뗏목 모험인생의 자유를 구가하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지난 60 평생을 돌이켜 보면 저는 크게 세 차례 정도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첫째는 대학 1학년 때 한 선교 단체를 만나 훈련받던 중 3학년 때 집에서 나와 그 단체의 생활훈련관에 입소한 것입니다. 안주하던 교회 생활에서 벗어나 선교 단체에서 훈련을 받기로 한 것도 큰 결정이었지만 자취하면서 훈련받는 생활관에 입주하기로 한 것은 비약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지금도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아 시도하지 않는 요리를 일주에 하루씩 맡아 함께 사는 형제들과 훈련관에 방문하는 형제들을 먹이는 일을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 시간까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훈련 일정과 학과 공부 덕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은(디모데후서 2:22), 고되었지만 보람된 기간이었습니다. 그 선교 단체와 함께 한 기간이 약 6년쯤 됩니다.
둘째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를 하던 도중에 유학하러 나간 일입니다. 그 학교에 근무한지 5년 차가 되던 해에 교사직을 사직한 후 출국했습니다. 계속 근무했다면 올해 교직 35년 차가 되었겠지요. 제가 유학한 곳은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 케손 시티에 위치한 필리핀국립대학이었습니다. 그 대학의 첫 학기가 시작하기 직전까지 고등학교 측에서 근무해 주기를 강권한 탓으로 빠듯한 일정에 맞춰 출국했기 때문에, 별 준비도 없이 시작한 박사 과정 첫 학기 동안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더구나 필리핀에 도착하기 전부터 조금씩 폭발하기 시작한 피나투보 화산이 나중에 본격적으로 폭발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곳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서부터 저희 가족이 살고 있던 지역뿐 아니라 가는 곳곳마다 화산재가 뒤덮은 탓으로 한동안 화산재에 둘러 싸여 지내곤 했습니다. 가장 흔한 교통수단인 지프니에 의존하며 지내던 그 기간 동안 가장 도전적인 일은 그 도시의 공기를 마시는 일이었습니다. 지프니와 오토바이들이 경유로 운행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주된 교통수단인 그 도시의 매연은 살인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고난을 상쇄하고도 남았던 것은 필리핀인들의 사랑과 우정이었습니다. 친절하고 자상했던 학교 친구들 뿐 아니라 유학 기간 내내 함께 동참했던 제자 훈련 사역 중에 만난 믿음의 친구들, 그리고 마지막 논문 작성 기간 중 저를 섬겨 준 한 자매님 가정과 나눈 교제는 잊을 수 없습니다. 이와 더불어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던 신실한 우리나라 일꾼들을 만나 함께 삶을 나눈 것도 큰 기쁨과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약 4년 간 유학한 후 귀국했습니다.
셋째는 말레이시아로 진출한 일입니다. 바로 개설될 줄 알았던 어학원 개원 일정이 대폭 늦추어지는 통에 비자를 얻지 못해 임시로 얻게 된 한국어 강사직 기간은 그야말로 광야의 시기였습니다. 그 비자마저 재발급할 때마다 거듭된 이민국의 늦장 행정 탓에 가족들을 데리고 이웃 나라 국경을 넘나드는 수고를 여러 번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광야 기간 7년을 버틴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어학원 대신 그곳 국립대학 한 곳을 열어주셨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대학 교단에 서서 영어 교사들과 영어 교사 후보생들에게 영어교육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장을 누리게 된 것이지요. 그 대학에서 11개국에서 온 교수들과 함께 12개국에서 온 학생들을 13년간 가르쳤습니다. 그 후에 지난 2018년 1월 말에 귀국했습니다. 지난 모험의 기간들을 다 합쳐 보니 약 30년이 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반이 모험의 여정이었던 셈입니다.
이 모험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후회가 많았을 것입니다. 대학 생활을 허송했을 가능성도 있고 기독교 신앙의 깊은 측면들을 납득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이어왔을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문화와 갖가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접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다문화 경험을 누리지도 못했겠지요. 전공인 영어 교육도 피상적으로만 공부한 채 대학 입시에 목을 매는 고교 교육의 최전선에서 고뇌하며 수십 년간 고전할 뻔했습니다. 신앙과 문화가 다른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간을 둔 영어 교육을 실행해 보는 기회도 갖지 못했겠지요. 말레이시아에서 귀국하면서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생각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간절하게 원하는 게 없다. 인생에서 꿈꾸던 것들을 다 경험했다. 이것으로 족하다. 여생이 몇 년이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는 그동안 공부하고 싶었던 것들을 자유롭게 연공하고, 살고 싶었던 곳에서 살다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 생계는 아버지께 맡기겠다.” ‘고국 재정착 겸 인생3막’이라는, 생애 마지막 모험을 맞이하는 각오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한번 떠올린 것은 이번에 독해할 소설이 모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1884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마크 트웨인의 대표작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입니다. “톰 소여의 모험”이란 작품의 후속 작으로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모든 현대문학은 마크 트웨인이 쓴 한 권의 책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나왔다.”라고 격찬한 책이기도 하지요. (번역은 “현대 문학”<박중서 역> 판을 참조했음.)
