역했다는 얘기가 되지요. 이런저런 문제로 고민하던 테스는 궁여지책으로 자기가 직접 죽어가는 아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를 받지 못한 사생아이기 때문에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 테스만의 오해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테스가 성경을 잘 알고 교회의 가르침을 잘 받았다는 앞의 설명을 고려하자면 이런 오해가 당시 교회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거를 종잡을 수 없는 억측이자 심각한 오해이지요.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당신께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린아이들이 천대받던 당시의 관습대로 제자들은 그 사람들을 꾸짖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제자들에게 노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노하심’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왕의 신분을 드러내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직면하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노함’과 대조되는 것이었습니다(동일한 헬라어가 사용됨).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였습니다.”(마태복음 21:15) 즉 그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찬양하는 어린이들에게 신성모독한다면서 쏟은 분노와 같은 수준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복을 누리기 위해 다가오는 어린이들을 막는 제자들에게 분노를 쏟아내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천명하신 대원리가 이러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누가복음 10:14) 그 말씀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에도 주목해 보세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마가복음 10:15-16) 즉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찬양하며 받드는 이들이고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는 이들이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천하에 외치신 것입니다. 테스의 생각이나 당시 교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성서와 동떨어지고 왜곡된 시각인지 알 수 있습니다.
테스의 말 속에는 자기의 죄악 때문에 아들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인과응보 사상도 섞여 있습니다. 테스가 겁탈당하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작가 하디가 덧붙인 의견에도 등장하는 시각입니다. 테스가 기진맥진해 있을 때 그녀의 몸을 지켜 줄 수호천사(guardian angel)는 어디 있으며 그녀가 단순하게 믿은 섭리(providence)는 어디 있는 것이냐고 질문하면서, 왜 그토록 순수한 테스에게 그런 조악한 낙인이 찍히게 되었을까를 논의합니다. 이 문제를 수천 년에 걸쳐 숱한 철학자들이 궁구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면서 아마도 누군가는 인과응보의 가능성(the possibility of a retribution)을 들먹거릴지 모른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전에 더버빌가 조상 중에 농가 처녀에게 이런 식으로 욕망을 채운 이가 있었기 때문에 그 후손인 테스가 그 벌로 알렉에게 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지요. 그렇지만 부모의 죄가 자녀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신학적으로는 괜찮은 도덕(a morality good enough for divinities)일지 모르지만 보편적인 인간성으로 볼 때는 경멸의 대상일 뿐이고 테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고 논평합니다. 당시 교회에서 이런 인과응보의 원리를 가르쳐주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성경을 잘 알고 교회의 가르침을 잘 배웠다는 테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죄과를 자녀들이 물려받는다는 인과응보는 성서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는 성구 몇 군데를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24:16)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에스겔 18:2-4, 20-2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즉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죄에 의해 죽고 각자의 의에 의해 살리라는 원리입니다. 인과응보를 주장하는 이들이 대표적으로 지적하는 성구 한 곳이 있지요.
