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해석과 인문학: 성경 해석에 문학 소양은 불필요하다?
신천지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의 간증을 들을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신앙 생활한 이들이 그곳에 빠질까라는 점이었습니다. 각 개인이 처한 환경적 요인, 신앙생활상의 갈등 요인, 심리적 요인, 정서적 요인, 공동체적 요인 등 다양한 원인이 제기될 수 있겠으나, 제게 특히 부각된 한 가지 원인은 그들 대부분이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이들이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른 요인들의 영향력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해서가 아니라, 신천지로 넘어가는 결정적 계기가 “비유 풀이”였고 그것도 단어 풀이 중심의 성경 해석이었다는 고백을 여러 번 접했기 때문입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주요 낱말들을 임의적으로 쪼개어 필요한 부분만 다른 의미로 연관 짓거나 그 낱말들을 각각 바로 다른 성경 본문 상의 용어와 연결하는 방식으로 조합하여 급기야 교주 이만희를 “말세에 약속한 목자”요,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게 한다고 하지요. 예컨대,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와 씨를 분리한 후 겨자는 빼버린 채, 씨는 ‘말씀’이고 나무는 ‘사람’이고 새는 ‘영’이며 가지는 ‘전도자’로 비유된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기름이라는 단어를 구약 성소의 ‘등잔’과 ‘감람유’로 연결했다가, ‘등잔’과 ‘감람나무’가 등장하는 스가랴로 가서 ‘두 감람나무’의 의미를 밝힌 후, ‘두 감람나무’와 ‘두 증인’이 등장하는 요한계시록으로 가는 식입니다. 이 지점에서 안타까운 점은 누구라도 건전한 성경 읽기의 기본, 혹은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만 갖추고 있었어도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신천지 가르침의 오류는 근본적으로 성경의 문학적 측면을 왜곡시켜 해석한 오류이기 때문이지요.
성경은 문학 작품입니다. 그것도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는 문학 작품입니다. 이런 언명에 대해 부담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을 줄 압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계시된 성경을 작가들이 꾸며 낸 문학 작품이라니!”라며 소리 높일 게 눈에 선합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문학 작품이라는 점이 변개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성령께서 불완전한 인간 증인과 가치중립적인 문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악에 깊이 물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아람어를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펼쳐 보이신 상황과도 비교될 수 있지요.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라는 문학의 정의는 성경에도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성경이란 하나님의 드높은 구속 경륜뿐 아니라 당신의 깊은 속마음까지도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당신의 선물이 아니던가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일상 언어를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는 문학적 방식을 취하신 것이 분명한 이상,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완서, 이청준, 도스토옙스키, 제인 오스틴, 까뮈, 이육사, 신동엽, 단테, 밀턴 등을 읽을 때 좇아야 할 원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글을 읽을 때, 그 글을 쓴 사람과 동일한 의도로 읽어야 합니다.”(We are to read in the same spirit as the writer who wrote.)(제임스 사이어) 그러기 위해서는 C. S. 루이스가 “An Experiment in Criticism”(오독: 문학비평의 실험)이라는 책 속에서 천명한 올바른 읽기 방식을 상기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즉 문학이란 “수용”(receive)하는 것이지, “사용”(use)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최대한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저자와 동일한 마음으로” 읽기를 시도하는 것이, 자신의 선입견이나 관심사에 물든 채 그 작품을 활용할 목적으로 읽기를 시도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전자를 통해서는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는 경험을 함으로써 자아를 넓혀가게 되지만, 후자를 통해서는 자신의 자아라는 감옥 속에 갇혀 “여기서 내가 발견하는 것은 지겹도록 늘 나 자신뿐”이라는 고백만 읊조리게 되기 때문이라고 루이스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성경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잘 이해하면서도 오독을 방지할 수 있는 길로 제임스 사이어는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Scripture Twisting” 참조). 첫째는, 가까운 문맥(immediate contexts)을 살피는 것입니다. 둘째는, 더 광범위한 문맥(larger contexts)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장르(genre)의 특성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각 방지책을 조금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근접 문맥 살피기-
첫째, 어떤 특정 구절 앞, 뒤에 위치한 가까운 문맥을 살피는 일입니다. 즉 그 구절 앞, 뒤 구절이나 장과 같은 근접 문맥이지요. 예컨대, 마태복음 7:7-8(기도에 관한 약속)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응답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접 문맥인 6:33에서 우리가 마땅히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밝혀 두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바로 그것이지요. 히브리서 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여기는 게 믿음이라고 이해한다면 오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접 문맥인 10:32절 이하를 살펴보면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명시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즉 “더 낫고 영구한 소유”(34절), “큰 상”(35절), “약속하신 것”(36절) 혹은 궁극적으로 “영혼을 구원함”(39)이 그것들이지요.