-“허클베리 핀의 모험” 줄거리-
이야기는 미국 미주리 주 미시시피 강 유역에 위치한 세인트피터스버그(가상의 도시)에서 시작된다. 허클베리 핀은 미주리주의 술주정뱅이 아들로 태어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던 중 같은 마을 더글러스 과부댁과 그녀의 여동생인 왓슨이 사는 가정에 들어가 살게 된다. 전작 격인 “톰 소여의 모험”에 의하면, 그와 톰은 인디언 조의 살인 행위를 증언한 탓으로 그의 복수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지만 인디언 조가 동굴에서 죽음으로써 그가 갖고 있던 금화를 각각 6천 달러씩 나눠 갖게 된다. 고아나 다름없이 자유롭게 자랐으나 늠름하게 살던 그를 불쌍히 여겨 더글러스 과부댁이 자기 아들로 맞아들여 그를 문명인으로 만들어 보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그는 과부댁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그녀와 왓슨이 가르치던 지루한 성경 이야기에 시달리던 차에 가출하여 톰 소여를 다시 만나게 된다. 톰 소여는 아이들을 모아 자칭 갱단을 조직했다면서 헉(Huck)에게 갱단에 들어오고 싶으면 더글러스 아줌마 집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톰이 조직한 갱단은 시작만 거창했을 뿐 별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해체되고 만다. 다시 더글러스 아줌마 집에서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학교에 다니는 일에 적응이 될 무렵, 헉의 아버지 팹이 갑자기 나타난다.
팹은 아들이 뜻하지 않게 큰돈을 손에 넣었다는 소문을 듣고 아들에게서 그 돈을 탈취하기 위해서 왔다. 그는 헉이 자기 머리 꼭대기에 올라선다고 여겨 그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가 가진 돈을 다 내어놓으라고 하지만 헉은 자기가 그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한번은 술에 취한 채 그 돈을 맡고 있던 새처 판사를 찾아가서 들볶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법으로 해결하겠다며 난리를 친다. 판사와 과부댁이 헉을 팹에게서 떼어놓으려고 법적으로 시도해 보았지만 그 사건을 맡은 신임 판사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팹을 개화하도록 도우려는 신임 판사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팹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아들을 미시시피 강가에 있는 숲속의 오두막에 가두어버린다. 문명 생활에서 벗어난 헉은 한편으로는 편안함을 느끼지만 아버지의 매질이 심해지자 결국 잭슨 섬이란 곳으로 탈출한다. 자기가 어떤 도적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가장해 두고는 아버지의 물품들을 가지고 오두막집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왓슨의 흑인 노예 짐을 만나게 된다. 왓슨이 자기를 다른 곳에 팔겠다고 말한 것을 엿듣고 노예에게 자유를 부여해 주는 지역인 일리노이주의 케이로로 갈 계획을 세우고 도주했던 것이다. 나중에 돈을 벌어 노예 생활하고 있는 자기 가족들을 사올 생각까지도 한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하면서 의기투합하여 홍수로 떠내려 온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강을 따라 남쪽으로 여행을 떠난다.
마을의 최근 소식을 알아보러 헉이 계집아이 복장을 하고 그 지역에 새로 이사 온 로프터스 아줌마 집을 방문했을 때, 자기 가짜 죽음과 연관된 소식을 듣게 된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살인 혐의를 받았다가 나중에 짐에게 그 살인자의 누명이 덮어씌워 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동네 사람들이 누가 그를 죽였을까를 논의하던 중 그가 죽임 당한 날 짐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가 헉을 살해하고 도망친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현상금이 3백 달러나 붙게 되었다. 돌아와 짐에게 그 뉴스를 알려 준 후에 그들은 재빨리 뗏목을 타고 떠난다. 얼마 후에 그들은 좌초된 증기선을 만나게 되는데, 그곳을 점검하던 중 두 악당이 다른 한 악당을 살해하려고 모의하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 그들 몰래 그들이 타려가려던 보트에 승선해서 도주했다가 나중에 자기 뗏목에다 보트 안에 있던 물품들을 싣고 계속 모험을 진행해 간다.
그런데 중간에 뗏목이 기선과 충돌하여 헉은 짐과 헤어지게 되어, 미시시피강의 켄터키 쪽 육지로 올라가게 된다. 그곳에 있는 마을에서 그레인저포드 대령의 호의를 입어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그 집은 가족끼리 존경과 우애가 넘치는 가정이었으나, 그 인근에 있는 셰퍼드슨 가와 숙적 관계에 놓이게 되어 그동안 서로 죽이고 죽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두 가문은 비록 같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면서도 남자들은 총을 가지고 가서 곁에 두고 예배를 드리기까지 한다.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어 그레인저포드 대령 집에서도 이미 아들 셋이 살해된 상태였지만, 나중엔 그 집안의 모든 남자(다섯 명)가 죽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집의 둘째 딸인 소피아가 셰퍼드슨 가의 아들인 하니와 눈이 맞아 가출한 후에 그 딸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벌어진 총격전 때문이었다. 이 불행한 사건 후에 헉은 다시 짐과 재회하게 되어 뗏목을 수리한 후 계속 여정을 진행한다.
