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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의미: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것이 기적이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8.

기도의 의미: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것이 기적이다?

말레이시아로 진출한 지 처음 5년은 제 생애에서 ‘가장 음침한 골짜기’(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the valley of deep darkness-시편 23:4)라고 할 정도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런 처지에 놓인 제게 시편 23편 4절 말씀은 큰 위로를 안겨 주었습니다. ‘다닐지라도’라는 표현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표현을 통해서였습니다. 우선 ‘다닐지라도’라는 말은 그 길과 그 목적지를 잘 알며, 그 길을 가기로 작정하고 있으며, 그 길이 안전함을 느끼고 있으며, 그러므로 온전히 조용하며 침착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의 꾸준한 발걸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의 온전한 인도를 신뢰하는 고요한 확신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다닐지라도’(혹은 통과할지라도)라는 표현을 통해 그 시편 저자는 골짜기 ‘안에서’(in) 헤매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를 ‘통과해’(through) 가는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희 가정이 당하고 있던 현실은 저희를 향한 주님의 선하신 뜻의 성취를 위해 당신께서 마련해 두신 고난과 역경의 골짜기일 뿐이었습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통과해 가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확신에 찬 평안한 발걸음과 위로받은 넉넉한 마음의 근원은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의 동행하심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가장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그곳 국립대학 한 곳에 자리가 나서 진출하게 되었고 그 대학에서 13년을 일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는 저는 계속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아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마다 제게 주어진 도전은, ‘이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건가요?’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곳에 왔고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주님께서 이루실 차례라며 어떤 놀라운 일을 요청하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그대로 되도록 하실 차례”(마가복음 11:23 참조)라고 강변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그 당시에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마가복음 본문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그 ‘믿음’의 핵심이 단순히 입으로만 믿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을 시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가슴 벅찬 감격이었습니다.

 

자의적인 믿음과 행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경거망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는 가운데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의 구속 사역이 힘 있게 진전되도록 아뢰는 것이야말로 주님께 드릴 기도의 본질적인 내용임을 깨달은 것이지요. 바로 이때 드려야할 기도가 바로 “이제 저희들이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였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오랫동안 기도하던 제목들이 응답되지 않을 때 자칫하면 경건하게 보이면서도 운명론적인 태도를 지니기가 쉽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더라도 지혜 충만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어떻게 변경될 수 있을까? 말레이 회교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때가 이미 예정되어 있는걸. 그때까지는 어떤 기적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이런 태도가 그릇되었다는 것을 당시 어느 날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조지 맥도날드의 글을 읽어가는 중에 깨닫게 된 은혜였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석상에서 어머니 마리아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들 중에 그녀가 원하던 것을 공급해 주시기 위한 여지를 마련하신 바가 있습니다(요한복음 2장). 그 당시에 기적을 베푸시는 것은 당신께서 원하시던 바가 아니었지만, 그녀가 기적을 바랐기 때문에 당신께서도 기적을 베푸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당신으로서는 차라리 그대로 놓아두기 원하셨던 것을 그 어머니를 위해 기꺼이 행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항상 그 어머니가 당신으로 하여금 하시도록 시킨 대로 행하셨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경우가 됨을 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의도를 변경하실 수도 있으면서도 아무 계획도 망치지 않을 수 있는 분이시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한 발 더 나아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시다는 뜻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본 대로만 행하시는 분이시니까요(요한복음 5:19).” (‘George MacDonald: An Anthology’)

 

