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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영성, 그리고 성경 묵상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12. 7.

선교와 영성, 그리고 성경 묵상

며칠 전 한 선교 단체에서 강의할 때 ‘영성 개발’에 대해 잠시 나눈 적이 있습니다. 선교 사역을 감당해가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성경적, 교리적인 기반을 닦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한 가지 측면이었습니다. 조슈아 오가와 선교사가 영성에 대해 나눈 내용에 의하면, 기독교 역사상 영성에 대한 접근 방식이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개인적인 것(personal)으로서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 사랑, 헌신 및 기도 속에 존재하기(being)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개념적이고 교리적인 것(conceptual and dogmatic)으로서 성경과 하나님, 특히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지식(knowledge)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행하기(doing things for God and God's justice)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서구권 선교사들은 영성을 지식(“Knowing”)이나 행동(“Doing”) 중심으로 파악하는 데 반해, 비서구권에서는 영성을 존재 인식(“Being” perception) 중심으로 파악한다고 보았습니다. 서구권 선교사들이 많이 사역한 비서구권에서 그들과 현지인들 사이에 영성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괴리가 발생한 선교 역사를 시사한 대목이지요. 그러므로 어떠한 민족 집단이든 각각 영성에 대해 자기들만의 이해나 기대나 실제적인 필요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 영성의 방향성을 잘 납득해서 활용하는 게 효과적인 선교 사역의 관건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제게는 이 세 가지 접근 방식이 영성의 세 가지 층위로 이해되었습니다. 즉 각각 존재, 지식 및 행위의 차원에서 영성을 이해한 이 접근 방식은 존재라는 층위를 기반으로 해서 지식과 행위의 층위가 연이어 겹쳐 있습니다. 얼핏 보면 지식이란 층위가 일차적인 기반일 것 같지만 존재라는 층위가 지식의 층위보다 우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지니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실재하셨고 당신께서 창조해 주신 우리에게 그 지식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린도후서 4:6)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암흑의 세계, 무의 세계에서 빛을 창조하신 것처럼, 암흑의 세계, 무지의 세계였던 우리 심령 속에 당신의 영광에 대한 지식의 빛을 조명해 주신 것이지요. 이 지식의 빛은 하나님의 실재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더 근원적인 단계까지 나아가면 이런 측면이 더 극명해집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존재를 택하셔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신 존재 차원의 비밀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 1:3-5) 성경 지식을 통해 이러한 신비로운 존재의 계시를 깨닫게 된 것은 맞지만, 하나님의 존재 안에 우리가 존재한 사실이 그 지식보다 우선했던 것입니다.

 

이 존재의 차원을 기반으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키워 가고 당신의 영광과 공의를 위하여 행하는 차원이 진작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존재의 차원을 보다 심화해 갈 수 있을까요? 제게는 ‘성경 묵상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그 관건이었습니다. 'MEDITATE'(묵상하다)라는 영어 단어 철자 여덟 개 각각을 머리글자로 한 문장들로 제가 활용하고 있는 성경 묵상 방식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 Memorize the verses. (구절을 암송하라.)

성구를 암송해야 할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제게는 그 구절을 묵상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자주 생기는 자투리 시간이나 여가 시간에 성경을 묵상하려면 성구를 암송해 두는 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성경이나 핸드폰을 펼쳐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들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길을 걸어갈 때 핸드폰을 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지요. 이럴 때 암송된 성구는 자연스럽게 묵상이 가능합니다. 심지어 일을 하는 경우에도, 심각하게 머리를 쓰는 일이 아니라 손발을 써서 하는 단순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암송된 성구가 묵상하기에 유용합니다.

 

암송할 구절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경건의 시간”(Quiet Time)에 묵상한 말씀 중 한, 두 구절을 암송해 두면 하루 종일 묵상하기에 적격입니다. 평상시에 성경이나 신앙 서적을 읽다가 마주친 의미 있는 구절도 암송해 두면 나중에 묵상할 수 있습니다. 시판되고 있는 주제별 성경 암송 카드들을 체계적으로 암송해 가는 것도 유용한 방식입니다.

