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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글쓰기가 예술로 승화된,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과 “1984”(1)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9. 11.

정치적 글쓰기가 예술로 승화된,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과 “1984”(1)

-우리나라 정당의 위상-

귀국한 지 2년 반 동안 많은 모임과 교제에 참여했습니다. 예배는 물론이지만 동창회부터 시작해서 소그룹 모임이나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까지 다양한 형태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예배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모임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주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정치였습니다. 평상시에도 인기 있는 주제였지만, 박 대통령이 탄핵되고 문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북핵 사태가 발생하고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진행되며 코로나 사태까지 겹친, 극적인 정치 상황의 연속이다 보니 정치 문제가 최고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한 정치 논의는 주로 일방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우선은 국제 정치보다는 국내 정치에 대한 대화가 절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아무래도 국제 정치 상황은 시급하고 근접한 국내 정치 상황보다 관심이 덜 가나 봅니다. 다음으로는 야당을 지지하는 참석자들이 거의 모든 대화의 내용을 주도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주로 지내고 다닌 곳이 대구와 부산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쉬웠던 점은 국내 정치와 더불어 국제 정치 상황도 논의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었습니다. 자주 전달되는 동아시아나 미국 정치 상황에 대해서도 나눌 수 있겠지만,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및 남아메리카에 대해 접한 뉴스나 유익한 지역 정보들을 나누며 우리의 정치적 시각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힐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리고 국내 정치에 대해 나눌 때에도 특정 정책에 대해 진전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이 그리웠습니다. 예컨대 작금에 주요한 관심사로 떠 오른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 대화할 때도, 안정된 부동산 정책이란 과연 어떠한 면모를 갖추어야 할지를 토의할 수 있는 분위기 말입니다. 특정 정당과 인물을 거의 동일체로 보면서 매도하거나 지지하는 일은 다반사였으나, 현 정치 상황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균형 잡힌 시각을 들을 기회가 희귀했기에 이런 분위기가 더욱 간절했습니다. 더구나 특정 언론들이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불분명하거나 왜곡된 보도가 대화의 주축을 이루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정치적인 논의가 좀 더 생산적이고 건전한 방향으로 진전되도록 도울 수 있는 한 가지 시각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저자인 채사장에게서 배웠습니다. “다분히 주관적인 판단임을 명심하고, 세부적인 구분은 독자가 다른 사람들과의 지적 대화 속에서 스스로 정립하길 바란다.”라고 전제하면서 그가 나눈 우리나라 정당의 위상은 제게 소중한 정치적 안목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2014년 그 책 출간 당시 새누리당과 맞선 구도에 있던 민주당이 중도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보수 정당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평가는 “세계의 보편적인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통해 판단”한 것으로서, 두 정당 중 어느 쪽이 집권을 한다 해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자본주의, 그것도 당시에는 신자유주의의 모습을 유지하게 되어 있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그 근거는 이러합니다. 우선 보수와 진보의 궁극적인 차이를 세금과 연결 짓는 그는, 보수는 세금과 복지를 줄이려는 방향성을 갖고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지만, 진보는 세금과 복지를 늘리려는 방향성을 지니고 정부의 개입을 중시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리하여 보수와 진보의 양극단에 각각 위치한 초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현재로서는 주요 논점으로 고려할 필요가 없지만, 그 사이에 위치한 신자유주의, 수정 자본주의 및 사회민주주의는 전 세계 정치 현실에서 주요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체제들은 GDP 대비 세율이 각각 대략 20퍼센트, 40퍼센트, 60퍼센트대 정도에 이른다는 점에서 서로 구별됩니다. 개별 국가의 세법이 복잡함을 고려하더라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신자유주의를 실행하는 한국, 미국, 일본의 경우에는 대략 25퍼센트 내외, 수정 자본주의를 실행하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경우에는 대략 40퍼센트,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스웨덴, 덴마크의 경우 50-60퍼센트 내외의 세율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이제 질문해 볼 차례입니다. 우리나라 현 정부가 수정 자본주의나 사회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유럽 국가들 수준까지 세금을 인상한 적이 있었나요? 그리고 현 여당인 민주당과 야당인 국민의힘이 과연 이 세율의 관점에서 그렇게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나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나라 여당과 야당은 여전히 신자유주의를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그렇다는 답변이 나오더라도 상황은 별로 달라질 게 없습니다. 여당과 야당의 선택은 신자유주의, 수정 자본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중의 선택이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포함하는 선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특정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이 여당을 공산주의로, 야당을 극우(초기 자본주의)로 매도하며 여론을 몰고 가려고 하는 것은 국민들을 기만하는 정치 행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깨어 있는 국민들이 그들을 가려내어 심판할 날이 올 것입니다. 결국 한 나라의 정치적인 현실과 장래는 성찰하고 깨어 있는 국민들의 존재와 그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채사장이 지적한 대로입니다. 인용문 마지막 문장에서 ‘어떤 정당’이란 표현 대신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이라는 구절이 들어간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비리와 부패의 문제가 아니라 이론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에서라면 선한 정당도, 악한 정당도 없다. 각 정당은 우리 사회의 특정 계층의 입장을 대변할 뿐이다. 새누리당이 자본가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욕할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진보 정당들이 서민과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욕먹고 비난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정치인이나 정당들이 아니라, 어떤 정당이 자신을 대변하는지 모르고 투표를 하는 사람들이다.”

