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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자아상: 내 됨됨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없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3. 8.

자아상: 내 됨됨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는 없다?

-지위에 대한 불안(Status Anxiety)-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나누면서 꼭 다루고 싶은 연관된 측면이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당장 시급한 것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접근하며 어떤 신앙적 행동으로 대처할까라는 주제이겠지만, 최근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 중 한 가지가 바로 건전한 자아상 정립, 혹은 “지위에 대한 불안”(Status Anxiety) 해소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후자는 알랭 드 보통이 2004년에 집필한 “불안”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원제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건전한 자아상이 형성되고 지속되지 못할 때 사회생활 중에 발생하는 심리적인 불안을 일컫는 표현이지요. 그의 표현을 빌자면, “지위에 대한 불안”이란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지요. 그는 여기에서 ‘지위’라는 단어를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one's value and importance in the eyes of the world)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생기는 원인으로, 그는 사랑 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및 불확실성과 같은 5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 해법으로도 5가지를 들고 있는데,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및 보헤미아가 그것들입니다. 기독교를 그 해법 중 한 가지로 제시한 게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유구한 역사를 통과하면서 형성된 종교의 가치를 온전히 활용하는 게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길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가 ‘기독교’를 다룬 부분에서 제시하는 것들은, ‘죽음의 경고’(memento mori), ‘업적 쌓은 사람들의 죽음’, ‘폐허 감상 및 그리기’, ‘광대한 풍경 감상’, ‘공동체 내의 친족 관계 형성’, ‘천국과 지상에서 차지하는 지위 차이’, ‘예술 작품을 통한 기독교적 미덕 옹호’, ‘가난의 고귀함을 찬양하는 건물’과 같은 요소들입니다. 지난 역사를 통해 기독교 문화가 낳은 이런 인문학적, 사회적 유산들이 지위에 대한 불안의 해소책으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깊이 있게 고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지위에 대한 불안을 다독여 주는 것으로서 폐허 감상 및 그리기를 들고 있는데, 폐허가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일깨워 준다고 주장합니다. 그 대목에서 폐허를 보는 것이 “기억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렬한 기쁨”이라고 주장한 프랑스 작가 스탕달의 언급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들이 기독교와 어떻게 연관이 될까요?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 게 기독교 도덕가의 입장이었다는 것이지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과 단테의 “신곡”을 통해, “성공과 실패를 윤리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한 것도 기독교의 공로로 보았습니다. 특히 가난과 선의 공존, 초라한 직업과 고귀한 영혼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기독교가, 그 가르침 속에서 존중하는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 문학, 예술, 건축을 통해 “매혹적인 진지함과 아름다움을 부여”하기도 했다고 평가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봅니다.

 

갖가지 인문학적 지식과 구체적인 사례들을 동원하여 제시하는 그의 시각이 참신하고 흥미로웠지만, 그 ‘기독교’ 장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측면도 있었고, 마땅히 다루어야 했지만 놓친 측면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해한 측면을 예로 들자면, 기독교를 속세에 초연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가치를 추구하는 고답적인 종교로, 혹은 현세가 멸망하기를 고대하는 종말 대망 종교인 것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비록 기독교가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지만, 현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도래하는 것과 장차 몸이 부활하는 것을 더욱 갈망하고 있다는 점을 그가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기독교는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면서 손 놓고 멸망을 기다리는 종교는 결코 아닙니다. 비록 그러한 상태가 궁극적인 종말이 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현세 속에서 내세에 속하는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갈릴리 출신의 무일푼의 목수”로 묘사한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 온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요, 주님으로 군림하는 것을 기독교인들이 신뢰하고 있다는 점에도 이 책은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책이 놓친 중요한 기독교적 측면이라면, 제게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자아상’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그가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현대 사회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처럼’ 살다가 그렇게 생을 마감하지 않고, 그런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재능으로 ‘튀는’ 삶을 사는 게 올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그는 아래와 같이 언급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사고를 따른다면 다른 모든 사람과 같아지는 것은 전혀 재앙이 아니다. 머리가 둔하고 재능이 없고 미미한 존재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며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신의 창조물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명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예수의 중심적인 주장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기독교는 신의 사랑의 범위 바깥에 있는 인간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상호 존중이라는 관념에 신의 권위를 부여한다.”

