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학(學)-평생에 걸쳐 학습하라

믿음은 항상 인문학 세계로 이끈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8. 14.

믿음은 항상 인문학 세계로 이끈다

인문학 공부가 우리를 항상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의 세계는 우리를 항상 인문학 공부로 이끕니다. 이웃 사랑이 우리를 항상 하나님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항상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웃 사랑은 반드시 행동으로 드러나는 실천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And who is my neighbor? - 누가복음 10:29)라는 한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비유를 마친 후에 그에게 주신 답변은 “네 이웃은 ...이다.”가 아니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였느냐?”였습니다. 율법 교사가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던진, 철저히 사변적인 질문을, 실제적이고도 긴급한 필요를 가진 사람을 실천적으로 돕는 행위로 전환하신 것입니다. 이웃의 깊은 필요를 살펴(=‘가서’) 사랑을 실천하라(=‘이와 같이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누가복음 10: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proved to be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robbers' hands? <...> Go and do the same.)

 

-이웃 사랑의 두 가지 장애물-

“Literature Through the Eyes of Faith를 집필한 수잔 갤러거와 로저 런딘은 이웃을 사랑하는 데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바로 무지(ignorance)와 이기심(selfishness)입니다. 먼저 우리 자신의 세계에만 머무르면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삶과 처지가 어떠한지 모르기 때문인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곳 대구에서 생활고로 자살한 한 가족(부모와 딸)의 딱한 처지를 알았다면 그들을 기꺼이 도울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외에도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당하는 이웃들이나, 일상생활 중에도 온갖 어려움에 직면해야 하는 신체/정신 장애자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무시당하는 요양원 환자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 눈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습니다. 눈을 세계로 돌려 보면 더 참혹한 처지에 놓인 이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정치, 경제, 사회 및 종교적인 이유로 폭력과 테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의 수는 헤아리기가 힘들고, 현재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당하는 확진자 수는 2,040만 명이고 사망자는 745,000명에 달합니다.

 

무지보다 더 큰 장애물은 이기심입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혹은 생활의 관성에 따라 자신의 좁은 세계 안에서만 살기로 선택하는 경우가 더욱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끝없는 탐욕을 좇아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는 이들도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그토록 많은 정책을 쏟아내어도 그 빈틈을 노리고 수도권 외곽까지 진출하여 집값 상승을 부추기는 투기꾼들을 예로 들어 볼까요. 홍민철 기자가 최근 수원에 있는 한 아파트 단지를 전수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그 단지 내 2층 아파트 한 곳을 옆 동네인 영통에 사는 사람(30대)이 매수했는데, 그 사람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 아파트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힐스테이트에 사는 사람(46세)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는 아파트 소유자는 춘천시 후평동 더샵에 사는 사람(55세)이었고 그 사람의 아파트는 서초구 반포동 삼풍아파트에 사는 사람(42세)의 아파트였습니다. 이런 갭 투기(=‘전세 끼고 아파트소유’)의 사슬은 수원 그 아파트에서 시작해 영통-돈암-춘천-서초로 이어졌던 것이지요.​ 작년 12월 16일에 정부 대책이 발표된 이후부터 전국에서 투기 세력이 그 아파트로 진출하여 거래가 폭등하고 가격이 급상승했다고 합니다. 서울과 인천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인 분당, 성남, 부천뿐 아니라 강원도 인제, 충남 당진, 전남 장성 사람들까지 이 아파트로 몰려와 경쟁적으로 사들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지난해 12월까지 이 서민 아파트(20평) 가격은 1억 8천만 원이었지만, 올해 들어 7개월간 1억 원이 올랐고, 지난달 15일에는 실거래가 2억 8천만 원이 찍혔으며 3억 원짜리 매물도 있었다고 합니다. 7개월 상승률이 66.6%에 달한 셈이지요.