 

인문학과 성서와의 접점을 모색하는 이 블로그에서 이번에는, 정치가 우리 삶 속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인문학과 정치라는 화두를 한번 다루어 볼까 합니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라고 주창하며 진실하고 올곧은 자세로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make political writing into an art)에 매진한 조지 오웰(1903-1950)의 소설 두 편, “동물 농장”(Animal Farm, 1945년)과 “1984”(1949년)를 독해하면서 이 작업에 임하고자 합니다. 올해가 그의 사후 70주년이 됩니다. (두 작품의 한글 번역문은 '미르북컴퍼니'<정영수 역>의 것들을 인용함)

 

-줄거리-

<“동물 농장” 줄거리>

메이너 농장의 늙은 돼지인 메이저는 죽기 얼마 전 농장에 있는 동물들을 소집해서 마지막 연설을 합니다. 잉글랜드에 사는 그 어떤 동물도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의 삶이 고통과 굴종 그 자체인 이유는 그들이 노동하여 생산한 걸 모두 인간이 도둑질해 가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동물들이 겪는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은 인간, 그 한 단어로 요약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해 반역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그 연설 말미에서 ‘영국 동물들’(Beasts of England)이라는 혁명가도 가르쳐 주지요. 그가 죽은 후, 스노볼과 나폴레옹이라는 두 마리의 수퇘지가 지휘권을 장악한 채 인간에 대한 반역을 준비해서 실행합니다. 그리하여 술주정꾼에다 무책임하기까지 한 존스 씨를 농장에서 내쫓아 버린 후에 그 농장을 ‘동물 농장’(Animal Farm)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All animals are equal)를 주축으로 한, 동물주의(Animalism)가 지향하는 일곱 가지 계명(Seven Commandments)도 채택합니다.

 

스노볼이 동물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동안 나폴레옹은 어린 강아지들에게 동물주의의 원리들을 교육합니다. 처음에는 먹거리도 풍부해서 농장은 원만하게 잘 운영됩니다. 돼지들은 자기들을 지도자의 위치로 격상시킨 후에 자신들의 건강을 위해 우유나 사과와 같은 특별한 음식을 따로 챙기기 시작합니다. 나폴레옹과 스노볼은 주도권을 쥐기 위해 계속 갈등을 조장합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스노볼이 풍차를 만들 계획을 발표하자, 나폴레옹은 자기 개를 풀어 스노볼을 쫓아내고는 자기가 동물농장의 지도자임을 선언합니다.

 

나폴레옹은 농장의 지배 구조에 변화를 주면서 함께 토의하는 시간을 없애는 대신 농장 관리하는 돼지 위원회(a special committee of pigs)를 만듭니다. 스퀼러라는 젊은 수퇘지를 통해서 나폴레옹은 풍차에 대한 아이디어가 자신의 것임을 주장합니다. 그 풍차가 생기면 삶이 수월해질 것이라는 약속만 믿고 동물들은 더 열심히 일하게 되지요. 어느 날 폭풍이 닥친 후에 풍차가 무너지자, 나폴레옹과 스퀼러는 스노볼이 그 프로젝트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동물들을 설득합니다. 스노볼이 희생양이 되자, 나폴레옹은 자기 개를 풀어 농장을 대대적으로 숙청합니다. 자기 라이벌인 스노볼과 가까이 지낸다고 자기가 비난하는 동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것이지요. ‘영국의 동물’이란 혁명가는 이제 인간의 라이프스타일을 채택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노래로 대체됩니다. 드디어 동물들은 자기들이 존스 씨 보호하에 있을 때가 더 나았다는 점을 확신하게 됩니다.