도중에 누군가로부터 도주하는 두 사람을 구해주어 자기 뗏목으로 들였더니 나중엔 그들이 상전 행세를 하며 헉과 짐을 노예처럼 부리기 시작한다. 자칭 ‘공작’이라는 젊은이와 ‘왕’이라는 늙은이의 속임수에 이용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밝힌다고 하면서 젊은이는 자기를 ‘공작’으로, 늙은이는 자기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 루이 17세라고 소개한다. ‘공작’이라는 파렴치한은 원래 날품 인쇄공이었다가 이런 저런 특별 조제약을 팔거나 연극을 공연하면서 푼돈을 버는 자였고, ‘왕’이라는 사기꾼은 안수하는 게 전문 분야라고 자부하는 이로서 낯선 마을로 들어가 금주 갱생 집회, 순회부흥회 및 천막 집회를 열어 주민들로부터 돈을 알겨내는 인물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자기들을 구해 준 헉과 짐을 ‘뗏목 위의 무법자들’로 여기면서, 그들에게 자기들을 각각 ‘나으리’(Your Grace)와 ‘전하’(Your Majesty)라고 부르며 격식에 맞게 섬겨주어야 한다고 주문하기까지 한다. 물론 헉은 이 두 인물이 ‘다만 닳고 닳은 사기꾼에 협잡꾼’(just low-down humbugs and frauds)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 내색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거짓말쟁이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함께 사기 연극을 벌여 큰돈을 번 후에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초상집을 찾아가 그 죽은 이의 형제라고 속여 재산을 가로채려고 시도한다. 그렇지만 헉이 중간에 끼어들어 그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
마침내 헉이 그들의 손아귀에서 겨우 빠져나와 뗏목으로 돌아왔으나 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기꾼 ‘왕’이 어느 농가에 팔아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농가 주인인 샐리 펠프스가 마침 톰 소여의 숙모여서, 때마침 그곳에 오게 된 톰과 공모하여 짐을 탈출시키는 대작전이 펼쳐진다. 하지만 갖가지 모험적인 요소들을 가미한 상태에서 짐을 데리고 도망치던 도중에 톰이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된다. 그래도 뗏목을 타고 도망을 치긴 했으나 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헉이 의사를 부르러 간다. 헉과 의사가 함께 타고 가기에는 카누가 너무 적어 의사가 혼자 톰에게로 가서 치료할 때, 짐이 나타나 그 의사를 도와 톰을 구한다. 그리하여 톰은 이모 집으로 안전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짐은 다시 체포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바로 그때 그곳에 톰의 숙모 폴리가 도착한다. 더글러스 미망인의 동생 왓슨이 죽으면서 톰을 자유인으로 해방시킨다는 유언을 했던 것이다. 그제야 짐은 헉에게 그의 아버지가 홍수가 닥쳤을 때 사망했다고 알려 준다. 그래서 헉은 세인트피터스버그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샐리 부인이 그를 입양해서 문명화시켜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도주해서 인디언 지역으로 갈 뜻을 품는다.
-협량한 부모의 희생자-
헉의 아버지 팹이 등장하는 장면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냐?” 이 말은 그가 헉에게 연거푸 던지는 말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놈의 아들이 어디 있냐?”(I never see such a son.) 자기가 아들 위해 희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지금까지 온갖 고생을 해가며, 온갖 걱정을 해가며, 기껏 돈 들여가며 키워놨더니 말이야.”(which he has had all the trouble and all the anxiety and all the expense of raising.)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나 헉 엄마도 읽을 줄 몰랐는데 헉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잘난 척한다고 여기면서, 자기는 그런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잘난 척하는 놈의 자식아. 다시 한 번 학교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붙잡히기만 하면 내 아주 늘씬하게 패줄 테니까. 아는 게 많아지니 이제는 아예 종교도 갖겠구만, 응? 세상에 그런 놈의 아들이 어디 있냐?”(<...> my smarty; and if I catch you about that school I’ll tan you good. First you know you’ll get religion, too. I never see such a son.)
“세상에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냐?”라는 패러디를 던져 놓고 보니, 이 세상 속에 그런 부류의 부모들이 적지 않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식을 자기 소유로 생각할 뿐 아니라, 자식을 자기 수준 이하로 매어 두려는 어리석은 부모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면 요즘 시대에 헉을 노예 부리듯 아무렇게나 대하고, 헉이 공부를 하게 되어 자기보다 더 읽을 줄 알게 되어 잘난 척한다고 시기하는 팹과 같은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컨대 자기가 무슨 대학을 나왔으니 자식이 그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부모나, 자기가 의사이니 자식도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종용하는 부모가 우리 주위에 없을까요? 그리고 자식이 문학이나 음악이나 연극하겠다고 하면 극구 말리는 부모나, 심지어 신학대학교들이 정원 미달되는 요즘에는 자식이 목회자(가톨릭 신부나 수녀 포함)나 선교사 되겠다고 하면 몸져누울 부모가 없을까요? 결국 헉이 자기보다 더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을 눈 뜨고 보지 못하겠다는 팹이나, 자기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통해 자식이 더욱 성숙하게 되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부모나 오십보백보 아닌가요?