 

이들뿐이겠습니까? 자기들이 통과시킨(킬) 부동산 법안을 이용해서 투기하는 국회의원들, 부동산 정책을 주무르면서도 자신들의 다주택을 정정당당하게 처리하기 꺼려하는 정부 고위 당국자들을 보며 과연 인간의 탐욕의 끝은 어디일까를 묻게 됩니다. 부와 권력과 명예를 이미 다 꿰차고 있으면서도 더욱 부정하고 무도한 방식으로 부를 탐하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처단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들을 비판하거나 그들 탓을 하면서도 그들과 똑같이 “불의한 재물”을 탐하는 투기꾼들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손에 맡깁니다. 그 대신 이런 “맘몬의 노예”들로 인해 고통당하고 고뇌하는 숱한 가난한 민초들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그들이라도 재물과 돈의 종의 자리를 떨쳐 버리고 일어나 가치 있고 정의로운 길을 택하는 지혜를 실행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작금의 부동산 사태를 바라보며 누가복음 17: 26-30, 32-33이 생각났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And just as it happened in the days of Noah, so it will be also in the days of the Son of Man: they were eating, they were drinking, they were marrying, they were being given in marriage, until the day that Noah entered the ark, and the flood came and destroyed them all. "It was the same as happened in the days of Lot: they were eating, they were drinking, they were buying, they were selling, they were planting, they were building; but on the day that Lot went out from Sodom it rained fire and brimstone from heaven and destroyed them all. It will be just the same on the day that the Son of Man is revealed. <...> Remember Lot's wife. Whoever seeks to keep his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his life will preserve it.)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게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일상을 이루고 인생을 형성하고 있는 터인데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같은 문맥에서 “롯의 처를 생각하라”라고 명령하시면서 그녀를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였다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여기에서 언급된 목숨은 물리적인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zoe)가 아니라 영혼이나 자신을 의미하는 ‘프쉬케’(psyche)입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했다는 것은, 그녀가 탐욕이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게 문제가 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는 일상의 다양한 대상이나 활동들을 탐욕과 사리사욕의 대상으로 변질시켜 독점하려 하고 그것들에 탐닉하려 한 게 잘못이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더구나 노아의 조상인 에녹 시대부터 주님께서 이 세상에 임하셔서 모든 사람의 모든 경건하지 않은 언행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천명되었음(유다서 14-15)에도 불구하고, 롯의 사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심판 소식을 농담으로 여기거나(창세기 19:14) 전혀 개의치 않고 탐욕의 끝을 달리는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부지기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의 약속이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부동산을 매개로 하여 탐욕의 끝을 달리고 있는 이 시대 우리나라의 현실이 위태롭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유다서 14-15)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It was also about these men that Enoch, in the seventh generation from Adam, prophesied, saying, "Behold, the Lord came with many thousands of His holy ones, to execute judgment upon all, and to convict all the ungodly of all their ungodly deeds which they have done in an ungodly way, and of all the harsh things which ungodly sinners have spoken against Him.")

(창세기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Lot went out and spoke to his sons-in-law, who were to marry his daughters, and said, "Up, get out of this place, for the LORD will destroy the city " But he appeared to his sons-in-law to be jesting.)

 

이상에서 논의한 대로 이웃 사랑의 장애물은 무지와 이기심입니다. 무지가 이기심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고 이기심이 무지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이기심 혹은 탐욕이 이웃 사랑의 최대 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문학으로 이웃 이해하기: 시대, 장소, 인물에 대한 실체적인 이해-

인문학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사상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줍니다. 한재욱 목사에 의하면, 동아시아에서는 주역에서 처음 사용된 인문(人文)이란 용어의 의미가 ‘인간의 무늬’ 즉 인간의 도리를 가리킨다고 하고, 그리스에서는 파이데이아(Paideia)라는 용어와 연관되어 ‘인간됨의 본질 교육’을 일컫는다고 보았으며, 로마에서는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용어가 관련되어 ‘시민으로서 익혀야 할 소양’으로 이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스투디아 후마니타스(Studia Humanitas)라는 용어가 채택되면서 ‘인간의 학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하지요. 이런 역사적 배경을 보자면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 사고 또는 인간다움 등과 같은 인간의 근원 문제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이해하는 여정에 더 없는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측면이 믿음이 항상 우리를 인문학 세계로 이끈다는 근거가 됩니다.

