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이목이라는 인생의 숙적
"잘 보라, 대장장이는 나라에 구두를 제공하지도 않고 구두수선공은 무기를 제공해 주지도 않는다. 만일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적절한 일을 온전히 실행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Why, neither does a smith provide it with shoes, nor a shoemaker with arms. It is enough if everyone fully performs his own proper business.)
노예 출신의 스토아주의 철학자 에픽테토스(55년경-135년경)의 “Enchiridion”(안내서 혹은 편람)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잠언이 나옵니다.
■“이런 고려사항들이 당신을 괴롭게 하도록 허용하지 말라. ‘나는 불명예스럽게 살 것이고 어디에서도 보잘것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불명예가 악이라면, 비열함에 연루되는 것보다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악에 더 연루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력을 얻거나 어떤 연회에 입장하게 되는 게 당신의 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결국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이 불명예인가? 그리고 당신이 오직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만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당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중요 인물이 되는 게 당연한 어떤 곳에서 보잘것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게 어떻게 진실인가? ‘그러나 내 친구들이 도움받지 못할 것이다.’ ‘도움 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그들은 당신에게서 돈을 얻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그들을 로마의 시민으로 만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이 당신의 능력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들 중에 있다고 누가 당신에게 말했는가?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을 누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가? ‘자, 그렇다면 우리도 관여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획득해 봐.’ 만일 내 자신의 명예와 성실과 자존감을 보존하면서 그것들을 얻을 수 있다면, 내게 그 길을 보여 줘라, 그러면 내가 그것들을 취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선하지 않은 것을 얻기 위해 당신이 내게 내 자신의 본래의 선을 상실할 것을 요구한다면, 당신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은지 고려해 보라. 게다가 당신은 많은 돈 혹은 신실하고 명예로운 친구 중에 어느 것을 얻을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인격을 잃을 수도 있는 것들을 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이 인격을 얻도록 나를 도와줘라. 자, 이제 당신은 말할 게다. ‘내 나라가 내게 의존하고 있는 만큼 내게 도움을 받지는 못할 게다.’ 또 여기에서 당신이 말하는 도움이란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의 나라는 당신이 제공한 주랑현관이나 목욕탕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잘 보라, 대장장이는 나라에 구두를 제공하지도 않고 구두수선공은 무기를 제공해 주지도 않는다. 만일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적절한 일을 온전히 실행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또 한 사람의 성실하고 명예로운 시민을 제공해 준다면, 그 시민이 당신의 나라에 유익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도 당신의 나라에 무익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은 또 말할 게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내가 차지할 자리는 무엇인가?’ 당신의 성실과 명예를 보존하면서 당신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가능하다. 그러나 그 나라에 유익하게 될 것을 열망하다가 만일 당신이 이것들을 잃어버린다면, 당신이 불성실하고 몰염치한 인물이 된 상태에서 어떻게 당신의 나라에 봉사할 수 있겠는가?”
(Let not such considerations as these distress you: “I shall live in discredit and be nobody anywhere.” For if discredit be an evil, you can no more be involved in evil through another than in baseness. Is it any business of yours, then, to get power or to be admitted to an entertainment? By no means. How then, after all, is this discredit? And how it is true that you will be nobody anywhere when you ought to be somebody in those things only which are within your own power, in which you may be of the greatest consequence? “But my friends will be unassisted.” What do you mean by “unassisted”? They will not have money from you, nor will you make them Roman citizens. Who told you, then, that these are among the things within our own power, and not rather the affairs of others? And who can give to another the things which he himself has not? “Well, but get them, then, that we too may have a share.” If I can get them with the preservation of my own honor and fidelity and self-respect, show me the way and I will get them; but if you require me to lose my own proper good, that you may gain what is no good, consider how unreasonable and foolish you are. Besides, which would you rather have, a sum of money or a faithful and honorable friend? Rather assist me, then, to gain this character than require me to do those things by which I may lose it. Well, but my country, say you, as far as depends upon me, will be unassisted. Here, again, what assistance is this you mean? It will not have porticos nor baths of your providing? And what signifies that? Why, neither does a smith provide it with shoes, nor a shoemaker with arms. It is enough if everyone fully performs his own proper business. And were you to supply it with another faithful and honorable citizen, would not he be of use to it? Yes. Therefore neither are you yourself useless to it. “What place, then,” say you, “shall I hold in the state?” Whatever you can hold with the preservation of your fidelity and honor. But if, by desiring to be useful to that, you lose these, how can you serve your country when you have become faithless and shameless?)