 

이 단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으로서의 명예를 누릴 수 있다는 성서적 관점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머리가 둔하고 재능이 없고 미미한 존재들”로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작가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일반적으로 사람을 평가할 때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양상에만 주목하는 경향을 의미하리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이해하는 기독교는, “사람들 사이의 표면적 차이 너머를 보면서, 보편적인 진리에 초점을 맞추라고 한다”라는 점을 이어서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작가는 그 ‘진리’의 의미를 좀 더 천착하지 않은 채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기독교인들이 자기 공동체 내에서 형제/자매와 같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논지를 이어갑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 진리의 공동체적 가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의 개인적인 차원이 전제되지 않는 한, 공동체적 차원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동체의 존립부터 흔들린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자아상이 건전하지 않은 사람이 공동체 속에서 변화되어 바람직한 자아상을 형성할 수도 있겠지만, 자아상에 결함이 있는 사람이 공동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습니다. 제임스 휴스턴이 언급한 대로, "자기중심적인 개인들을 데려다가 공동체를 만들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하기 마련입니다."("Joyful Exiles") 더구나 그 공동체가 형성된 것 자체가 자아상이 건전한 사람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비기독교인이 집필한 글 속에서 이런 자아상의 신앙적 측면까지 보기를 기대하는 것은 과욕이겠지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게 작가가 이해하여 주장하는 ‘진리’라면, 그 진리는 좀 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더구나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에서 비롯된 불안의 문제는, 자신의 외모와 인격 및 삶의 여정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늘 우리 모두의 심령을 요동치게 할 잠재적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외모와 인격=하나님의 걸작-

이 문제를 다룰 때 저는 가장 먼저 시편 139편이 떠오릅니다. 총 24절로 구성된 이 시편은 다윗의 저작으로서,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omniscience)(1-6절), 하나님의 편재(遍在)하심(omnipresence)(7-12절),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13-18) 및 하나님의 거룩하심(holiness)(19-24)을 차례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중에 여기서 다룰 부분인 13-18절 내용에 대해, 아래 개역개정 번역과 NASB(문자적으로 번역한 영어 성경)를 참고로 병기해 두었습니다.

 

(시편 139:13-18)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For You formed my inward parts; You wove me in my mother's womb. I will give thanks to You, for I am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Wonderful are Your works, And my soul knows it very well. My frame was not hidden from You, When I was made in secret, And skillfully wrought in the depths of the earth; Your eyes have seen my unformed substance; And in Your book were all written The days that were ordained for me, When as yet there was not one of them. How precious also are Your thoughts to me, O God! How vast is the sum of them! If I should count them, they would outnumber the sand. When I awake, I am still with You.)

 

이 구절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습니다(성경 묵상과 연관되는 경우에는 ‘저’라는 대명사 대신 ‘나’를 사용함). 신비롭고 기이한 방식으로 나를 지으셨습니다. 내 육체와 인격을 빚으셨습니다. 13절의 ‘내장’(inward parts)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신장’(kidney)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히브리인에게는 그 단어가 인간의 정서와 도덕적인 감수성을 뜻하기에, 결국엔 ‘인격’(personality)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내 육체와 인격의 됨됨이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다 주관하셨다는 것이지요. 그것들이 다 형성되기 전부터(my unformed substance) 이미 보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은 내 신체적, 인격적 요소들도 모두 하나님께서 관장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적인 시각과는 판이하게 다른 하나님만의 시각으로, 은혜와 사랑의 의도로 내 외모와 신체적 특성, 내 인격 및 내 은사대로 나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14절에서 나를 빚으시는 장면을 묘사할 때 활용된 단어들에 주목해 보십시오. ‘기묘’, ‘기이’(개역개정), ‘놀라움’, ‘신비들’(공동번역), ‘오묘함’, ‘놀라움’(새번역),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경외감이 들 정도로 경이롭게 조성되다-NASB). 시편 기자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를 발한 이유입니다. 자신을 볼 때나 다른 사람을 볼 때 이런 경외감이 들어 하나님께 감사한 때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이 앞서 용서를 빌 따름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게 인지상정이라고는 하나(삼상16:7), 하나님의 섭리에 근거하여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방식으로 조성해주신 내 외모와 인격은 내가 마땅히 감사로 응답해야 할 내 자아입니다. 그리고 14절 하반절(“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을 “Your workmanship is marvelous—how well I know it”으로 번역한 성경(New Living Translation)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자아를 만드신 기량이 경탄할 만하다는 것을 내가 마땅히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결국 내가 자신의 외모와 인격 됨됨이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권리와 능력)과 섭리(지혜와 목적)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뢰하지 않기 때문임이 드러난 셈이지요. 외견상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내 외모와 인격을 하나님의 걸작으로 여길뿐 아니라 진심으로 당신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외모를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지 않고 자꾸 외모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는 이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성구가 한 곳 있습니다. 이사야 53:2입니다.