 

우선은 다양한 인문학 작품을 읽음으로써 시대나 장소나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을 늘릴 수 있습니다. 이 영역에서는 소설이 주된 역할을 감당할 것이기에 소설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누어 보겠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소설은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으로서, “일정한 구조 속에서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동, 사상, 심리 따위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이나 사회상을 드러낸다.”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상상력이나 허구적이라는 표현 때문에 소설의 성격을 오해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마치 작가가 별다른 근거 없이 상상에만 의존하여 특정 시대와 인물을 설정해서 사실처럼 꾸며 만든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경우입니다. 작가의 상상력이 작용한 산물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이 근거 없는 가공의 이야기라는 것은 오해입니다.

 

예컨대 “불멸의 이순신”(KBS의 100부작 대하 사극)의 원작자인 김탁환 작가는 소설 한 권을 쓰기 위해 책 100권을 읽는다고 합니다. “누가 나에게 장편소설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나는 100권의 책을 읽고 한 권의 책을 쓰는 것이라고 답한다.”라고 할 정도니까요. 이 말은 소설가가 소설을 쓸 때 얼마나 많은 연구와 고증 작업을 거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불멸의 이순신”의 경우처럼 등장하는 인물들(약 120명-아침에 글쓰기 전에 약 30분간 그들의 출석을 부르며 작업했다고 함)과 상황 묘사와 대화 내용이 그 당시 역사 현장을 똑같이 재현한 것은 아니더라도, 수많은 자료 연구와 고증 작업을 거쳐 가장 근접하는 개연성을 띤 것들로 묘사하면서 그 현장의 진실을 추적해 가는 작업이 바로 소설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소설의 반대말은 진실(truth)이 아니라 사실(fact)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소설이 거짓부렁이가 아니라 사실 배후의 진실을 캐는 고귀한 작업이라는 소설의 진면목을 일깨워주는 측면이지요. 소설가들의 이런 작업을 통해 획득하게 되는 지식은 사실상 특정 시대나 장소나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지식인 것입니다.

 

-인문학으로 이웃 이해하기: 삶의 도전과 가치관에 대한 이해-

우리가 소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상황과 처지를 알게 되면 될수록 그들의 입장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내밀한 고민과 염려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더 많아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이웃이 그 구체적인 세상의 장 속에서 어떤 도전에 직면하며 사는지와 어떠한 가치관을 품고 어떻게 살기로 선택하는지에 대한 지식까지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을 통해 이러한 측면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서스펜스 드라마로서 두 가정의 비극을 다룬 소설입니다. “세령호의 재앙”이라는 사건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서원이 7년 전 그날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우발적으로 한 여아를 살인하게 된 서원의 아버지 최현수와 그를 향해 극한의 복수를 감행하는, 그 여아의 아버지 오영제를 중심으로 그 사건과 연계된 여러 인물들의 삶이 비극적으로 전개되지요.

 

소설 도입부에 보면 ‘세령호의 재앙’이라는 제목을 띤 기사에 세령호사건을 재구성한 것과 함께 “미치광이 살인마”인 최현수의 삶이 소개된 한 주간지가 아들 서원에게 배달됩니다. 그것을 읽게 된 서원은 자기를 돌보아 주는 안승환에게 한마디 합니다.

 