에픽테토스의 이 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명예욕이나 지위에 대한 욕심 혹은 관심이 우리를 계속 괴롭게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위 잠언 서두에 등장하는 첫 번째 고려 사항, ‘나는 불명예스럽게 살 것이고 어디에서도 보잘것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는 점이나 마지막 고려 사항,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내가 차지할 자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하는 대로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불명예스러운 상황이란 것은 비열하거나 치사하게 처신하게 된 상황을 일컫는 게 아닙니다. 단지 어떠한 권력이나 지위를 얻지 못했거나 어떤 인기 있는 연회에 초대받지 못한 처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처럼 비친다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지요. 알랭 드 보통이 “불안”(Status Anxiety)이란 책에서 지적한 지점입니다. 즉 '지위'(Status), 즉 ‘세상의 눈으로 본 자신의 가치나 중요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처지는 강준만 교수가 “바벨탑 공화국”이란 책에서 가리킨 '바벨탑'의 의미와도 직결됩니다, 즉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한 각자도생형 투쟁'의 상태인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목하 진행 중인 '서열 사회'의 심성과 행태를 가리키는 이 '바벨탑'이란 용어는 전 지구적인 함의를 띠고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펄떡거리며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 않는, 돈 많은 사람들도 이런 '불안'이나 '서열 투쟁'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졸부로 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본다고 여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이겠지요. 미국의 부자들 중에 엄청난 돈을 기부함으로써 자신의 가치와 중요성을 향상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게 말입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는 속담의 실례들이지요.
둘째 교훈은 우리의 진정한 명예는 우리 자신의 능력과 자원과 인격적인 자질을 잘 깨달아 그것으로 봉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위 잠언에 제시되어 있는 대로, 우리는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두고 애타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도리어 우리만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탁월하게 감당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게 도리입니다. 그 일이 세상에 드러나는 일이든 잘 표시도 나지 않는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자기에게 허락된 능력과 자원과 인격적인 특성을 활용하여 성실하게 최선을 경주한 것이라면 자기도 알고 하나님께서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 일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리가 그 일에 우리 영혼을 불어넣은 것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우리가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 일에 오랜 기간 동안 이런 정신으로 일하고 섬기게 되면 반드시 그 열매가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김홍신 작가의 “인생 사용 설명서”에 보면 다스라트 만지라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도의 비하르주 가흐로우르라는 마을에서 수드라 계급(인도 카스트 제도 중 4번째 계급으로 천민 계급)에 속한 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슬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자기 아내가 산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를 다쳤지만, 병원으로 이송할 수 없어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아내가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가 살던 오지에서 읍내 병원까지는 무려 88킬로미터를 돌아가야했던 것이지요. 마을 뒤에 있는 칼바위산의 산세가 너무 험하여 그곳까지 직통해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내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만지는 망치 한 자루와 정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칼바위산을 깨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틈틈이 남의 일을 섬겨주고 밥벌이하면서도 그는 칼바위산을 계속 깨부쉈습니다. 그 산에 대해 자신의 능력과 자원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하게 담당한 것이지요. 가까운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미친 짓에 돌입한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도와주는 이도 없었지요. 그렇지만 어느 날 기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망치와 정을 들고 바위를 깨부수기 시작한 1960년부터 무려 22년이 지난 후인 1982년에 드디어 그 칼바위산을 관통하는 길을 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길은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를 뚫고 난 길이었습니다. 그 바위는 총길이가 915미터나 되고, 평균 너비 2.3미터에 깊이는 최고 9미터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20대 후반이었던 만지는 볼썽사납고 근천스러운 늙은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그 멀디멀었던 읍내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손수레도 끌고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도 정부가 포상을 해 주겠다고 제안하자 만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하지요.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김홍신 작가는 만지의 사례를, 자존감을 품고 세상을 끌고 가는 사람의 전범으로 들고 있습니다. "세상을 끌고 가는 사람은 스스로의 존엄함을 인정한, 자존심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세상에 끌려다니는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눅 든 사람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그 정문 앞에 헌책방이 한 곳 있었습니다. 