 

(이사야 53:2) “그(즉 약속된 메시야 예수님)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For He grew up before Him like a tender shoot, And like a root out of parched ground; He has no stately form or majesty That we should look upon Him, Nor appearance that we should be attracted to Him.)

 

어떻습니까? 백인인 데다가 매력적인 콧수염과 구레나룻이 나 있고 몸도 균형 잡혀 있을 뿐 아니라 멋있게 생기기까지 한 그 수많은 예수님의 그림과 영화 속 이미지는 비성서적인 상상화에 불과했던 셈이지요. 예수님은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미남이 아니었습니다. 공동번역이 더 사실적이기까지 합니다.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외모 때문에 아쉬워하거나 괴로워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외모가 당신의 사역에 장애가 되었던 적도 없습니다.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때 당신의 외모를 뵙는 중에 화들짝 놀라 내 외모를 수용하지 못한 지난 날을 후회하게 된다면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지금 마음을 고쳐먹읍시다. 내 외모와 인격을 믿음과 감사로 받읍시다.

 

그런데 외견상 미남이나 미인들은 자신들의 신체적 면모를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기가 더 수월할까요? 오래전에 본 연예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로 나온 미남, 미녀 연예인들이 자기 외모 상의 콤플렉스를 서로 이야기하거나 자기 외모 중 어느 부분을 성형했다는 이야기를 나눈 장면들이 떠오르는군요. 주로 눈, 코, 턱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성형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연예인들의 성형 문제는 과거 한 동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단골 주제 중 한 가지였지요. 우리나라 연예인 중에 성형한 사람이 아니라, 성형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전 알 길이 없습니다. 소속사의 잣대나 세상의 안목이라는 게 우리 시야를 장악하는 순간, 경외감이 들 정도로 기기묘묘하고 신비롭게 만들어진 독특한 우리의 신체와 인격 됨됨이라는 차원은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에 불과합니다. 그리하여 평생을 그 잣대와 안목에 목을 매면서 외모 비교 의식과 성형 시술 사이를 전전하다 생을 마감하게 될지 모릅니다. 외모로 인해 ‘지위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주위에 널려 있는 ‘외모지상주의’ 시대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로써 왜곡된 우리 각자의 자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게 시급한 한 가지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으로 태어나거나 병으로 인해 신체장애를 겪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분들과 그분들의 가족들이 겪은 그 고통과 고뇌를 저는 감히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예컨대 얼마 전에 ‘세바시’에 나온 고정욱 작가의 경우는 정상아로 태어났으나 한 살 때 소아마비가 걸려 지금까지 52년 간 걷지 못한 채 휠체어를 타고 지냈다고 합니다. 그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어머님께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총 12년간을 업어서 등하교를 시켜 개근상을 세 번씩이나 받았다는 얘기를 접하면서 전 할 말을 잃었습니다. 국문학과로 진학한 후 계속 공부에 매진하여 박사 학위까지 딴 그는 현재까지 192권의 책을 집필했고 350만 권의 책을 판매한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왜 내가 장애인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50년 만에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그 답이 도래했다고 하지요. “정욱아, 너 같은 녀석 중에 하나 정도는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녀석이 있어야 장애인의 고통과 아픔을 세상에 알릴 게 아니냐!” 이런 분이 있기에 요한복음 9:1-3 말씀의 의미가 더욱 밝히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요한복음 9:1-3)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고 작가 같은 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처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습니다. 그들의 장애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엄연한 계시입니다. 예컨대,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갖가지 핑계를 대며 이스라엘을 이끄는 역할을 회피하면서 자기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해서 그 일을 못하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4: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The LORD said to him, "Who has made man's mouth? Or who makes him mute or deaf, or seeing or blind? Is it not I, the LORD?)