(출애굽기 20:5-6)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즉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뿐 아니라 삼사 대의 후손들에게까지 그 죄과를 감당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천 대의 후손들에게까지 당신의 은혜가 미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보통 인과응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5절만 주목하면서 6절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죄책을 다루는 5절은 3-4대밖에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다루는 6절은 천 대까지라고 지적하고 있는데도 그러합니다. 죄책이 3-4대나 이어진다는 것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순종의 결과가 천 대까지 이어진다는 점에는 더욱 경탄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더 불공평하게 전개되지 않습니까? 성경의 대원칙이 자기 죄로 인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의 죄가 삼사 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은 그 후손들이 계속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그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같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을 때 적용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 후손들이 그러한 태도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질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이겠지요. 즉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세나 태도는 부모를 본받는 자녀들로 인하여 삼사 대까지 지속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세나 태도는 천 대까지도 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삶과는 상관없이 우리 각자가 바로 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무엇보다 중차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내 부모가 하나님을 미워해서 온갖 벌을 받았어도, 오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당신께 순종하기로 결단한다면 온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천 대의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성숙-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이 있습니다. 순결을 잃고 아들을 낳은 테스가 좌절에 빠져 있던 중 어느 날 자기를 수용하고 다시 일어서서 일하러 나가는 장면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일으켜 세워주었을까요? 그녀가 느끼던 비참한 심정 대부분이 자기의 본질적인 감각(her innate sensations)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자기의 인습적인 측면(her conventional aspect)에서 생성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컨대 자기를 그토록 주눅 들게 했던 것, 즉 자기 처지에 대해 세상이 관심 갖고 있다는 생각(the thought of the world's concern at her situation)은 한 마디로 환상(an illusion)에 근거한 것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자기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자기는 경험과 열정과 짜임새 있는 감각을 갖춘 어떠한 존재로 자리매김되지 못했습니다. 모든 인류에게(To all humankind) 그녀는 단지 지나치는 생각 거리 한 가지(only a passing thought)에 불과했습니다. 자기가 그 기나긴 나날 동안 비참하게 살아도 “아, 쟤는 사서 고생하는구나.”(Ah, she makes herself unhappy.)라고 할 테고, 자기가 쾌활해져서 모든 근심을 잊고 기쁨을 누리며 살아도 “아, 쟤는 용케도 잘 참네.”(Ah, she bears it very well.)라고 지나치며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딱 거기까지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면서 떠 오른 생각이 자기가 만일 무인도에 살았다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그다지 비참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설령 자기가 막 인간으로 창조되었는데, 배우자 없는 엄마로, 그것도 아무런 인생 경험이 없는 엄마로 태어났더라도, 좌절하는 대신 그 사실을 침착하게 수용하고 그것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경이로운 반전이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우리를 진정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라는 테스의 깨달음에 동감을 표시하게 됩니다. 그 이목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일시적이고 얕고 일방적이며 편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도 테스가 지적한 대로만 유추해 보아도 금방 인식할 수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 이목을 너무 의식하여 특정한 말과 행동과 선택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물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우리의 처지에 대해 깊이 동감하면서 동행해 주는 이들의 관심과 의견도 존재한다는 점을 무시해선 안 되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각자의 본질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내면적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내적 성찰이 항상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습의 노예, 타인의 안목의 종이 되고 맙니다.
