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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心)-마음을 따르라

본말 전도된 사상의 순교자를 자처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뫼르소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1. 17.

본말 전도된 사상의 순교자를 자처하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뫼르소

이번 달 말이 되면 귀국한 지 3년이 됩니다. 지난 3년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방인의 삶’이었습니다. 21년간을 외국에서 살다 돌아온 고국 생활은 낯설었습니다. 고향이 아닌 타향에서 정착을 시도했기에 더욱 낯설기도 했겠지만, 고향에서 살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곳도 그동안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일도, 길도, 차도, 휴대폰도, 카드도, 기후도, 심지어 공기까지도 새롭게 적응해야 했습니다. 특히 추운 날씨나 탁한 공기는 아직까지도 난감한 적응 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그 단어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법적/사회적 이방인입니다. 제가 지난 세월 동안 타국에서 외국인의 신분으로 살았던 삶의 양태입니다. 전문인으로 그토록 오래 지냈어도 그 나라는 제게 영주권도 부여해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저 1년 혹은 2년 단위로 비자를 갱신해 주면서 언제라도 떠나야 할 사람으로 대우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이미 국적을 확보한 중국계나 인도계 국민들에 대해서도 차별 대우를 일삼는 상황이었으니 노동 비자로 체류를 이어 가는 저 같은 경우는 두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 땅에 옛날부터 자리 잡고 살아온 원주민 후손을 제외한 모든 이주민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지요.

 

둘째로는 문화적/종교적인 이방인입니다. 귀국한 후 지금까지의 제 처지가 그러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그동안 지내온 삶의 방식이나 문화적 환경이 달라 체험하게 되는 양상입니다. 예컨대 이전보다 외모에 신경을 더 써야 하고 계절마다 적절한 옷을 갖추어 입는 일들은 지금도 버거운 영역입니다. 종교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삶의 양식의 차이도 이 범주에 듭니다. 종교적으로 다르면, 속해 있는 공동체나 함께 사귀는 사람들이 확연히 구분되고 각각 다른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되지요. 예컨대 제가 살던 회교국에서 회교도와 비회교도의 삶의 방식은 천양지차가 났습니다.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기는 하더라도 회교도와 비회교도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회사 생활을 영위합니다. 공무원들(국립대학 교직원 포함)이라면 기도하고 회의를 시작하고 회교도들은 일과 중에도 기도하러 시간을 내어 기도실로 갑니다. 점심 시간에 비회교도들은 수저와 포크를 사용하지만, 회교도들은 오른손을 사용합니다. 특히 라마단 금식월이 되면 그들은 식사도 함께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회교도들에게는 비회교도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온갖 특혜가 주어지는 상황이니, 서로를 이방인 취급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목입니다.

 

셋째는 사상적/철학적 이방인입니다. 둘째의 의미와 연관되기도 하겠지만 따로 구분될 수 있는 범주입니다. 인생의 의미나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해 각자가 품고 있는 사상이나 철학이 차이에서 비롯되는 상황입니다. 예상과는 달리 종교가 같은 사람들 간에도 이런 사상적, 가치관적인 차이를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현재 우리나라나 미국 같은 경우에 기독교인들이라고 해도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이나 가치관적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아주 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우파(보수), 좌파(진보) 진영에는 각각 많은 기독교인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2018-19년도 미국의 종교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이 65%이고, 2014년 통계에 의하면 ‘매우 종교적’인 미국인 절반가량인 49%가 공화당 지지자인 반면 36%가 민주당 지지자였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2주 전에 국회의사당 난입 반란 사건(insurrection)을 사주한 것으로 탄핵소추를 당하는 와중에서도 공화당원들은 여전히 75%나 그를 지지하고, 42%는 그의 2024년 대통령 선거 출마에 찬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의 선동으로 전대미문의 폭거가 발생한 상황 가운데서도 ‘매우 종교적인’ 미국인 중 대략 잡아 1/3 이상은 여전히 트럼프를 지지하고 있고, 또 다른 1/3 이상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같은 국적을 지닌 채 같은 문화 속에서 같은 종교를 품고 살아도, 이렇게 사상적으로나 가치관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게 현대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이런 사회적 실상을 염두에 두면서 사상적이거나 철학적인 측면에서 일반인과 극단적 차이를 보이는 이방인 한 명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195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등장하는 주인공 뫼르소입니다. 1942년, 그의 나이 28세에 출간하여 ‘20세기 최고의 문제작’이라는 평을 받은 작품이지요. 작가가 “부조리와 대면한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려 보인다”라고 자평한 이 작품을 통해 뫼르소라는 주인공이 노정하는 이방인의 면모를 고찰해 보겠습니다. (번역은 ‘미르북컴퍼니’<베스트트랜스 역> 판과 ‘별글’<김옥진 역> 판을 참조함.)

