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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20세기 코헬렛,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5. 21.

20세기 코헬렛,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우리나라 사람 중에 자신의 인생의 책으로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 1946)를 거론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카잔차키스의 묘지명에 감동한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그 책 저자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자기 영웅으로 여기는 이들이 눈에 띄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65세, 화자는 35세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조르바가 자기보다 30세 연하의 백면서생인 화자에게 자신의 인생론을 다각도로 나누어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 화자는 그와 대화하고 함께 삶을 나누는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인생관에 대격변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를 구가하며 살아가는 조르바의 모습이 종이와 먹물에 파묻혀 살아온 자신에게 신세계를 열어준 것이지요. 실제 인물이었던 조르바는 사실상 작가 카잔차키스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와 같은 반열에 놓인 사람입니다. 그만큼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지요.

 

-그리스인 조르바줄거리-

이 책은 바람이 거센 어느 가을 아침 동트기 직전에, 아테네 근처의 항구 도시 ‘피레우스’의 한 카페에서 시작합니다. 젊은 그리스 지성인인 화자는 자기 친구인 스타브리다키스가 헤어지며 던진 ‘책벌레’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원고 나부랭이를 던져 버리고 행동하는 삶의 여울 속에 뛰어들 구실을 찾고 있던 중, 크레타섬에 있는 갈탄 폐광 한 곳을 빌리게 됩니다. 그의 친구는 위험에 처한 동포 그리스인들을 돕기 위한 명분을 품고 캅카스 지방으로 떠나버린 상태입니다. 반면에 그는 크레타섬 리비아 해안에 위치한 갈탄 광산으로 가서, 책벌레 무리와 떨어진 채 노동자들과 소작 농부들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보기 위해 그곳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그가 단테의 신곡을 읽기 시작하려는데, 누군가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을 느낍니다. 주위를 둘려보니 약 60대의 남자가 유리문을 통해 그를 보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들어와서 화자에게 다가와서는 일자리를 청합니다. 자기는 요리사이자 광부이자 산투리(이슬람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전통 현악기) 연주자이기도 하다면서,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난 알렉시스 조르바라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화자는 조르바의 도발적인 의견과 다양하게 표현하는 방식에 매료되어, 그를 갈탄 광산의 일꾼 감독으로 고용하기로 결심합니다. 화자는 이 조르바가 자신이 오랫동안 찾았지만 찾지 못했던 바로 그 사람이란 것을 직감합니다. “살아서 팔딱거리는 심장,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대지에서 아직 탯줄이 끊어지지 않은 거칠고 야성적인 영혼, 가장 단순한 인간의 언어로 이 노동자는 내게 예술, 사랑, 아름다움, 순수, 정열의 의미를 뚜렷하게 일깨워 주었다.”

 

크레타섬에 도착하자 그들은 조르바의 제안대로, 마담 오르탕스의 호텔로 향합니다. 호텔이라고 해봤자 그저 오래된 해변 탈의장을 길게 이어 붙여 만든 건물 말고는 볼 것 없는 곳이었지만, 화자와 조르바는 그 탈의장 오두막 한 곳을 함께 쓰게 됩니다. 화자는 하루 동안 섬 주위를 둘러보며 보냈는데, 그곳 경치는 “마치 한 편의 훌륭한 산문과도 같았습니다. 산뜻하게 다듬어지고, 과묵하고, 불필요한 표현 없이, 힘차고, 절제되고,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핵심을 표현하고, 장난을 치지 않으며 요령을 부리거나 과장하지 않은 채 강건한 간결함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을 적은 그런 산문”과 닮았습니다. 그날 저녁을 먹으려고 호텔로 되돌아오자마자 화자와 조르바는 마담 오르탕스를 식탁으로 초대해서, 귀족들의 애첩으로 지내온 그녀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듣습니다. 조르바는 그녀에게 부불리나(그리스 해군 여성 사령관 이름)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자기는 카나바로(카나바로 제독이라는 실제 인물)라는 애칭을 취합니다.

 

그 이튿날, 광산은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회주의적인 이상을 품고 있는 화자가 그 노동자들을 개인적으로 알려고 시도하지만, 조르바가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인간은 야수란 말이오. 당신이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하지만 잘 대해 주면 결국 당신을 잡아먹고 말 거요.” 조르바는 일에 자기를 던지는 타입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온전히 몰두하고 누구와 함께 있든지 그 순간에 몰두하는 삶의 태도를 견지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일하면서 방해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하지요. 화자와 조르바는 다양한 인생사에서부터 종교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들에 대해 긴 대화를 많이 시도합니다. 서로의 과거사와 어떻게 각자가 현재의 위치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화자는 인간과 인생에 대해, 종이와 먹물에 파묻혀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많이 배우게 됩니다. 자신의 지난 삶이 허비된 삶이라고 여기며 ‘진리를 발견한’ 조르바를 부러워하면서 이렇게 속으로 외치기도 합니다.