테스가 자기의 내적 본질과 고유성에 눈을 뜨고 시작한 새로운 삶은 최대의 장애를 만나게 됩니다. 자기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제임스 클레어 목사의 막내아들 에인절이었습니다. 임시적인 기간 동안 테스가 일하던 낙농장에서 일을 배우기 위해 와 있던 장래 농장 경영자였습니다. 그런데 인습적인 측면보다 자기의 본질적인 감각에 주목하며 사는 테스를 지켜보면서, 에인절은 그녀가 그저 가지고 놀다가 무시해 버려도 되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절감합니다. 그녀가 자기만의 소중한 인생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삶은 그녀가 인내하여 누리게 된 것으로서 에인절에게 가장 위대한 사람의 삶으로 인식되는 것과 같은 위대한 차원을 포괄하고 있었습니다. “테스에게는 그녀의 감각에 모든 세계가 달려 있었고, 그녀의 존재를 통해 그녀의 모든 동료 피조물들이 존재했습니다.”(Upon her sensations the whole world depended to Tess; through her existence all her fellow-creatures existed, to her.) 즉 “우주 자체도 테스가 태어난 특정 연도의 특정일에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이지요.”(The universe itself only came into being for Tess on the particular day in the particular year in which she was born.) 이단적이고 결점 많고 유약하지만 양심적인 존재(“a man with a conscience”)인 에인절이 테스를 깊이 관찰한 후에 밝힌 소감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에인절이 변절하는 대목입니다. 테스는 자기의 본질에 충실한 삶을 계속 영위하고 에인절이 자기가 발견한 테스의 위대한 면모에 계속 주목했다면, 이 소설이 제시하는 비극적 결말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에인절이 비록 자기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도주의자, 이상적인 종교가 및 박식한 그리스도 연구가(the most appreciative humanist, the most ideal religionist, even the best-versed Christologist of the three)로 언급되고 있지만, 결혼 후 테스의 고백을 듣고 나서 그가 보인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습니다. 런던에서 자기가 범한 성적 일탈은 용서 받을 수 있지만, 테스의 성적인 피해 경험은 용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었지요. 그의 허탄한 논리는 이러합니다. “오 테스, 그 경우에는 용서가 적용되지 않아요. 이제 당신은 다른 사람이오. 아이고, 어떻게 용서가 그것과 같은 기괴한 요술에 적용될 수 있겠소!”(O Tess, forgiveness does not apply to the case! You were one person; now you are another. My God—how can forgiveness meet such a grotesque—prestidigitation as that!) 자기도 말이 안 되는 줄 알았던지, “말을 멈추고 그 단어의 정의를 깊이 생각하더니 갑자기 마치 지옥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부자연스럽고 음산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He paused, contemplating this definition; then suddenly broke into horrible laughter—as unnatural and ghastly as a laugh in hell.) 그야말로 사단적인 논리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상주의자로 자처한 그의 허술하고도 기만적인 내면이 한순간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기 의지와 독자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진보적으로 살아 나가려 했던 그도 실질적인 사회적 인습의 문제에 직면하자 이전 시절의 단순하고 맹목적인 생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순결에 대한 사회적 인습의 노예로 살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살아온 자기의 위선이 폭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테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남성미의 극치인 신체와 성인의 영혼과 예언자의 지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여겨졌던 그였습니다. 자기 형들을 보면서 점차적으로 지적인 한계(their growing mental limitations)를 보인다고 여기고 그들을 자기만족에 빠진 독선가(a contented dogmatist)로 매도하면서, 자기 지성 걱정하지 말고 자기들 지성이나 챙기라던 자신만만한 그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한계라는 그늘”(The shade of his own limitations)에 사로잡힌 채 살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 셈입니다. 그리고 그는 개량된 도덕적, 지적 훈련 체계라는 것이 무의식적인 인간의 본능을 상당히 향상시킬 수는 있겠지만, 교양이란 것은 그저 지적인 외피에나 영향을 미칠 뿐이라고 보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이런 시각도 그가 갖추고 있던 교양의 수준을 대변해주는 자기실현적인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에 불과했습니다.
에인절은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옵니다. 브라질에서 목숨을 건 고된 경험을 감내하면서 새롭게 체득한 시각을 통해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테스에 대해 자기가 저지른 실수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테스를 그녀가 겪은 과거 사실과 사건 중심으로가 아니라 건설적인 시각으로 그녀 내부에 간직된 본질로 판단하지 못한 점과, 그녀의 행위보다 그녀의 의지로 판단하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거듭 후회했습니다. (“he had asked himself why he had not judged Tess constructively rather than biographically, by the will rather than by the deed?”) 외국에서 생활한 기간 동안 그는 정신적으로 열 살 이상이나 성숙해져서 그를 사로잡은 인생의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연민이나 슬픔이나 동정심을 자아내는 속성(“What arrested him now as of value in life was less its beauty than its pathos.”)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격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그 사람이 이룬 성취 자체에 존재할 뿐 아니라 그가 품고 있는 목적이나 동기와도 관계가 있으며, 그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그가 과거에 행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의도한 바에 달린 것”(The beauty or ugliness of a character lay not only in its achievements, but in its aims and impulses; its true history lay, not among things done, but among things willed.)이라는 통찰력도 품게 되었습니다. 그때쯤에는 “테스의 도덕적 가치는 그녀가 성취한 것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성향으로 평가해야 한다”(her moral value having to be reckoned not by achievement but by tendency)는 점에 무지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테스가 아닌 것에만 신경 쓰다가 테스의 됨됨이를 간과했을 뿐 아니라 흠 있는 것이 완전한 것을 능가할 수 있다는 생의 진리에 잊어버린 자신”(In considering what Tess was not, he overlooked what she was, and forgot that the defective can be more than the entire.)도 발견하게 되었겠지요.
