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자연 재앙과 질병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고통당하는 시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금주 들어 다수의 확진자들이 더 발생하고 있어 온 국민들이 긴장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천지 신도들로 인해 직격탄을 맞은 이곳 대구 시민들의 불안은 대단합니다.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게 일상화되고 신학기도 1주간 연장된 상태일 뿐 아니라 교회 예배도 드리지 않거나 축소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까지 가고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이 바이러스 사태를 시진핑의 기독교 박해의 결과로 해석하는 다수의 우리나라 설교자들이 언론에 회자될 정도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요. 다수의 인명 피해를 안겨다 주는 자연 재앙이나 질병이 발생할 때마다 누구 탓이고 무엇 탓이라며 진단하고 해석하는 이 설교자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입은 예가 허다합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이들이 대형교회 목사들이라고 지적한 언론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을 뿐 언론에 언급되지 않은 목회자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과연 그러할까요? 자연 재앙이나 질병의 원인을 이런 인과응보식으로 접근하면서 그것을 죄다 특정인 혹은 특정 집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게 과연 성서적인 시각일까요? 이런 관점이 하나님의 뜻을 곡해한 것임을 명백하게 밝혀 주는 성경 텍스트가 바로 욥기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묵상할 때마다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계시해 준 욥기는, 심지어 신천지 지도자도 이번 사태를 자기들에게 닥친 중대한 고난의 시기로 인식하여 인용할 만큼 고난과 직결되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 욥기를 통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대한 교훈을 한 번 상고해 보겠습니다. 욥의 삶과 그의 극한 고난의 의미가 이해된다면 우리가 현재 겪는 고난도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 욥의 문제 -
첫째, 욥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욥은 우스 땅에 살던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이었습니다(욥기 1:1). 그는 아브라함과 같은 족장시대 인물 혹은 모세 시대나 그 이후의 인물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족장 시대라는 설은 그가 거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었고(1:3), 아브라함처럼 한 가족의 지도자로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던 면모(1:5)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세 시대 이전은 아닐 것이라고 지적하는 근거는,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욥기 38:1)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계시된 것은 모세 시대였기 때문에(출애굽기 3:14-“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 이전 시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총 42장으로 되어 있는 욥기의 구성은 아래와 같습니다.
1-2장: 서론
3-31장: 욥과 친구들의 논쟁 (= 전체의 2/3 분량)
32-37장: 엘리후의 논박
38-41장: 하나님의 등장
42장: 욥의 반응과 결말
욥이 겪은 첫 번째 재앙은 자신의 모든 재산이 탈취당했을 뿐 아니라 자기 자녀 열 명(아들 일곱, 딸 셋)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것이었습니다. 재산이 사라진 것과 자녀 열 명이 한꺼번에 죽은 것이 동일한 차원의 재앙일 수는 없겠지만 "그의 소유물을 다 네(사탄) 손에 맡기노라"(욥기 1:12)라는 하나님의 허락의 결과 이루어진 재앙이었습니다. 두 번째 재앙은 자기 온몸에,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악창 질환으로 뒤덮인 것입니다. "내가 그를 네(사탄) 손에 맡기노라"(2:6)라는 하나님의 두 번째 허락으로 이루어진 사태입니다. 여기에다 세 번째 재앙까지 겹칩니다. 사실상 이 재앙이야말로 사탄이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2:5)라고 주님께 요구한 핵심 내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세기 2:23)인 아내가 자기를 비웃으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기 2:9)라고까지 한 것입니다. 아마도 아내의 몰이해와 경멸은 그 어떠한 재앙보다 욥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을 주지 않았을까요?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 나타나 있는 욥의 논리는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선한 자도 징계하신다"(예컨대, 9:22-24; 9:28-31)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와 자녀들도 악을 범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선한 일에 진력해 왔는데 왜 이런 징계가 자기에게 닥쳤는지 이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 친구들의 논리는 "하나님은 악한 자를 반드시 징벌하신다"(예컨대, 4:8-9; 15:20-21; 18:5-21)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인과응보 원리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급기야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욥을 공박하고 있지요. 즉 현재 욥이 고난 받고 있으니 그에게 악행이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는 것이지요. 나중에 등장하는 엘리후의 논리는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자를 징계하신다"(예컨대, 33:8-12; 35:6-8)라는 것입니다. 욥이 스스로 의롭다고 역설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결국 욥도 악행을 범했다는 것이지요. 결국 세 친구들의 논리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인과응보라는 것이지요(예컨대, 34:10-11).