 

한 가지 덧붙일 조언은 성구를 영어 성경으로 함께 욀 경우에 대해서입니다. 한글로만 묵상하는 것보다 영어를 곁들여 묵상하면 다른 시각을 누릴 수 있을 때가 많습니다. 각 언어는 세계를 바라보는 각각의 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어 성경 중 어떤 것을 택해야 할까요? 영어 성경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직역’ 혹은 ‘축어역(逐語譯)’(a Literal Translation)으로서 원문 한 단어씩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영어 단어를 활용하여 번역(‘word-for-word’ translation)하는 방식입니다. 즉 “원문의 한 구절 한 구절을 본래의 뜻에 충실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The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ASB)이나 The New King James Version (NKJV)이나 The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RSV)이 그 예가 됩니다. 두 번째는 ‘역동 대응 번역’(a Dynamic Equivalent Translation)으로서 원문 단어 하나하나뿐 아니라 그 구절들의 보다 분명한 의미를 밝히는 방식입니다.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이나 The New Living Translation (NLT)이 그 예가 됩니다. 세 번째는 ‘의역’(a Paraphrase)으로서 원문의 의미를 풀어 현대 영어로 번역하는 방식입니다. The Good News Bible (GNB)이나 The Living Bible (TLB)이나 The Message Bible (MB)이 그 예가 됩니다.

 

이것들 중 어느 것을 택하는 게 좋을까요? 묵상은 특정 구절을 계속해서 묵상하고 반추하는 경우이므로, 원문의 의미뿐 아니라 원문에 사용된 단어 하나하나까지도 충실하게 다룬 축어역 영어 성경을 택하는 게 유리합니다. 의역은 그 성경 번역자들이 원어 성경을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한 것을 자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그것을 통해서 특정 구절의 요지를 파악할 수는 있지만, 그 구절에 대해 다른 의미로 확장하거나 적용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의 확장이나 적용이 옳은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로마서 12:1-2을 아래 두 번역으로 비교해 보세요. 첫 번째는 축어역 성경이고 두 번째는 의역 성경입니다. 축어역 성경의 의미는 개역개정 성경과 유사하지만, 의역 성경의 의미는 따로 번역해 두었습니다.

 

■“Therefore I urge you,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o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and holy sacrifice, acceptable [well-pleasing]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rational] service of worship.  And do not be conformed to this world [age],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so that you may prove [approve] what the will of God is, that which is good and acceptable [well-pleasing] and perfect.” (NASB)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개역개정)

■“And so, dear brothers, I plead with you to give your bodies to God. Let them be a living sacrifice, holy—the kind he can accept. When you think of what he has done for you, is this too much to ask?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be a new and different person with a fresh newness in all you do and think. Then you will learn from your own experience how his ways will really satisfy you.” (TLB)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간청합니다. 그 몸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산 제사가 되고 거룩한 것이 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행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이렇게 요청하는 게 너무 과한가요? 이 세상의 행동이나 관습을 모방하지 말고 여러분이 행하고 생각하는 모든 일 속에서 새롭고 신선함을 갖춘 새롭고 다른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길이 어떻게 여러분을 참으로 만족시킬지를 여러분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선 의역 성경(TLB)에서는 축어역 성경(NASB)의 ‘영적 예배’(spiritual [rational] service of worship)라는 표현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의역 성경에서는 이런 식으로 역자의 판단에 의해 생략되는 표현들이 자주 존재합니다. TLB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행해 주신 것’(what he has done for you)이라는 표현은 NASB의 ‘하나님의 자비하심’(the mercies of God)에 대한 역어입니다. ‘자비’의 원래 의미인 ‘불쌍히 여긴다’가 드러나지 않았지요. TLB의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he can accept)이라는 표현은 NASB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acceptable [well-pleasing] to God)에 대한 대응 구절입니다.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된다’는 원어의 의미가 축약되었지요. TLB의 ‘이 세상’(this world)에는 NASB의 ‘이 시대’(this age)라는 의미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라는 표현은 ‘내세’(the age to come)라는 표현과 대조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관건이 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더 심각한 의역의 문제가 2절 하반절에 드러납니다. TLB에서 ‘하나님의 길이 어떻게 여러분을 참으로 만족시킬지를 여러분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게 될 것입니다’라고 번역된 부분은, NASB의 ‘선하고 큰 기쁨이 되며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증명[분별, 시험]하도록 하십시오’에 대한 대응 구절입니다. 즉 TLB는 하나님의 뜻이 선하고 당신에게 큰 기쁨이 되며 온전한 것이라는 원어의 의도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측면으로 방향 전환해 버렸습니다. 이 의역으로는 원어 성구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을 수도 없고 그 구절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의미를 확대하기도 어렵습니다. 이상에서 논의한 이유들 때문에 의역 영어 성경보다는 축자역 영어 성경을 택하는 게 묵상하는 데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제게는 NASB가 참 도움이 되었습니다.

