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우리 각자의 신체와 됨됨이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창조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전 생애도 이미 생전에 하나님의 섭리로 예정되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이미 모든 게 다 정해져 있는 마당에 내가 어떻게 산들 무엇이 달라질까라고 생각하면서, 인생을 수동적이고도 체념적인 자세로 영위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게 예정되어 있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므로, 인생을 능동적이고도 낙관적인 자세로 영위해 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논의하면서 다루었지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우리의 책임은 서로 이율배반(antinomy)의 관계에 놓여 있는 엄연한 성서 상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온 우주의 제1원인인 것만큼이나 내게 부여된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점도 진리인 것입니다.
내 책임과 역할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궁구하는 중에, 지난 1970년대 중반에 제가 고등학교 재학 중일 때의 일이 기억났습니다. 제가 출석하던 교회의 어느 헌신 예배 시간에 한 교목님이 와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설교 중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시간에 책 한 권을 강력한 어조로 추천한 것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책 제목은 “적극적인 사고방식”(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이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 목사가 쓴 책으로서 지금까지 5백만 권 이상이 팔렸다는 책이지요. 당시 그 교목님이 필독서라고 강조한 탓에 그 이튿날 서점에 가서 그 책을 샀습니다. 아직도 그 책 중의 한 대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게 힘을 주는 신념을 무기로 하여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 책의 역자가 과감한 재량권을 갖고 의역을 시도한 본문이었습니다. 신약 성서 중 빌립보서 4:13을 의역한 것이지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돌이켜 보면 이 번역문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왜곡한 번역에 불과했지만, 필 목사나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신봉한 숱한 목회자들과 자기계발 강연가 및 작가들의 의도를 꿰뚫은 문장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내게 힘을 주는 존재’가 ‘하나님’ 혹은 ‘예수님’이든, ‘나 자신’ 혹은 ‘나 자신의 신념’이든 “결정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무기만 제공해 주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들 중에 그래도 그 존재가 예수님이라고 주장할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들이 믿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가 하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펴낸 책이나 강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거인, 그들이 낳은 삶의 열매를 보면 그들이 믿노라고 고백한 예수님이 어떠한 존재였는지 판가름 나지 않을까요?
-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 사고방식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필 목사가 자기 책(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 속에서 언급한 다음 내용이 그 핵심을 짚고 있다고 봅니다.
“만일 당신이 부정적으로 사고한다면 당신은 부정적인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사고한다면 긍정적인 결과가 찾아온다. 이것이야말로 단순한 사실로서 (...) 번영과 성공에 관한 놀라운 법칙이다.” (If you think in negative terms you will get negative results. If you think in positive terms you will get positive results. That is the simple fact ... of an astonishing law of prosperity and success.)
이런 적극적 사고방식은 간혹 “적극적인 심적 태도”(PMA, 즉 Positive Mental Attitude)나 “적극적인 고백”(Positive Confession)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소위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 "믿음 신학“(Faith Theology), 혹은 "건강과 부요의 복음” (Health and Wealth Gospel)이라고 불리는 그릇된 신학이 뿌리 내리고 있는 토대입니다.
사실상 적극적으로 생각하거나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나 인생관을 실행하여 성공을 누리는 것 자체는 잘못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아시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7:11). 또한 성경은 성공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많은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시편 1편에서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경건한 사람에 대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절)라고 천명한 것에 주목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삶이 어느 정도 성공하도록 예정해 두셨다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맥코넬이 지적한 대로 이 ‘적극적인 심적 태도’, ‘적극적인 고백’ 혹은 ‘적극적 사고방식’을 인본주의적이라고 판단할 이유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이런 시도들이 인간에게 인간 자신이 규정한 “필요들”을 채울 수 있는 무제한의 능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믿음(faith)이란 것을 자기 스스로 생성해서 번영한 삶으로 이끌어주는 영적 능력이라고 보면서, 개인적으로 누리는 유익이야말로 영적 생활 속에서 믿음을 지속해가야 할 주요한 동기로 보고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당신의 뜻 대신 자기와 자기 욕구가 중심이 되어 있는 이 경향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자신의 신체적인 복과 물질적인 복을 누리기 위해 휘두를 수 있는 도구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조엘 오스틴의 글 한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그의 베스트셀러인 “Your Best Life Now"의 서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인용문 중에 그가 말하는 믿음의 실상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최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을 통해 인생을 보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새로운 차원으로 비상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당신의 사업이 급성장하는 것을 보라. 당신의 결혼이 회복되는 것을 보라. 당신의 가족이 번영하는 것을 보라. 당신의 꿈이 성취되는 것을 보라. 만일 당신이 항상 그것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그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To live your best life now, you must start lookng at life through eyes of faith, seeing yourself rising to new levels. See your business taking off. See your marriage restored. See your family prospering. See your dreams coming to pass. You must conceive it and believe it is possible if you ever hope to experience it.")