 

“스펀지 행주를 꼭 쥐고 그동안 내가 읽고 보고 들었던 것들을 모두 말끔하게 닦아낸 후, 조르바의 학교에 입학하여 위대하고 진실한 문자를 새로 배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내 삶은 얼마나 달라질까! 적어도 오감을-온 피부로 말이다. -한껏 사용하여 모든 걸 즐기고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게다. 달음박질치고, 씨름하고, 헤엄치고, 말에 올라타 질주하고, 배를 젓고, 자동차를 몰고, 소총 쏘는 법을 배울 게야. 내 영혼을 육신으로 채우고, 내 육신을 영혼으로 채우며 결국 태곳적부터 앙숙이었던 이 둘을 내 안에서 서로 화해시킬 수 있을 게다.”

 

게다가 화자는 조르바와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의 경험을 통해, 인생에 대한 새로운 활기를 흡수하게 되지요.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비극 사태가 연이어 크레타섬에 발생하게 됩니다. 화자와 하룻밤 함께 지낸 아름답고 열정적인 과부 소르멜리나가, 사모하던 그녀로 인해 자살한 한 청년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받던 중 공격을 받아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게다가 조르바와 교제하고 있던 마담 오르탕스도 독감이 들어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됩니다. 그 후에는 이전에 섬 안의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알게 되었던 자하리아스 신부가, 수도원에 등유로 불을 지른 후에 숨을 거두는 사건도 발생하게 되지요. 마을 사람들의 비정하고 부도덕한 태도 때문에 소원함을 느끼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자와 조르바가 계획한 목재 운송 사업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갑니다. 화자는 가진 돈을 깡그리 날려 버렸지만 조르바와 함께한 생활이 자기 가슴을 넓혀 주고, 조르바의 모든 말이 자기 영혼에 안식을 주고, 복잡한 인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로 인도하여, 문제 해결의 정상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화자는 결국 육지로 되돌아가게 되지만, 크레타섬을 떠나기 전에 친구인 스타브리다키스가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게 됩니다.

 

조르바와는 헤어졌지만 그 두 사람은 각자의 여생 가운데 서로를 기억하지요. 비록 조르바가 여러 해에 걸쳐 아토스산, 루마니아, 시베리아 등지에서 보낸 자기의 여행 과정과 일거리, 그리고 25살짜리 과부 여인과 결혼한 것과 같은 내용을 화자에게 알리는 편지를 보내곤 하지만, 화자와 조르바는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를 방문해달라는 조르바의 초대도 화자는 수락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느 날 화자는 세르비아 스코피아 근처에 있는 한 학교 교장에게서, 조르바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한 통 받게 됩니다. 그 교장은 화자에게 그에 대한 조르바의 유언(“<...> 내 평생 이 짓거리 저 짓거리 별짓 다 해 봤지만 아직도 못한 게 있소. 아, 나 같은 사람은 천년을 살아야 하는데. 그럼 잘 자시오!”)을 알려주면서, 미망인이 죽은 남편의 소원에 따라 화자가 그녀의 집을 방문해서 하룻밤 묵은 후 조르바의 산투리를 가지고 가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작품의 한글 번역문 인용: 그리스인 조르바”<김욱동 역-민음사>, 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오상빈 역-애플북스>, 영혼의 자서전”<안정효 역-열린책들>)

 