 

말 못 하거나 못 듣거나 눈이 먼 사람들이 죄다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나날=하나님 섭리의 여정-

내 외모와 인격을 포함한 모든 면모가 내 생애 전체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당신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어떻게 기여하게 될지 아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 정해진 생애가 당신 책 속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6절). 현재 60세가 다 되어 가는 제 여생이 얼마나 되는지도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해 두신 셈이지요. 그런데 “나를 위해 예정된 생애(lifetime)” 혹은 “나를 위해 예정된 해(years)”이라고 하지 않고 “나를 위해 예정된 나날들(days)”라고 하신 것에 주목해보십시오. 내 전 생애 하루하루가 다 예정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도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모든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다는 것입니다(16절 하반절-공동번역, NASB 참조). 우리를 마치 당신의 각본 따라 움직이는 로봇이나 꼭두각시처럼 살도록 하셨다는 의미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하도록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 정, 의를 허락해 주시고 우리의 결정에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깊고 넓은 사랑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따르도록 하시는 일을 위해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전개해 오신 것이 아닐까요? 결코 억지로, 강압적으로 우리 의지를 꺾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도록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은 그 본질상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내 날이 단 하루도 시작되기 전에 예정된 나날들(days)”이란 문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이 표현은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가리킬 것입니다. 창조주로서, 왕으로서 당신의 피조물이자 백성인 우리에 대해 행사하시는 당신의 권리와 능력뿐 아니라 그것들을 자비롭게 운용해 가시는 당신의 주도적인 과정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 과정 속에 우리가 지성을 활용하여 상황을 판단하고 가장 적합하다고 여기는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측면이 포함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떠한 판단으로 어떻게 선택하든,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로 어떠한 일이 벌어지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이루어짐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나날들의 여정은 인과응보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내가 ‘A’라는 선행을 했기 때문에 ‘A+’라는 결과를 항상 얻고, 내가 ‘B’라는 악행을 했기 때문에 ‘B-’라는 결과를 항상 얻게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이 말씀이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이 예정은 ‘내 날이 단 하루도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떠한 원인을 만들 새도 없이 이미 모든 삶의 여정이 예정되었다는 것이지요.

 

내 삶은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법칙이 아니라, 나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해 주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운행해 가시는 여정입니다. 아래 두 말씀을 잠시 묵상해봅시다.

 

(에베소서 1:11) “모든 일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also we have obtained an inheritance, having been predestined according to His purpose who works all things after the counsel of His will,)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And we know that God causes all things to work together for good to those who love God, to those who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ose whom He foreknew, He also predestined to becom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so that He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ethren;)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당신의 뜻대로 결정하실 뿐 아니라, 당신의 계획대로 당신의 백성들을 예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뜻을 벗어나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이 되도록 선택된 이들은 오직 당신의 계획을 따라 예정된 이들입니다. 이 백성들의 삶의 여정 속에 갖가지 고난과 역경이 마련되어 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좌절할 필요는 결코 없습니다. 그 여정의 결과가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궁극적으로 누릴 ‘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당신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이 구절들은 천명합니다. 이 엄청난 인생의 비밀을 깨달은 시편 기자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품으시고 계신 생각이 얼마나 보배롭고도 그 수가 많은지 몰라 헤아릴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이 충분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의 경이로운 구속사의 전모를 깨닫고 아래와 같이 외친 사도 바울도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다시, 지위에 대한 불안(Status Anxiety)-