- 성서적인 믿음 -
적극적 사고방식에 대한 성서적인 시각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믿음이 어떠한 것인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 블로그 중 “믿음: 바라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이다?”라는 제목의 글 속에서 이미 나눈 바 있지만, 성서가 계시해 주는 믿음은 “태초라는 어느 과거 시점에 Creator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현재 시점에 Yahweh 하나님께서 역동적으로 우리 삶 속에 실존해 계시며, 미래 어느 시점에 Rewarder 하나님께서 소망 찬 미래를 마련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철저하게 하나님과 당신의 속성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믿음의 사례들을 통해서 그 믿음의 본질을 살펴보겠습니다. 블레인 스미스가 정리해 둔 것을 활용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질문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특정 개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정답은 아래와 같이 8회입니다.
(1) 소경 바디매오(마가복음 10:46-52) (2) 혈루증 앓은 여인(마가복음 5:25-34) (3) 중풍병자의 네 친구(마가복음 2:1-12) (4) 가나안 여인(마태복음 15:21-28) (5) 죄를 지은 한 여인(누가복음 7:36-50) (6) 예수님께 감사한 문둥병자 한 명(누가복음 17:11-19) (7) 자기 종을 고쳐달라고 청한 백부장(누가복음 7:2-10) (8) 고쳐달라고 청한 두 소경(마태복음 9:27-29) ("Optimism Factor")
각 경우의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께 대해 “주님” 혹은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외치거나,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했다는 구절들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을 구약 시대로부터 약속된 메시야로 인정하면서 당신의 은혜와 능력으로 자신들의 신체적 질병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을 믿는 그들의 면모가 암시된 부분입니다. 스미스는 이런 면모를,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신비로운 낙관적 태도”(uncanny optimism)로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믿음에는 아래와 같은 4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위한 최선을 바라시는 친구라는 믿음(The belief that Jesus was a friend who desired the very best for them).
2. 그리스도의 도움을 구하고 당신께 순종함으로써 유익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The belief that they would benefit by seeking help from Christ and submitting to him).
3. 예수님의 도움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결단(The determination to do whatever was necessary to get help from Jesus).
4. 자신들의 특정한 필요가 예수님에 의해 채워질 것이라는 상당한 확신(Considerable confidence that their specific need would be met by Jesus). ("Optimism Factor")
즉 예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믿음은, 당신께서 자기들의 특정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강력하게 신뢰할 뿐 아니라 당신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품은 확신은 “믿는 것은 성취할 수 있다”(“what you believe you can achieve")라고 주장한 로버트 슐러나 그 아류들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번영 신학과는 결을 달리합니다. 적극적 사고방식 주창자들은 자신의 면모와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반면, 성서에서 인정받은 믿음의 소유자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당신께서 무언가를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만하거나 경박하지 않고, 도리어 철저하게 주님의 주권과 은혜에만 소망을 두면서 겸허하게 자신들의 필요를 간구하고 당신의 말씀에 순복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태도는 교리적인 지식 체계를 갖추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얼마든지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거나 들었을 뿐 아니라, 당신이 어떠하신 분이신지 보고 들은 것을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태도를 키워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미스는 이 믿음의 태도를, “하나님의 도움을 얻는 것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감”(an optimistic expectation about receiving help from God)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 적극적 사고방식의 긍정적인 측면 -
성서가 지향하는 믿음의 실체에 근거하자면, 적극적 사고방식은 믿음의 대상을 설정하는 측면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적극적 사고방식에는 긍정적인 면모가 없을까요? “신앙의 눈으로 본 심리학”(Psychology Through the Eyes of Faith)의 저자인 데이비드 G. 마이어즈와 맬콤 A. 지브스는, 자만심(pride)의 폐해가 크긴 하지만 긍정적인 자부심(positive self-esteem)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유익성에 대한 상보(相補)적인 진리도 잊지 말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즉 “자만심은 우리를 하나님과 사이가 틀어지게 하고 서로서로를 멸시하게 만드는” 주역으로서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민족주의 및 모든 치명적인 국수주의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지만, 긍정적인 자부심과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긍정적인 자부심(positive self-esteem)을 품고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우울증에 덜 시달리고, 어떤 병이나 약물 남용에서 더 자유롭고, 동료에게서 받는 압력을 덜 느끼며, 어려운 과제에 당면했을 때 좀 더 끈기 있습니다.” 역으로 “나는 쓰레기”(I am junk)라는 감정을 가진 사람은 절망과 정신적 혼란을 경험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많은 임상의학자들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비참하다고 느끼는 것(misery)과 자기 거부하는 감정(self-rejection)과의 관계를 잘 살펴보면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인지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비참하다고 느끼는 것이 자신이 쓸모없다는 느낌(feelings of worthlessness)의 원인인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낮은 자아상(lowered self-image)이 자기가 비참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요. 학교에서 친 시험에서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거나, 언젠가 데이트한 상대가 자기를 두고 별로 끌리는 데도 없고 매력도 없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최소한 당분간은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요?