-조르바와 실존주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1946년에 출판된 이후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영화화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자유인의 표상으로 전 세계 독자들의 가슴속 깊이 남아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이 책을 다룬 평론가들 중에는 이 책과 실존주의와 연관 짓는 시도를 한 이들이 많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나 사르트르나 카뮈가 반색할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르바라는 작중 인물은 이 황량한 우주에 홀로 내던져진, 혹은 “피투”(被投)된 존재인 인간이 지향해가야 할, “기투”(企投)하는 삶을 영위한 전범으로 여길 만한 존재입니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이란 “자신이 선택하지도, 만들지도 않은 세계에 자의와 상관없이 내던져진 존재”로 보면서, “인간은 피투성(被投性=내던져져 있음)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하이데거). 이러한 선언을 들은 서구인들은 한 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신의 분노에 의해 인간이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신이 죽어버린 상태에서 인간이 마치 고아처럼 이 세상에 내버려진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내던져져 있는 상태에서 비롯된 존재적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이 말하거나 행동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삶의 양태가 드러납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하이데거는 “퇴락”(頹落)이라고 하고, 그 방식을 채택하는 사람을 “세인”(世人)이라고 불렀습니다. 참된 자기 자신으로서 사는 “본래적 삶”이 무너져 내린 경우이지요. 그 해결책은 우선 자신이 퇴락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양심의 부름”에 응답하여 “양심을-가지려고-원함”으로써 이룩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참된 자신의 “본래적 삶”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른 해결책은 자신이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되어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즉 “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 혹은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봄”의 상태이지요. 실존주의가 지향하는 “실존”(實存)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피투된 유한한 삶을 수용하고 세인의 퇴락한 삶의 방식 대신 양심에 따라 자신만의 진정한 존재 가능성을 인식한 상태인 것이지요. 이 실존이란 개념은 서구 사회에서 르네상스 이후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언급된 “자기실현”(自己實現)이란 개념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도록 독려합니다. 하이데거는 “기획투사”(企劃投射)를, 사르트르는 “앙가주망”을 천명하지요. 전자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한 후 그것을 향해 스스로 자기를 던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후자는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스스로를 잡아매는 것을 뜻합니다(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참조).

 

조르바가 이런 실존주의의 이상적 측면을 구현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 봅니다. 우선 조르바는 자신이 피투된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게 마담 오르탕스가 독감으로 인해 죽은 후 극한 슬픔에 빠진 조르바는 오랫동안 공부 많이 한 화자에게, 인간이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창조되었고 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보스 양반, 이 모든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도대체 누가 창조했소? 누가 창조했건 왜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서 조르바의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로 가득 찼다. “..... 왜 우리는 죽는 걸까요?” (...)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듣고 싶소. 보스는 오랫동안 청춘을 불사르면서 모르긴 몰라도 몇 트럭 분량의 종이에서 마법의 주문을 읽으며 뭔가 정수를 얻어 냈을 테지요. 그래 무슨 정수를 찾아냈소?” 조르바의 목소리는 너무 고뇌에 찬 나머지 그만 숨이 막힐 정도였다. (...) “나도 늘 죽음을 내려다보고 있소. 죽음을 응시하지만 무섭진 않아요. 하지만 ‘나는 저게 좋아!’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소. 그렇소, 난 죽음을 좋아하지 않소. 눈곱만큼도요. 나는 자유인이지 않소이까? 그래서 동의할 수가 없는 거요! 

 

피투된 존재임을 인식하면서도, 조르바는 결코 다른 세인들이 가는 길을 걷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인간이란 존재가 사악하다고 보고 인간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기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짐승이나 야수와 같은 존재라고 인식합니다.

 

“화내지 마쇼, 보스 양반. 난 그 어떤 것도 믿지 않소. 인간의 본성을 믿었다면, 하느님도 믿고, 또 악마도 믿겠지. 그건 엄청나게 골치 아픈 일이오. 그랬다간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 문제를 일으킬 거요, 보스. (...) 그래, 없소. 아무것도 믿지 않아.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합니까? 난 아무것도 믿지 않고, 이 조르바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아요. 조르바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아서가 아니요. - 결코, 결단코 더 낫지 않지! 조르바란 녀석 또한 같은 야수에 지나지 않으니까.” 

“(...) 우리는 바지를 입고 셔츠에 칼라를 달고 모자를 쓰고 있지만 여전히 노새, 늑대, 여우, 돼지 같은 짐승과 다를 바 없어요.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들 하죠. 누가요, 우리가요? 난 그 더러운 인간의 면상에 침을 탁 뱉겠소이다!” 

 

그가 세인으로 여긴 이들 중에는 종교인들도 큰 몫을 차지합니다. 수도원이라는 성채 속에 거하면서도, 온갖 욕심과 일탈로 십자가 복음을 짓밟는 명목상 종교인들 말입니다. 한번은 화자와 조르바가 수도원을 방문하는 길에서 그 수도원을 떠나려고 하는 자하리아스 수도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예배드리러 수도원에 간다는 그 두 사람에게 돌아가라고 말하고는, 그곳은 “성모의 정원이 아니라 사탄의 정원”이라면서, “돈, 젊은 사내들, 다음 수도원장은 누가 될 것인가, 이 세 가지가 바로 수도사들의 삼위일체요!”라고 외칩니다. 그 말이 참이라는 것을, 그 수도원을 방문해서 그곳 수도사들을 만나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조르바의 일갈이 떨어지지요.