얼마 전 김성희 작가의 글을 읽던 중 헝가리 의과대학 설명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을 때 그녀가 통역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의료 분야에서 노벨 수상자를 네 명이나 배출한 헝가리는 유럽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의과 대학 선택지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당시 설명회를 진행하던 의과대학장이 김 작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의대가 많은데 왜 이렇게 많은 한국 아이들이 의사가 되려고 헝가리까지 오는 거죠?” 그녀가 대답을 못 한 채 그냥 웃으며 넘기려 하자 그 학장이 이렇게 지적해주었다고 합니다. 자기네 나라에서는 의사가 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한다고. 하지만 학생들은 명예를 위해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명의식을 갖고 의대에 입학한다고. 김 작가의 얼굴이 뜨뜻해져 있었을 상황이 눈에 선합니다. 학장이 지적한 다른 것들은 제쳐두고라도, 무엇보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부모들이 지금까지처럼 이렇게 자녀들을 의과대학으로 보내려고 묵맬까요?
다행스럽게도 이런 협량한 아버지에게 당하면서도 헉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산속 오두막에 가둬 두고, 취해서 기분이 좋으면 자기를 두들겨 패곤 하는 통에 견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쇠가죽으로 채찍질을 당할 때까지는 참을 수 있었으나, 히코리나무 회초리 다루는 아버지의 솜씨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탈출을 감행합니다. 심지어는 원수 같은 그 아버지가 자기를 더 이상 찾지 않도록, 자기가 살해당한 것으로 가장해 둔 채 말입니다. 그 아버지는 나중에 누군가에게 총을 맞고는 침대에 홀딱 벗은 채로 방치되어 있다가 나중에 폭풍우가 치던 날 자기 오두막 전체가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헉과 짐에게 발견되는 수모를 당하게 되지요. 그 남자가 팹이라는 것을 인식한 짐은 헉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누더기로 그 시체를 덮어 버립니다. 이 소설 끝에 가서야 짐은 이 사실을 밝히면서 헉이 그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일러 줍니다. 아버지 역할을 맡아 온 제 지난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맹목적인 숙원과 눈먼 사랑의 결말-
헉이 그레인저포드 대령 가정에서 지낼 때 경험한 비극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가정과 셰퍼드슨 가문은 오래전부터 숙적 관계여서, 시시때때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서로를 죽이고 죽임 당하는 비극을 지속해 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두 가문이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런 끔찍한 이웃 관계를 지속해왔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이들이 주일 예배 드리는 상황을 한번 관찰해 보세요.
“다음 일요일에 우리는 모두 말을 타고, 3마일쯤 떨어진 교회에 갔다. 남자들은 총을 들었고, 버크도 마찬가지여서, 무릎 사이에 끼고 있거나, 아니면 손닿는 곳 벽에 세워두었다. 셰퍼드슨 쪽 사람들도 똑같이 했다. 설교는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말끝마다 형제 사랑이니 뭐니, 따분한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훌륭한 설교라고 입을 모았고, 집에 가는 내내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하면서 신앙(faith)이며, 선행(good works)이며, 값없이 얻는 은혜(free grace)며, 예정운명구원설(preforeordestination)에 대해 열심히들 이야기를 했는데, 나야 그게 뭔 소리인지 전혀 알 길이 없어서, 그날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겪은 일요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하루인 것만 같았다.”
교회를 오가는 중이나 예배 중에 무슨 불상사가 벌어질지 몰라, 총을 자기들 옆에 세워 두고 예배드리는 이 장면은 가히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형제 사랑을 부르짖는 설교가 단상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그들 심령 속에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현란한 신앙 용어들을 서로 고백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죄다 허공에서 사라질 연기에 불과했습니다. 호시탐탐 이웃을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신앙이나 선행이나 은혜라는 표현들이 가당하기나 합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되지 않았던 헉이 자기 또래인 그 집의 막내 버크에게 그들 간에 품고 있다는 숙원(the feud)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묻자, 버크의 답변이 이러합니다.
“그러니까, 숙원이란 이런 거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하고 싸우다가, 그 사람을 죽이는 거지. 그러면 그 죽은 사람의 동생이 ‘먼젓 사람’을 죽이는 거야. 그러면 양쪽 편에서 또 다른 형제가 나서고 해서, 하나씩 죽이는 거지. 그러면 이제는 ‘사촌들’이 끼어드는 거야. 그래서 결국 모두 죽어 없어져야만, 숙원이라는 것도 끝나는 거라구. 하지만 [그 과정이] 하도 느리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Well, a feud is this way: A man has a quarrel with another man, and kills him; then that other man’s brother kills him; then the other brothers, on both sides, goes for one another; then the cousins chip in—and by and by everybody’s killed off, and there ain’t no more feud. But it’s kind of slow, and takes a long time.)