- 욥의 문제 해결 방식 -
둘째, 욥은 어떻게 문제를 극복했을까요? 그가 당장 직면한 신앙적 고민은 의롭고 선한 자도 고난 받을 수 있는가였지만 보다 현실적인 문제는 고난 당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였습니다. 우선 주목할 것은 욥은 자신의 고난의 제2원인인 사탄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 극한 고난 중에 사탄을 언급하거나 주목한 적이 없습니다. 소위 "영적 전투"라는 문제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취하는 태도에 대해 욥기가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도전입니다. 사탄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사탄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표명하면서 접근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께 간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욥기 1, 2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살펴보십시오. 사탄은 하나님과 맞짱 뜨는 존재가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하는 종속적이고도 부차적인 존재로 등장합니다. 게다가 그의 활동 반경은 하나님의 손바닥 가운데서도 당신께서 허락하신 영역에만 제한되어 있을 뿐입니다. 제2원인에도 신경 쓰지 않는 욥이 제3원인에 불과한 스바 인, 벼락, 갈대아 인 및 광야의 모진 바람과 투쟁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대상들을 언급하면서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제1원인인 하나님과만 상대했습니다(10:2; 13:3; 13:15; 16;20).
(10:2)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13: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또는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6: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비록 친구라는 미명 하에 자기를 비난하는 이들을 "무가치한 의사들"(13:4), "비열한 위로자들"(16:2), "거짓말쟁이들"(21:34)이라는 표현으로 공박했지만,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자신의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금번 병마 사건(코로나 19)은 신천지가 급성장됨을 마귀가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마귀의 짓임을 압니다. 욥의 믿음과 시험같이 우리의 발전을 파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제(2월 21일) 신천지 교주 이만희 총회장이 전국 신도들에게 보낸 특별 편지 서두입니다. 이번 바이러스 사태가 사탄의 소행이라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책임 지는 자세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처지가 그 극한 고난의 시험을 통과한 욥과 같다고 강변하기까지 합니다. 비록 여기에서 욥을 언급하고 있으나 그가 과연 욥이 어떤 인물인지 욥기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성경인지 알고 있을까요? 이단의 지도자인 그에게서 욥이 사탄에 대해서 전혀 언급한 사실도 없을 뿐 아니라 그는 오직 하나님과만 상대했다는 것에 대한 지식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게 무리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들을 덮친 재앙이나 재난을 사탄의 역사로만 돌리기에 급급한 이단 교주의 자세와 이웃들에게 다가온 천재지변이나 질병을 하나님의 심판으로만 정죄하기에 발빠른 소위 정통 기독교 목회자들의 태도는 동전의 양면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다음으로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내세웠으나 자기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이런 측면은 엘리후가 욥이 자기가 행한 악을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욥이 취하고 있는 기본자세만큼은 일관되다고 본 것과도 일치합니다. 즉 “하나님은 뵈올 수 없고 일의 판단하심은 그 앞에 있으니 나는 그를 기다릴 뿐이라”(35:14)라는 게 욥의 기본자세라는 것이지요. 이런 극한 고난 속에서 욥이 취한 이런 자세를 성경은 "인내한 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5:11은,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라고 증언합니다.
- 욥의 결말 -
이 말씀 속에 언급된 대로 결국엔 하나님께서 친히 욥에게 임재하셔서 그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실존을 눈으로 뵌 것만으로 모든 문제는 끝난 것입니다. 욥42:1-6에 주목해 보십시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새번역-4절이 '개역개정'과 다름)
그 극한 고난 가운데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 대한 수많은 의문이 고개를 들어 내뱉은 말이, 이제는 부질없는 말이었고, 자기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로운 일들을 영문도 모른 채 지껄인 것에 불과했다고 욥은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토록 변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위를 아뢰리라고 호언장담했던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앞에 나타나셔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라고 하시자 단박에 자기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친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자기 눈으로 주님을 친히 뵌 것으로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이지요.
가장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더해 주신 것은 덤이었습니다. 그의 여생에 이전보다 더해 부어 주신 하나님의 복 목록을 주목해 보세요.
