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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좋은 일에만 하나님의 섭리가 간여한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3. 5.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좋은 일에만 하나님의 섭리가 간여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겪으면서 대구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떠올렸을 질문이 있습니다. 하필이면 대구에 왜 이렇게 그 환자가 많이 생겼을까? 물론 이 질문을 이 사태의 환경적 원인(cause)을 묻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신천지 소속 31번 확진자가 주된 바이러스 전파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3월 2일 현재 총 확진자 4,212명 중에 대구 지역 확진자 수는 3,081명으로서 총 72.6%(2차, 3차 감염을 다 합치면 90%가 넘는다고 함)에 달하니 이런 질문이 나올 법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이 사태의 내재적 이유(reason)를 묻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 답변은 우리 신앙 내용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즉 간단하게 “그걸 어떻게 아냐?”라고 되묻는 이도 있겠고, “하나님의 뜻이야” 혹은 “하나님께서 다 허락하신 거야”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저 대구가 운이 좀 나빴던 거지”라고 응답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한 치 앞도 분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 내재적 이유에 대한 정보나 지혜가 제한되어 있는 마당에 이런 식으로 응답할 수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응답은 제게 늘 낯설게 다가옵니다. 그것은 단지 우연히 그 31번 확진자가 대구 사람이었고, 우연히 그녀가 신천지 모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한 주역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그래서 우연히 대구 혹은 대구 시민들이 운이 좋지 않게 된 것으로 결론짓는 거지요.

 

과연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운이 좋지 않은 경우라는 게 존재할까요? 이번 바이러스 사태뿐 아니라 우리가 생활해가다 보면 예기치 않게 불행한 일들이 닥치는 경우가 자주 있고 일이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의 원인이 타인이나 주위 환경일 경우도 있지만 우리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깊은 자책이나 좌절감에 휩싸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일이 우리에게 닥칠 때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흔합니다. “만일... 했다면 일이 달라졌을 텐데”라는 후회도 따라오지요. 이번 바이러스 사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운 나쁘게도 31번 확진자가 하필 대구 시민이랄 게 뭐람?”이라고 반응할 수도 있겠고, “만일 31번 확진자가 보건소나 선별 진료소에 신고해서 진료를 받았으면 이렇게 많이 확산되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불운처럼 보이는 일이나 우연하게 발생한 일들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지 한번 묵상해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떠오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라는 용어였습니다. 어떤 일이 닥쳐도 우리 인생을 통치하시고 인도해 가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시기에 결국엔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지난 세월 동안 겪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세상만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면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섭리로 운영해 가신다면 우리 책임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도 그 뒤를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의미-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란 어떤 의미를 띠고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이란 용어는 행하시기로 결정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리와 능력(right and power)을 가리키지만,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라는 표현은 지혜롭고 의도적인 하나님의 주권(wise and purposeful sovereignty)을 가리킵니다(존 파이퍼). 즉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님으로, 왕으로서 지니고 계신 권리와 능력이 ‘주권’이라면, 그것을 지혜롭고도 선한 뜻과 목적으로 운용해가시는 차원이 ‘섭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단어에 대한 성경적인 용례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주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영어 성경(문자적으로 번역한 NASB)에 총 7회, ‘섭리’라는 헬라어 단어는 영어 성경에 단 한 번만 나올 뿐입니다. 개역성경이나 새번역에는 이 ‘주권’이 ‘왕권’(시편 103:19), ‘주권’(이사야 17:3), ‘왕위’(다니엘 4:31) 및 ‘나라’(다니엘 4:36, 5:18, 7:27, 11:4)로 번역되어 있고, ‘섭리’는 ‘선견’(사도행전 24:3-하나님이 아닌 벨릭스 총독에게 적용됨)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 중에 “하나님의 섭리라는 개념”(the idea of God's providence)을 표현해 주는 용어가 단 한 가지도 없다고 J. I. 패커가 주장한 게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성경 전체에 계시된 내용을 근거로 신학자들은 창조주 혹은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권(즉 주권)과 그 주권을 행사하시는 당신의 의도적인 방식(즉 섭리)에 대해 천착해왔습니다. 예컨대, J. I. 패커와 제리 브릿지즈는 ‘섭리’의 정의를 아래와 같이 각각 좀 더 세밀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넘치는 은혜와 선의로 당신의 피조물들을 질서가 잡힌 상태에서 보전하시고, 모든 사건, 환경 및 천사와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을 인도하고 다스려, 모든 것을 그 정해진 목표로 이끌어 가시는 창조주의 끝없는 활동”(The unceasing activity of the Creator whereby, in overflowing bounty and goodwill, He upholds His creatures in ordered existence, guides and governs all events, circumstances, and free acts of angels and men, and directs everything to its appointed goal, for His own glory.) (패커)