그 답변을 듣고 헉이 언제부터 생긴 거냐고 묻자, 30년쯤 전에 무슨 소송이 벌어져서 어느 한쪽이 이겼는데,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을 총으로 쏘아서 이 숙원이 시작되었다고 대답합니다. 그 당시의 말썽거리가 무엇이었는지, 어느 가문이 먼저 총을 쐈는지 헉이 묻자, 버크는 아주 옛날이었는데 자기가 어떻게 아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는 거냐고 헉이 다시 묻자, 그의 답변이 이러합니다. “어, 맞아, 아빠는 아실 거야. 아마, 나이 많은 어른들도 아실 거고. 하지만, 그분들도 지금은 맨 처음에 도대체 무슨 일로 싸우게 되었는지는 모르실걸.”(Oh, yes, pa knows, I reckon, and some of the other old people; but they don't know now what the row was about in the first place.) 기가 막힌 일이지요. 무려 30년 동안이나 두 집안이 서로를 살해하면서 원수로 지내왔는데, 현 세대의 양가 아들들도 그 숙원(the feud)의 기원을 알지 못한 채 호시탐탐 상대를 죽일 생각에 골몰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두 가문 사이에 한 가닥 사랑이 싹틉니다. 셰퍼드슨 가의 아들인 하니와 그레인저포드 가의 딸인 소피아가 서로 눈이 맞아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사랑의 결말은 끔찍했습니다. 딸 집안의 모든 남자가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이 나니까요. 물론 이런 불상사의 책임은 당시 가장이었던 아버지들이 져야 할 것입니다. 숙원의 시발점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두 죽어 없어져야 끝나는 게임을 지속한 책임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니와 소피아가 서로 눈이 맞아 함께 도주한 일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 소식을 접했을 때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 떠올랐지만, 그들은 결코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수 없습니다. 우선은 로미오와 줄리엣과는 정반대되는 결말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살았을 뿐 아니라 결혼 생활까지도 누릴 수 있었겠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둘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들의 도피 행각으로 두 가문이 숙원을 푼 것도 아닙니다. 그레인저포드 가 사람들이 분개해 소피아를 찾아 나섰다가 소피아 아버지를 비롯하여 그 가족의 남자는 다 죽었으니까요. 그래도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의 죽음의 결과로 끝에 가서는 로미오의 몬터규 가문과 줄리엣의 캐플릿 가문이 서로 화해라도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소피아는 20세 성인이었고, 줄리엣은 이제 막 14세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소피아는 도피 행각이 아닌 좀 더 성숙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자기 결단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했습니다.
“신경 끄기의 기술” 저자인 마크 맨슨이 “희망 버리기 기술”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흥미로운 지적을 한 게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에 의하면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쓴 것은 로맨스를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풍자하기 위해서, 그것이 얼마나 정신 나간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연극이 사랑을 찬미하는 것이 되도록 의도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는 그 반대가 되도록 의도했던 것이다. 즉 그 주위에 횡단금지라는 경찰 통제선이 쳐 있는 데다 출입금지 사인이 깜박이는 거대한 네온사인 역할하도록 의도했다.”(It is suspected by many scholars that Shakespeare wrote Romeo and Juliet not to celebrate romance, but rather to satirize it, to show how absolutely nutty it was. He didn't mean for the play to be a glorification of love. In fact, he meant it to be the opposite: a big flashing neon sign blinking KEEP OUT, with police tape around it saying DO NOT CROSS.)
그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19세기 중반까지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이란 것은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을 훼방하는 심리적 방해물에 불과했지만, 현대처럼 그 사랑이 찬양받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젊은이들이 대개 그 불필요하고 위험한 낭만적 열정(romantic passions)을 피하고 자기와 가족들의 안정을 보장해 줄 실리적인 결혼을 택해야 했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정신 나간 사랑(batshit crazy love)을 부추긴다고 그는 해석합니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맨슨의 문제의식은 남다릅니다. 낭만적 사랑이란 것이 마약과 소름 끼치게 비슷하다(frighteningly similar to cocaine)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낭만적 사랑은 마약이 자극하는 것과 똑같은 두뇌 부위를 자극하면서 일시적으로 쾌락과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문제를 해결한 만큼 문제를 새로 만들어낸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건전한 사랑(healthy forms of love)이 있고, 불건전한 사랑(unhealthy forms of love)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 두 가지 사랑의 차이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는 게 그의 결론입니다. 첫째, 각자가 책임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는가(how well each person in the relationship accepts responsibility). 둘째, 각자가 기꺼이 상대를 거절하고 상대로부터 거절당할 수 있는가(the willingness of each person to both reject and be rejected by their partner).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조차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하니와 소피아의 사랑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허클베리 핀의 모험 철학-
데니스 패트릭 슬래터리 교수가 톰과 헉을 이렇게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톰은 헉과 대조되는 인물이다. 톰이 책 속의 모험을 모방해 과거의 방식과 스타일에 현재를 맞추려 하는 반면, 헉은 현재의 곤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즉흥적으로 전략을 만들어낸다. 헉이 톰보다 훨씬 더 창의적이고 기지가 넘친다.” 톰은 친구들과 강도단 놀이를 하거나 짐을 구출하는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기가 읽은 책들을 인용하면서 주위 상황들을 해석하고 그 책들 속에 소개된 대로 일들을 진행해 가기를 고집합니다. 예컨대 강도단 놀이를 할 때 한 번은 자기가 들은 첩보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이튿날 스페인 상인들과 아랍인들 무리가 케이브 할로 근처에서 야영을 하는데 코끼리 이백 마리, 낙타 육백 마리, 노새 천 마리에다 무수한 다이아몬드가 실려 있다고 하면서 경비병은 겨우 사백 명뿐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정작 강도단 아이들이 가서 보니 주일 성경공부반 아이들뿐이었습니다. 그 녀석들을 박살내고서 얻은 수확이라고는 고작 도넛 몇 개와 잼뿐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헉이 톰에게 묻자, 톰은 원래 아랍인, 코끼리, 다이아몬드 같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면서, “돈키호테”라는 책만 읽어도 알 수 있는 상황인데 헉이 무식해서 그렇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마법사가 그 모든 것들을 주일학교 꼬맹이들 모습으로 변신시켜 놓았다는 것이었지요. 나중에 짐을 구출해 낼 때에도, “이놈의 것은 정말이지 너무 쉬워빠지고도 어설퍼빠져”(this whole thing is just as easy and awkward as it can be) 있어서 “뭔가 어려운 계획을 만드는 게 오히려 더럽게 어려울 정도”(it makes it so rotten difficult to get up a different plan)라며 아쉬워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책에서 접한 온갖 잡다한 요소들을 끌어 들여 인위적으로 그 구출 작전이 최대한도로 위험하게 만들었다가 결국 자기가 총을 맞는 소동이 발생하게 되지요. 자업자득이었던 셈입니다.