우리 주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보면 그럴듯하게 성경 말씀을 읊조리면서 자기 사상과 의도를 설파하는 유명인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장구한 역사에 걸쳐 믿을만한 증인들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한 성경 말씀의 권위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고 해서 그 유명인들의 말이 참이라는 보장은 결코 없습니다. 그들이 인용한 성경 구절이 그 구절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와 정신을 좇은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모두 성경을 오독하고 오도하며 오용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도의 초월명상법(Transcendental Meditation, 혹은 TM)을 창시한 ‘마하리쉬 마헤시 요기’의 명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하셨소. 가만히 있어 당신들이 하나님임을 알도록 하시오. 당신들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들은 하나님처럼 살기 시작할 것이고, 하나님처럼 살면 고통을 당할 이유도 없게 되오.” (“Scripture Twisting”)
이 말의 문제점을 알아차리셨나요? 우선 이 경우는 시편 46:10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으로 보는 부정확한 인용의 오독(Inaccurate Quotation) 사례입니다. 다음으로 이것은 성경을 미끼로 쓰는 오독(The Biblical Hook) 사례이기도 합니다.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그저 자기의 독특한 가르침을 변명하는 데 끌어들여 사용한 것이지요. 이 구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자신의 가르침과 정반대 되는 성경의 내용을 택한 그의 어리석음과 거짓됨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 하반절과 11절 문맥을 참조하면 문제가 되는 10절 상반절의 “내”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46:10-11)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초월명상 기법을 창시하고 개발한 인물이었기에 당연히 범신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기 독자들에게 조용히 명상하면서(‘가만히 있어’) 자기들이 하나님임을 알라고 할 수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그의 잘못은 특정 성경 구절을 그 문맥을 무시한 채 잘못 인용했을 뿐 아니라, 자기주장을 변호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미끼로 쓴 것입니다. 그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인들과 기독교 이단들이 성경을 들먹일 때, 이런 식으로 근접 문맥만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그들의 오독과 왜곡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좀 더 넓은 문맥 살피기-
둘째, 어떤 특정 구절이나 본문의 근접 문맥보다 좀 더 멀리 있는 문맥을 고려하는 일입니다. 즉 그 구절이나 본문이 포함된 책 전체에 포함된 내용을 살펴보는 것과 더불어, “성경 전체의 지적, 문화적 준거”(the intellectual and cultural framework of the entire Bible)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지요. 특히 후자는 각 구절의 궁극적 문맥인 성경 전체 맥락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J. I. 패커가 언급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an overall grasp of Bible teaching)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믿음과 행함에 대한 말씀이 여러 번 언급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4절) 얼핏 보면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성경의 대원리(에베소서 2:8-9; 디도서 3:5)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야고보서 전체를 잘 읽으면서 그 논지를 파악해보면 그 의문은 이내 풀립니다. 윤종하 선생이 지적한 대로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한다면 당신께 순종하는 게 당연한데,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지 않기에 시련도 기쁘게 견디지 못하고(1:2-4), 지혜를 구하지도 않고(1:5-8), 허탄한 것을 자랑하고(1:9-11), 자기 욕심을 따라 살고(1:12-18), 말씀을 듣고 배우고도 행하지 않고(1:19-27), 교회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 대우한다고(2:1-13) 지적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장차 메시아를 낳을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기꺼이 제단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고, 기생 라합이 여리고 성을 배신하는 대신 하나님의 백성 되길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요지입니다. 즉 야고보서는 행위보다 믿음을 더 강조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이 그 서신서의 주제인 셈입니다. 다만 그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 삶의 변화로 드러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렇게 성경의 일부가 잘 이해되지 않고 이미 확정된 교리와 배치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그 부분이 포함된 책 전체를 잘 살펴보면서 논지를 이해해가면 그 의미가 더욱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다 다른 책들과 성경 전체의 문맥을 고려해보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유명인들이나 이단들 중에는 다양한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도 불완전하게 인용하거나 불공정하게 조합하거나 부정직한 방식으로 석의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다양하게 인용하기 때문에 혹하기 쉽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경우가 적지 않지요. 