 

-“이방인” 줄거리-

<1부> 뫼르소는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선박회사에 근무하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어느 날 마랭고의 양로원에서 지내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는다. 그는 이틀간의 휴가를 내고 몹시 더운 날 양로원을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망자의 자녀가 일반적으로 보이는 슬픔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더구나 어머니의 시신을 보기 원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그것을 거절하고, 대신 시신이 안치된 관 앞에서 담배도 피우고 커피도 마시며 잠에 빠진다. 그리고 어머니 나이에 관한 질문을 받고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지만, 그저 주위 사람들의 모습에만 정신을 빼앗기며 장례식을 마감한다.

 

귀가한 후에 뫼르소는 상장을 뗀 채로 바닷가로 수영을 즐기러 나간다. 그곳에서 전에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던 마리를 다시 만나게 되어 함께 희극 영화도 보고 함께 밤을 보낸다. 마리가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묻자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하고, 그녀가 결혼하자고 하자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응답한다. 다른 여자가 청혼을 해도 그렇게 승낙했을 거냐고 묻자, 그는 물론 그렇다고 답변한다. 회사에서 파리 출장소를 열면 그를 영전시켜 보낼 계획이라면서 의향을 묻자 이러나저러나 자기에겐 마찬가지라면서 거절한다.

 

어느 날 뫼르소는 같은 건물에 사는 레몽 생태스라는 건달에게 편지 대필을 부탁받게 된다. 그 건달의 무어인(Moor) 여자 친구가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혐의를 잡고 그녀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그녀를 초대하는 편지였다. 뫼르소는 그를 돕지 않을 다른 이유가 없었고 그것이 레몽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알고 편지를 써 준다. 그것이 효력이 있어 그녀가 일요일 아침에 되돌아왔지만, 그는 그녀의 잘못을 책잡으면서 그녀의 뺨을 때리며 구타한다. 그것으로 인해 체포된 레몽이 뫼르소에게 법정에서 그 여자 친구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증언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그렇게 해 주겠다고 동의한다. 뫼르소의 도움으로 레몽은 경고만 받고 풀려난다. 이 일이 발생한 후에 그 여자 친구의 오빠와 아랍인 몇 명이 레몽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뒤따르기 시작한다.

 

레몽은 뫼르소와 마리를 자기 친구 마송의 바닷가 별장에 초대한다. 거기에서 그들은 그 여자 친구의 오빠와 아랍인 한 명과 마주친다. 이 두 명이 레몽과 맞붙어 칼로 그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런 상황에서 뫼르소는 자칫 잘못하면 그들을 총으로 발사할 참이었던 레몽을 달래 총을 건네받아 지니고 다닌다. 그러던 중 혼자 해변을 거닐던 중 레몽 여자 친구 오빠와 마주친다. 그 아랍인이 “칼을 뽑아 태양빛에 반짝이며” 자기에게 “겨누었다.” 강철 위에서 반짝 튄 그 빛이 “길쭉한 칼날이 되어” 자기 이마를 쑤시고 자기 속눈썹과 아픈 두 눈까지도 파헤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로 그때 그는 그에게 한 발을 쏘고 난 후 다시 그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발을 쏘았다.” 그는 그 총알 소리가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 같았다.”고 느낀다.

 

<2부> 감옥에 수감된 뫼르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 상태로 자기에 대한 재판을 흥미롭게 여기면서 구경하기만 한다. 그렇지만 법정에 온 사람들이 서로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들처럼 즐겁게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재판이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느낀 것은, 그에게 주로 쏟아진 질문이 아랍인 살해 경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여준 태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담당 검사는 어머니 장례에 임하면서 뫼르소가 보인 무덤덤한 태도나 어머니에 대한 무관심이나 시신 앞에서 취한 무례한 행동들이나 장례 후에 마리와 함께 보낸 시간들을 확인하고는, 그를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면서 “하찮은 이유 때문에 형편없는 치정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살인을 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래서 결국엔 변호사가 참다못해 그 재판이 어머니 장례에 대한 것인지 살인죄에 대한 것인지 따져 묻기까지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렇지만 검사는 뫼르소가 그 살인 범죄를 사전에 계획했다면서, 첫째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일어난 여러 가지 명백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증명할 수 있고, 둘째 그의 “영혼의 심리 상태가 빚어내는 어두운 빛”에 비추어서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레몽과 짜고 그의 정부를 유인했을 뿐 아니라, 바닷가에서 그가 레몽의 적들에게 먼저 시비를 걸어 레몽이 다쳤고 그에게서 권총을 달라고 해서 다시 바닷가로 가서 계획한 대로 아랍인을 쏘아 죽이고 확인 사살까지 감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튿날 전개될 재판에서 다룰 아버지 살해 사건과 연계시키는 묘수를 발휘한다. 즉 “윤리적 측면에서 자기 어머니를 죽인 사람은, 실제로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서 퇴출되어야 한다”라고 항변한 것이다. 결국 그 검사가 구형한 것은 사형이었다.