둘째, 자신의 잠재력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좀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좀 더 많은 돈을 벌며, 문제에 대해 더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적 통제 소재(統制所在)”(internal locus of control)와 연관된 수천 개의 심리학 관련 연구에서 드러난 사실입니다. ‘내적 통제 소재’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 심리 상태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물론 우리 삶 속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때는 그것들을 수용하고 그것들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일 또한 많은 법입니다.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보다 다양한 유익을 누릴 수 있는 영역인 셈이지요.
셋째,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해가 어떻게 난감한 심리적 상황을 일으키는지 깨닫게 되면, 자기에게 이미 형성된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라는 비극적인 체념 현상을 간파하게 되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낮은 자긍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과제가 주어지면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 무기력하게 대처함으로써 실패하게 되고, 그 실패가 더 낮은 자긍심을 낳은 원인이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건전한 자긍심의 소유자는 어떤 과제가 주어지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성공하게 되고, 그 성공이 더 높은 자긍심을 낳게 되지요. 낮은 자긍심이 먼저인지 무기력이 먼저인지 가늠하긴 힘들지만, 낮은 자긍심 문제를 먼저 해결함으로써 얼마든지 ‘학습된 무기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어 관용어구 중에 “throw the baby with the bathwater”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baby)을 쓸데없는 것(bathwater)과 함께 버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소중하고 좋은 것과 하찮고 나쁜 것을 구분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을 논의하는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에는 잘못된 세계관, 오도된 신학 및 그릇된 성경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죄다 버려야 합니다. ‘욕조 속 구정물’에 불과하니까요. 그렇지만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심리학적인 연구 속에는, “인간은 자유의 경험과, 자신들을 외부 세력의 인질로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피조물로 볼 수 있는 시각으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마이어즈와 지브스)라는 교훈이 엄연히 담겨 있습니다. 이것까지 버려서는 안 됩니다. ‘소중한 아기’이니까요.
- 적극적 사고방식의 부정적인 측면 -
적극적 사고방식의 긍정적인 측면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그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한번 상고해 보겠습니다. 여러 기독교 신학자들과 학자들의 의견을 통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적극적 사고방식 신봉자들은 성공과 자기 부인과의 균형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상 불가피한,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in the world but not of it) 영적 긴장과 씨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공이 바람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원칙대로 자신의 은사와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여 공적인 유익을 낳는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오로지 성공을 누리겠다는 소욕을 좇아 그릇되거나 덕스럽지 못한 방식으로 기독교 사업이나 사역이 진행된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컨대, 적극적 사고방식의 주창자들 중에 지난 세월 동안 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추태와 비행이 얼마나 많았는지 한번 살펴보세요.
둘째, 적극적 사고방식 신봉자들은 그 낙관적 태도의 장점을 너무 찬양하는 나머지 그것의 위험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낙관적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을 때 수반되는 낙심, 수치심이나 죄의식이 얼마나 극복하기 어려운 것들이라는 점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짐 콜린스는 자기의 책(“GOOD TO GREAT”) 속에서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스톡데일은 미국의 삼성 해군 장군이자 전 부통령 후보였지만, 그 이전에 베트남 전쟁 포로 중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의 의미는 낙관주의(optimism)와 현실주의(realism)와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트남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이 역설적이게도 낙관주의자들(optimists)이었다는 것이죠. 크리스마스 때까지, 그리고 그 이듬해 부활절까지, 그리고 추수감사절까지는 자기들이 풀려날 것이라는 낙관적 견해를 잔뜩 품고 있다가, 거듭된 낙담을 경험한 후 상실한 마음(a broken heart)으로 인해 다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설명하면서 그가 한 말이 유명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교훈이다. 결국 이기게 될 것이라는(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믿음과, 눈앞에 닥친 가장 냉엄한 현실이라는 사실들이 어떠한 것들이든 그것들을 직면하는 훈련을 혼동해선 안 된다.”(You must never confuse faith that you will prevail in the end — which you can never afford to lose — with the discipline to confront the most brutal facts of your current reality, whatever they might be.)