 

둘째, Emphasize each word. (각 단어를 강조하라.)

암송한 구절 중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를 각각 강조하며 읽어 보면 이전에 주목하지 못했던 특정한 단어가 눈에 들어오면서 주목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1:8 말씀을 참조해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but you wi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has come upon you; and you shall be My witnesses 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even to the remotest part of the earth.”(NASB)

 

이 구절 중 ‘오직’이라고 번역된 원어가 ‘그러나’의 의미도 갖고 있었는지 알고 계셨는지요? 이렇게 한 단어씩 주목해 보지 않으면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앞 구절(7절)을 한 번 더 상고해 보게 되지요. 예수님의 재림 시기는 하나님의 권한 하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간여할 바가 아니라는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접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나오는 단어가 ‘성령’입니다. 교회의 선교는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과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너희’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읽다 보면 선교의 매개체가 바로 우리가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교회라는 주님의 몸임을 인식하게 되지요. ‘임하신다’는 단어는 단순히 ‘오신다’가 아니라 ‘엄습하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의 ‘on'[’to'가 아니라]이라는 전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헬라어가 누가복음 21:26, 야고보서 5:1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마치  “해와 달과 별들에서 징조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서 괴로워”(누가복음 21:25)하는 날이 세상에 엄습하거나(26절), 비참한 일들이 부자들에게 닥치듯이(야고보서 5:1),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엄습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권능을 받고’라는 표현을 강조하다 보면 우리가 선교 활동을 담당할 때 누리는 능력은 내게서 비롯된 게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능력 있다고 자만해지지 않고 도리어 그런 능력을 부여해 주신 하나님 앞에 더욱 겸허할 수 있겠지요.

 

다음으로 강조하게 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라는 부분은 사실상 사도행전의 ‘목차’(Table of Contents)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다루고, 8장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산되는 선교 활동을 언급하며, 9장에서부터 마지막 28장까지 사도 바울의 개심에서 시작하여 그의 선교 여행 일정과 로마에 이르는 여정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이 점진적일 뿐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세계적일 것이라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지요.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이란 지명을 강조하다 보면 현재 우리가 살거나 일하고 있는 일상의 장이 떠오릅니다. ‘사마리아’란 지명에 주목하다 보면 우리가 선교하러 가기 꺼려지는 지역이 상기되지요. 이 지명의 존재 때문에 일본 선교에 생애를 건 분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땅 끝’이란 표현을 강조할 때 저는 회교권과 힌두권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하늘’이란 단어처럼 ‘땅 끝’이란 표현도 비유적인 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이라면 모두 다 ‘땅 끝’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증인’이란 표현과 ‘되리라’라는 단어를 강조해 봅니다. 우선 ‘내 증인’이란 구절은 특정인이나 특정 교파나 단체 및 특정 국가의 증인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지난 선교 역사를 돌아보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아니라 특정 교파나 특정 국가의 증인으로 선교 사역을 담당했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리고 이 증인이란 단어는 단수(witness)가 아니라 복수(witnesses)라는 점도 참고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너희’라는 2인칭 복수와 상응하는 측면이지만, 한 번 더 선교 활동에 있어서 교회 공동체가 증인들의 주체로 부각되어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런 지점을 놓치면 선교 활동 자체를 지나치게 개인적인 기여라는 측면에서만 이해할 소지가 많습니다. 이에 덧붙여 ‘내 증인이 되리라’이지 ‘내 증인이 되라’가 아니라는 점도 주목거리입니다. 성령께서 성도들의 인격 위에 엄습하셔서 당신의 능력을 부여해 주시면서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빚어 가실 것이라는 약속이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선교 열정을 강화하라는 명령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축자역 영어 성경 두 곳(NASB와 NKJV)에서는 'you shall be My witnesses'라고 번역해 두었습니다. 요즘 영어 평서문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shall’을 ‘will' 대신 쓰고 있지요. 이렇게 ’shall'이 2인칭 평서문에 사용되는 경우에는, ‘시키겠다’, ‘하도록 하겠다’라는 화자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성도들을 당신의 증인이 되도록 하시겠다는 의미인 것이지요. 이 상황에서 ‘will'이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문맥 속에서 이미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에게 능력을 허락해 주신 후에야 비로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특정 구절 속의 각 단어를 강조하면서 묵상할 때 누릴 수 있는 유익의 예가 됩니다.