 

재판장이 뫼르소에게 덧붙일 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아랍인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라고 대중 생각나는 대로 진술했지만 재판장은 그것은 단지 의사표시일 뿐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그러면서도 재판장은 뫼르소에게 그의 변호 방식이 잘 이해하기 힘들다면서 범행 동기를 다시 한번 명확히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태양 때문이었다.”라고 응답한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우습게 생각할 줄 알면서도 그렇게 답변했고 예상대로 재판장내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변호사가 뫼르소가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마지막으로 배심원들에게 정상참작을 바란다는 호소를 했지만 결국 그에게는 사형 언도가 내려진다.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릴 것”이라는 판결이었다.

 

사형을 선고받은 후 마리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뫼르소는 인간이란 결국 죽게 마련이라면서 상고를 포기하고 사형 집행일을 기다린다. 자기에게 찾아와 자기를 신에게로 인도하려는 부속 사제의 여러 제안을 거듭 거절하다가 급기야 뫼르소는 분노를 폭발시키고 욕설을 퍼붓기까지 하면서 외친다.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는 주제에 인생과 장차 직면할 죽음에 대한 확신이 충일한 자기에게 집적대냐면서, 타인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의 하느님 따위를 비롯하여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소리 지르다 숨이 막힌다. 사제가 자기에게 눈물을 머금은 채 돌아가자, 잠에 빠져 든 그는 한밤중에 울리는 큰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이제 그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로 여긴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남은 소원은 단 한 가지라고 밝힌다. “모든 것이 완성되고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질 수 있도록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그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 증오에 가득 찬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육체적 욕망과 무의미성의 화신-

이 작품의 해석에 대해서는 그동안 “관습과 규범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세계의 바깥에서 들어온 것 같은 뫼르소라는 독특한 인물을 통해 부조리를 대면한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합니다. 뫼르소를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는 대체로 과묵하지만 일단 말을 하면 자기 마음속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돌아가신 어머니 시신을 보겠느냐고 해도 거절하고, 여자 친구가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아도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고, 자기 회사 사장이 파리 출장소로 영전 시켜 준다고 해도 싫다고 사양하고, 사람이라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는 법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이 세상에는 중요한 것도 의미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을 작가인 카뮈나 여러 평론가들은 그의 솔직함의 발로라고 이해합니다. 자기감정을 은폐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며 진실을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으로 해석한 것이지요. 장 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어머니와 연인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거부할 정도로 정직함을 밀고 나가는,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사형에 처해버린 그 뫼르소”라고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카뮈는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뫼르소를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라고까지 일컬었으니까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의 적나라한 솔직성은 타인에 대한 무례와 냉담성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선 그가 과묵한 중에 던지는 말과 솔직하게 취하는 행동이 타인의 인격과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함으로 해석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의 말과 행동이 타인의 처지에 대해 냉담하고 상황의 의미에 대해 부주의하거나 그것을 몰이해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가 옷을 입고 다니고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다니는 처지라면, 그가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다 드러내는 솔직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언명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적어도 그가 자기 몸을 가리고 치장하는 영역에서는 관습과 규범 중에 지킬 것을 선별한다면, 왜 말하고 행동하는 면에서는 관습과 규범을 통째로 무시해도 됩니까?

 

뫼르소의 무례와 냉담성은 단순히 무관심한 상태(indifference)이기보다는 차갑고 무감정한 상태(apathy)에 더 가깝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흔히 인용되는 소설 첫 장면은 뫼르소의 이런 측면을 드러내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온 전보를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조의를 표함.’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오늘 돌아가셨는지, 어제 돌아가셨는지 전보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의미이지, 그가 그 사실에 대해 부주의하거나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이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뫼르소의 부주의하고 냉담한 태도가 드러납니다. 예컨대 요양원의 어머니 빈소에서 아랍인 간호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그 간호원이 눈 밑에서 머리까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볼 때는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중에 관리인이 그것에 대해 언급하자 다시 그녀를 쳐다보고서야 주목하지요. 얼굴이 온통 흰 붕대투성이인데도 말입니다. 어머니 시신을 입관한 상태라 어머니를 볼 수 있도록 못을 뽑아주겠다는 관리인의 제안도 거절하고, 나중에 어머니 관 뚜껑을 덮기 전에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라는 원장의 제안도 거절합니다. 어머니 시신 앞에서 관리인이 건네 준 커피도 마시고 망설이다가 담배도 피지요. 이런 모든 일들이 빈소의 정황상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핵심적인 문제는 그가 조금이라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느끼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표현하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경우는 슬픔의 한계를 초월하는 불행을 접한 처지여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게 아니었습니다. 몽테뉴가 자기 수상록에서 소개한 일화 중에 이런 처지와 연관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기원전 522년 이집트 왕 프삼메니투스가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에게 패배하여 잡혔을 때 발생한 일입니다. 프삼메니투스는 함께 사로잡힌 자기 딸이 노예복을 입고 물 길으러 가느라 자기 앞을 지나쳤을 때나 심지어 자기 아들이 죽음의 길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땅만 내려다보며 말없이 꼼짝하지 않고 서있었습니다. 주위에 있던 자기 친구들은 모두 울부짖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부하 하나가 끌려가는 포로들 중에 있는 것을 보고는 머리를 치며 대성통곡했습니다. 그때 캄비세스가 그에게 왜 자기 자녀의 불행에는 잠자코 있다가 부하의 불행은 참지 못 했느냐고 묻자 그가 응답한 내용이 이러합니다. “이 마지막 불행은 우는 것으로 표현되지만, 처음의 두 사건은 눈물로 표현할 수단과 한계를 너무나 초과한 것이오.” 뫼르소가 프삼메니투스의 고백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나중에 변호사에게 장례식 날 자기가 어머니에 대해 자연스러운 슬픔의 감정을 억제하지도 않았고 그것은 억제할 수 없는 일이라고 고백했으니까요. 장례식 날 묘사 속에는 어머니 죽음에 대한 슬픔이 드러나 있기는커녕 장례식 날의 햇빛, 영구차에서 풍기는 말똥 냄새, 향냄새, 부족한 잠으로 인한 피로감과 같은 것들이 자기 눈과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표현들만 요란하게 등장할 뿐입니다.