“‘이거 사실이 아니지요?’ 나는 아저씨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을 절망적인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러니까 전부 다 사실은 아니지요?’ 한참 만에 대답을 들었다. ‘사실이 전부는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살인마 최현수는 끝내 변호사를 거부했다. 사형확정판결을 받는 순간에도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 현장 검증을 하던 지난 2004년 11월에도 최현수는 어린 소녀의 목을 비틀거나, 아내를 강에 던지는 장면을 태연하게 재현해내 국민의 공분을 산 바 있었다...”라는 자기 아버지 기사를 읽으면서 어떻게 그 사실이 전부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 사실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진실이 존재했습니다. 20년 야구 생활(포수)을 접고 국가주요시설 경호를 전문으로 하는 보안업체에 취직한 최현수는 일산 땅에 33평 아파트(아내에게 있어 ‘중산층 진입’ 기준인)를 구입한다는 아내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오지 근무(세령댐)를 자원해서 그곳 사택에 살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한 번 다녀보려고 간 밤길에 그만 한 소녀를 자기 차로 치게 됩니다. 그날 밤 “새카만 상공에서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던 안개 덕에 시야가 나빠져 보여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길가 가로등이 무용지물일 정도로. 그 상황에서 어떤 모퉁이를 돌다가 “안갯속에서 튀어나온 희뜩한 물체를 놓쳤”는데, 그것이 보닛 앞까지 날아와 있었습니다. “길고 새하얀 물체가 차 오른편에 들이받히며 보닛 위로 허리를 꺾고 착 들러 붙었”고, “산발한 머리가 차창을 내리찍었”습니다. “그 반동으로 보닛에 들러붙었던 몸뚱어리는 45도 각도로 튕겨나간 다음 도로에 떨어졌”고, “차는 철망 담장에 범퍼를 들이받으며 멈췄”습니다. 현수는 소녀에게 돌아가서 그 소녀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소녀 곁엔 파멸로 줄달음치는 자신이 앉아 있었”지요. “무면허, 음주운전, 사망사고...” 사고 당시에는 그 세령이라는 여아의 목숨이 붙어 있었지만 두려웠던 나머지 현수는 그 여아를 죽이게 되어 세령호에 던져 버립니다. 그렇게 하여 살인자가 된 것이지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평범한 가장이었을 뿐입니다.

 

“옳지 않았다. 공평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쥐 한 마리 죽여본 적이 없었다. 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간 적도 없고, 독 묻은 혀로 남의 등골을 빨아먹은 적도 없었다. 거창한 소망을 바란 적도 없었다. 가족에게 세끼 밥을 먹이고, 아들을 키우고, 내키면 소주 한잔할 수 있는 딱 지금만큼의 행운을 바랐다. 그것이 그리도 주제넘은 바람이었던가. 두려움 밑에서 깜박대던 분노가 불길로 타올라 소녀에게 옮겨 붙었다.”

 

최현수라는 인물을 신문 기사에만 의존한다면 “미치광이 살인마”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소설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의 삶과 그가 몰락하는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입장을 더 깊이 납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한 사람을 깊이 이해함으로써 그와 다른 사람들이 선택하고 실행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집니다. 이에 덧붙여 그들에게 가해지는 도전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지식을 확장시킬 수도 있게 되지요. 이 소설의 경우처럼 그들의 의도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에 의해 그들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바뀌어버렸으니까요. 이런 소설의 성격을 정유정 작가는 “사실과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나’에 대한 이야기”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7년의 밤” 마지막에 덧붙인 작가의 말을 통해서입니다.

 