 

셋째, Deliberate on the most important term. (가장 중요한 용어에 대해 숙고하라.)

우리가 암기하는 특정 구절에는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예컨대 히브리서 11:6을 묵상하다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꽂힙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And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Him, for he who comes to God must believe that He is and that He is a rewarder of those who seek Him.” (NASB)

 

믿음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본 블로그 속 다른 글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습니다("믿음: 바라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이다?" 참조). 그 글의 시발점이 된 것이 바로 이 구절 묵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사도 바울(고린서후서 5:9)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야망이 됨을 알고 있기에, 이 일의 필요조건이 되는 믿음에 대해 숙고하는 일은 중대한 묵상 과제였습니다. 믿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이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믿음 없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 헌금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 금식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 선교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믿음 없이 목사도 될 수 있고, 선교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존재한다고 이 말씀은 천명합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이유를 이 구절 하반절이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존재하신다는 것과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당신께로 나아오는 자만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이라는 주요 단어에 대해 주목하는 동안 떠 오른 질문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질문은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이 질문을 할 때 성령께서 상기시켜 주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해 권면해 주신 내용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의로운 일을 실행하면서 각각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6:2), “사람에게 보이려고”(6:5, 16) 기를 쓰는 자들이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각각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they have their reward in full-2, 5, 16절)고 단호하게 말씀하시지요. 영어 성경은 ‘전부 다’(in full) 받았다는 점도 덧붙입니다. 즉 그들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면서도 각각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4, 6, 18절)께서 지켜보고 계심을 믿지 않고 도리어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그들의 영광을 받으려는 어리석은 이들이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이들은 각각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4, 6, 18절)는 진리를 믿지 않은 이들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1:6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라는 진리를 믿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들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도로(徒勞)에 그쳤습니다.

 