 

나중에 이웃인 살라마노 영감이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프지 않으냐고 질문했을 때에도 그는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감옥에서 변호사와 대화를 하는 중에도 이런 그의 면모는 그대로 드러납니다. 변호사가 어머니 장례식 날 마음이 아팠느냐는 질문을 하자, 그는 여전히 그 답변은 회피한 채 그런 거북한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놀랍다고 느끼기만 합니다. 도리어 자기에게는 이제 스스로 질문하는 습관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응답합니다. 그러면서 “물론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라면서 “건전한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얼마간 바라기도 하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건물에 사는 레몽과의 관계에서도 이렇게 부주의하고 냉담한 측면이 드러납니다. 그와 친구 관계를 맺기 전에 뫼르소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여자들을 등쳐 먹고 산다”는 말도 들었고 ‘창고 감독’이라는 그의 직업도 사실상은 포주 역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은 채 자기와 친구가 되고 싶으냐는 그의 제안에 “괜찮을 것 같다”면서 바로 응대했을 뿐 아니라, 그의 무어인 여자 친구에 대해서도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그의 말만을 듣고 그 여자를 골탕 먹이는 일에 과감하게 가담합니다. 레몽 대신에 여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주고는 큰 소리로 읽어주는 봉사까지 담당합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바로 이 시점이 그의 비극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 편지가 효력을 발휘하여 그 여자가 돌아오지만 레몽이 그 여자를 구타한 것 때문에 경찰에 잡혀 갑니다. 그런데 자기가 직접 목격하지도 않고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순전히 레몽의 요청 때문에 “여자가 그에게 버릇없이 굴었다”는 말로 그의 증인이 되어 줍니다. 이런 식으로 그와 친구 관계가 진전되어 바닷가 별장까지 함께 놀러 갔다가 불의의 살인 사건에 연루되는 것이지요. 자신의 특장이라는 적나라한 솔직성이나 독자성은 온데간데없고 레몽의 말만 듣고 레몽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다가 그 여자 친구가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을 냉담하게 방관하고 있는 뫼르소를 보세요.

 

그렇다면 뫼르소의 이런 냉담하고 무신경한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변호사와의 대담에서 그 답을 시사해 주는 구절들이 두 가지 등장합니다. 첫째는, 자기는 “원래 감정은 뒷전이고 육체적 욕망이 먼저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엄마가 죽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 장례식 날도 너무 졸리고 피곤해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그러면서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변호사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싶어 했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소용이 없는 일이었고 번거로운 일 같아서 단념하고 만 것입니다. 즉 뫼르소의 냉담성의 원인은 그의 삶 속에서 우선순위에 있던 육체적 욕망과 인생의 무의미성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천성적으로 이런 육체적 욕구가 사랑의 감정이나 슬픔의 감정을 방해하는 상황이 전개되었고, 어떤 시도를 하려다가도 그 무의미성 때문에 쉽게 단념하는 일들이 연거푸 일어납니다. 이처럼 본문 독해에 의하면 적나라한 솔직성의 전범이라는 뫼르소는 사실상 육체적 욕망과 무의미성의 화신이었던 셈이지요.  

 

결국 뫼르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 상태로 “대단히 흥미” 있게 자기 재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가, 자기를 “참여시키지도 않고 모든 게 진행”되어도, 자기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운명을 결정해 가는 재판 과정에서도 의미 있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습니다. 결국엔 상고까지도 포기하고 사형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지요. 심지어는 아랍인의 칼날을 피해 방어하는 중에 발생한 자기 사건을 검사나 변호사까지도 유죄로 전제한 가운데 재판을 진행해 가도 별다르게 항의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재판장이 범행 동기를 한 번 더 분명하게 설명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서도 “태양 때문이었다”라는, 모든 이들의 실소를 자아내는 어처구니가 없는 답변을 해대고 말지요. 여기에서 이 ‘그런 것들은 모두 소용이 없다’라는 표현은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다’라는 표현들과 상응하면서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모티프가 됩니다.