예컨대, 20세기 미국의 독보적인 사상가로 평가받고 동서양의 철학을 융합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는 ‘앨런 와츠’는 자신의 책(“Beyond Theology") 속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예수)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또 천사는 무덤으로 예수의 시체를 찾으러 온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가시나니....’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심은 그를 떠나보내지 않고, 기록된 역사의 죽은 문자 속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계속 찾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라고 말했던 상황과 흡사한 것이다.” (“Scripture Twisting”)
어떻습니까? 이 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벌써 깨달으셨지요? 철학자이자 종교학자이며 언어학자이기도 한 와츠가 비록 성경 구절을 여러 곳(밑줄 친 곳) 인용하고 있지만, 그 말씀들은 원래의 문맥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서로 조합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인용한 구절은 요16:7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과 보다 긴밀하고 의미 있는 교제, 교통을 이어가시겠다는 약속을 주시는 문맥입니다. 와츠 말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보낼 필요도 없고 당신께서도 그들을 떠나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지요. 과연 와츠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혜사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한복음 14:26)이시오, “진리의 성령”(요한복음 15:26)으로서 장차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요한복음 14:16) 그들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분이라는 점을 이해하기나 했을까요?
두 번째로 인용한 구절은 누가복음 24:5과 마태복음 28:7이 뒤섞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미리 말씀하신 대로 갈릴리로 가셨다는 점을 증언하는 문맥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 기록은 와츠 말처럼 죽은 문자가 아니지요. 몸의 부활로 온 천하의 주님 되심을 확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동하는 문자입니다.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증인들이 기록한 역사적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와츠의 말대로 그리스도를 찾지 못해 그 속을 뒤지는 게 아니라, 그 기록을 매개로 그리스도를 뵐 수 있고 당신과 교제할 수 있기에 그 속에서 살려고 하지요. 이런 와츠가 성경이라는 책이 부활을 체험한 증인들이 앞에서 언급한 보혜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점을 납득했을까요(베드로후서 1:21)?
셋째로 인용한 구절은 요한복음 5:39입니다. 원래 성공회 사제로 훈련받은 경력에 걸맞지 않게 임의로 원래의 성경 구절을 반만 인용하면서 자기 뜻을 펼치려고 했지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의 문맥을 살펴보자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 된 앉은뱅이를 주님께서 안식일에 고친 것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 중 일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와츠 말처럼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과대평가하여 계속 그것을 연구한 것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약 성경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고 그 속에 계시된 당신에 대한 증거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이지요. 사실상 이 구절은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생의 근원이 되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와츠가 전체 구절을 다 인용하지 않은 것도 그런 난감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현재 불교학자로도 분류되는 와츠는 사복음서를 넘나들면서 자기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수용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권위와 몸의 부활, 성경의 확실성과 권위 및 성령의 임재와 그 의미를 해체하고 무의미하게 만들려고 시도했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성경 구절을 미끼로 사용하여 인용했지만, 어떤 구절은 그 의미를 제대로 밝히지도 않고, 어떤 부분은 두 구절을 짜깁기해서 인용하고, 또 어떤 구절은 자기에게 유리한 반쪽만 인용하는 식으로 스스로 자신의 주장의 신빙성을 훼손해버렸지요. 이런 지경이니 그가 인용한 구절들의 문맥만 잠시 일별해 보아도 바로 그 주장의 허구성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경우는 자신의 지적, 문화적 준거에 의해서 성경 말씀을 재단한 경우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 문맥에 근거하여 형성된 예수님, 성경 및 성령에 대한 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그나 그 아류에 불과한 이단들을 곧바로 분별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장르의 특성 주목하기-
셋째, 관계 구절이나 본문이 포함된 부분의 장르에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 장르가 시라면 시로, 지혜문학(욥기, 잠언, 전도서)이라면 지혜문학으로, 연대기라면 연대기로, 편지라면 편지로, 비유라면 비유로 읽어야 합니다. 그 장르를 고려하지 않고 문학 작품이나 성경을 대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장르 분류의 오류”(error of genre misidentification)라고 합니다.