믿음이라는 주요 단어에 대해 주목하는 동안 떠 오른 둘째 질문은 “하나님께 상 받을 것을 기대하며 당신을 추구하는 게 바람직할까?”였습니다. 상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게 순수하지 못하고 타산적이 아닐까라는 우려에서 비롯된 질문입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서 11:6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을 추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상 주신다는 점을 믿지 않으면 당신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앞의 질문 속에서 암시된 우려는 C. S.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칸트나 스토아학파의 사상에서 스며든 것이지 성경의 정신이 아닙니다. 예컨대 성경은 자기 부인에 대해 여러 모로 언급하고 있지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부인이 이루어질 때 이어지는 결과나 보상이 함께 소개되어 있지요. 예컨대 다음 두 구절을 보세요.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누가복음 9:23-24)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8:28-30)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이런 결과나 보상을 기대하는 게 타산적(mercenary)일까요? 루이스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해 줍니다. 타산적인 보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행위와 보상 사이에 자연스러운 연관성이 없는 경우는 타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두 가지 사이에 자연스러운 연관성이 있는 경우는 “합당한 보상”(proper reward)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돈이라는 보상을 목표로 결혼하는 사람은 타산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결혼이라는 보상을 목표로 결혼하는 "진정한 연인"(real lover)은 결코 타산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돈은 사랑에 대한 자연스러운 보상이 될 수 없지만, 결혼은 진정한 연인에게 합당한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여 추구하는 자에게 허락해 주시는 보상은 당연히 합당한 보상입니다. 얼마든지 그 보상을 기대하고 당신께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상 우리의 문제는 그 기대감과 갈망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니라 너무 약한 것이 아닐까요? 루이스의 일갈에 귀 기울여 보세요. “참으로 복음서에 약속되어 있는 뻔뻔스럽게까지 보이는 보상의 약속과 그 엄청난 보상의 성격들을 생각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강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깨닫게 되실 듯합니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을 제공해 준다고 해도 술과 섹스와 야망에만 집착하는 흐리멍덩한 피조물들입니다.”(Indeed, if we consider the unblushing promises of reward and the staggering nature of the rewards promised in the Gospels, it would seem that Our Lord finds our desires not too strong, but too weak. We are half-hearted creatures fooling about with drink and sex and ambition when infinite joy is offered to us, <...>) 이상이 특정 구절 속의 가장 중요한 단어를 숙고하면서 묵상할 때 누릴 수 있는 유익의 예가 됩니다.

 

넷째, Imagine their context. (문맥을 상상하라.)

마태복음에서 제시되어 있는 예수님의 대위임령인 28:19, 20의 문맥을 관찰해보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의 실상이 드러나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When they saw Him, they worshiped Him; but some were doubtful.)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Some'이라고 했으니 의심한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사정을 알고 계시면서도 주님께서는 그들이 포함된 무리, 즉 당신의 교회에게 대위임령을 발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시되어 있는 대위임령인 1:8의 문맥을 살펴보아도, 마태복음과 다르게 묘사되어 있지만 상황은 오십보백보입니다. 6절에 보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Lord, is it at this time You are restoring the kingdom to Israel?)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무려 40일간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도, 사도들은 여전히 동사, 명사 및 부사구 측면에서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지요(존 스토트). ‘회복하다’(restore)라는 동사 속에는 정치적이고도 영토적인 왕국의 회복이라는 오류를 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Israel)이라는 명사 속에는 민족적인 왕국을 기대하는 오판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때’(at this time)라는 부사구 속에는 즉각적인 왕립 확립을 고대하는 실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부분을 묵상할 때마다 부활하신 후에 곧 승천하실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할 때가 많습니다. 저 같으면, ‘참 대단하다!’, ‘참 너무 한다!’, ‘참 기가 찬다!’라고 읊조리면서 여전히 의심하고 오해하고 있던 사도들에게 핀잔 한 마디 하셨을 법한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혼잣말하시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언짢게 꾸짖으신 적도 없습니다. 저 같으면, ‘이런 자들에게 세계 선교 사역을 위임할 수 있겠는가?’라고 자문하실 법한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독백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의심을 불식해 주시면서,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제자 삼는 사역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시면서, 전 세계로 뻗어나갈 증인 사역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의심하는 사도들의 의혹을 말끔히 떨어 없앨 수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후 40일간 '확실한 많은 증거"(many convincing proofs-사도행전 1:3)로 부활하신 것을 드러내주신 과정을 통해서였습니다. 그 다양하고 확실한 증거들을 한 가지씩 상상해 보고 나중에 이것들을 다 함께 통합해서 묵상해 보세요. 사도들이 당신의 부활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고 그 역사적 진실성을 확고하게 증거할 수 있는 증인이 되도록 준비시키시려던 주님의 깊은 의도가 담겨 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예컨대 시간적으로 아침과 저녁에도 나타나시고, 공간적으로 길가(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의 경우)나 바닷가(고기 잡던 제자들의 경우)나 방 안에도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나 의심을 제거해 주시고(도마의 경우) 격려해 주기도 하셨으며(베드로의 경우), 제자들 그룹 전체와 만나 함께 식사도 하시고 그들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40일간의 집중 강좌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과 범위와 도래"(the kingdom's nature, extent and arrival)에 대한 사도들의 오해도 말끔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을 온전히 준비시켜 주신 이후에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나눈 것처럼 성경 구절의 문맥을 관찰하는 중에 자기 생각이나 반응을 예수님의 반응이나 행동과 견주어 상상해 보면 새로운 점들을 발견하고 주님의 인격을 더욱 깊이 체감하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다섯째, Think them through with 5W1H. (육하원칙으로 곰곰이 생각하라.)