 

근처 농장주 중 한 사람인 프레데릭 씨가 농장을 공격하여 발파용 화약으로 동물들이 겨우 복구한 풍차를 박살 냅니다. 비록 동물들이 그 전투에서 이기지만 그 과정에서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되지요. 말 세 마리 몫을 하며 열심히 일해 온 복서를 포함해서 많은 동물들이 부상을 입게 됩니다. 부상을 입었지만 복서는 더 열심히 일하기를 지속한 탓으로 결국엔 풍차 공사장에서 일하는 동안 쓰러집니다. 그때 나폴레옹은 밴을 한 대 보내어 복서를 수의사에게 보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어느 돼지 못지않게 잘 읽을 수 있던” 벤저민은 그 밴 밖의 선전 문구를 보고 그 밴이 도축업자의 것인 점을 간파하고 그를 구하려고 애를 써보지만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스퀼러가, 그 밴을 병원에서 구입했지만 아직 이전 주인이 쓴 문구를 다른 것으로 칠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사실은 나폴레옹이 자기의 가장 충직한 동지를 위스키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팔아버린 것이지요.

 

세월이 흘러가면서, 돼지들은 점점 사람들을 닮기 시작합니다. 두 다리로 바로 걷고, 채찍을 쥐며 옷을 입게 된 것이지요. 일곱 계명도 축약되어 단 한 구절만 남습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nimals are more equal than others.) 나폴레옹이 새로운 동맹을 기념하기 위해서 돼지들과 그 지역 농부들을 위한 파티를 엽니다. 그는 혁명적인 전통에서 비롯된 관행들을 다 없애고 ‘메이너 농장’이라는 옛날 농장 이름을 다시 살립니다. 동물들이 돼지들과 인간들을 번갈아 보지만, 이젠 그 둘 사이를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984” 줄거리>

1984년 현재 전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세 초국가(super-states)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국가들은 각각 다른 한 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다른 한 나라와는 평화를 유지하는 식으로 운영해 갑니다. 주인공 윈스턴(39세)은 오세아니아에서 삽니다.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BIG BROTHER IS WATCHING YOU.)라고 적힌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는 이곳은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 및 상호 신고 체제를 통해 모든 국민들의 삶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감시하고 통제하는 전체주의 사회입니다. 윈스턴이 언급한 그대로입니다. “동전에도, 우표에도, 책 표지나 현수막, 포스터, 담뱃갑 포장지 등 어디에나 빅브라더의 눈이 있었다. 언제나 그의 눈에 감시를 받고 그의 목소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잘 때든 깨어 있을 때든, 일을 할 때든 밥을 먹을 때든, 집 안에 있을 때든 밖에 있을 때든, 목욕을 할 때든 잠을 잘 때든, 빅브라더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 것이라곤 머릿속 얼마 안 되는 공간밖에 없었다.”(On coins, on stamps, on the covers of books, on banners, on posters, and on the wrappings of a cigarette packet—everywhere. Always the eyes watching you and the voice enveloping you. Asleep or awake, working or eating, indoors or out of doors, in the bath or in bed—no escape. Nothing was your own except the few cubic centimetres inside your skull.)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족은 있지만 그들 간의 사랑의 유대란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폐기될 수 없는 가족 제도 속에서 부모가 아이들을 사랑하도록 권장했지만, 아이들은 부모를 감시하고 부모의 과오를 보고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나라에는 동지는 존재하지만 친구는 없습니다. 동지들 중에서 다른 이들보다 더 친한 동지만 있을 뿐이지요. 여가시간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혼자 있지 않고, 일하거나 식사하거나 단체 오락 활동에라도 참가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독생’(오세아니아 신어로 OWNLIFE, 혼자 생활하는 것)은 개인주의와 기벽(individualism and eccentricity)을 뜻했습니다. 그렇다고 살기도 편리하지 않습니다. 생필품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곳입니다. “모두 면도날을 구하려고 했다. (…) 지난 몇 달 동안 면도날이 품귀 현상을 빚었다. 당원용 상점에서도 언제든지 생활필수품이 동날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단추였고 또 어떤 때는 털실이나 구두끈이었다. 요즘은 면도날이 동나고 없었다. 면도날은 이제 ‘자유’ 시장에서 남몰래 거의 구걸하다시피 해야 겨우 구할 수 있었다.”(Everyone kept asking you for razor blades. <…> There had been a famine of them for months past. At any given moment there was some necessary article which the Party shops were unable to supply. Sometimes it was buttons, sometimes it was darning wool, sometimes it was shoelaces; at present it was razor blades. You could only get hold of them, if at all, by scrounging more or less furtively on the ‘free’ market.)