 

-인생의 무의미성에 대한 인식-

뫼르소는 여러 번에 걸쳐 인생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하다고 주장합니다. 한번은 사장이 파리 출장소로 파견되는 문제를 논의할 때 심드렁한 태도로 응대한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영전을 제안한 셈이지만 그는 결국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지요. “사람이란 결코 생활을 바꿀 수도 없고, 어떤 생활이든 비슷비슷하며, 또 이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답변합니다. 자기 생활을 바꿔야 할 이유도 없었고 자기는 불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심적 태도를 갖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야심을 품고 있던 학생 때와는 달리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런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언급합니다.

 

자기 애인인 마리가 자기와 결혼을 하자고 해도 그는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괜찮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가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마리가 묻자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라고 답변하지요.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이런 태도가 그의 삶 속에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뫼르소는 사랑도 의미 없는 단어에 불과하고 결혼도 중요하지 않은 삶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여자가 청혼을 해도 승낙을 했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마리에게 밝히고 있으니까요.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취지의 언급도 셀 수 없이 되뇝니다. 사람들의 삶과 운명과 죽음, 어머니의 사랑, 사람들이 믿는 하느님 따위를 비롯하여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라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른 살에 죽으나, 예순 살에 죽으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자기는 잘 알고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비록 앞으로 자기가 살 기회가 있는 이십 년을 생각하면 마음속에 용솟음치는 무언가가 있지만, 그때에도 죽기는 매일반일 것이라고 생각할 게 뻔하니 미리 그 마음속의 세찬 움직임을 억눌러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의 결과로 상고를 거부해 버리고 부속 사제의 면회도 거절합니다. 혈액이 규칙적으로 자기 몸을 돌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굳이 사제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지요.

 

작가 카뮈는 자신의 “작가 수첩”에서 “이방인”이 '부조리'(the absurd)와 직면한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려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 '부조리'란 말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합리적인 세계를) 열망하는 인간의 정신과 이 열망을 저버리는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의 분리"라고 지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개념은 인생에서 직면하는 무의미성 혹은 무가치성과 등가(等價)를 지니고 있습니다. 게다가 카뮈는 이 부조리를 '자명한 사실'로 전제한 채, 자명한 사실을 은폐할 수도 없고, 부조리라는 방정식의 두 항[즉 합리적 세계를 열망하는 정신과 비합리적인 세계] 중 하나를 부정함으로써 부조리를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이 운명적인 현실을 “현재라는 지옥, 이것이 결국 인간의 왕국”(This hell of the present is his Kingdom at last)이라고 지적하면서 아래와 같은 논의를 덧붙입니다.(열린책들 번역 참조함.)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달라졌다. 죽을 것인가, 비약을 이용해 피해 갈 것인가, 자기에게 맞는 관념과 형상의 집을 다시 지을 것인가? 반대로 부조리라는 비통하고도 경이로운 내기를 계속 이어갈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노력을 한번 해보자. 그래서 우리의 결론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보도록 하자. 이때 육체, 애정, 창조물, 행동, 인간적 품위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다. 인간은 그곳에서 자기 위엄의 양식인 부조리라는 포도주와 무관심이라는 빵을 되찾게 될 것이다.” (None of them is settled. But all are transfigured. Is one going to die, escape by the leap, rebuild a mansion of ideas and forms to one’s own scale? Is one, on the contrary, going to take up the heart-rending and marvelous wager of the absurd? Let’s make a final effort in this regard and draw all our conclusions. The body, affection, creation, action, human nobility will then resume their places in this mad world. At last man will again find there the wine of the absurd and the bread of indifference on which he feeds his greatness.)

 