예컨대, 시편은 히브리어로 된 “찬송”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을 때는 히브리시의 특성상 압운과 단어의 선택, 특히 ‘대구법’이라고 불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시질 브리지랜드, 프란시스 포크스). 이것은 어떤 문장을 형성한 후에 그것을 다른 단어로 되풀이해서 말하거나 확장하는 방식입니다. 이 말은 시편의 한 구절을 이해하려면, 그 구절을 전체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그 구절의 두 부분 사이를 구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시편 103:7)라는 구절의 의미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그분의 행위만,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당신의 행사만 알리셨다는 뜻이 아니지요. 그 구절 전체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역동적인 사역을 계시해주셨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잠언과 같은 지혜문학의 목적은 지혜, 즉 일상에 대한 실제적 “삶의 기술”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지혜는 ‘무엇을 아는 것’(knowing that)이 아니라 ‘방법을 아는 것’(knowing how)이었기에 지능 지수(Intelligence Quotient, 혹은 IQ)보다는 감성 지수(Emotional Quotient, 혹은 EQ)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트램퍼 롱맨 3세). 각각 다른 상황 속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실제적인 지침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진리라고 여기면서 잠언을 읽으면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옛날 옛적에 적지 않은 랍비들을 곤경에 빠뜨렸던 잠언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잠언 26:4-5)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어떻습니까?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잠언을 인용하면서 잠언서가 정경에 속할 수 없다고 주장한 랍비들이 있었다는 게 이해되지 않나요? 그렇지만 당시 유대 공동체는 이미 잠언서를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랍비들의 반대는 무산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잠언이라는 장르의 성격상 두 잠언 모두 그 의도에 따라 이해되는 한, 참이라는 데 있습니다. 잠언은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과 상황에 따라 그 타당성이 드러난다고 본 것이지요. 잠언을 이해하고 해석할 때 명심해야 할 원리입니다.
바울의 글은 “편지”로서 어떤 것은 특정 교회에 어떤 것은 특정인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서를 읽을 때는 그 수신자가 누구인가와 어떤 특정한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가를 잘 살피며 이해해가야 합니다. 특히 영어 성경을 읽는 독자의 경우에는 서신서에 등장하는 대명사 'you'를 복수가 아닌 단수로 이해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많지만 단수가 아닌 복수로 여겨 발생하는 문제 또한 적지 않습니다. 전자의 예는 고린도전서 3:16-17이고, 후자의 예는 디모데후서 4:1-2입니다.
(고린도전서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난외주-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Do you not know that you are a temple of God and that the Spirit of God dwells in you? If any man destroys the temple of God, God will destroy him, for the temple of God is holy, and that is what you are.-NASB)
(디모데후서 4:1-2)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I solemnly charge you in the presence of God and of Christ Jesus, who is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and by His appearing and His kingdom: preach the word; be ready in season and out of season; reprove, rebuke, exhort, with great patience and instruction.-NASB)
이 두 본문의 ‘너희’와 ‘너’는 모두 영어로 ‘you'입니다. 고린도전서 본문에서 이 'you'는 한 개인인 ’너‘가 아니라 고린도 교회 공동체를 일컫지요. 그래서 누군가가 거짓 가르침이나 심각한 분열 책동을 가하여 그 공동체를 ‘멸하면’ 혹은 파괴하면(destroy-NASB),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만일 이 말씀에서 'you'를 ‘너’로 이해하면 상당한 오해가 생기겠지요. 디모데후서의 말씀은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이 구절들의 주어인 'you'는 성도들이 아니라 디모데입니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복음 전파하는 방식에 적지 않은 혼란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본 블로그의 "복음전도의 시기와 방법" 참조).