“당신 자신의 영광과 당신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당신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절대적인 통치를 행사하시려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추구”(His constant care for His absolute rule over all His creation for His own glory and the good of His people) (브릿지즈)

 

이 두 정의에서 눈에 띄는 것들이 바로 밑줄 친, ‘모든 사건, 환경 및 천사와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 ‘모든 것’, ‘끝없는 활동’과 ‘모든 피조물’, ‘절대적인 통치’, ‘지속적인 추구’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즉 이 정의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셈입니다.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사건과 환경뿐 아니라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천사와 인간의 모든 행동까지도 죄다 인도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이 개념은 가히 제 생각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더구나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끝없이 활동하시고 지속적으로 추구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 또한 제 생각으로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성경상의 용례-

이런 정의가 타당한지 성경을 잠시 참조해 볼까요? 예컨대, 우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라는 선언을 필두로 성경은 아래와 같이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자 보존자이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그곳에 있는 만물들, 모든 인간 및 보이지 않는 존재들까지도 죄다 창조하시고 보존해 가시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이하의 성구들은 제리 브릿지즈의 "Trusting God"을 많이 참조했음).

 

(느헤미야 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이사야 40:26, 28)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사도행전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즉 하나님)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골1:16-17) “만물이 그(즉 성자 예수님)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미 이 구절들 속에서 충분히 암시되어 있지만, 이 창조주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환경까지도 주관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확고한 입장입니다.

 

(시편 103: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sovereignty)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시편 135:6)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이사야 46: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다니엘 4: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즉 하나님)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즉 하나님)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재앙이나 불운에 대한 이해-

그렇다면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는 우리가 보기에 좋은 일들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외견상 고통과 슬픔과 재앙을 동반하는 경우도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이사야 14:27)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

(애3:37-38)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예레미아 애가 3:32-33)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특히 마지막 구절에서 계시된 대로, 비록 사람들이 고난과 재앙으로 인해 근심하고 고생하는 상황을 허락하시는 게 본심이 아니시지만,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드높은 당신의 길과 생각(이사야 55:9)을 성취하시기 위해 당신께서는 이러한 것들도 활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문제, 즉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운이 좋지 않은 경우라는 게 존재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제시된 셈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다면 외견상 ‘좋은’ 일 혹은 행운에만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되는 게 아니라 외견상 ‘나쁜’ 일 혹은 불운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외견상 ‘나쁜’ 일 혹은 불운으로 보일 뿐 그것들은 하나님의 자애로운(benevolent) 뜻과 경륜이 작동되어 주어진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측면이 하나님의 섭리와 “운명의 교리”(doctrine of fate)와 다른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운이 나빠서’, ‘불운해서’ 발생하는 일은 단 한 가지도 없는 법입니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제리 브릿지즈가 나눈 성경 사례 한 가지를 소개합니다. 행12장에 보면 사도 야고보와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사도가 되기 이전부터 아주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베드로의 동업자로 함께 고기를 잡던 야고보(누가복음 5:10)는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을 좇기 시작하여(마태복음 4:18-22) 주님의 수제자 3인 중에 포함된 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에게는 각각 완전히 다른 사건이 벌어집니다. 야고보는 헤롯 왕의 칼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으나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야고보와 베드로의 아내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야고보의 아내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애도하게 되겠지만 베드로의 아내는 남편의 기적적인 구출에 대해 기쁨이 충만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좋은 환경’ 속에서는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시지만, ‘나쁜 환경’, ‘불운한 환경’ 속에서는 방관자로 계시는 걸까요?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지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면 그 참새와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한 사람,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 그룹에 포함된 야고보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게 어찌 우연한 불운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래 두 구절에 나타나 있는 대로 사복음서 기록 당시에 참새는 그저 덤으로 한 마리 더 줄 만큼(“황금잉어빵”도 많이 산다고 한 마리 더 주지 않는데!) 흔하고 값싼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마태복음 10:29) “참새 두 마리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2:6) “참새 다섯 마리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그런데 그 한 마리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실 뿐 아니라 죽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야고보의 죽음은 어떠할까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어떠할까요? 하나님의 허락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있을까요?

 

-일상사 속의 하나님의 섭리-

외견상 우리에게 ‘좋은’ 일에는 간여하시지만 ‘불운한’ 일이나 대부분의 일상적 삶 속에서는 방관자 역할만 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처럼 독신(瀆神)적인 태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가 매일 사고당하지 않고 무탈하게 살아가는 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덕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 공치사를 늘어놓는 게 아닙니다. 이 점을 실감하는 때가 바로 사고를 당할 때이지요.