 

“맙소사,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소?” (...) “사내놈들도 아니고 계집들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 노새 새끼들이구먼! 지옥에나 어울릴 망할 놈들!” (...) “놈들이 죄다 몸 안에 악마를 하나씩 품고 있소. 이놈은 계집을 원하고, 이놈은 소금에 절인 대구를 원하고, 이놈은 돈을 원하고, 또 이놈은 신문을 원해요. 오, 저런 멍청한 놈들을 봤나! 저놈들 대갈통 속을 씻어 내려면 속세로 내려와서 원하는 걸 신물 나게 진탕 누려 봐야 하오.” 

 

바로 이런 연유로 조르바가 나중에 자하리아스 수도사가 등유로 그 수도원을 불태울 계획을 밝히자 그 구체적인 방안을 그에게 제안해주게 됩니다.

 

세상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이런 인간의 사악한 모습과 부당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접한 조르바는, 자신도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왔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심지어는 마케도니아 혁명대의 유격대원으로서 조국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테러를 감행하면서 다른 가족이 파괴되는 것도 경험하게 되지요. 그 후에 그는 자기가 대의명분으로 삼은 조국, 종교, 재물 등과 결별하고 그것들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선택합니다.

 

“보스 양반, 내 말 좀 들어 보쇼. 이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부당하고, 부당하고, 또 부당한 거요! 난 이놈의 세상이 하는 짓거리를 인정할 수가 없어. (...)

“(...) 나는 뱃사람 신드바드요. 뭐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다 돌아다녔다는 건 아니오. 절대로 그렇지 않아. 하지만 난 도둑질도 해 봤고, 사람도 죽여 봤고, 거짓말도 해 봤고, 계집도 한 트럭은 데리고 자 봤소. 계명이라는 계명은 깡그리 어긴 인간이란 말이오. 

“그렇게 해서 난 해방됐소.” 그가 말했다. “아저씨의 조국으로부터 해방됐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내 조국으로부터 해방됐소.” 조르바는 단호하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조국으로부터, 신부들로부터, 그리고 돈으로부터 해방되었소이다. 이제 체로 치는 행위는 더 이상 하지 않아. 사물을 체로 치는 행위는 이제 손 뗐소. 모든 일을 단순하게 생각하려 하오. 당신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난 지금 나 자신을 해방시키고, 한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는 중이오.” (...)

 

이런 조르바에게도 끝까지 내내 해방될 수도 없고 자유로울 수 없었던 현실이 엄존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야기하는 절대자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조차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지요. 침상에 누워 유언을 던진 그가 마지막으로 취한 행동이 뭘까요?

 

"유언이 끝나자마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우리는-부인인 류바, 저(교장), 그리고 이웃의 장정 몇 사람은-달려들어 그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분은 창틀을 거머쥔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먼 산을 바라보며 웃다가 말처럼 힝힝거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는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삶의 방식이 바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처럼 사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내가 작은 마을을 지나고 있었어요. 아흔 살 먹은 고루한 영감탱이 하나가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저기요 할아버지.’ 내가 물었죠. ‘정말로 아몬드 나무를 심고 계신 건가요?’ 그러자 허리가 땅속으로 기어 들어갈 것 같은 그 영감탱이가 돌아서서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젊은이, 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꾸했죠. ‘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걸요.’ 보스 양반, 이 두 사람 중 누구 말이 더 맞을까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처럼 사는 방식이란, 한 번에 한 가지씩 순서대로 삶을 영위해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 앞에 음식이 있으면, 우리 마음을 그 음식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튿날 우리 앞에 갈탄 광산 작업이라는 일감이 있으면, 우리 마음을 갈탄 광산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을 덧붙이지요. 이렇게 매일 매 순간 자기 앞에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인식하고 수용하면서, 조르바는 그것을 누리며 그것에 자기의 전 생애를 걸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수용하고 죽음에서 해방되는 길을 몰랐기에, 조르바가 정작 두려워한 것은 죽음보다도 늙는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중엔 늙지 않게 보이려고 머리 염색까지 감행하지요.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염색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살아가는 제 눈이 휘둥그레지게 한 사건입니다. 아니 이 머리 염색이란 게 그 천하의 자유인 조르바도 고민 끝에 굴복할 문제였단 말인가?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게 있어 물어보겠소, 보스. 나는 다른 건 하나도 두렵지 않아요. 그런데 이 문제를 생각하면 밤낮으로 마음을 안정할 수가 없소. 보스, 늙는다는 것, 나는 이게 두렵소. 하느님, 제발 우리를 보호하소서!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바람 한 점에 촛불이 꺼지듯 한 방에 그저 훅! 가는 거지요. 하지만 늙는다는 것은 엄청난 수치요.” 