공간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온갖 새로운 책들이 자주 입고되는 곳이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신앙이 흔들렸던 저는 선배님 한 분을 만나 성경을 다시 새롭게 정독하고 공부하면서 신앙의 기반을 새롭게 다질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선교 단체 한 곳에서 성경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성경에 대한 깊이 있고 체계적인 지식은 신앙 서적을 통해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효과적으로 도와준 곳이 바로 그 헌책방이었습니다. 존 스토트, C. S. 루이스, 프랜시스 쉐퍼, 제임스 패커, 폴 틸리히, 헬무트 틸리케, 조지 워싱턴 카버, 폴 리틀, 마이클 그린, 마이클 그리피스, 송인규를 비롯하여 다양한 신앙의 선배들을 책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곳이 바로 그곳이었으니까요. 그 책방은 당시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주인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을 찾을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고 제가 원하는 신앙 서적들을 부지런히 구해다 주셨습니다. 그분이 언젠가 제게 자기의 꿈이 있다면서 이런 포부를 밝혔습니다. 헌 책방이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고 있는 마당에서, 앞으로 20년간 그곳에서 그 헌책방을 운영하는 게 자기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공간을 통한 자기의 조그마한 섬김을 통해 대학생들과 일반인들의 지적 탐구에 기여할 수 있다면 자기로서는 더 이상 보람된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게 그분의 고백이었습니다. 해가 갈수록 점점 상업화된 모교 근방에서 그분이 꿈꿨던 20년을 버틸 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충성스럽고 성실한 섬김으로 저 같은 대학생이 신앙을 되찾고 영적 기반을 다지고 난 후 급기야 해외로 진출하여 그리스도인 영어교육학 교수로서 제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이 자리를 빌어 밝힙니다. 그 헌책방 주인장께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각자가 품고 있는 재능과 은사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 가는 중에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세상을 변화시켜 갑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큰 자유와 평안을 줍니다. 자기 분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이고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이 세상에는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에는 단 한 가지의 능력과 은사조차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는 이 세상에는 똑같은 성정과 특성을 지닌 이가 단 한 쌍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 보면 주인공인 한스 카스토르프가 요양원에서 지낼 때 눈송이를 여러 번 확대 렌즈로 관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눈이 그냥 보기에는 “아무런 형체가 없는 너덜너덜한 알갱이”로 보였지만, 그 렌즈를 통해서 보면 그것이 얼마나 정교하고 규칙적으로 형성된 “조그만 보석”인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솜씨가 뛰어난 보석 세공업자도 이러한 보석, 별 모양의 훈장, 다이아몬드 브로치보다 더 다채롭고 섬세하게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신비로운 작은 보석인 이러한 무수히 많은 마법의 별꽃들은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거기에는 항상 동일한 기본형, 변과 각이 똑같은 육각형이 조금씩 다르게 극히 정교한 모습으로 무한한 독창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체적으로는 이러한 차가운 작품마다 절대적인 균형과 얼음장 같은 규칙성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 점이 이 꽃의 무시무시하고 반유기적이며 반생명적인 요소였다. 그것은 무척이나 규칙적이었고, 생명을 이루는 유기물이 그렇게까지 정연한 법은 결코 없었으며, 생명은 그러한 정확한 엄밀성에 몸서리를 쳤다. 생명은 그것을 치명적이라고 느꼈고, 죽음 그 자체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 흔하고 무수한 눈 알갱이 하나하나도 서로 같은 것이 단 한 가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얼마나 고유하고 독창적인 존재일까요? 그리고 우리 각자가 그 정교한 독창적인 면모를 온전히 발휘하게 된다면 이 세상 속에서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셋째는 봉사할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우선순위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성실과 명예와 자존감과 같은 인격적 자질입니다. 그것들을 희생하거나 포기하고 추구할 것은 이 세상에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인격적 자질 없이 나라에 봉사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나라에 도리어 해가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내 나라가 내게 의존하고 있는 만큼 내게 도움을 받지 못할 게다.’라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데 대해 애타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을 향해 에픽테토스는 '대장장이는 나라에 구두를 제공하지도 않고 구두수선공은 무기를 제공해 주지도 않는다.'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둘째 교훈에서 논의한 것처럼 '만일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적절한 일을 온전히 실행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내가 차지할 자리는 무엇인가?’라고 도전하면서 여전히 사회에서 누릴 지위에 눈길을 돌리고 있는 이들에게 일깨워줍니다. 자신의 성실과 명예를 보존할 수 있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사회적 지위를 누리라고. 그렇지만 그것들을 잃어버리고 그 지위를 누리게 된다면 자기 나라를 섬기는 길이 되지 못한다고. 두 가지 실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반면교사이고 둘째는 모범적인 예입니다.