 

이 나라에서 진리부(the Ministry of Truth) 기록국(the Records Department) 소속 직원으로 일하는 윈스턴은 신문이나 책자와 같은 인쇄 매체에 기록된 내용을 조작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라는 당(the Party)의 표어에 입각하여, 현재 집권하고 있는 빅브라더와 당이 한 말과 정책에 결코 오류가 없도록 과거를 조작함으로써 미래를 지배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작업을 탁월하게 잘 감당해 가면서도 그는 자기가 확실히 사실로 알고 있는 과거가 조작되는 것에 대해 갈등하면서, 내심 언젠가 무산 계급 노동자들(the proletarians)이 혁명을 완수하여 인간의 개성이 존중받는 사회를 건설할 것을 기대합니다.

 

윈스턴은 캐서린과 결혼했으나 15개월 동안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이혼은 허락되지 않으니 별거하라는 당의 지시를 따라 헤어졌습니다. 결혼이란 제도는 ‘아기 만들기’(making a baby)를 위한 도구로만 활용될 뿐 “성적으로 쾌락을 느끼는 성행위는 반역”(The sexual act, successfully performed, was rebellion.)이었고 “성욕은 사상죄에 해당”(Desire was thoughtcrime.)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연애를 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윈스턴은 당의 눈을 피해 비밀스럽게 줄리아(26세)와 만나 연애를 이어갑니다. 어릴 때부터 받은 철저한 훈련으로 자신의 “순결은 당에 대한 충성으로 그녀들 가슴 깊이 각인”(Chastity was as deep ingrained in them as Party loyalty.)되어 있는 여성 당원들과는 달리 육체관계를 통해 쾌락을 느끼는 여성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윈스턴은 줄리아와 함께, 지하 비밀조직인 형제단(the Brotherhood) 일원으로 생각한 오브라이언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 형제단은 빅브라더와 함께 혁명을 주도했지만 그의 사상에 반기를 들고 대항한 골드스타인의 단체였습니다. 그 단체에 가입해서 공작 활동을 하겠다고 고백했지만, 그 섣부른 행동으로 인해 그들은 결국 애정부(the Ministry of Love)에 정치범으로 체포됩니다. 사실상 그 오브라이언은 당의 핵심 인사 중 한 사람이었지요. 각각 떨어진 상태에서 고문 겸한 심문을 받은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고백할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배반하게 됩니다. 의식 깊숙이 줄리아를 향한 사랑을 숨겨 두고 있던 윈스턴은 애정부 101호실에서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인 쥐와 마주하면서 자신의 사랑도 배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엔 “투쟁이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빅브라더를 사랑했습니다.”(the struggle was finished. He had won the victory over himself. He loved Big Brother.).

 

-반공 서적이자 독재 시대의 금서-

이 두 작품은 2000년쯤에 공식 영어판만 무려 4천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에 취임하면서 “1984”의 판매량이 95배나 급증해 7만 5천 부가 새로 간행됐다고 하지요. 박홍규 교수에 따르면 “허위를 조작하고 복종을 요구하며, 외국의 적들을 악마화하는 오웰의 소설 속 정부가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냉전 시기에 영국과 미국이 이 작품을 악용하기도 하고 우리나라는 조지 오웰을 반공 작가로 분류해 두고 이 두 작품을 청소년 필독서로 올리기도 했지만, 중국은 이 두 작품을 금서로 지정해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반공 서적이자 독재 시대의 금서로 취급받고 있는 이 작품들의 현주소를 가리키고 있지요. 사실상 오웰은 이 두 작품이 반공주의 작품으로 오해받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하지요. “1984”에 등장하는 ‘당’의 의미만 보아도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당'이란 표현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여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는 집단일 뿐 어떤 특정 사상이나 체제를 가리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웰은 이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삶의 전 영역이 죄다 통제되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습니다.

 

오웰은 사회주의자로서 절대 권력으로부터 민중이 해방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스페인 내전에도 참여하였다가 머리 총상을 당하는 사고를 겪기도 했지만, 그 기간 동안 공산주의나 파시즘도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이며 핵심 권력 간의 투쟁은 피할 수 없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과 성찰을 통해 개인의 개성이 존중받고 계층 차별이 없는 사회를 꿈꿨던 그가 말년에 내놓은 작품이 바로 전체주의의 실체를 그린 “동물 농장”과 “1984”였던 것입니다. “동물 농장”의 어법으로 이야기하자면 클로버(암말)가 말한 대로, “굶주림과 채찍에서 자유롭고, 모두가 평등하고, 각자는 자신의 능력에 맞게 일하고,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는 그런 동물의 세상(a society of animals set free from hunger and the whip, all equal, each working according to his capacity, the strong protecting the weak)을 꿈꿨던 것이지요.