(원래의 소유) (나중의 소유)
양 7천 마리 ---------------> 양 1만 4천 마리
낙타 3천 마리 -------------> 낙타 6천 마리
소 5백 쌍 ------------------> 소 1천 쌍
암나귀 5백 마리 -----------> 암나귀 1천 마리
아들 7명 -------------------> 아들 7명
딸 3명 ----------------------> 딸 3명
잘 셈해 보면 이전에 잃어버린 소유의 꼭 두 배를 허락해주셨습니다(42:10). 그런데 한 가지만 예외였지요. 가축은 두 배를 두셨으나 자녀는 아들 일곱과 딸 셋만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 대목이 그 죽은 자녀들이 당시 하나님 앞에 살아 있을 뿐 아니라(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 앞에 살아 있듯이-마가복음 12:26-27)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게 아닐까요? 이렇게 묵상하는 게 단순한 추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언하는 욥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19:23-27)
욥은 그 극한 고난 중에서도 장차 이루어질 몸의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내 가죽", "내 육체", "내 눈"이라는 표현들이 이 사실을 밝혀줍니다. 제가 욥기를 읽을 때마다 감동하는 최고의 구절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마도 오라토리오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이 그 영광스러운 작품 속에 이 구절들에 근거하여 그 감동적인 선율로 이어지는 "내 주는 살아계시고"(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를 포함시킨 것도 저와 같은 감동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요?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서 벗어나 있던 이방인인 욥이, 그것도 구약 시대에, 이런 수준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게 경이롭기만 합니다.
- 비열한 위로자들과 무가치한 의사들 -
이제 욥기에 나온 욥의 말과 친구들의 말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주목해 봅시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욥의 논지는,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선한 자도 징계하신다"라는 것이었고, 세 친구들의 논지는, "하나님은 악한 자를 반드시 징벌하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욥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의 의미를 알 수 없어 고민하면서도 하나님께만 호소하고 당신의 은혜를 기다리며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그렇지만 세 친구들은 처음엔 그의 사정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중엔 욥을 정죄하기 시작하여 그가 그렇게 고난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과응보의 원리 때문이라고 강변했습니다.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 하느님의 입김에 모두들 사라져 가고 그의 콧김에 날려 없어졌네"(4:8-9, 새번역)는 말 그대로입니다.
변화무쌍하고 복잡다기한 인생사를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원리로 해석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성경이 그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건만(예컨대, 전도서 7:15-"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욥의 세 친구와 같은 오만한 도덕주의자들은 거침 없이 한 발 더 나아가 결과를 보고 원인까지 짚어내는 신기(神技)까지 연출합니다. "재앙 당한 것 보니 악을 범했네", "병 든 것 보니 죄를 범했어"라는 식으로 정죄하는 것이지요. 오직 하나님만이 섭리하시고 인도해 가시는 인생사를 자신들의 협량한 소견으로 재단하는 이런 도덕주의자들, 재앙 당했거나 아파 신음하는 이웃들을 사랑하고 섬기기는커녕 그들의 육체적 고통에 죄의식마저 떠안기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우하실까요? 욥의 마지막 고백 다음에 등장하는 42:7-9 에 욥과 이 세 친구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42:7-9)
하나님께서는 7, 8절에 두 번에 걸쳐서 그 세 친구들의 말이 욥의 말처럼 진실하거나 솔직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거듭 지적하셨습니다. 개역개정에서 밋밋하게 표현되어 있는 7절의 "하나님의 분노"는 영어 성경이나 한글 다른 번역본에서는 그 분노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My wrath <=격노, 천벌> is kindled against you and against your two friends"(NASB)
"너와 너의 두 친구를 생각하면 터지는 분노를 참을 길 없구나"(공동번역)
"나는 너와 너의 두 친구에게 분노를 금할 수 없다"(현대인의 성경)
욥 시대에 그 원인을 알지 못할 고난당한 친구를 찾아와 위로해 준다면서 도리어 오도된 논리로 하나님과 당신의 뜻을 들먹이며 고통당한 친구의 가슴에 못을 박던 세 친구와 같은 이들은 언제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대변자나 되는 것처럼 성경 말씀을 읊조리며 거짓 사설을 전파하는 이들, 몸과 심령이 상한 영혼들을 위로해주기는커녕 그들을 향해 저주를 대신 날리는 이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하지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국민이 불안해하는 이 시점에도 이런 "거짓된 친구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욥이 말한 대로입니다. 그 친구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비열한 위로자들"이요 "무가치한 의사들"이자 "거짓말쟁이들"에 불과합니다. 속지 맙시다. 분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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