암송한 구절을 묵상할 때 다양한 질문을 하면 신앙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호수아 1:8 말씀을 묵상하면서 누린 안목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This book of the law shall not depart from your mouth, but you shall meditate on it day and night, so that you may be careful to do according to all that is written in it; for then you will make your way prosperous, and then you will have success.)

 

먼저 이 구절은 언제 주어진 말씀일까요? 1:1에 보면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이끈 전무후무한 지도자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리더십이 여호수아에게 넘겨졌을 때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어디서 주어졌을까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가 아니라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1:2). 이 구절은 누가 누구에게 주셨나요? “모세와 함께 있었던” 하나님(1:5)께서 모세의 수종자인 여호수아에게 주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무엇을 말씀하셨나요? 하나님의 율법책 속에 기록된 말씀대로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관건이라면 어떻게 순종하라고 하셨나요? 율법책을 항상 입술에 두고(NIV) 그것을 밤낮 묵상함으로써 주의 깊게(NASB) [혹은 성심껏-새번역, 공동번역]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순종하라고 말씀하셨나요? 여호수아의 길이 순조롭게 되고 그가 성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구절을 두고 다양한 질문을 던지다 보면 그냥 막연하게 읽을 때는 지나치게 될 의미 있는 많은 정보와 지혜를 새롭게 주목하게 되어 숱한 영적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민족의 영도자 모세가 죽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 정복하는 일을 목전에 둔 여호수아,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선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함께 동행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그의 장래 사역의 관건이 달린 한 가지 과제를 부여해 주십니다. 항상 율법책을 입술로 읊조리고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의 깊게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깊게 순종하는 것이 결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율법책을 입으로 읊고 밤낮 그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이 핵심적인 사안이 됩니다.

 

한편으로 보면 말씀을 읊조리는 것과 묵상하는 것이 같은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개역개정 시편에서는 묵상하는 것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로 번역한 예가 많고(예-시119편에만 8회 사용), 축자역 영어 성경에서는 율법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는 것과 그것을 밤낮 묵상하는 것을 병치시킴으로써 같은 의미를 대조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말씀을 읊조리는 것과 묵상하는 것을 다른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묵상이 그 의미상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말없이 특정 구절을 깊이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사정이 허락한다면 그 구절을 입으로 읊조리면서 묵상하는 게 더 자연스럽기도 하고 더 효과적이기도 합니다. 특정 단어나 구를 강조하거나 다양한 질문을 하려고 시도하면 자연스럽게 말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좀 더 집중해서 생각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그 읊조림을 듣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심령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말을 통한 암시에 강력한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한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쉐마'(Shema)라는 전례(典禮)용 기도가 있습니다. 그 용어 자체는 ‘들으라’는 의미를 띠고 있으며, 그들, 특히 유대인 남성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확언하기 위해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두 번씩 낭송하는 성구 세 구절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 성구는 바로 신명기 6:4-9, 11:13–21, 민수기 15:37–41로서 그들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유대인들은 이 구절들, 특히 신명기 6:4-9을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울 뿐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암송한다고 하지요. 사실상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명령, 즉 가장 큰 계명으로 지적해 주신 것이 바로 신명기 6:5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ght.-마태복음 22:37-38에 인용됨)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의 마음 판에 새길뿐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자신들에게 들려주고 자녀들에게도 부지런히 가르치고 강론해야 했습니다. 암송뿐 아니라 말을 매개로 하는 ‘들음’의 지대한 영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말하기와 듣기는 자기에게도 똑같은 효력을 발생합니다. 지금 묵상하고 있는 여호수아 1:8에서 율법책을 자기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읊조림은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혼잣말이자 자기와의 대화(self-talk)인 셈이지요. 상상을 초월한 과제와 무시무시한 적들과 고분고분하지 않은 백성들이 전후좌우에 포진한 상태에서 자칫 잘못하면 낭패를 당할 수 있던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뿐 아니라 그 말씀을 자신에게 계속 들려주는 게 절실했습니다. 두려워하고 놀랄 일 천지인 상태에서 강하고 담대한 심령을 지속하면서 용감하게 처신하고 앞장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이렇게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기와의 대화를 타성에 젖어 별생각 없이 진행해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12:2)과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출20:6)을 읊조리며 자신의 심령을 격려하고 위무하기보다는, 한숨을 쉬거나 ‘아이고!’, ‘죽겠다!’, ‘미치겠다!’, ‘내가 못 산다!’ ‘참 대단하다!’, ‘참 너무 한다!’, ‘참 기가 찬다!’, ‘지겹다!’, ‘징글징글하다!’라는 표현들로 자기 마음을 낙담시키거나 위축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제부터라도 ‘주님, 감사합니다!’(Thank you, Lord!) 혹은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I can do all things through Him who strengthens me.-빌립보서 4:13)라는 자기와의 대화로 자신의 삶을 일신한 실례들을 본으로 삼아 주님의 생명의 말씀이 제 입에서 떠나지 않도록 진력해야겠습니다.