미국은 현재 새로운 대통령이 집권한 상태이지만, 신의 없고(faithless) 몰염치한(shameless) 이전 대통령이 저지른 각종 무리한 행태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중입니다. 우선 그가 코비드 사태에 방만하고 부실하게 대처한 것은 국가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신의를 잃은 행태였습니다. 작년 이맘때에 처음으로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에 그가 취한 행동은 주로 과학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과학자들의 권고를 경시하면서 거짓 정보를 퍼뜨리고 허풍 떠는 일뿐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이라는 그 기본적인 처방을 무시하고 경시함으로써 바이러스 확산세를 저지하지 못한 데는 그의 책임이 큽니다. 자기부터 실천하지 않고 있었으니 그러한 조치들을 행정 명령으로 발동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그리하여 미국은 어제 날짜로 약 2,700만 명의 확진자와 417,000명의 사망자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미국 사회를 바라보면서 떠 오른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가 한 말이지요. “듣는 사람들이 오해한 진실보다 더 나쁜 거짓말은 없다.”(There is no worse lie than a truth misunderstood by those who hear.) 믿기 어렵게도 미국인들 중에는 코비드 사태에 대해 그 대통령이 퍼뜨린 거짓 정보들을 진실로 믿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그가 모든 국가 기관들이 인정한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하여 저지른 행위들은 후안무치의 끝장판이었습니다. 수십 가지 선거 소송을 전개한 것도 모자라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관련 공무원들이나 부통령까지도 압박했을 뿐 아니라 급기야, 자기 지지자들까지 선동하여 국회의사당까지 침범하여 난동을 부리도록 사주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리하여 그는 미국 역사상 두 번씩이나 국회 탄핵을 당하는 수치를 겪은 유일한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대통령직을 마쳤으니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자행한 불법과 비리들을 처단하는 사법적 단죄가 급물살을 탈 것입니다. 그를 볼 때마다 떠 오르는 영어 문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가 한 말입니다. “거짓말쟁이가 받는 벌은 조금도 자기를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라 자기가 다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The liar's punishment is not in the least that he is not believed, but that he cannot believe anyone else.) 온갖 거짓과 술수로 대통령직을, 아니 지난 인생을 지탱해 온 그에게 과연 신뢰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요?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어제 날짜로 확진자 75,084명과 사망자 1,349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일확진자 수도 486명으로 다시 안정세로 접어들었습니다. 미국 인구가 약 3억 3천만쯤 되고 우리나라 인구가 약 5,200만쯤 된다는 점을 고려해 보자면, 우리나라가 미국에 비해 그동안 이 팬데믹에 대해 얼마나 선방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 국민들의 선진화된 시민 의식에 담겨 있었습니다. 위 잠언에서 언급된 대로입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나라에 또 한 사람의 성실하고 명예로운 시민을 제공해 준다면, 그 시민이 당신의 나라에 유익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국민 각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적절한 일감을 온전히 실행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을 성실하게 준수한 것이 국가에 크낙한 유익을 제공해 준 셈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평범하게 보이는 그 일들이 사실상 엄청난 방역 결실을 낳은 것이지요. 이 일에 무익한 국민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 국민 대부분은 자기 분수를 좇아 신실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신의 없고 몰염치한 인물로 드러난 이들이 갖가지 특혜가 제공되는 고위직을 탐내는 경우 또한 자주 눈에 띕니다. 이런 이들이 득실거리는 정치판을 두고 '정치인들은 다 똑같아'라고 조소하기만 하면 좋은 인물과 나쁜 인물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 결국엔 나쁜 인물이 판치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이런 시점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성실하고 품위 있는 리더십을 분별할 뿐 아니라 그러한 리더십을 요구할 수 있는 국민들의 인식과 선택이라고 지적한, 전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기자 다니엘 튜더의 제안이 유효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성 있는 리더십과 제대로 된 정보를 갖춘 대중 사이에는 선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벌써부터 요동치고 있는 우리나라 재보궐선거에서 명심할 만한 조언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평가할까에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만큼 사회적 안목으로 자신의 가치나 중요성을 판단하고 그것에 목맬 소지가 많은 인생의 현장에서 자신을 지켜갈 길을 에픽테토스의 지혜를 통해 배웠습니다. 우선은 이 관심사가 얼마나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유혹거리인지 잘 인식함으로써 그것에 매이지 않도록 깨어 있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다음으로는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능력과 자원과 인격적 특성을 활용하여 일상을 영위하는 것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그 일에 최선을 경주하며 그러한 상태로 자족하는 일입니다. 끝으로 자신의 성실성과 품위를 잃는 대신으로 취할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설령 그 일이 대통령직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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