이에 반해 헉의 모험은 생존의 수단이기도 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없이 지냈으니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아버지가 나타난 후에는 그의 학대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카누를 타고 다녔으나 짐과 합류한 후에는 뗏목을 하나 발견하게 되지요. 이 뗏목은 잭슨 섬 근처에서 건져 올린 것으로서 좋은 소나무 널판으로 되어 있었고 폭이 약 3.6미터, 길이가 약 4.5-5미터쯤 되고 바닥은 물에서 약 15-18센티미터쯤 위에 있었으며 무척 튼튼했습니다. 그는 뗏목 생활이 주는 자유의 맛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레인저포드 대령 가의 비극을 경험한 후 짐과 재회한 다음에 헉이 하는 말을 들어 보세요.
“나는 그놈의 숙원에서 결국 떠나올 수 있어서 너무나도 기뻤고, 짐은 그놈의 늪지에서 결국 떠나올 수 있어서 마찬가지로 기뻐했다. 우리는 결국 세상에 이 뗏목처럼 아늑한 곳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딴 장소라면 너무 좁아터져서 숨 막힐 것 같았지만, 뗏목 위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여러분도 뗏목에 한 번 올라보시면 알 것이다. 그곳이 얼마나 자유롭고 느긋하며 편안한 장소인지 말이다.” (I was powerful glad to get away from the feuds, and so was Jim to get away from the swamp. We said there warn’t no home like a raft, after all. Other places do seem so cramped up and smothery, but a raft don’t. You feel mighty free and easy and comfortable on a raft.)
즉 헉과 짐에게는 이 세상에서 단 한 곳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장소들은 너무 비좁고 답답해서 질식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한 곳만큼은 자기들에게 엄청난 자유를 선사해 주고 안락하고 쾌적한 기분을 만끽하도록 해 주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바로 뗏목이었지요. ‘There warn’t no home like a raft‘라는 구절은 비문(非文)처럼 보이지만, 'there was no home like a raft.'의 의미입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warn't'는 ‘wasn't'의 방언으로서 온갖 방언이 활용되고 있는 이 작품 중에 무려 293회나 사용되었으며, 함께 사용된 이중 부정(double negatives)도 방언이나 비표준어에서는 부정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뗏목과 같은 안식처는 없네.”(There is no home like a raft.) 이 작품 속에서 발견한, 가슴을 시원하게 틔워주는 생수 같은 문장입니다. 뗏목 모험인생의 좌우명이기도 하겠지요.
이 뗏목 위에서 헉은 인생의 온갖 묘미를 맛보았을 뿐 아니라 모험 속 대인관계의 비결도 터득합니다. 그것은 관용의 자세였습니다. 자칭 ‘공작’과 ‘왕’이라는 파렴치한 두 인간을 구해 준 후 그들이 도리어 그 뗏목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자기들을 노예처럼 부렸어도 헉은 그들을 넓은 아량으로 품는 관대함을 보입니다. ‘공작’은 30대, ‘왕’은 70대였지만 10대 초반인 헉이 그들보다 더 지혜롭고 성숙했던 것이지요. 그의 기개와 지혜가 돋보이는 장면 한 곳을 보겠습니다.
“공작은 왕의 말을 따랐고, 짐과 나는 이 두 사람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자 기뻤다. 이후로는 모든 불편함이 사라져 버렸고, 우리도 기분이 좋았던 것이, 뗏목 위에서 누군가가 서로 적의를 품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뗏목 위에서는 모두가 만족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The duke done it, and Jim and me was pretty glad to see it. It took away all the uncomfortableness and we felt mighty good over it, because it would a been a miserable business to have any unfriendliness on the raft; for what you want, above all things, on a raft, is for everybody to be satisfied, and feel right and kind towards the others.)