시139편 중에 지금까지 묵상한 말씀(13-18절)은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을 다룬 단락으로서,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omniscience)(1-6절) 및 하나님의 편재(遍在)하심(omnipresence)(7-12절)과 하나님의 거룩하심(holiness)(19-24)을 다룬 단락들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락 첫 구절인 13절에 'For'(NASB)가 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단락이 이 시편의 중심부라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 모든 것을 아시고(첫째 단락) 내가 어디를 가더라도 함께 계셔주시는(둘째 단락) 이유를 제시하는 부분이 바로 이 단락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에 소개되는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편재하심은 나 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하나님의 속성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적인 능력과 섭리로 내 외모와 인격과 은사를 비롯한 모든 것을 신비롭게 빚으시고 내 전 생애의 모든 나날을 예정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편의 시발점은 따로 있습니다. 마지막 단락에 속한 구절들을 한번 읽어 보세요.

 

(19-24절) “하느님, 악한 자를 죽여만 주소서! 피에 주린 자들, 나에게서 물러가게 하소서. 그들은 당신을 두고 음흉한 말을 지껄이며, 당신 이름을 우습게 여깁니다. 야훼여, 당신께 원수진 자들을 내가 어찌 미워하지 않으리이까?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어찌 싫어하지 않으리이까? 내가 그들을 지극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에게도 원수입니다. 하느님, 나를 살펴보시고 내 마음 알아주소서, 나를 파헤쳐 보시고 내 근심 알아주소서. 죽음의 길 걷는지 살피시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공동번역)

 

이 시편이 일반적으로 모든 시편 중에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은 잘 아시겠지만, 혹시 이 시편이 소위 “저주 시편”(Imprecatory Psalms)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언급되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레슬리 S. 맥코, J. A. 모티어) 다른 저주 시편에 대해서는 저급하고 조악한 도덕적 가치로 당면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고 공격하던 성서 주석가 중에는, 이 시편을 읽어 가면서는 이곳에서 제시된 격분에 찬 용어들(예컨대, 19절 참조)이 조금도 놀랍지 않다고 하면서 시편 기자가 그 악인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서둘러 결론을 내린 이들도 좀 있었으니까요. 그 이유는 이 시편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속성을 드높이고, 하나님과 주권과 섭리라는 고귀한 가치를 선양하며, 탐낼만한 영성이 묘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실현을 명쾌하게 지지하는 신학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편을 읽는 현재의 우리에게는 다윗의 대적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서 15:4(“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이 시편은 서두에서 말씀드린 “지위에 대한 불안” 해소책으로 적격이지 않을까요?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돈, 사회적 지위, 권력, 외모, 인기 등과 같은 잣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그러한 세속적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때 우리가 직면해야 할 ‘대적들’의 수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사조에 물든 불경건한 이들이 직접 우리에게 도전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 스스로 이런 잣대로 자기 검열하면서 위축된 인생을 영위할 소지도 큽니다. 이 대적들은 날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 대적들을 향해, “하느님, 악한 자를 죽여만 주소서! 피에 주린 자들, 나에게서 물러가게 하소서”(19절)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나 자신과 공공의 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는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저주의 기도와,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When I awake, I am still with You.)(18절 하반절-새번역)라는 고백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내 마음을 살피고 지키며(23-24절) 사람의 악한 영향력을 경계하는 과정(19-22절)은, 경이로운 섭리로 나를 빚으신 후 평생 내  삶을 주관해주시기에(13-18절), 나를 둘러싸서 지켜주시고(1-6절), 나를 인도해 주시고 붙들어 주시는(7-12절) 주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는 영광스러운 삶의 여정의 필수 요소입니다. 이렇게 매일 주님 임재를 누리다 보면, 죽음 이후에 언젠가, 혹은 생전에 언젠가 우리 주님을 친히 뵙는 영광의 그날(Day of the great awakening)이 도래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