“염색했소이다, 보스 양반! 하도 재수가 없길래 염색해 버렸소.” “왜요?” “뭐, 자존심 때문이라고나 할까. 하루는 롤라의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었소. 정확히 말해서 손을 잡은 건 아니고..... 이렇게, 손이 거의 닿지도 않았소. 그런데 우리 뒤에 망할 놈의 애새끼가 하나 따라오는 거 아니겠소. 이 쪼그만 꼬마 녀석이 말이오. ‘거기, 할배. 이놈의 망할 올챙이 같은 녀석이 계속 부르는 거요. 헤이, 할배, 손녀랑 어디 가세요? 그러자 불쌍한 롤라가 창피해하지 않겠소. 그래서 염색했소이다. 롤라가 창피하지 않도록 바로 그날 저녁 이발소로 달려가 염색을 했어요. 

 

결국 조르바가 본래의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퇴락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양심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이룩될 수 있었지만, “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 혹은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봄”이라는 차원은 거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발견해서 깨달은 조르바는 다른 사람은 누구라도 믿지 못해도 자기만은 믿는다고 역설합니다.

 

“내가 조르바를 믿는 이유는, 유일하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유일하게 내가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오. 그 외의 존재들은 죄다 유령이오. 조르바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소화시키거든.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나머지 사람들은 모조리 유령일 뿐이오. 내가 죽으면 모든 게 사라지는 거요. 조르바의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거란 말이오.” 

 

조르바의 본래적 자기 모습에 주목할 때 제게 가장 경이로운 면모는 바로 그의 어린아이 같은 심성입니다.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처음 보듯 했고, 끊임없이 경이로워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기적”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주위를 둘러보며 외칩니다. “이 무슨 기적이란 말인가!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마치 위대한 선지자와 시인들의 눈앞에서처럼 그의 눈앞에는 “아침마다 신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보스!” 조르바가 믿기지 않는 듯 외쳤다. “정말로 이 세상을 난생처음 보는 것 같소. 저기서 움직이고 있는 저 푸른색은 도대체 무슨 기적이오? 뭐라 부르는 거요? 바다요? 바다 말이오? 꽃이 그려진 초록색 앞치마를 두고 있는 저건 또 뭐요? 대지요? 도대체 어떤 열성가가 그런 것들을 만들어 놓은 거요! 맹세코 말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것들이오, 보스.”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어이, 조르바 아저씨!” 내가 소리쳤다. “지금 노망난 건가요?” “웃지 마쇼, 보스! 어이, 보이지 않소?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두 사람이 마법에 걸려 있는 거요!” 그는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오더니 춤을 추면서 새봄의 망아지처럼 풀밭을 뒹굴었다. 

 

이런 조르바의 순수한 본래적 자아의 모습은, 자신이 발견한 존재 가능성에 모든 것을 던지는 삶의 자세 가운데 놀랍게 구현됩니다. 언젠가 조르바는, “어설프게 반쯤 끝낸 일들, 대화, 죄악, 덕성, 이런 것들 때문에 오늘날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오.”라고 언급하면서, “목표까지 도달하라. 모두들! 투쟁하라! 투쟁에서 승리하라! 하느님은 우두머리 악마보다 덜떨어진 악마를 더 싫어하신다.”라고 외칩니다. 그는 일할 때 전심전력합니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쉬지 않고 질주합니다.

 

“일할 적에는 말 걸지 마쇼.” (...) “내가 둘로 쪼개지는 수가 있으니까.” (...) “이걸 보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소? 난 일에 나 자신을 완전히 맡겨 버립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몸을 뻗어 내가 씨름하는 돌이나 갈탄을 - 아니면 산투리를 말이오. - 정복하려고 나 자신을 확장시킵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나를 갑자기 건드리거나 말을 걸어서 뒤를 돌아보게 만들면 난 두 쪽으로 쪼개지고 말아요. - 그걸 당신이 어떻게 이해하겠소!” 

