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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선교: 선교는 순진하고 시대에 뒤진 개념이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1. 9.

 

교회와 선교: 선교는 순진하고 시대에 뒤진 개념이다?

[아래의 글은 "양질의 선교사 양성과 지원"이라는 제목으로 "선교대구"(2019년 69호)에 실린 글의 어투만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올해 출간된 자신의 책 “대변동”(Upheaval)에서 현재 인류의 생존과 삶의 수준을 위협하고 있는 임박한 위험 요소를 4가지로 지적했습니다. 핵무기 폭발,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 전 지구적인 자원 고갈 및 전 지구적인 생활수준의 불균형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편집인인 자니 민턴 베도우스는 최근 미국 PBS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세계 경제가 4가지 충격적 사건을 통과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미래의 일거리 문제가 달려 있는 컴퓨터 혹은 과학 기술 혁명, 중국이 미국을 대항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는 지정학적인 변동, 수명은 늘지만 출생률이 감소하는 인구 통계상의 충격 및 급격한 기후 변화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지리학자와 경제학자가 각각 다른 초점을 가지고 제안한 내용이라 서로 차이가 나긴 하지만 현세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리는 정보입니다.

 

그러나 이 격변의 시대에도 선교의 모판은 여전히 지역 교회입니다. 선교 단체나 신학교가 아닙니다. 지역 교회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백성들이 공동체를 이룬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정의가 어떠하든 교회를 떠나서는 선교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선교의 행위자 혹은 대행자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정의는 이런 기반을 전제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형성된 공동체인 교회가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 속으로 나아가 당신의 나라와 영광을 현시하고 구현해 가는 작업이 바로 선교인 것이지요. 복음전도, 제자훈련 및 교회개척이 그 주요 요소가 됨은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온 세상을 구원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하실 원대한 계획을 펼쳐가고 계심을 교회가 고백한다면 선교의 의미는 더 확장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더구나 격변하는 시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성령께서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전 세계 모든 국가로 해외 선교사를 보내시는”(the sending of international missionaries to all of the world's countries from almost every country) 현시점에서 어떻게 양질의 선교사를 양성해서 파송하고 지원할 것인지는 시급한 논의 사항입니다.

 

<선교사 양성과 지원의 문제점>

선교사 양성과 지원과 연관된 문제점의 핵심은 지역 교회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레슬리 뉴비긴이 세속 사회 속에서 복음 전도하는 지침으로 제시한 5가지 사항은 이 문제에 대해 적실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복음 전도는 교회의 크기와 중대성을 증대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좋은 소식을 나누는 것이라고 전제했습니다. 둘째, 이 복음을 살아 내고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현대의 사건과 관련 지워 석의하는 행위자가 바로 지역교회이기에, 세속 사회 속에서 복음전도의 열쇠(the clue to evangelism)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the primary center of evangelism)은 지역교회여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셋째, 그런 연유로 교회가 주요한 과업으로 삼아야 할 영역은,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다양한 공적인 삶의 영역(the various sectors of public life) 속에서 하나님 나라 일꾼으로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넷째, 세상 방식과 다르게 살아갈 때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는 경우가 생기게 되기 때문에, 이때 이런 대화에 성도들이 참여하여 기독교의 스토리를 나누면서 그것이 일상적 삶과 연관된 의미를 설명해 줄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긴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다섯째, 그리하여 개인적인 개심이 이루어지게 되지만 가장 중요한 지향점은 모든 공적 영역(정치, 산업, 교육 및 예술)에서 최고 수준의 탁월성을 성취하는 이들이 기독교의 스토리에 의해서 그렇게 형성되는 사회를 이루는 게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을 주창했습니다.

 