셋째, 적극적 사고방식 신봉자들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 속에서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현실과 직면하거나 현실을 누리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그것을 시각화하며 사는 것이 그들의 주된 생활방식이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들”(The Screwtape Letters) 속에서 사악하고 노회한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풋내기 신참 마귀 웜워드에게, “인간의 애착을 미래에 고정시키라”(fix men's affection on the Future)라고 조언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영원한 미래가 아니라, 손에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는 미래 속에 거의 모든 악이 뿌리박고 있다는 점을 마귀가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감사는 과거 쪽을 향하고, 사랑은 현재 쪽을 향하지만, 공포, 탐욕, 정욕 및 야망은 앞을 보게 한다.”(Gratitude looks to the past and love to the present; fear, avarice, lust, and ambition look ahead.) 과거사와 관련하여 하나님과 누군가에 대한 감사도 없고, 현재에 실천하고 누릴 사랑도 없이, 그저 미래만 보고 달려가는 어리석고 죄악 많은 인간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나요? 파스칼 역시 아래와 같이 끝없는 야망의 위험을 보았습니다.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수단이고, 오로지 미래만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살지 않지만, 살기 소망한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행복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불가피하다.”(The present is never our end. The past and the present are our means-the future alone is our end. So we never live, but we hope to live-and as we are always preparing to be happy, it is inevitable we should never be so.)
넷째, 적극적 사고방식과 번영 신학 신봉자들은 하나님과 당신의 뜻 대신, 자신과 자신의 뜻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와 자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와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합니다. “네 입에 건강이 있다”(Health Food)의 저자인 케네스 해긴이 주장하는 “Name it and Claim it”이나 “Say it, Do it, Receive it, and Tell it”이라는 모토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들이 순종의 삶을 드려야 할 “주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말을 듣고 이 세상의 건강, 부, 번영을 안겨다 주는 “종”일 뿐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의 반석 위에 성령의 역사로 진행되는 성화 과정이 마지막 날에 이룰 영화를 의미할까요? 그렇다면 그들을 적극적 사고방식 혹은 번영 신학 신봉자들로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후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중에 닥치는 고난과 역경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극복해가면서 거룩함을 이루어가다가 맞이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구원을 소망한다면, 건강, 부, 번영을 누리는 부차적인 문제에 그들처럼 방점을 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어떻게 건강, 부, 번영을 희생하면서라도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건강, 부, 번영이 우리의 삶에 필요한 요소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주님의 구원과 통치라는 지고의 가치와 비교하여 그것들을 철저하게 “덤”으로 여기는 것이 성경의 주된 관점이 아닐까요? 결국 적극적 사고방식과 번영 신학 신봉자들은 성경 속에 도도히 흐르는 “구원의 맥”을 무시한 채, 도리어 “지류”에 불과한 건강, 부, 번영이란 것들을 “맥”으로 둔갑시킨 오류를 범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복음으로 온 세상에 외치고 있는 셈입니다.
- 바람직한 사고방식 -
이상에서 논의한 대로 적극적 사고방식 그 자체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성서적인 자아상이 토대를 이루고 있는 낙관적이고도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주님께 영광이요, 나에게 풍성한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후에 “하나님의 도움을 얻는 것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감”으로 충일한 마음의 태도가 얼마나 역동적인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초점이 하나님과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에서 나와 내 뜻을 성취하는 것으로 옮기는 순간(이 두 가지가 항상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누리는 모든 성공은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항상 마음을 지키고 경계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즉 낙관적인 태도와 재능이나 은사의 성취가 품고 있는 긍정적인 역할과, 육신의 소욕으로 인한 악과 자기 부인의 필요성을 균형 있게 지속해가야 합니다.
이 균형 잡기의 비결은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유지하며 당신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날마다 당신과 더 깊이 교제하면서 당신을 더 깊이 이해해 가야 합니다. 동시에 매일 당신께서 허락해 주시는 현재의 복들을 감사함으로 누려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밖에서 갖가지 필요를 외치며 우리를 부르는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 내 은사와 재능을 존중하면서 그것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할 기회를 모색해 가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지속되고 깊어지면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어떻게 내 은사와 재능을 활용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충분히 교제하면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온갖 음성을 주님의 부르심으로 착각할 소지가 클 뿐 아니라, 내 은사와 재능을 활용하여 누리는 성공이 우상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마이어즈와 지브스가 묘사한 “풍요로운 삶에 대한 기독교적인 비전”을 소개하며 제 글을 맺겠습니다.
"자기를 긍정하지만 자기를 망각하는 것, 긍정적이지만 현실적이고, 은혜가 충만하며 우쭐대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풍요로운 삶에 대한 기독교적인 비전이다."(To be self-affirming yet self-forgetful, positive yet realistic, grace-filled and unpretentious-that is the Christian vision of abundant life.)(“Psychology Through the Eyes of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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