“운명은 때로 우리에게 감미로운 산들바람을 보내고 때론 따뜻한 태양빛을 선사하며, 때로는 삶의 계곡에 ‘불행’이라는 질풍을 불어넣고 일상을 뒤흔든다. 우리는 최선의, 적어도 그렇다고 판단한 선택으로 질풍을 피하거나 질풍에 맞서려 한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최선을 두고 최악의 패를 잡는 이해 못 할 상황도 빈번하게 벌어진다(일간지 사회면을 점령하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떤 세계’.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우리가 한사코 들여다봐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기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도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운명’, ‘불행’, ‘어떤 세계’ 및 ‘그러나’의 세계는 우발적으로 우리에게 닥치는 도전들로서 인생을 살아가노라면 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그것들 중에는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존재하겠지만,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단연 불행한 것들입니다. 정유정 작가는 우리가 인간인 이상 이 측면을 피해갈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문제는 이런 사건들이 닥칠 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우리 인생을 좌우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시각은 세계적인 법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의 안목과 궤를 같이 합니다. 그녀도 상상력이 근간이 되는 문학 작품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이해하게 되는 것으로서 바로 이 측면을 지적했으니까요. 즉 소설 같은 장르의 문학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삶에는 충격을 주지만 그 개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사건들의 윤리적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스바움은 이것들을 “통제되지 않는 사건들”(uncontrolled happenings)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사건들로 인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대로 “도덕 운” 혹은 “도덕적 운세”(moral luck)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자신의 행동이나 그 결과들에 대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 행동이나 그 결과들에 대해 칭송이나 비난을 받게 되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소설 속에서 최현수의 차에 세령이 우발적으로 뛰어 들어 그 아이를 치게 되는 도덕 운이 발생하게 되었지요. 비난을 받게 될 게 뻔한 운 나쁜 사건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도 그에게는 자신의 다음 운세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아이를 죽이고 호수에 던져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되지요. 그때부터 살인범이 된 것입니다. 자기에게 도래한 도덕 운을 살인이란 단계로 진전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세령을 찾기 위해 온 동네를 돌아다니던 아버지 오영제가 호수 근처에서 세령의 옷의 일부를 발견하게 되어 처음에는 잠수부 안승환과 신임 보안팀장이었던 최현수를 의심하다가 결국 최현수가 살인범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서원을 세령호 한가운데 있는 한솔등이라는 섬에 묶어놓고 호수의 수위가 높아져 서원을 익사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최현수를 세령호 통제실 CCTV 의자에 묶어둔 것도 그에게 채무상환하는 식으로 똑같은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다른 도덕 운이 닥친 셈입니다. 호수 수위가 올라가기 시작해서 서원이 죽을 상황에 처하게 되자 최현수는 흥분하게 되어 또 다른 엄청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오영제를 힘으로 제압한 후, 호수의 수위를 낮추기 위해 세령댐의 수문을 열어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마을 주민 절반과 경찰 네 명이 살해되고 최현수는 사형을 선고받게 되지요.

 

자신에게 닥친 도덕 운에 대해 극단적인 선택으로 응수한 최현수가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이 있다고 작가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내가 평생을 걸고 지켜온 가치관이 아닐까 합니다. 작가는 자신에게 그것은 자유의지였다고 했지만, 최현수에게는 그것이 바로 자기 아들 서원이었겠지요. 자기에게 다가온 세령의 치명적 교통사고라는 도덕 운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해 또 다시 다가온 아들의 죽을 고비라는 도덕 운을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생명을 걸고 지켜낸 것이었습니다. 그가 취한 행위가 옳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삶의 벼랑 끝에서 생명 다해 지키고자 했던 유일한 가치가 존재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치과의사이면서도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sociopath)인 오영제에게는 그런 아들, 즉 “그의 인생에서 빠진” 유일한 것이 없었지요. 아니, 그에게는 그런 가치 있는 존재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그 “빠진 것을 채우고자 노력해온 기간이 무려 9년이었”다가 아들이 생길 뻔했지만, 아내에 대한 자신의 폭력 행위로 그녀의 뱃속에서 11주간 자란 태아가 유산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그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아이가 죽었다는 말로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될 줄은 모르고. 그는 수술실 안에서 들려오는 흡입기 소리를 들으며 몸서리를 쳤다. 자기 몸이 토막 나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고통 속에서 확신했다. 죽은 아이는 아들이었다.” 자기에게 다가온 아들이라는 도덕 운을 폭력이라는 선택을 통해 거부하게 됨으로써 자기 삶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은 소시오패스인 그의 열매였습니다.

 