“내 인생 계약서에 종료 시한이 적혀 있지 않으니 나는 가장 위험한 경사로에서도 브레이크를 풀어 버립니다. 인간의 삶이란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가는 철도와 같소이다. 나는 (...) 이미 오래전에 브레이크를 던져 버렸어요.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오. (...) 나는 그저 내키는 대로 밤낮으로 질주를 계속하고 있소. 충돌해서 산산조각이 난다 해도 그게 무슨 대수요? 내가 잃을 것이 뭐 있겠소? 아무것도 없어요. 만약 내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가정해 보쇼. 그런다고 부딪히지 않을 것 같소이까? 그래도 마찬가지일 거요. 그러니 전속력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는 거죠! (...) 사람마다 바보스러운 데가 있지만,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는 자기가 바보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오.”

 

이만하면 실존주의자 철학자들이 조르바를 얼마나 귀히 여길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까? 비록 이 세상에 홀로 내던져져 있지만, 퇴락된 자기 모습을 극복하여 본래적 모습을 회복한 후에 자기 가능성에 전력투구하는 모습이 조르바의 인생 속에 고스란히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인생의 무의미성에 고뇌하던 많은 현대인들에게 이 “그리스인 조르바”가 준 크낙한 위로도 읽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원래 무의미한 삶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자신의 본래적 모습의 회복이라는 화두와 자신이 선택한 자기 가능성에 한 몸 던지는 기획투사라는 화두는, 캄캄하기만 한 인생에 새로운 의미의 광명을 부여해 준 것과 진배없겠지요.

 

-조르바와 코헬렛-

한 번뿐인 인생, 하시라도 죽음에 직면해야 하는 인생을 염두에 두면서, 매일 치열하게 일하고 음식과 성과 음악과 자연 만물을 즐기고 찬양하는 조르바를 보면서 구약의 전도서가 떠올랐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행복과 즐거움(happiness and enjoyment)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전도서처럼 노골적으로 증거하는 성경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래 구절들을 한 번 묵상해 보세요.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3:12, 2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5:18)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9:7, 10)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35세인 백면서생 화자에게 조르바가 충격적인 인물이었듯이,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를 읊조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도서는 충격적인 책입니다. 전도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코헬렛’(qohelet)으로 발음되며 모으다(assemble)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그리스어(영어도 동일함)가 바로 ecclesiastes로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연설하는 사람 혹은 설교자라는 의미를 띠고 있으며, 전도서 본문에서는 ‘전도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전도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주는 것은 우선 그 저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부터 시작됩니다. 전통적으로는 솔로몬이라고 주장되었지만, 그 내용을 꼼꼼히 읽어가다 보면 그 주장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결정적인 것은 1장의 프롤로그(1:1-11)와 12장의 에필로그(12:9-14)에서 코헬렛(전도자)을 3인칭으로 받는다는 점과 에필로그에서는 자기 아들에게 권면하는 인물, 즉 ‘제2의 지혜자’(frame-narrator) 혹은 ‘숨어 있는 저자’(the implied author)라고 불리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 두 부분은 전도서의 본문(1:12-12:8)에서 코헬렛을 일인칭(예, 1:12)으로 사용하는 것과 확연한 대조를 보이고 있지요. 그렇다면 전도서는 익명의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코헬렛을 소개해 주고, 본문을 통해 코헬렛의 주장을 서술해가다가, 에필로그에서 코헬렛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평가해 주는 구조를 가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전도서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것이 바로 욥기입니다. 욥기의 경우에도 프롤로그(1-2장)와 에필로그(42장)가 존재하고 그 둘 사이에 무려 서른다섯 장(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말씀하시는 38-41장 제외)이나 되는 본문 내용이 등장하지요. 그 본문 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내용들이 수두룩합니다. 특히 욥의 세 친구가 한 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옳지 않다고 거듭 말씀하시면서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다고 하실 정도였습니다(42:7-8). 심지어는 욥의 고백 내용 중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도 있지요(예컨대, 자신이 태어난 날 저주하는 것-3:1 이하). 그래서 욥기를 읽을 때는 이 에필로그에서 하나님께서 평가해주신 것에 근거하여 주의 깊게 그 내용을 이해하고 해석해가야 합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제시해주신 내용과 견주어 이해하고 해석하는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전도서의 경우에도 적용되지 않을까요? 에필로그에서 제시된 궁극적인 인생의 원리, 즉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2:13-14)는 말씀의 기조에 따라 전도서 내용을 이해해가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전도서에서 세 개의 표현, 즉 “해 아래”(30회), “헛되다”(22회), “바람을 잡으려는 것”(7회)이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도서 속에는 회의주의자나 유물론자나 세속주의자들의 언명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인생의 헛된 측면(the futility of life)을 묘사하는 내용을 분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12:10)는 평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욥기의 사정과는 차원이 다른 진리의 말씀들이 계시되어 있어, 실제적인 믿음에 대한 지혜(the answer of practical faith)를 포함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가 요청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전도서 1-3장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장에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코헬렛의 천명과 함께(1:1-2), 자연이란 닫힌 시스템이고 역사는 단지 사건들의 연속에 불과하며(1:3-11), 지혜는 사람을 실망시킨다는 점(1:12-18)을 지적합니다. 2장에서도 쾌락이란 사람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며(2:1-11), 지혜도 쾌락을 주는 것들보다 더 높이 평가되겠지만, 결국 죽음이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똑같이 닥친다(2:12-23)고 언급합니다. 그렇지만 2:24-26에서는 이런 헛된 측면에 대한 실제적인 지혜를 제공해줍니다. 즉 인생을 하루하루씩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며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당신께 감사하고 당신을 영화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2:24-26)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새번역)