작금의 우리나라 교회의 국내 선교 상황을 관찰해볼 때 첫째와 둘째 사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셋째와 넷째 사항에 대해서는 아쉬운 측면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섯 째 사항은 언감생심이지요. 우리나라 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언필칭 “만인제사장주의”(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원리)를 강조한 만큼이나 “만인사역자주의"(the ministry of all believers-모든 성도들이 사람들의 필요를 섬기는 특권을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원리)에 주목하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전자가 나름대로 성도들이 주님과의 직접적인 교제, 교통을 누리도록 격려하는 데 기여한 것에 반해, 후자는 그 의미가 왜곡되고 협소화된 채로 진행되었습니다. 일상적인 삶, 즉 직업의 장과 공적인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차원은 경시되기 일쑤였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사적인 영성이 일상적인 삶, 즉 직업의 장과 공적인 영역 속에서 열매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복된 소식을 선양하는 데 도무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렀을 뿐 일상적인 삶 속에서 열매 맺지 못한 데는 목회자와 선교단체 지도자들의 책임이 지대했습니다. 선교의 의미를 단순한 복음 전도 활동으로 축소시킨 데 그치지 않고, 선교의 결과가 교인이나 단체 구성원 수가 늘어나는 교회(혹은 선교단체) 성장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왜곡시킨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도록 격려하긴 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사적인 영성이 실제의 삶의 현장 속에서 진리와 사랑이 충만한 모습으로 현시되어야 한다는 측면을 경시하거나 왜곡시킨 것이지요. ​그들에게 직업은 죄 많은 이 세상에 사는 이상 그저 생계를 해결하는 수단이 될 뿐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그것이 거룩한 교회(혹은 선교단체) 사역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재원을 마련해 주는 수단이 되거나 불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통로가 된다면 이상적이라고 여깁니다. 딱 여기까지입니다. 직업이나 공적 생활 그 자체가 품고 있는 영광스러운 선교적 차원은 무시되었습니다. 이런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력을 느껴 복음의 비밀이나 그들이 품고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불신자들이 존재할 리 만무했습니다.

이런 국내 선교 상황이 선교사 양성과 어떤 연관성을 띨까요? 선교사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들이 아닙니다. 지역 교회라는 모판 속에서 뿌리박고 성장한 일꾼입니다. 일상적인 삶, 즉 직업의 장과 공적인 생활 속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한 이들 중에 교회가 기도하면서 해외 선교지로 보낼 일꾼들을 징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자기 선교팀에 합류시킨 과정을 살펴보십시오(행16:1-5). 우선은 디모데가 적어도 두 지역(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그리스도인들이 칭찬하는 일꾼으로 인정된 사실을 확인한 후 그를 선택했습니다. 디모데를 만난 곳이 루스드라였으나 사도 바울은 그의 됨됨이를 알아보기 위해 그곳에서 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고니온까지 가거나 사람을 보내어 그에 대한 평가를 확보했던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헬라인이어서 이방인 선교에 더욱 적합하다고 여긴 것은 차후 고려 사항이었을 것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나라 교회는 어떠한 방식으로 해외 선교를 위한 일꾼을 선택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부실한 우리나라 교회의 모판 속에서도 지난 세월 동안 선교사 자원들을 성장시키고 세계 각지로 파송하여 그들과 동역하신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출신 선교사들이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로 사역을 담당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통해 과연 뉴비긴이 제시한 지침들이 재생산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입니다. 자기들이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들을 어떻게 선교 현장 속에서 실행해 갈 수 있겠습니까?

 

<선교사 양성과 지원에 대한 제언>

선교사를 양성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침으로 필자는 아래 다섯 가지에 주목합니다.

 

(1) 지역교회에서 건전하게 성장한 후보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의 대위임령 문맥(요20:19-23)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가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요? 레슬리 뉴비긴은 그 앞 구절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절).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을 장악하고 호령하는 왕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 제물이 될 종으로 보내셨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선교사가 갈 길도 분명합니다. 정복자의 대로가 아니라 십자가의 좁은 길입니다. 이어지는 22절에 드러나 있듯이, 자기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해 가는 사역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통치 하에 진행해 가는 사역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십자가 구속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해되는 영광스러운 열매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장기간 교회의 장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마음”(crucified mind)을 현시하고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게 순종하며 성숙하게 사역한 일꾼 중에 선교사 후보생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선택할 때 보여준 본입니다.

 

(2) 선교사 후보자의 은사와 자질에 기초하여 훈련하고 배치해야 합니다.

선교사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거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은사와 자질을 분별하고 활용해본 결과 그것들이 특정 선교 사역에 합당할 뿐 아니라, 자신이 그 사역을 통해 가장 기쁘고 보람 있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이가 자기 몸을 당신께서 기뻐하실 산 제물로 드리는 길입니다(롬12:1-5). 교회나 선교단체도 이런 선교사 후보자의 내적 자질에 근거하여 훈련시키고 적지(適地)에 배치해야 합니다. 척박한 선교 상황 가운데서도 장기간 기쁨과 보람을 누리며 선교할 수 있는 양질의 해외 일꾼들을 양성하는 정도(正道)라고 믿습니다.