 

차제에 이러한 성경 묵상의 길이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됨도 명심하기 원합니다. 시편 1:1-3 말씀을 한번 묵상해 보세요. 말씀 묵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는 복된 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How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walk in the counsel of the wicked, Nor stand in the path of sinners, Nor sit in the seat of scoffers! But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RD, And i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 He will be like a tree firmly planted by streams of water, Which yields its fruit in its season And its leaf does not wither; And in whatever he does, he prospers.)

 

이상이 특정 구절에 대해서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묵상할 때 누릴 수 있는 유익의 예가 됩니다.

 

여섯째, Apply them to my life. (내 삶에 적용하라.)

말씀을 묵상하는 결과는 순종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시편 1편에 계시된 대로 주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복 된 열매 맺는 삶을 약속해 주고 있지만, 여호수아 1:8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 것은 구체적인 순종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두 가지 경우의 적용 사례만 나누겠습니다. 우선 사도행전 1:8을 묵상하면서 ‘땅 끝’이란 표현을 강조할 때 제게는 회교권과 힌두권이 떠올랐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다가 집을 짓지 않으려”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 곳 말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야망으로 삼은 사도 바울(로마서 15:20)이 지금 살아 있다면 택했을 지역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택한 곳이 회교권 중 한 곳인 말레이시아였습니다. 그곳에서 21년 동안 말레이 회교도들을 섬기고 귀국한 이후에도 제 초점은 여전히 이 회교권과 힌두권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히브리서 11:6을 묵상하면서 적용한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을 염두에 두는 게 아니라 제 삶 속에 역동적으로 임재해 계신 주님만을 의식하면서 당신께서 허락해 주실 보상만을 기대하고 갈망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어떤 일감을 제안받을 때 살핀 것은, 우선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제 안에서 빚어 놓으신 기질이나 됨됨이나 은사나 역량에 부합하는지 여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저를 빚으셨고 현재 제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면 당신께서 제 안에 이미 마련해 주시고 심어 두신 것을 존중하는 게 도리였습니다. 돈이나 지위나 명예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기 부인해야 할 대상이었지요. 그다음으로 고려한 것은, 그것으로 인해 제가 보람과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의 보상이 된다고 믿기도 했지만, 이런 것들을 누리며 주님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길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14:17-18의 교훈이기도 하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eating and drinking, b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For he who in this way serves Christ is acceptable to God and approved by men.)