-인문학으로 이웃 이해하기: 시대정신 및 세계관에 대한 이해-

문학 작품은 전반적인 시대 및 인물 이해에서 시작하여 그 시대 및 인물의 가치관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뿐 아니라, 그 시대와 인물 배후에 존재하는 시대정신과 세계관까지도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을 통해 이러한 측면을 고찰해 보겠습니다. 30명 이상이나 되는 등장인물들이 1인칭으로 자기 시점을 묘사하는 독특한 형식을 차용하면서 우리나라의 20세기의 이모저모를 파헤치는 이 작품은 만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태산준령 산골인 개운리라는 곳에 정착한 조부모,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6남매(3남 3녀) 중 둘째 아들인 만수는 소위 베이비부머 세대(우리나라에서는 전후 세대, 특히 1955-1963년에 태어난 세대를 일컬음)로서 성 작가나 저와 같은 나이인 1960년생입니다. 머리가 크고, 걸음마도 늦고, 어미젖도 제대로 먹지 못해 팔다리가 비쩍 마르고, 병도 잦고, 온갖 피부병으로 고생하면서 자녀들 중 황천에 가장 가까이 갔다 온 아이여서 그저 사람 구실하도록 살려만 주소서 하는 게 (조)부모들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만수가 다른 형제, 자매들을 돌보고 보살핍니다. 집안에서 촉망받던 형이 월남 파병되었다가 고엽제로 인해 사망한 후에 그 형의 유언을 좇아 평생을 가족들을 섬기며 투명인간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이 작품을 읽어가다 보면 우리나라가 지난 20세기에 어떤 세월을 통과했는지 일별할 수 있습니다. 일본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 및 경제 개발 시기의 다양한 속내를 갖가지 주인공들의 고백을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피폐한 삶을 살아가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괴롭고 고단한 삶의 나날들을 축소판으로 보여주는 고백들이 적지 않습니다. 공동 수도와 공동 화장실을 써야 했던 난감한 시절,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거나 사고 나는 경우(만수의 둘째 누나 명희는 연탄가스를 마신 후 제 때 치료받지 못해 바보로 전락함), 학생들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는 독재 교사들, 열악한 구로공단에서 돈 벌어 가족 부양하는 젊은 여성들, 돈 벌겠다고 자원하여 월남으로 파병된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먼 시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장남이나 머리가 뛰어난 아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온 가족이 희생한 우리의 과거도 고스란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특히 독재 정권과 싸우면서 자신을 희생한 대학생 젊은이들의 고뇌와 비극적 결말이나 회사 내 노조 설립을 방해하거나 노조원들을 희생시키는 악덕 기업가들의 이야기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시절들의 묘사가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료와 참고 자료들을 통해 검증된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만수의 친구 이동해가 한 고백과 고엽제 가족 준비모임의 성명서 일부를 참고해 보겠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3월 말에 한 학년이 다섯 개 반인 시골 중학교에서 열두 개 반인 서울 변두리 중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그때 내 번호가 69번이었다. 교실 하나에 예순 명이 정원이고 열다섯 줄의 네 개 분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달 사이 아홉 명이 전학을 온 셈이었다. 일 년 뒤 한 학년 당 반의 개수는 열여덟 개로 1.5배 늘어났다.”

“베트남 전쟁기간 중 미국은 베트콩의 은둔지와 무기 비밀 수송로로 이용되어온 정글을 제거하고 시계를 청소하기 위해, 또 베트콩의 경작지 농작물 제거를 위해 1962년에서 1971년까지 330만 헥타르가 넘는 면적에 고엽제를 살포했습니다. 이는 베트남 전 경작지의 15퍼센트, 전 삼림의 30퍼센트에 해당합니다. (...) 베트남에서는 한국군에게는 고엽제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주의사항이나 지시가 별달리 전달되지 않았던 까닭에 일부 병사들은 미군이 고엽제를 공중 살포할 때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 하여 고엽제가 쏟아지는 곳을 쫓아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더 맞으려 했습니다. 부대 주변에서 제초작업을 하는 병사들은 고엽제 가루를 철모에 담아서 맨손으로 뿌리기도 하고 고엽제가 살포된 정글에 흐르는 물을 수통에 담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이옥신이 눈, 코, 입, 피부 등을 통해 온몸에 축적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베트남 국민 약 4백만 명이 베트남전 당시 고엽제에 노출됐고 기형아 출산이 급증하는 등 부작용이 속속 보고되었습니다. (...) 1970년대부터 참전국 장병들이 원인 모르는 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고 죽기 시작했고, 미국에서는 이것이 엄청난 사회적 문제로 발전했습니다. 원인 모를 질병이 고엽제의 후유증인 것으로 판단한 미국, 호주, 뉴질랜드 3개국의 월남전 참전 환자 24만 명이 미국 정부와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손해배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연방법원은 2억 4천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도록 판결했습니다. 독재정권하에 있던 한국에서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소송 참가와 언론보도를 금지해 환자들 대부분이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참전용사들은 원인도 모르는 ‘베트남 풍토병’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다가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습니다.”