-시대적 갑질의 피해자-
비록 알렉의 추행, 에인절의 변절 및 알렉의 재범(再犯)이라는 세 번 죽는 고통을 감내하던 중, 급기야 참된 사랑의 회복을 누린 후 생을 마감한 테스의 짧은 생애는 한 사람만을 향한 순결한 사랑의 전범이었습니다. 알렉의 범죄로 몸은 망가졌지만 테스의 마음은 일편단심 에인절뿐이었습니다. 비록 빈한한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교육밖에 받지 못한 테스가 성경을 곡해하긴 했어도 그녀의 삶은 성경의 원리를 실행하는 열매를 아름답게 맺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줄 알고, 부모에게 순종하고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며, “육체적인 수줍음과 정신적 용기가 뒤섞인 인내력”(Patience, that blending of moral courage with physical timidity)으로 열심히 자기가 맡은 일에 신실하게 임했습니다. 남의 것 넘보지 않고 남에게 손 벌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남에게 해를 당한 일은 수두룩했지만 그들에게 앙갚음하지 않고 도리어 선한 의도로 대했습니다.
에인절은 테스의 유일한 애인이었습니다. 자기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테스가 고백할 만큼 훌륭한 자질들을 고루 갖춘 청년이었습니다. 대단한 줄 알았던 자기 의지와 독자적인 판단이 구체적인 사회 인습에 직면하자 박살이 나는 체험을 하면서 자기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절감하며 해외 도피의 길에 올랐습니다. 죽음을 넘나드는 체험을 통해 그는 거듭나서 더욱 성숙한 인격자로 귀국하게 됩니다. 그의 경우는 알렉의 경우와 대조됩니다. 그에게도 자기의 삶을 변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기회를 만사휴의로 만들어 버렸지요. 기독교로 개심한 이후에 그는 다시 옛날의 불한당으로 되돌아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심지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설교하는 단계까지 진전했으나, 그것은 “온전한 개혁이 아니라 단순한 변형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It was less reform than transfiguration.)
결국 테스와 에인절은 천생연분이었습니다. 서로를 알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으니까요. 비록 에인절이 변절하기 전에 테스와 나눈 대화이지만 다음과 같은 상호 고백은 각자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에인절에게 “나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어울리지 않는다구요!”(I am not worthy of you—no, I am not!)라고 테스가 수줍어하며 이야기할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랑하는 테스! 그런 말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탁월성이라는 것은 경멸할 만한 인습들을 요령껏 이용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나의 테스, 당신처럼 참되고 정직하고 공정하고 순결하고 사랑스럽고 평판이 좋은 사람들로 인정받는 데 존재한단 말이오.”(I won’t have you speak like it, dear Tess! Distinction does not consist in the facile use of a contemptible set of conventions, but in being numbered among those who are true, and honest, and just, and pure, and lovely, and of good report—as you are, my Tess.) 그들이 일찍부터 피차의 진면목을 알고 존중하는 가운데 그들의 사랑은 무르익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탄탄한 이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사랑과 결혼의 집이, 그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당대의 ‘순결’이라는 도덕 기준 한 방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시대적 갑질’의 피해자였던 것입니다.
에인절에게는 그 갑질의 피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지만, 테스는 그저 희생자로만 남게 된 소설의 결말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줄 압니다. 외면적이고 피상적인 가치만을 절대시하고 내면적이고도 본질적인 가치는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시대 상황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외면적으로 부유하고 편안한 삶을 포기할 뿐 아니라 자기의 고귀한 삶과 참된 사랑을 탈취해 간 원인을 처단한 후, 자기 목숨 드려서까지 그 삶과 사랑을 되찾는 테스의 결행이 더없이 소중한 시대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끼며 사는 우리 모두에게, 자기 생명 드려 지키고자 했던 테스의 가치와 소신이 심금을 울리는 감동으로 다가오길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뼈아픈 고통을 통해 타인의 이목보다 자기의 내적 본질과 고유성에 주목하는 내적 성찰에 눈을 뜬 테스와, 목숨 건 해외 여정을 통해 아름다운 인생의 본질과 타인 이해의 고갱이를 체득한 에인절을 우리 모두 본받기 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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