 

즉 주님을 올바른 방식으로 섬기면 주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까지도 겸하여 누리게 된다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연연하여 선행할 때에는 ‘외식하는 자’(hypocrites)라는 주님의 엄중한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한 채 실체도 없는 보상밖에 누리지 못하지만(마태복음 6장의 구제, 기도, 금식 사례 참조),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주님을 섬길 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복을 겸하여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일곱째, Reflect on them telescopically. (망원경 시각으로 성찰하라.)

묵상한 말씀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려면 문맥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 구절의 앞뒤에 있는 근접 문맥뿐만 아니라 그 구절이 속해 있는 책과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잘 이해할 때야 비로소 그 암송 구절의 진의를 납득할 수 있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예컨대 마가복음 1:15이 그러합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구절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올바로 납득하려면 성경 전체를 살피면서 그 표현의 용례를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 용어는 성경 전체에 대한 망원경 시각이 없으면 오해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라는 한글 의미나 ‘kingdom’이라는 영어 의미가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의미와 곧바로 대응되지 않습니다(본 블로그 중 “하나님의 나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다?” 참조). 한글과 영어 단어는 주로 영토적인 측면을 지칭하고 있는 데 반해,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는 ‘통치’나 ‘왕적 권위’를 가리키고 있지요.

 

마태복음 28:19, 20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를 삼을 때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것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마태복음 28:20)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예수님)께서 구약, 신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경륜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보자면,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자신의 책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에서 ‘선교’라는 용어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재정립한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대목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선교는(성경에 근거하고 성경에 의해 정당성이 입증된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피조물의 구속을 위해 하나님의 세계 역사 내에서 진행되는 하나님 자신의 선교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Fundamentally, our mission (if it is biblically informed and validated) means our committed participation as God’s people, at God’s invitation and command, in God’s own mission within the history of God’s world for the redemption of God’s creation.)

 

이 정의에서 주목할 것은 우선 선교의 목적입니다. 전도와 교회 개척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의 구속’이라는 크낙한 목적입니다. 다음으로는 이 정의 속에 '하나님의'(God's)라는 표현이 다섯 번씩이나 등장합니다. 선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점을 확고하게 천명한 것이지요.

 

여덟째, Evaluate the application. (적용한 것을 평가하라.)

지금까지의 묵상 과정을 마무리하고 통합하는 단계입니다. 특정 성구를 암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묵상하여 적용한 것을 한데 정리하는 과정이지요. 이 단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메타 인지(Metacognition) 과정에서 평가라는 차원이 차지하는 위상을 견주어 보면 이해가 됩니다.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해 한 단계 높은 시각에서 계획하고(plan), 관찰하고(observe), 조정하며(monitor), 평가하는(evaluate) 메타 인지 과정 중에 평가하기는 메타 인지 중 마지막 단계로서, 이 단계가 빠지면 더 이상 특정 인지 능력의 진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다시 계획하고 관찰하며 조정해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묵상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요. 특정 구절을 묵상해서 어떤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반추해 보는 과정이 없다면, 더 이상의 특정 영성 영역이나 역량의 진전을 기대하기 힘들 것입니다.

 

주로 이 평가 과정은 글로 기록되기 마련입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자면 이렇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성경을 묵상하면서 얻은 교훈과 그 적용 사항들을 기록해 둔 것이 제게는 더없이 소중한 영적 자원이 되었습니다. 우선은 제 영적 성숙을 위해 기록한 것들을 나중에 함께 기도로 동역해 주시는 분들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시작이 1996년 1월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매달 한 번씩(혹은 일정 기간 동안에는 매주에 한 번씩) 그 묵상 내용을 글로 나누었습니다. ‘복연소식’(福聯消息-빌립보서 1:27을 근거로 '음의 신앙을 위한 합'을 도모한다는 의미)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글이 지난달로 299호가 되었고, 이번 달 글이 300호가 됩니다. 만 25년간의 결실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매달 집필하여 동역해 주시는 분들과 교류한 이 기도 서신이 독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글들이 저를 살려 주고 지켜 주었다는 점입니다. 장구한 지난 세월 동안 변함없이 말씀을 통해 참된 길을 조명해 주시고 때마다 일마다 제 길을 선하게 인도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