 

상상력과 허구의 세계가 펼쳐지는 소설 속에서 이런 식으로 특정 시대의 상황과 그 시대정신을 접하는 경우는 상당히 흔합니다. 콩나물시루와 같았던 당시의 학교 교실 상황을 설명하면서 인구 증가로 인한 학교 교육이 직면한 시대적 도전을 다루고, 고엽제 살포와 그 피해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와 당시 상황을 제시해주면서 군사 독재 정권이 판치던 당시의 시대정신 중 하나가 바로 친미사대주의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 작품의 제목인 “투명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 보이지 않게 된 사람이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작품의 주인공인 만수가 바로 그 투명인간의 대표 격이죠. 세상을 등진 채 사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누나 둘과 동생 둘을 돌보는 일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다 바친 그였지만 그가 곤경에 처하자 그를 도와주는 가족은 없었고,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위해서도 혼신을 다했지만 수억대에 이르는 손해배상 청구를 안고 신용불량자가 되었어도 도움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작가가 설명하는 투명인간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말할 때의 의미에 가깝다. 존재감이 없는, 외모나 능력 모두 별 볼 일 없는 약자다. 또 다른 의미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전부 소진해서 닳아 없어져 버린 사람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결국엔 보이지 않게 된 인간이다.” 희생적이고도 순종적이며, 나쁜 관습과 악한 사회 질서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것들의 희생자로 전락하는 이들 투명인간의 세계관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시대정신과 세계관은 아마도 비평가 로버트 스콜레스가 정의한 ‘본문 밖의 관심’(extratextual concerns)일 것입니다. 본문이 직접 언급한 내용도 참고가 되겠지만 본문의 행간을 읽어 언외의 뜻을 헤아려야 할 사회, 문화적인 경향이나 방향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불멸의 이순신”이나 “투명인간”과 같은 소설들을 그의 말대로, “단순히 고립된 예술 영역에 있는 작품 양식이나 방식들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결과를 품고 있는 세계관들”(not simply as styles or modes of production in an isolated realm of 'art', but as world views with social consequences)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성석제 작가는 이 투명인간들의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독자가 판단하도록 할 뿐 그들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알리고 싶지 않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을 쓰면서 터진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자기 이익과 특권 의식이라는 시대정신과 세계관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 당하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소설가로서 활동한 20년간 빈부격차가 더 심해지고 신자유주의가 더 강화된 것을 지켜보면서 바람직하지 않은 질서가 영구히 지속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속에서 세월호 사태(2014년)가 터졌고 절망감을 느꼈다고 토로하기도 했지요. 그래서인지 “투명인간” 말미의 작가의 말이 그토록 비관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현실의 쓰나미는 소설이 세상을 향해 세워둔 둑을 너무도 쉽게 넘어 들어왔다. 아니, 그 둑이 원래 그렇게 낮고 허술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이상에서 인문학, 특히 문학 작품들이 제공해 주는 이웃에 대한 깊고 넓은 이해가 이웃 사랑의 기반이 된다는 점을 논의해 보았습니다. 우선은 그 작품들이 특정 지역, 시대, 사람들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의 폭을 넓혀준다는 점을 살펴보았고, 다음으로는 그것들이 그 사람들의 내밀한 속사정과 가치관 및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도전들도 알려 준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문학 작품들이 그 지역, 시대, 사람들이 품고 있던 시대정신이나 세계관을 현시해준다는 면에도 초점을 맞추어 보았습니다. 한 작품 속에 이러한 것들을 다 읽을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세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측면들을 각각 고찰해 보았습니다.