 

이 지혜는 3장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인생을 살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계획을 아시고 계심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3:1-15). 그다음으로 헛된 인생의 측면인 불의(injustice)의 문제를 거론한(3:16) 후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3:17)는 실제적인 지혜를 제공해줍니다. 그리고 인간이 짐승들처럼 죽는 헛된 인생의 면모를 제시하면서(3;18-21),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생에서 영광 받으셔야 한다(3:22)는 실제적인 지혜를 일러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해 주신 이 세상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진선미가 계시되어 있는 매개체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의를 깨닫게 되고 그 혜택들을 누리며 삽니다. 이 점을 성경이 우리에게 밝히 계시해주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의 삶이 자연과 음식과 예술과 성과 인간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우리가 그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헛된 것’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것들을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인식한 채, 그것들을 취하는 것을 인생의 주된 목적으로 여기게 될 때입니다. 이 차원 또한 성경은 곳곳에서 밝히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 아래 있는 삶을 올바로 수용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결코 회의주의(scepticism)나 비관주의(pessimism)가 아닙니다. 그 길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전도서 12:13-14).

 

(전12:13-14)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 (새번역)

 

마치 현대판 코헬렛처럼 인생의 온갖 주제에 대해 자기 견해를 자신 있게 설파한 조르바의 삶을 평가하는 데에도 이런 시각이 주효할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조르바는 퇴락한 자신의 삶을 일깨우는 “양심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본래의 자기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자연이 베풀어준 온갖 향연을 만끽하면서도, 갖가지 굴레를 집어던진 채 자유를 누리고 해방을 외치며 일평생 살아갔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가 경험하고 변호하는 성적인 자유를 적나라하게 고려해본다면 그는 “난봉꾼 중의 난봉꾼”이기도 했습니다. 여성을 한 없이 존중하고 찬양한다고 하면서도, 수도 없이 많은 여성을 정복한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회복하는 자유를 누렸다고 평가해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봄”이라는 차원은 거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되어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수용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가 일부러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자기는 죽음을 응시하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여러 번 언급합니다. 다만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아직 못한 게 있어 천년 동안 살기를 원합니다. 아마도 이 점은 조르바만의 한계가 아니라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카뮈가 주도한 20세기 실존주의 신학의 한계일 것입니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기에, 아니 믿지 않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믿지 않는 것이지요. 죽음을 향해 미리 한번 달려가 보는 것만으로 죽음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신약으로 가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코헬렛이 겪었던 허무와 헛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보게 된다. (...)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코헬렛이 가장 고통스러워한 것들 속에서 심오한 의미들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는 지혜, 수고, 사랑, 삶의 의미를 회복시키셨다. 결국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코헬렛이 가장 크게 두려워한 것을 정복하셨으며, 사망이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 입구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딜러드와 롱맨)

 