즉 헉은 그들이 뼛속까지 사기꾼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자기 혼자만 알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뗏목 위 일가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최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활한 육지 위에서도 아니고 그 좁디좁은 뗏목 위에서 서로 적의를 품는다는 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헉은 이미 체험한 바 있었지요. 그레인저포드 가와 셰퍼드슨 가 사이의 원한으로 인해 빚어낸 그 엄청난 비극 말입니다. 이런 측면이 모험적인 여행이 안겨 주는 유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인생의 교훈을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기꾼들만 만난 게 아니라 자기를 따뜻하게 반겨주고 보살펴 준 손길들을 접하면서 타인들에 대한 인식을 재조정하고, 진실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감동받아 더욱 이타적인 삶의 길을 모색하게 된 것들도 헉이 누린 모험의 혜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격적 성숙의 여정이었던 것이지요. 예컨대 공작과 왕이 생면부지의 상갓집에 가서 그 집 재산을 통째로 꿀꺽하려는 것을 헉이 도중에서 방해한 것도, 사실은 그 집의 세 자매들이 친절한 태도로 자기를 감동시킨 결과였습니다. 톰이 총을 맞아 위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가진 것 전부를 그 양반에게 주고”서라도 그를 구하려고 한 것도, 그동안 톰이 자기에게 보여 준 진정한 우정과 벗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헌신하려고 한 짐의 확고부동한 이타적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모험의 과정을 통해 헉은 “남을 섬기고 관대하며 의리를 지키는 삶이야말로 속임수와 사기와 탐욕이 이끄는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 주는 “최고의 완충장치”(데니스 패트릭 슬래터리)임을 스스로 체득하게 됩니다.
특히 짐이 모험 여정 내내 보여준 태도는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짐은 항상 헉 앞에 있었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달빛 아래서나 폭풍 아래서도 그러했습니다. 헉 아버지 시체가 오두막 속에 있는 채로 떠내려 왔을 때 자기가 먼저 그를 알아보고 헉이 아버지의 끔찍한 시체를 보지 못하도록 배려합니다. 뗏목 위에서 한밤중 당직을 서는 시간에도 항상 자기가 먼저 하겠다고 하면서 곤하게 자는 헉 몫까지 다 감당하는 아량을 베풉니다. 그래서 헉이 고백하지요. “녀석은 항상 그런 식으로 마음씨가 착했다. 짐은 원래 그랬다.”(he was always mighty good that way, Jim was.) 자기를 허니라고 부르면서 귀여워해 주고 자기를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해주었던 짐의 섬김은 다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톰이 자기를 구출하다가 총을 맞고 위경에 처해 있을 때, 그는 의사를 불러 그를 살리기까지 “나는 이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의사’ 없이는. 앞으로 40년이 흘러도 말이야!”(I doan' budge a step out'n dis place'dout a doctor, not if it's forty year!)라고 선언합니다. 톰 도련님도 자기가 이런 위경에 처해 있다면 그렇게 해 주었을 것이라면서 말이지요. 이 말을 들은 헉은 “그의 속마음만큼은 하얗다는 것을 알았고, 녀석이 진심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I knowed he was white inside, and I reckoned he'd say what he did say) 그 톰을 구한 의사가 짐에 대해 해 준 증언도 주목해 보세요. 그는 누구보다도 더 뛰어난 간호사였고 아주 충직한 놈이었다고 하면서, 자기의 자유를 뺏길 위험을 각오하고 자기도 매우 지칠 지경까지 톰을 살리기 위해 의사를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런 깜둥이는 그야말로 천 달러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자비롭게 대해 줄 것을 요청하지요. 이렇듯 뗏목 모험 여정은 생존, 자유 및 관용을 기반으로 하여 반면교사들의 사례와 성숙한 사람들과의 교우 관계를 통해 헉이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도정(道程)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소망)에 대한 조악한 이해-
다른 소설에서처럼 이 작품 속에서도 기독교를 희화화하는 경우가 자주 눈에 띕니다. 더글러스 과부댁은 헉을 신앙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성경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도 하고 기도도 시켜보기도 합니다. 한번은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곳에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하루 종일 하프를 갖고 노래를 부르는 것뿐인데, 그것을 영원히 계속한다고 언급해 줍니다. 그것에 대한 헉의 반응은 자기 생각엔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톰 소여도 거기 갈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과부댁은 그럴 가능성이 많을 것 같진 않다고 답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헉은 그 답에 만족했습니다. 자기는 그 녀석과 함께 붙어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 왓슨이 헉을 자기 골방으로 데리고 가서 기도를 해 주면서, 매일 기도하기만 하면 헉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룰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헉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지적합니다. 자기가 해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자기에게 낚싯줄이 하나 생겼는데 낚싯바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바늘을 달라고 서너 번쯤 기도했지만 그 바늘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서 그들이 처한 곤경들이 왜 해결되지 않느냐면서 기도란 아무 소용이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소설 속의 헉은 몇 살일까요? 그레인저포드 대령 집에서 지낼 때 그 집 막내아들 버크가 자기 또래라고 하면서 열셋이나 열넷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1, 2학년 정도 되는 나이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천국이나 기도에 대한 언급은 중학생 헉이 과부댁과 왓슨에게 들은 내용을 자기가 이해한 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들이 실제로 성경에서 제시하는 천국이나 기도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주된 이유입니다.