 

먼저 “동물 농장”은 조지 오웰이 언급한 대로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비난하기 위해 쓴 소설입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1943년의 테헤란 3차 회담에 이르는 약 26년간의 세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 기간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들을 동물의 우화 형식을 빌어서 풍자하는 정치 알레고리(allegory) 형식을 취하고 있지요. 예컨대 늙은 메이저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그의 연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연상시킵니다.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갈등은 일국 사회주의를 주창하여 점진적인 공산화를 꾀한 스탈린과 세계 혁명론을 내세운 트로츠키의 갈등을 빗댄 것이라고 하지요.

 

그렇지만 도정일 교수의 지적처럼 이 작품이 우화(fable)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당대의 현실 문맥에 반드시 매일 필요가 없이 그 장르에 합당한 독해 방식과 수용 태도를 채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현재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마당에도, 이 작품을 “인간 정치사회의 권력 현실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항구한 알레고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소수의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 쟁취만을 목표로 하여 추구하는 혁명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 본질적 사회변화를 낳을 수 없지만, 오직 일반 대중이 깨어 있어 정치 지도자들을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혁명이 성공하여 그 소기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84”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와 함께 디스토피아[=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단화한 암울한 미래상=‘역유토피아’) 작품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역대 세계 최고의 100대 명저’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하고(‘뉴스위크’), ‘20세기를 가장 잘 정의한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가디언’). 오웰은 이 소설에서 1930-40년대의 현실을 해부하면서 파시즘과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를 비판할 뿐 아니라 미래 사회를 전망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예견한 것은 디스토피아의 세계로서, 특히 권력에 의해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짐으로써 자유와 민주주의가 부정되는 미래 사회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보사회에 대한 선구적인 통찰이었던 셈입니다(미래 중 ‘1984’를 택한 이유는 이 소설이 쓰인 1948년의 ‘48’을 ‘84’로 바꾼 것이라고 알려져 있음).

 

이런 측면에서 김호기 교수는 이 작품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으로서, “감시사회로서의 현대사회의 그늘에 대한 성찰적 계몽”을 지목했습니다. 가상의 초국가인 오세아니아가 허구적 존재인 빅브라더를 내세워 텔레스크린, 사상경찰, 마이크로폰 등을 이용해 개인의 생활을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하듯이, 해가 갈수록 현대 사회는 감시사회로 변모해 갈 것이라는 성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 속에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전망만 제시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개성의 자유로운 개인들이 스스로 자치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맹아(萌芽)들이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홍규 교수는 과거에 ‘반공주의적 디스토피안’으로 이해된 오웰을 ‘아나키즘적 유토피안’으로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오웰이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모두 권위주의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무엇보다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1936년 스페인내전 참전 이후 내가 쓴 모든 글은 전체주의와 독재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글이고 민주사회주의를 위한 글이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오웰에 주목한 권석하 작가는, 지금 이 시대에도 오웰이 존경받는 이유를 단 한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의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라는 소신에 충실했던 오웰이, 특정 이데올로기와 그 논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로지 진실과 진리만을 추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현실적으로 종말을 고한 이 시대에도 좌익과 우익을 따지면서 당파성에 파묻혀 보다 정의롭고 공평하며 효과적인 정책과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채택하는 일에는 굼뜬 우리 정치인들과, 그들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올바로 심판하는 역할에는 무관심한 우리 모두에게 이 두 작품이 주는 의의를 이제 한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빅브라더의 시대’(The Age of Big Brother), ‘획일적인 시대’(The Age of Uniformity), ‘이중사고의 시대’(The Age of Doublethink) 및 ‘고독의 시대’(The Age of Solitude)라는 네 가지 제목하에서 이 두 작품이 품고 있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에 대한 진실과 진리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이 제목들은 “1984”의 주인공인 윈스턴이 오세아니아에서는 불법으로 되어 있는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는 내용 중에 등장하는 표현들입니다.

 

“미래 혹은 과거를 향해, 사상의 자유가 있고 저마다의 개성이 존중 받으며 홀로 고독하게 살지 않는 시대를 향해, 진실이 존재하며 행해진 것이 사라질 수 없는 시대를 향해 글을 썼다. 획일적인 시대로부터, 고독의 시대로부터, 빅브라더의 시대로부터,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의 안부를 전하며!”(To the future or to the past, to a time when thought is free, when men are different from one another and do not live alone—to a time when truth exists and what is done cannot be undone: From the age of uniformity, from the age of solitude, from the age of Big Brother, from the age of doublethink—greetings!)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