 

-다시, 사마리아인의 비유-

하나님 사랑이 우리를 이웃 사랑으로 이끕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 속에서 살아갈 때만 진정으로 우리 이웃을 실천적으로 사랑해갈 수 있습니다. 그 역이 반드시 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이웃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자기가 오해한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이들도 세상에는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피조물, 혹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군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서두에 말씀 드린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시 상고해 보자면,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의미는 이웃 사랑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비유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에 대한 답변이었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Teacher, what shall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 누가복음 10:25)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의 길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주시기 전에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입니다. 그 사랑이 반드시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하지만 핵심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은 올바로 자기매김되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인문학이 신앙 성장에 아무리 유익하다고 하더라도 인문학은 올바로 자리매김되어야 합니다. 인문학 서적을 읽는 일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도록 도움을 준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논의한 대로 인문학을 통하여 이웃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들을 섬길 수 있는 길을 모색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덧붙여 인문학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고 우리의 인격을 보다 성숙하도록 도와줍니다. 시와 소설 읽기를 통해 정서적으로 큰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고 내적인 상처를 치유받기도 합니다. 특히 소설 속의 인물과의 교감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고 인격적인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인문학 자료를 활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우리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개발해 갈 수 있습니다. 수잔 갤러거와 로저 런딘이 지적한 대로, “어느 사회나 어떤 형태의 문학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비유를 사용하는 자(metaphor makers)와 이야기를 창안해 내는 자(story tellers)로 창조하셨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문학은 그 자체의 힘만으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히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역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처지를 이해하더라도 그들을 돕기 위해 그 이해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왕왕 발생합니다. 인문학 자원을 통해 기쁨을 얻고 내적 상처를 치유받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도덕적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되더라도 그 통찰력이 반드시 행동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구태의연한 악’('the banality of evil') 속에 파묻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살게 되는 경우도 흔하지요. 마르크스주의자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이 예로 든 나치 사령관을 한번 살펴보는 것으로 족할 듯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일하는 그 사령관은 낮 동안은 대량 인간 학살을 감독하는 일을 하고, 밤이면 괴테를 읽으면서 휴식을 취했다고 하지요. 우리나라 부동산 투기꾼들 중에도 낮에는 투기 현장을 휩쓸고 다니면서도 저녁에는 고상한 인문학 강좌나 예술 활동에 심취하는 이들이 없을까요? 인문학 자원을 통해 자기 잠재성을 개발하는 이들 중에도 다른 사람들의 인격을 무시한 채 안하무인격으로나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하게 됩니다. 이렇듯 이웃 사랑의 두 가지 장애물 중 두 번째인 이기심의 뿌리는 쉽사리 뽑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검으로 활용하시는 성령의 역사만이 이기심에서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논의는 인문학의 위치를 폄훼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장점과 그 한계를 함께 인식하면서 잘 활용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항상 우리를 인문학의 세계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김기석 목사가 제안한 것을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 인문학과의 소통을 통해 믿음 혹은 신학의 언어와 지평을 더욱 확장해야 합니다. 신학이 '홀로' 자족하는 길을 선택하는 순간 고립은 심화되고 현실로부터 점점 멀어질 것임을 명심하면서, 인문학과 '더불어' 가는 길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중심이신 하나님께 이르는 다양한 길을 발견하는 신학으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인문학자들은 우리가 잘 분석할 수 없는 세상의 흐름을 탁월하게 읽어 내는 재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저작들을 소화해서 세상을 바르게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게 지혜입니다. 둘째, 인문학 서적을 통해 확보한 보편성을 띤 언어와 메시지로 일상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소통을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기독교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가 소통과 설득에 있다는 점을 부인할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좋은 책’ 즉 ‘인간 경험의 깊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사람들의 것을 담아놓은 책’을 통해 우리가 먼저 상상력과 감성에 자극 받음으로 더욱 풍요로운 세계를 누리면서 그 책의 시각과 그 책을 통한 경험을 소통에 활용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셋째, 모든 상황에 맞는 답을 이미 갖고 있다는 신학적 오만을 내다 버리고, 인문학이 제기하는 질문들에 성실하게 답하려고 진력하는 가운데 더욱 풍요로워지는 신학을 추구해야 합니다. 넷째, 최고의 이야기꾼이요 시인이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이야기와 은유의 세계를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지점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4-5, 새번역)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우리는 궤변을 무찌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for the weapons of our warfare are not of the flesh, but divinely powerful for the destruction of fortresses. We are destroying speculations and every lofty thing raised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nd we are taking every thought captive to the obedience of Chr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