 

제가 말레이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두 번 있습니다. 한 번은 오토바이로 이리저리 다닐 때 자동차가 제 오토바이를 치어 옆에 있는 얕은 개울에 빠진 적이 있고, 다른 한 번은 주유소에 들어가기 위해 자동차 좌회전 깜빡이를 넣고 서서히 들어가고 있는데 오토바이 한 대가 차 좌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첫째 사고에서는 다리 한쪽에 찰과상을 입은 정도였고, 둘째 사고에서는 차 좌측 문짝을 다시 갈아야 하는 손상이 있었으나 주목할만한 신체상의 피해는 없었습니다(가해자 측도). 제 차를 받은 오토바이 운전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머리에 헬멧도 쓰지 않은 채 친구를 뒤에 태우고 (아마도) 서로 이야기하며 달리다 제 깜빡이도 파악하지 못하고 바로 직진하다 제 차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복기하면서 가슴에 와 닿은 교훈이 있습니다. 그 날 사고를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그날 제가 좀 더 빨리 운전하거나 좀 더 천천히 운전했다면, 제가 다른 길로 갔다면, 제가 늘 이용하는 주유소로 갔다면, 아내가 운전해서 집으로 왔다면, 그 학생들이 헬멧을 제대로 쓰고 운전했다면, 그 중 한 명만 운전했다면, 그들이 제 깜빡이를 보고 반응했다면 등의 가정을 하면 사고는 당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if only”를 계속 주절대는 중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사고당하지 않은 그 수많은 다른 날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섭리’가 깨달아진 것이지요. 무려 20년 간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갖가지 사고를 낳을 수 있었던 그 수많은 변수가 저를 비켜갔다는 사실이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그것들이 과연 우연이었을까?”라는 깨우침이었습니다. 자가용이 없어 중고 오토바이로 한밤중에 복잡한 교통망을 뚫고 달릴 때 위험하다고 느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오토바이로 비를 맞으며 그 길고도 높은 페낭교(14.5 킬로미터)를 통과해야 하는 아찔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조그만 운전 실수나 사소한 환경의 변화나 오토바이 자체 문제가 생겼다면 대형 사고가 났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통과하면서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하늘의 별만큼, 바닷가의 모래만큼 많은 돌발사고 변수를 주관해주신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좋은 일뿐 아니라 외견상 불운한 일에도 섭리를 발휘하시지만, 기적적인 일뿐 아니라 일상사 속에서도 당신의 선한 경륜을 행사해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운’도, ‘우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책임-

하나님께서 평안과 환난을 지으시고 우리의 일상사 속에서도 항상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면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은 없는 것일까요? 만일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주권과 우리의 책임은 성경 속에 함께 강조되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주권이 이 세상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궁극적인 제1원인이 됨을 부인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책임을 면제하시 않으십니다. 예컨대, 시편 127:1을 잠시 참조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사에서 짓고 지키는 것에 모든 것에 대한 주권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기도 하시고 지키기도 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건축가와 파수꾼 역할을 대신하신다고 언급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집은 건축가가 세우고 성은 파수꾼이 지키는 것이지요. 결국 집은 하나님께서 세우시지만 우리가 그 짓는 일을 감당해야 하고, 성은 하나님께서 지키시지만 파수꾼이 깨어 경계 임무를 담당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서로 모순(paradox)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이율배반(antinomy)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J. I. 패커의 말이 적절합니다. 모순(paradox)과 이율배반(antinomy)은 서로 다릅니다. 모순(paradox)은 상반된 아이디어를 통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진술의 형태로서, 비유적 표현(figure of speech)이나 말장난(wordplay)에 속합니다. 예컨대, 갈5: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에는 ‘자유’와 ‘종노릇’이란 상반된 개념이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언어적인 차원일 뿐 실제적인 것은 아닙니다. 즉 이 모순은 다른 표현으로 대체 가능하고(dispensable) 그 대체 표현은 충분히 이해될 수(comprehensible)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제의 필요를 도와주는 사람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진정한 자유는 형제를 섬기는 데서 발견된다”, “죄로부터의 자유는 형제를 섬기는 자유를 위한 것이다” 등의 표현도 가능한 것이지요.