먼저 영원히 하프(harp)를 켜면서 노래만 하는 천국이라는 측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참고해 보면 하프라는 것은 천국 생활에 대한 한 가지 상징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거문고로 번역되어 있지요. 거문고라는 번역어가 나오는 곳이 총 여섯 곳인데 그 중 네 곳이 요한계시록에서 나옵니다(5:8, 14:2, 15:2, 18:22<이 구절은 ‘거문고 타는 자’, harpists가 언급됨>). 그중 한 곳만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5:2-3)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And I saw something like a sea of glass mixed with fire, and those who had been victorious over the beast and his image and the number of his name, standing on the sea of glass, holding harps of God. And they sang the song of Moses, the bond-servant of God, and the song of the Lamb, saying, "Great and marvelous are Your works, O Lord God, the Almighty; Righteous and true are Your ways, King of the nations!)
장차 마귀와 그 졸개들을 물리치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함께 모여 하나님의 하프를 켜면서 모세의 노래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를 부르며 만국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입니다. 즉 하프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 누리게 된 은혜와 복이 너무 영광스럽고 놀라워 천국 백성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을 반주하는 역할인 것이지요. 여기서 소개되는 다른 상징들도 잠시 주목해 볼까요? ‘불’, ‘유리 바다’, ‘짐승’, ‘거문고’, ‘종’(bond-servant), ‘어린양’이란 표현 외에도, 상징인 짐승을 다시 상징하는 ‘우상’(image)과 ‘그의 이름의 수’(number)라는 표현까지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만 살펴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요한계시록에는 수많은 상징들을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에 진행하시는 우주적인 구원 사역과 천국의 이모저모를 다각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프도 이런 크낙한 그림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앞에서 하프 사용이 천국 생활의 한 상징이라고 말씀드렸는데, 다른 상징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와 있는 상징들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장에는 천국 시민 된 사람들을 ‘나라’, ‘제사장’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그들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생명의 관’을 쓰고, ‘둘째 사망의 해(害)’[죽음 이후에 심판받아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벌]를 받지 않고,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과 새벽별’[승리와 주권의 상징]을 받고,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린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는 그들이 ‘생명 책에 기록’되고, ‘하나님 성전의 기둥’[천국에서 누릴 하나님과의 떨어질 수 없는 연합에 대한 확신 상징]이 되고, ‘예수님과 더불어 먹’으며, ‘예수님 보좌에 앉’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상징들 모두가 신앙적인 승리를 거두고 천국 시민 된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의미상으로 서로 유사한 상징들도 있지만, 대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다양한 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누린다는 것과 예수님 보좌에 앉는다는 것은 유사한 개념이지만, 새벽별을 받는 것과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는 것은 서로 다른 개념이지요.
그렇다면 천국 생활에 대해 왜 이렇게 다양한 상징들이 등장할까요? C. S. 루이스에 의하면, 천국 생활에 대한 각 “약속은 실체와 같은 면뿐 아니라 다른 측면도 있는 상징일 뿐이므로 다른 약속들 안에 담긴 다른 상징들을 통한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요한계시록 3:20에 보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교제의 문을 여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더불어 먹으리라’는 약속이 나옵니다. 이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다른 약속들 못지 않게 상징적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는 식으로 예수님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며 교제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렇게 생각할 때 예수님의 신성은 밀쳐두고 당신의 인성에만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빈약한 개인적 사랑으로만 너무 외곬으로 상상해서 온갖 편협함과 긴장과 단조로움이 얽힌 상태라고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십여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서로서로를 교정해 주고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도록 말입니다.”(and lest we should imagine the joy of His presence too exclusively in terms of our present poor experience of personal love, with all its narrowness and strain and monotony, a dozen changing images, correcting and relieving each other, are supplied <“The Weight of Glory”>) 이러한 지적은 성경상의 천국을 이야기하기만 하면 늘 빠지지 않고 나오는 비아냥, 즉 영원히 하프(harp)를 켜면서 노래만 하는 지루한 곳이라는 언급에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렇게 단정 짓지 못하도록 천국 생활의 다양한 다른 측면들을 제시함으로써 그런 시각을 교정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헉이 불신하는 기도의 효과와 그 의미에 대해서도 간단히 짚어 보겠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른 장면 한 곳을 살펴볼까요? 나중에 톰이 헉에게 마법사와 요정 이야기를 하면서 요정은 램프나 가락지를 문지르면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자, 헉이 이삼일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본 후에 그대로 실행해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숲속에서 램프 하나와 쇠고리 하나를 서로 문지르고 또 문질렀지만 요정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톰의 거짓말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고 결론지으면서도 “그건 어딜 보더라도 주일학교의 흔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It had all the marks of a Sunday-school.)라고 회상합니다. 낚싯바늘이 없어 서너 번쯤 기도했으나 그 바늘이 생기지 않은 이전의 기도 경험과 같은 유라고 본 것이지요. 기도를 램프 요정을 부리는 일로 보고 실행한 것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의 극단적 행태입니다. 한 마디만 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기도는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거룩한 대화이자 친밀한 교제요, 당신 존전(尊前)에 거하는 일입니다. (기도에 관해서는 본 블로그 중 “기도의 의미: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이 기적이다?” 참조 요망)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천국 혹은 기도에 대해 별다른 근거 없이 이런 식으로 단언하거나 어린이 버전의 희화화된 기독교를 상정해 두고 섀도복싱(shadowboxing)하기보다는, 한 번쯤 마음을 열고 장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전개된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인 성경과 수천 년을 이어온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겸허하게 귀 기울여 보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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