 

​(3) 선교 단체 훈련과 전문인들과의 네트워킹이 긴요합니다.

랠프 윈터가 2007년에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우라”라며 제시한 12가지 항목 중에 필자가 보기에 우리나라 사정에 가장 유용한 제안이 두 가지였습니다. “교회가 선교단체를 이용하지 않고 선교사를 파송한 실수”와 “선교 속의 비즈니스와 비즈니스 속의 선교를 이해하지 못한 실수”였습니다. 특히 선교학적인 지식과 광범위한 현장 경험을 갖고 있는 선교 단체를 무시하고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 중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예가 단 한 군데도 없었다고 단언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다양한 국제 비즈니스 노하우와 실제적인 현장 경험을 갖춘 전문인들과의 네트워킹을 활용하지 않은 채 용감하게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나 선교 단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 경험한 실패담은 윈터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4) 전문인 선교사가 이등선교사(secondary missionaries)라는 인식을 불식합시다.

최근에 “Christianity Today”가 보도한 대로, 21세기 초기부터 지금까지 선교사 파송 모델이 현격히 바뀌고 있습니다. 즉 “서구 선교사가 전 세계 나머지 지역으로 가는 모델”에서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전 세계 모든 국가로 해외 선교사를 보내는 모델”로 전환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2015년부터 중국 정부는 아프리카에 1,200억 불을 투자하기로 결단하고 수십 만 명의 중국인 노동자와 사업가들을 그 지역으로 보내어 경제적인 기회를 노리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 정책은 지난 2015년 가을에 중국 가정 교회 지도자 100명이 홍콩에 모여 자기들끼리 오랫동안 논의한 2030년까지 2만 명 선교사 파송 목표를 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2만 명을 목표로 정한 것은 로버트 모리슨과 허드슨 테일러 이후로 중국에서 사역한 선교사 수가 2만 명이라고 추산한 것을 바탕으로 일종의 보은(a gospel debt or missional debt)의 차원으로 정한 숫자라고 합니다. 필리핀의 경우도 고무적입니다. 선교 단체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2백만이나 되는 필리핀인을 훈련시켜 그들의 고용주, 동료 및 이웃들에게 증거 할 수 있는 전문인 선교사(tent-making missionaries)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이 변혁의 시대에 세계 선교에 혁혁하게 기여할 이들을 아직도 이등선교사(secondary missionaries) 취급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지 않습니까?

 

​(5) 선교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교회는 선교사를 신실하게 지원합시다.

사도바울은 복음전파 초기부터 자기를 재정 지원해 준 빌립보교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아름다운 향기이며,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4:18, 새번역)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원으로 본 것이지요. 이것이 선교사가 취할 본이라면 교회가 취할 본은 따로 있습니다. 자기 교회에서 처음으로 파송한 마지 팔리 선교사가 우리나라에서 54년이나 사역한 다음 귀국한 이후에도 지금껏 지원해주는 미국 그레이스 커뮤니티 처치입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이와 같은 예가 희귀할까요?

 

세계적인 격변기를 통과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선교적 대응책을 마련한다는 것이 천진난만하다고 생각되지 않는지요? 하시라도 핵무기가 터질 위험이 상존하고 시시각각으로 기후 변화가 위기로 둔갑하고 자원이 고갈되며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이 시점에 선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나라를 현시한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띠겠습니까? 성경적인 종말 시나리오에 의하면 어차피 세상은 죄악이 관영하여 극한 혼돈 가운데 멸망하게 되어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런 비관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격변은 시대마다 상존했고 그 격변기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으로 군림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격변기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역동적으로 엄존하여 계십니다. 격변기에 직면한 인류 모두에게 가장 긴급한 것은 외적 상황의 개선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적 상태의 변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언제 어디서 어느 측면에서 기여해야 할지는 오직 이 모든 개선과 변혁 과정을 주도해 가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말과 행동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필요보다 영혼의 필요가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복음은 몸의 부활을 포함하는 전인적인 재창조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만이 아니라 새 땅의 도래도 함께 갈망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지 2천 년이 지났어도 교회는 “주의 강림이 가깝고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신다”(약5:8-9)는 믿음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라고 고백하며 오늘 하루를 보냅니다. 이 믿음과 고백이 결여된 내일이란 교회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양육하고 훈련시킨 성숙한 일꾼들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해외) 선교 지역의 깊은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기꺼이 파송하고 내내 동역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