즉 인생의 부조리 앞에 선 인간의 선택은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는 실제적인 자살이나 '철학적 자살'의 길입니다. 카뮈는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시도한 것 같이 신앙적 비약을 통한 길이나, 현상학자 후설이 시도한 것과 같이 현실의 다양성 혹은 복수성을 강조하는 길을 철학적 자살로 간주합니다. 다른 한 가지는 그 부조리를 끌어 안고 가는 길입니다. 그 길에 전력을 경주하다 보면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들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제 자리를 잡는 역사가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즉 부조리에 진력하면 의미와 가치가 형성된다는 논리이지요. 그런데 더욱 기이한 일은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전력 경주한 인간이 여전히 '자기 위엄의 양식인 부조리라는 포도주와 무관심이라는 빵'을 되찾게 된다는 점입니다. 결국 부조리로부터 시작해서 온 힘을 다 바쳤지만 다시 부조리와 무관심이라는 포도주와 빵을 양식으로 삼아 부조리의 삶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글을 읽으며  제 눈을 의심했지만, 이것이 바로 시시포스의 운명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제우스를 속인 죄로 지옥에 떨어져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은 그는 자신이 밀어 올리는 바위가 산꼭대기에 이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때문에 영원히 이 일을 되풀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조리 철학'을 유기환 교수는 알베르 카뮈(카뮈에 대한 입문서)라는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말하자면 부조리는 합리도 아니요, 비합리도 아니다. 그것은 합리와 비합리의 뒤섞임, 즉 코스모스(Cosmos)이전의 카오스(Chaos)와 같은 것이다. 예컨대 박하사탕처럼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한 상태, 즉 모순되는 두 대립항의 공존상태, 즉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부조리한 상태이다. 코스모스가 카오스의 부분집합이듯 합리는 부조리의 부분집합이다. 부분이 전체를 다 설명할 수 없는 까닭에, 부조리의 합리적 추론이란 애당초 과욕인 것이다. 요컨대 부조리란 논리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으로써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코스모스가 카오스의 부분집합이듯이 합리가 부조리의 부분집합이라는 주장이 합리적인 말일까요? 도리어 바로 여기에 카뮈의 '부조리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빛이 어둠에 의해 규정될까요, 아니면 어둠이 빛에 의해 규정될까요? 그리고 의미가 무의미에 의해 규명될까요, 아니면 무의미가 의미에 의해 규명될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어둠이 빛이라는 존재에 의해서 규명되듯이 무의미는 의미에 의해 규명됩니다. 즉 어둠이란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고, 무의미란 의미가 상실된 상태인 것이지요. 그 반대일 수가 없습니다. 빛을 어둠이란 개념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의미를 무의미란 개념으로 어떻게 묘사할 수 있습니까? C. S. 루이스가 명쾌하게 지적한 대로, 빛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눈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조차도 알 수 없듯이, 이 세상에 의미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 자체를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온 세상에 의미가 편만하게 존재하기에 무언가가 무의미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카뮈가 활용한 부분집합 개념으로 설명해 보자면, 어둠은 빛의 부분집합이고 무의미는 의미의 부분집합인 것입니다. 결코 그 반대가 아니지요. 사정이 이러한데도 어떻게 코스모스가 카오스의 부분집합일 수가 있고 합리가 부조리의 부분집합일 수 있습니까? 도리어 부조리성이나 무의미성은 온 세상에 빛과 같이 편재한 의미와 가치를 전제합니다. 그런 면에서 뫼르소가 습관처럼 내뱉는 말, 즉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고 소용이 없다는 표현은 이런 우주적 현실에 대한 그의 무지를 드러낼 뿐입니다. 

 

유 교수(혹은 카뮈)는 이렇게 본말이 전도된 전제에 근거하여 부분에 불과한 합리가 전체인 부조리를 다 설명할 수가 없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면서 ‘부조리의 합리적 추론이란 애당초 과욕’이라고 결론지으면서, 부조리란 논리로 설명되지 않고 다만 감정으로만 느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부분과 전체의 내용을 도치시켜 버린 채 부분에 불과한 부조리로 전체에 해당하는 합리성을 규명하려 들고 합리성이 부조리를 규정하는 길조차 원천 봉쇄해 두었으니, 카뮈의 ‘부조리 철학’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의 사변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활짝 열어 둔 셈입니다.

 

그 ‘부조리 철학’의 혼란한 현장을 “이방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조리와 직면한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뫼르소는 “이방인” 곳곳에서 ‘그 모든 것들이 소용없다’,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다’라는 표현들을 남발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부부가 합일하여 가정을 일구는 결혼도, 어머니의 사랑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직업과 사업도, 사람들이 품고 있는 영적인 신앙도 그 어떠한 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이겠지요. 그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도 말입니다.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세상의 모든 것, 삶의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기고 선언하는 그를, 과연 “가난하고 가식이 없는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라거나 “절대에 대한 진실, 진실에 대한 정열”이 자기에게 활력을 공급하는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한 발 더 나아가 그를 “그 어떤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 상찬할 수 있을까요?(인용부들은 카뮈가 “이방인”의 미국판 서문에서 쓴 표현들임.)