그런데 비유적인 표현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는 다소간의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 단어나 구절이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비유적인 뜻으로 쓰였는지 혹은 복합적인 방식으로 활용되었는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문자적인 언어를 비유적인 언어로 오해하는 오독을 주의해야 합니다. 예컨대,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창시자인 ‘메리 베이커 에디’가 언급한 아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에서 우리는 성경 말씀에 대한 실질적인 정의(material definition)를 영적인 정의(spiritual definition)로 대치하는 것이, 종종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 말씀을 기록한 분들이 의도했던 의미를 명백하게 밝혀준다는 것을 배운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장(용어 해설집)이 추가되었다. 여기에는 성경에 나오는 용어의 영적인 의미, 곧 그것의 원래의 의미를 제시해주는 형이상학적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은 그녀가 "비유에서 비롯되는 오류"(The Figurative Fallacy)를 도리어 원칙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지요. 그 용어 해설집에 나오는 것 몇 가지를 살펴보면, 비둘기는 “거룩한 과학, 순결과 평화, 소망과 믿음의 상징”이고, 저녁은 “몽롱한 인간의 사고, 권태로운 인간의 마음, 모호한 견해들, 평화와 휴식”이며, 아침은 “빛, 진리의 상징, 계시와 진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이미 언급한 유명인들보다 더욱 과감하게 아예 성경 구절도 인용하지 않은 채 이런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문자적 의미 배후에, 확고한 이성의 눈에 비치는 것 이상의 비유적인 의미, 진정한 의미,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기에 그 열쇠를 찾아내야 하는데, 바로 자기가 그 열쇠를 발견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요?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녀를 특별한 선지자로 인정하고 그녀의 책인 “과학과 건강”(Science and Health)을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이 용어 해설집을 신앙 지침으로 활용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다음으로 비유적인 언어를 문자적인 언어로 오해하는 오독을 주의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이 책은 장르상으로 비유적인 언어와 상징적인 숫자로 가득 찬 "묵시문학"(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실 마지막 때에 행하실 것을 드러내는 작품들)에 속합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이 책에 등장하는 단어나 숫자나 사건들이 주로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과거 및 미래 사역의 의미를 비유적으로 계시한 것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유적인 언어와 숫자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먼저 이미 앞에서 말씀 드린 근본적인 성경 해석 원리인 문맥 파악을 통해 요한계시록 내에 존재하는 내적 정보에 주목하는 게 긴요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비유적 표현들에 대해 성경의 다른 책들이 명백하게 제공하는 정보에 주목하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예컨대, 한편으로는 요한계시록 1:1-6에서 밝힌 대로 이 책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 특히 핍박받고 있는 초대 교회에게 주신 말씀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일들”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존하시고 부활하신 만왕의 왕이심을 천명하는 것이며, 그 진리로 인해 박해받는 교회 성도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고 그들의 심령을 위로해주는 것임을 명심하면서 비유적 표현을 해석해 가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가득 찬 일곱 인(6:1-8:5), 일곱 나팔(8:6-11:19), 일곱 표징(12:1-14:20) 및 일곱 대접(15:1-16:21)의 순서를 정하고 그 내용을 해석하는 것이 마태복음 24-25장 속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제시해 주신 미래의 마스터플랜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신천지를 다루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144,000명에 대해 잠시 논의해보겠습니다. 신천지에서는 이만희라는 육체에 이미 재림예수의 영이, 신천지 12지파장에게는 열두 사도의 영이 들어와 있는 상태이고, 급기야 신천지 교인 수가 144,000명이 되면 요한계시록의 144,000명의 영이 그들 속에 들어와서 지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됨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144,000이란 숫자는 요한계시록 두 군데(7:4와 14:1, 3)에 등장합니다.
(7: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14:1, 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우선 이 두 군데의 내적 정보에 의하면, 이 144,000명은 ‘인침을 받은 자들’이고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는 자들이며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근접 문맥을 살펴보면, 이 144,000은 7:9, 10에 등장하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도 같은 무리입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외치고 있지요. 그리고 14:4에서는 이 144,000명이 순결한 자들로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앞 장(13장)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따르고 경배하는 자들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이들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짐승이 하나님을 비방하고 모든 국가와 민족을 다스리면서 자기를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사로잡거나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즉 그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8절)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이 144,000명은 "창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모든 사람"이라는 점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이 숫자와 연관된 신천지의 논리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지요.