 

이율배반(antinomy)은 이 모순(paradox)과 다릅니다. 그것은 비유적 표현도 아니고 대체 가능하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합당한 진술들 간에 존재하는 외견상의 부조화 현상입니다. 지금 논의 중인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이 두 요소가 서로 부조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견상 그러할 뿐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두 차원이 각각 분명한 실재를 띠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두 항목은 서로 경쟁적인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지금은 이해되지 않지만 서로 상보적인 요소로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이 이율배반은 현대 물리학자들이 당면했던 이율배반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혹시 학창 시절에 배운 이 내용이 기억나시나요? 빛은 파동(waves)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증거만큼이나, 입자(particles)로 구성되어 있다는 증거도 설득력 있게 존재한다는 물리학 상식입니다. 어떻게 빛이 서로 상반되는 요소처럼 보이는 파동과 입자로 구성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각각의 증거가 존재하는 한 어느 한쪽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파동-입자 이원성”(Wave-particle duality) 문제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들을 고민하게 했지만, 1920년대에 와서 독일의 양자 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크가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김용규 선생의 설명을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이 문제는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광양자 이론’을 발표하면서 불거졌는데, 하이젠베르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오는 ‘잠세태’(potentia, 잠재된 가능성의 상태)라는 용어를 빌려와서 이 설명할 수 없는 모순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요컨대 빛은 단지 잠세태로 있다가 실험자가 빛을 입자로 규정하고 그에 적합한 장치로 실험을 실시하면 입자로 현실화되고, 파동으로 규정한 실험을 하면 파동으로 현실화된다는 말이다.” (“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서로 이율배반의 관계에 놓여 있는 엄연한 성서 상의 실체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제1원인이자 ‘본래적 원인’(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피조물이자 자녀이자 당신 나라의 시민으로서 맡은 책임과 역할을 다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렇다면 현재 코로나 사태에 직면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하는 일>

제가 믿기에는 기도해야 할 책임이 우선일 것입니다. 시편 57:2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당신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빌레몬서 2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 감옥에서 석방되어 빌레몬과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를 만나 교제하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역사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로 여겼기에 그의 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에스겔 36:37을 한번 주목해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에스겔 36:1-15에는 바벨론 유수 생활 이후에 전개될 이스라엘의 외부적인 회복을 다루고 있는 반면, 16-38에는 이스라엘의 내적인 회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내적인 회복의 중심에 바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직결되는 성령 내주의 역사(25-27절)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예레미아 31:31-33에 등장하는 예레미아의 ‘새 언약’에 상응하는 에스겔 판 ‘새 언약’인 셈입니다. 곧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임하셔서 그 속에 하나님의 도리를 심고 그들이 그것에 순종하도록 역사해 주시겠다는 놀라운 언약입니다.

 

(에스겔 36:25-27)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예레미아 31:3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은 무엇일까요? 모든 일을 우리 위해 이루어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시편 57: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역사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로마서 8:28)이 엄연히 존재해도, 그 약속들이 '이같이 우리에게 이루어 주기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우리가 담당해야 할 몫인 것입니다.

 

<사려 깊은 행동>

기도 다음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사려 깊은 행동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학자인 시질 브리지랜드와 프란시스 포크스가 이런 말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의 적들에 의해 항상 반대에 직면한다. 그렇게 되면 세 가지 위험이 생겨난다. 우리는 그 반대에 저항하는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일을 계속해 나가지 못한다. 아니면 우리는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기적을 기대한다. 또 아니면 우리는 그 일을 이루려고 미친 듯이 일하다 보니 기도를 하지 않는다.”("Pocket Guide to the Bible")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이 세 가지 위험 중 적어도 한 가지가 제 삶의 각 중대 시기마다 발목을 잡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경 역사상 위협적인 반대에 직면했으나 하나님의 역사를 진전시켜나가면서도 진지한 기도와 사려 깊은 행동을 결합시킨 인물을 찾는다면 저는 느헤미야가 먼저 떠오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간 지 12년이 지난 후에 그곳의 황폐한 상태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기도하면서 아닥사스다 1세에게 접근한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진출하여 성곽 재건을 시작했습니다(1-3장). 그런데 그 주변 지역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게 되자, 아래 구절에 나타나 있는 대로 느헤미야는 기도와 경계와 건축을 병행하면서 성곽 재건 계획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위급한 사태가 벌어지면 귀족들, 관리들 및 백성들도 함께 다 나아와 결전을 벌일 것을 촉구했습니다. 이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워주시리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와 모든 백성들이 함께 내내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느헤미야 4:7-9)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16-18절)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20절)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왜 이 사태가 우리나라에, 특히 대구에서 극성을 부리고 있는가?”라고 묻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처음 이런 환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이 질문이 터져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반응이겠지만 누군가를 비난하는 투로 이 질문을 거듭 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렇게 되면 환경적 원인에 불과한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 탓으로 돌리며 그들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그 사태의 내재적 이유를 알 수 있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당신의 주권적 섭리와 직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궁극적 유익을 위해, 좋은 일뿐 아니라 불운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는 점입니다. 기적적인 일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애로운 섭리를 작동해 가심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가십니다. 현시점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당신께만 온전히 의뢰하는 자세로 당신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당신께서 허락해주신 계시와 성화된 분별력으로 매일 사려 깊게 행동해 가는 것입니다. 이 신산한 시절에 여러분들의 건승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