 

그렇지만 인생에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인생의 의미는 도무지 발견될 수 없다는 ‘부조리 철학’은 다음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인생 가운데서 이미 발견된 인생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인간이 삶을 영위해 온 모든 지역과 시대 및 인간이 구가한 모든 문화를 꿰뚫고 엄존하는 보편적 원리와 가치들 말입니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전 세계 인류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근거하여 1948년 UN을 통해 “세계 인권 선언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이 형성되었지요. 본 블로그 한 곳(“정치적 글쓰기가 예술로 승화된 ‘동물 농장’과 ‘1984’ <2>”)에서 소개한 대로, C. S. 루이스가 전 세계 문화와 종교와 철학을 망라해서 정리한 ‘다오’(Tao)도 이와 동일한 맥락에 있는 보편적인 가치와 원리들입니다. 이미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는데도 별다른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찾고 구하는 것은 마치 새로운 태양을 하늘에 두려고 시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루이스가 다오를 소개한 The Abolition of Man의 마지막 몇 문장에 주목해 보세요. 그 중에 나오는 제일 원리(first principles)란 지난 세월의 인문학 속에서 자연법(Natural Law), 전통적 도덕(Traditional Morality), 실천 이성의 제1원리(the First Principles of Practical Reason) 등으로 소개된 것으로서 루이스가 '다오'(한자어 '道'의 음역)라고 부른 것입니다. 

 

영원히 사물을 꿰뚫어 볼 수는 없다. 무언가를 꿰뚫어본다는 것의 핵심은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창문은 투명해야 좋다. 창문 너머의 거리나 정원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정원을 꿰뚫어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제일 원리를 '꿰뚫어 보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면, 모든 것이 투명하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투명한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는 것은 결국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You cannot go on ‘seeing through' things for ever. The whole point of seeing through something is to see something through it. It is good that the window should be transparent, because the street or garden beyond it is opaque. How if you saw through the garden too? It is no use trying to ‘see through’ first principles. If you see through everything, then everything is transparent. but a wholly transparent world is an invisible world. To ‘see through’ all things is the same as not to see.)

 

-반항적 인간의 길-

뫼르소의 냉담한 태도와 삶의 무의미성에 대한 자각은 종교 혹은 신의 존재나 부재에 대한 냉담한 자세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부속 사제와의 대화를 통해 뫼르소는 우선 자기는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입장을 밝힙니다. 그 점에 대해 확신이 있느냐고 사제가 묻자 그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답합니다. 정말 자기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하기 어려운 때는 있겠지만 자기의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백히 확신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제의 이야기는 자기 관심을 끌지 않는다고 단정합니다. 뫼르소가 취한 이런 태도는 무신론(atheism)과는 별도로 ‘apatheism’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신의 존재와 연관된 신념이나 주장이나 신념 체계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냉담한 자세를 가리킵니다. 사제가 연이어 절망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절망한 것이 아니라 단지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뿐이며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답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제의 말에도 그는 도움을 받기 싫을 뿐 아니라 흥미 없는 것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다고 응답합니다.

 

그럼 희망을 포기한 채 죽는다는 생각만 하며 지내는가라는 사제의 질문에 그가 그렇다고 답변하자, 사제는 그를 불쌍히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지고 있는 죄의 짐을 버려야 하며 사람의 심판보다 하느님의 심판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사제가 언급하자, 그는 자기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은 인간이었고 자기의 죄가 뭔지 모르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범인이라는 점만 일러 주었다며 지적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그가 살인자이었지만 사건 당시의 정당 방위의 상황보다 그 이전에 그가 취한 행태를 근거로 그를 의도적인 살인을 감행한 인물로 몰고 간 법정에는 분명 부조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쏜 첫 발의 총탄은 우발적이었지만 연이어 쏜 네 발은 자신도 변호하지 못하는 의도성이 담겨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정당 방위를 밝히기는커녕 태양때문에 살인했다는 답변으로 자승자박해 버린 그의 증언 태도에도 부조리한 측면이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의 죄가 뭔지 몰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고백입니다. 이때 사제가 그에게 한번쯤은 다른 삶을 꿈꾼 적이 있었을 거라고 묻자, 그는 “지금의 이 삶을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삶이요”라고 외칩니다. 그때 사제가 자기는 그와 함께 있을 것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을 전하자 뫼르소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했습니다. 환희와 분노가 뒤섞인 울부짖음으로 욕설을 퍼붓기까지 하면서 자기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쏟아부은 것이지요. 그의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모든 게 터져 나오는 순간입니다.

 

사제가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그의 신념은 죄다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가치도 없다”면서 그를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다고 일갈합니다. 그에 비하면 자기에게는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에다 “내 인생과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당당하다면서,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나 어머니의 사랑 같은 것들”이나 “당신의 하나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과 운명” 따위를 비롯해서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면서 사제를 비롯한 모든 다른 사람들도 장차 사형을 선고 받은 사형수라고 외쳐대면서 숨이 막힙니다. 뫼르소를 “반항의 상징”으로 일컫는 데 기여한 장면으로 보입니다.