이렇게 이 두 군데의 내적 정보와 근접 문맥만 잘 살펴보아도 이 144,000명의 정체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4,000명이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비롯된 사람들이므로, 이 숫자가 그리스도인들과는 상관없다고 강변하는 이들을 위해서 다른 성경 본문을 참조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야고보서 1:1과 마태복음 19:28에서 교회를 “12지파”로, 갈라디아서 6:16에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고, 로마서 2:29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면적(진정한) 유대인”이라고 지적한 정도만 살펴보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구절들 외에도 신약 곳곳에서, 구약 이스라엘에게 허락된 약속과 특권들을 신약 교회가 이어 받았다는 점을, 오해가 생기지 않을 만큼 다각도로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마태복음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갈라디아서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로마서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결국 144,000명은 창세 이후로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전세계적인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그들이 누구인지 죄다 아시는 하나님(디모데후서 2:19)께서 선포해주신 상징적인 수에 포함된 이들입니다. 비록 요한이 이 계시를 받을 당시에 들은 것은 이 비유적인 숫자였으나 그가 실제 눈으로 본 것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그들 모두는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이었지만, 요한의 관점, 우리의 관점에서는 모든 나라와 민족에서 나온 구원 받은 자들이었던 셈이지요.
지금까지 비유적인 표현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건전한 방식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방식들을 정리해 보는 의미에서 제임스 사이어가 제시한 비유적 본문에 대한 해석 지침에 주목해 볼까요? 이미 다룬 두 가지 해석 방식을 요약하고 있는데, 사이어는 비록 이 원칙이 비유적 언어와 연관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해석하기 어려운 텍스트의 수를 현격하게 줄여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전통적인 성경학자들은 다른 원칙을 사용한다. 성경에 나오는 단어나 이야기가 상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성경 자체가 시사하고 있으면, 우리는 성경이 암시하는 바를 그대로 따라야 한다. 성경이 그런 상징성(symbolism)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우리는 본문의 단순하고 직설적인 의미(plain, straightforward sense)에 충실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인 해석이, 단순하고 일상적인 의미(plain ordinary sense)로 쓰인 성경 구절로 이해되도록 명백하게 의도된 텍스트에서 비롯된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어서는 안 된다.”
-책임 있는 독자의 태도-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자세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기에 당신의 영적 도움이 없다면, 정확하고 깊이 있는 성경 본문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영적 구도의 자세와, 성경의 문학적 측면을 고려하여 특정 본문의 문맥과 그 본문의 장르적 특색을 주의 깊게 살피는 차원이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신천지를 포함한 많은 이단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 중 한 가지는, 성경 속에 '비밀'의 계시가 숨겨 있는데 자기 단체나 자기 지도자가 그 계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입장은 그들의 주장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마이클 윌콕이 지적했듯이 성경에 나오는 "비밀"이란 단어는 완전히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될 수 있다는 복음을 일컫습니다(엡3:3-6; 골1:25-27). 아래의 두 말씀 외에도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 보면 바로 드러나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에베소서 3:3-6)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골로새서 1:25-27)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즉 이 '비밀'이 그리스도라는 점을 믿고 당신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지만, 이 '비밀'이 은밀하게 숨겨진 다른 계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을 정상적으로 따라 가면서 그 문맥을 고려해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정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간구하는 것과 더불어 건전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어가는 노력도 병행해야 하는 것이지요. 성경의 어느 본문을 접하든 항상 글쓴이의 정신에 입각해서 읽어야 하고, 그 본문과 연관된 문화적, 지적 준거 안에서 글쓴이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훌륭한 성경 독자라면 항상 그 본문이 속해 있는 원래의 역사적, 문화적 문맥 가운데서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도 우리 모두에게 본이 되는 이들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베뢰아 사람들입니다.
“베뢰아의 유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아주 기꺼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서 믿게 된 사람이 많이 생겼다. 또 지체가 높은 그리스 여자들과 남자들 가운데서도 믿게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사도행전 17:11-12, 새번역)
먼저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성경을 “사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우선 열정적인 마음으로 “수용”했습니다. 둘째로 수용한 내용을 기록된 구약 성경과 대조하며 연구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인용한 성경 구절들의 근접 문맥과 더 광범위한 문맥들을 참고하며 면밀하게 그의 논지를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셋째로 날마다 구약 성경을 조사했습니다. 11절의 ‘상고하다’라는 헬라어의 의미에는 ‘질문하다’(사도행전 4:9)나 ‘심문하다’(사도행전 12:19)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뢰아 인들의 성경 상고에는 마치 유대인들이 ‘하브루타’ 방식으로 공부하듯이 서로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이 매일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모쪼록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간절히 수용하고,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성경 본문을 천착하고, 다른 성도들과 혹은 공동체 속에서 서로 이해하고 적용한 말씀 내용을 주고받으며 날이 갈수록 보다 풍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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