-조르바와 카잔차키스-

비록 “그리스인 조르바”를 전도서의 시각으로 독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인 조르바”가 전도서가 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 구성과 내용이 서로 비슷하다고 해서 욥기가 전도서가 될 수 없듯이, “그리스인 조르바”도 전도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각각 독특한 양식과 내용을 품고 있는 창의적인 문학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들에게 영감을 허락해주셔서 당신의 오묘한 뜻을 펼쳐 보이신 예술 작품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 작품 한 작품 대할 때마다, 열린 마음과 외경심을 갖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를 귀 담아 듣고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조르바를 영웅으로 보는 것과 카잔차키스를 영웅으로 여기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조르바가 카잔차키스의 전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조르바가 카잔차키스 인생 여정에 있어 주요한 도반 중 한 사람이긴 했으나, 계속 안주할 수 있는 피난처나 인생 종착지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카잔차키스의 인생 종착지는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1951)을 출판한 이후에 바티칸이 그 작품을 금서 목록(the Index)에 포함시킨다고 발표했을 때, 그가 “주님, 당신의 법정에 저는 상고합니다”("In Your Courtroom, Lord, I Appeal."[터툴리안의 고백])라고 외친 이유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로서 자신의 신앙 양심과 상상력에 의해 그 작품을 집필했던 것입니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삶에서 오직 “가장 높은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평생 치열하게 살아간 작가입니다. 학창 시절부터 베르그송에게 철학을 배우고 니체와의 유대를 다지며 지내다가, 니체를 버리고 불교에 빠졌고, 다음에는 불교에서 레닌으로, 나중에는 레닌에서 오디세우스로 옮겨 가면서 자신의 영적 여정을 진행해갔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실제 인물인 조르바와의 만남은 1917년, 그의 나이 30대 중반에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그해에 이루어진 러시아 혁명과 조르바와의 만남으로 인해, 당시에 행동적인 삶을 열렬하게 흠모하면서 그런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했던 카잔차키스의 욕망에 불이 붙게 되었습니다. 자유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혁명이란 화두가 그를 격렬하게 몰아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우정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였습니다. “행동과 명상 사이의 갈등”을 가장 큰 주제로 다루었다고 평가되는 책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과 종교 및 이데올로기를 경험하고 그 가운데서 자기를 확장하고 상승해가던 중에, 그는 마침내 그리스도에게로 귀착하게 됩니다. 그의 작품들을 여러 권 영역한 피터 빈이 지적한 대로, “과거의 모든 과정이 풍요하게 결실을 맺은 그리스도에로의 귀착”이었습니다.

 

이렇게 치열했던 그의 인생을 요약한 글 한 자락을, 그의 사후에 출판된 “영혼의 자서전”(Report to Greco)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전체가 상승, 절벽, 고독이다. 우리들은 많은 동료 투쟁자와, 많은 사상과, 거대한 일행과 함께 출발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올라가도 정상이 이동하여 자꾸 멀어지면 다른 투쟁자들과, 희망과, 사상은 숨이 차서 더 높이 올라갈 마음이나 능력이 없어져, 우리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움직이는 정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우리들만 남았다. 우리들은 언젠가는 정상이 움직이지 않아서 우리들이 거기에 다다르게 되리라는 순진한 확신이나 교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그곳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높은 그곳에서 행복과, 구원과, 천국을 찾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들에게는 올라간다는 행위 바로 그 자체가 행복이요, 구원이요, 천국이기 때문에 올라갔다.”

 

이 글 한 자락을 읽는 중에 사도 바울의 빌립보서 고백이 떠오른 사람이 저 혼자뿐일까요?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여러분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3:11-15, 새번역)

 

그러므로 “그리스인 조르바”(1946년)의 독해는, 카잔차키스가 이어 집필한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1951년)과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t. Francis of Assisi, 1953)와 견주어 비교해 보며 이루어지는 게 이상적입니다. 카잔차키스의 영적 여정과 집필 방향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자타가 공인하는 조르바의 자유를 흠모하는 이들이 전 세계에 무수하게 존재하지만, 그 자유는 프란체스코가 고백하고 누린 자유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조국, 종교, 재물, 인습 및 도덕으로부터의 자유였지만, 후자는 육신의 정욕 및 세상 명예와 같은 자기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였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는 입버릇처럼 되풀이했다. “아무런 고집도 피우지 않고 ‘나’라는 소리는 입 밖에도 내지 않고 살아가니 이 얼마나 즐거워요! 내가 누구라는 것도 잊고 하느님의 바람결에 따라 아무렇게나 나를 맡겨두는 것이 얼마나 신명나는 일인가요!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자유가 아니던가요! 레오 형제, 어떤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냐고 누군가 질문하면 당신은 뭐라고 답하겠소. 그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종이라오! 그 밖의 자유는 사실, 속박이라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이처럼 그리스인 조르바만으로는 카잔차키스의 전모를 읽어내기 힘듭니다. 그 책만으로 카잔차키스를 조르바와 동일시하는 것은 속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과연 “그리스인 조르바”(1946년) 속의 화자가 35세의 카잔차키스가 아니라, “성 프란체스코”(1953년)를 출판하던 70대의 카잔차키스였다면 어떤 반응과 평가를 남겼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