 

이 장면에서 눈에 띤 것은 자기가 살아온 “부조리한 삶”(이 작품 속에서 ‘부조리’라는 단어가 사용된 유일한 용례) 내내 뫼르소가 꼭 움켜쥐고 있던 게 있었다고 지적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에다 “내 인생과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그 진실이 자기를 꼭 움켜쥔 만큼 자기도 그것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면서, “내 생각은 옳았고, 여전히 옳고, 항상 옳다.”라고 주장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자기가 항상 옳다는 선언이지요. 그런데 이 주장에 대한 합리적인 증거가 존재할까요? 본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카뮈의 ‘부조리 철학’도 그 증거에 대해서는 보탤 말이 없습니다.  “부조리란 논리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으로써 느낄 수 있을 뿐”이니까요. 그러면서 뫼르소는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든지 그게 어떻단 말이냐?’라고 자문하고는, “나는 이 모든 시간 동안 내 정당함이 인정될 저 새벽을 기다리며 살아온 셈이다.”라고 자답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저 새벽’이란 자기가 사형당하는 시점을 가리킵니다. 사형 집행인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새웠습니다. 그 새벽이 되면 자기 정당함이 인정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정당함이 인정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 질문에 대한 이성적인 해답을 알 수는 없지만, 그 해답을 시사해주는 마지막 몇 문장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신호와 별로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나는 그처럼 세계가 나와 매우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세계와 나는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그리고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도록, 내게 남은 소원 하나는 사형 집행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뫼르소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세상의 무관심을 부드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무관심한 그 세계와 자기가 같은 형제라고 실감하는 상황입나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한데 그 행복이 완성되도록 자기가 사형 당하는 날 구경꾼들이 많이 와서 자기를 증오한 나머지 함성을 지르며 배웅해 주기를 고대한다고 술회합니다. 수수께끼같은 이 문장들이 많은 독자와 평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뫼르소는 충동적인 살인으로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고, 그 살인의 결과로 겪게 되는 위기에서 물러서지 않음으로써 끝까지 저항한다.”(최수철 작가)라는 논평도 존재합니다. 제게는 세상을 거스르는 자기 사상에 목숨을 건 순교자의 각오가 느껴집니다. 

 

-문학 작품의 해석 문제-

어떤 문학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는 작가의 의도를 살피는 게 우선적입니다. 그 작품이 집필된 시대적인 상황하에서 작가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는가를 헤아리는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가 본문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본문에도 등장하지 않는 작가의 숨은 의도를 말하는 것은 문학 작품이 고유하게 품고 있는 독자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떠한 문학 작품이 특정 작가의 산물인 것은 맞지만, 작가의 손길을 벗어나는 순간 그 작품은 또 하나의 독자적인 특성을 지닌 생명체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았지만 그 자식이 독자성을 갖고 성숙해 가듯이 문학 작품도 각자의 특성을 간직하면서 계속 성장해 가는 깃이지요.

 

그래서 어떤 문학 작품을 이해할 때 작가의 말에만 의존하는 것은 충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모든 문학 작품이 작가의 자기표현일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특정 작품이 작가가 겪은 경험의 진실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아”처럼 자기가 겪지 않은 경험을 나누는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더구나 작가가 특정 작품을 집필할 때 의도한 의미를 잊을 수도 있고, 그 작품 속에 제시한 내용과는 상응되지 않는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T. S. 엘리엇은 자기의 대표작인 “황무지”(The Waste Land)에 대해서, 그것은 단지 인생에 대해 갖고 있던 개인적인, 그것도 하찮은 불만의 토로였을 ”(only the relief of a personal and wholly insignificant grouse against life)이고 한 편의 운율적인 투덜거림에 지나지 않는다(just a piece of rhythmical grumbling)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이 말이 그 작품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는 해석일까요? 토머스 하디는 자기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논쟁적 주제들에 대해 자기는 어떤 견해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지요. 이 논의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언급은 로버트 브라우닝에게서 나왔습니다. 모호한 의미를 띠고 있는 자기의 시 한 편에 대해 질문받았을 때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 시를 썼을 때는 하나님과 로버트 브라우닝이 그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만 아십니다!”(When I wrote it, only God and I knew; now God alone knows!) 그런데 이방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작가 카뮈가 한 말이나 그가 쓴 글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을 정독한 것에만 근거한다면, 과연 카뮈가 논평한 대로 뫼르소를 ‘절대에 대한 진실, 진실에 대한 정열’이 충일한 인간, ‘그 어떤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한 인간’, 급기야는 ‘우리들의 분수에 맞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게 타당할까요? 

 

이런 측면들을 고려해 볼 때 테리 이클턴이 지적한 대로, “문학 작품은 고정된 의미를 가진 텍스트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다양한, 가능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모태라고 간주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각 문학 작품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기보다는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정확한 의미를 짚은 유일한 한 가지 해석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리어 생산된 그 의미는 공적일 뿐 아니라 설득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설득력 있는 해석은 본문상의 증거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에 대해서 작가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자기 해석만이 독점적인 권위를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셈입니다. 그 작품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해석은 앞으로 많은 동시대인들이나 미래의 세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이방인”에 대해서도 ‘20세기 최고의 문제작’이라는 수식어나 노벨상 수상작가의 작품이라는 타이틀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지 않는 대신 본문에 깊이 천착한, 창의적이고도 다양한 해석들이 앞으로 더 많이 개진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