결국엔 하나님의 주권이 만사를 좌우하게 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당신의 주권과 함께 긴밀하게 조율되도록 만사를 운영해 가고 계심을 성경은 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분명 역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야고보서 5:16).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가운데서와 같이 우리가 기도하는 불신자들의 심령 속에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는 역사”(데살로니가전서 2:13; 데살로니가후서 3:1)가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기도할 때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진전을 체험하는 것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 부차적인 일일지도 모릅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가도록 만든 것은 그의 배고픔이었습니다(누가복음 15:17 이하). 그에게 즉각적으로 음식이 제공되거나 제공되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사실상 그에게는 저녁 식사보다 그 아버지가 더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다른 모든 필요를 뛰어넘는 우리 영혼의 단 한 가지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시편 27:4).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그러한 교제의 시작이 되고 어떤 필요는 그러한 기도의 동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어떤 것(심지어는 기적적인 구속의 역사까지도)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보다 저급한 필요에 대해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받는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구함 없이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죄다 아시고 그 모든 것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자녀들로 하여금 무릎 꿇도록 하기 위해, 당신과 거룩한 교제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언가를 구하도록 그 무언가를 주시기를 보류하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탕자 상태를 벗어 난 우리가 탕자 된 이웃들을 위해, 아니 탕자 된 그 이웃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더욱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결국 제게 있어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의 장이자, 당신의 뜻을 분별하는 과정이며 그 뜻의 성취를 위해 간구하고 애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은혜의 수단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어 성취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구속 역사를 펼쳐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당신께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4:23). 우리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을 기다리시고 그대로 성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마태복음 7:7-8). 우리가 당신께 부르짖으며 당신께로 와서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우리가 온 마음으로 당신을 구하면 찾고 만나 뵐 수 있는 분이십니다(예레미야 29:12-13).

 

성경 곳곳에 등장하는 기도 응답에 대한 이런 약속을 묵상해 보노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게 기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운행해 가시는 하나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깊은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벗어나 분리되었다가 이제 다시 관계가 회복한 상황에서 우리가 당신께로 나아가 겸허하게 당신과의 교제를 청하고 당신의 뜻을 구하며 당신의 뜻이 성취되길 비는 게 도리어 기적이 아닐까요? 주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후에도 기도를 통한 교제의 의미와 약속이 엄존하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매일 주님께 기도드리는 삶의 현장이 항상 낙관적인 감흥으로 넘실대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거철에 그저 표 한 장만을 지닌 무력한 유권자에 불과한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는 소시민처럼 느낄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관적인 생각에 젖을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은 역대상에 나오는 야베스입니다. 읽기 지루하리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의 족보를 무미건조하게 읊어가던 역대상의 저자는 유독 야베스에 대해서만큼은 특별한 평을 하였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9-10) 히브리인들에게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남다른데도,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을 시사하는 의미를 품고 있었고 그의 기도의 결국도 ”고통이 없게 하옵소서“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낙심천만한 상황 속에서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구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그는 알고 있었음)께만 소망을 두고(사람들은 자기를 ”야, 이 고통거리“로만 불렀을 것) 야베스는 진지하게 간구했던 것입니다(영어 성경에서는 ‘큰 소리로 외쳤다’고 되어 있음). 더구나 고상해 보이기는커녕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기도 내용(‘나’라는 말이 4번씩 나옴)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롭게 응답해 주신 하나님을 묵상해 보면 ”당신께서 역동적으로 존재하시고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당신께 나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히브리서 11:6).

 

히브리어 구약성경 중 제일 마지막에 위치해 있으면서 비관적인 환경에 짓눌려 믿음을 상실한 채 낙망하고 좌절해 있을 이스라엘 백성에게(기원전 4세기경)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고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 기록되었던 이 역대기의 일부가, 말세의 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때와 동일한 도전과 격려를 주고 있음을 봅니다. 지난 수백 년 간의 역사를 통해 회교 신앙을 완강하게 보전해 온 말레이인과 그들이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종교적 현실만을 바라본다면 저희가 그곳에서 기울인 노력은, 그 열매가 지극히 비관적일 수밖에 없는, 장기간의 실패가 보장된 사역이었습니다. 저희를 더 낙망케 하는 소리들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도 조금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도 저희는 더 이상 그러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저희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선히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만 소망을 두고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해 갈 것입니다.(히브리서 5:7) 더구나 저희의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된 이름과 그 백성들”을 위한 고상한 중보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분별력 있는 간구라는 점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믿음 있는 끈질긴 간구”를 지속해 가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늘 기억하시면서(누가복음 18:8), 피차 격려와 권면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기도에 관한 묵상을 맺으며 피터 크리프트의 글을 한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C. S. 루이스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전 세계의 평화를 고양시키고 인류의 생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던져 주었을 법한 글이라며 그가 언급한 내용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거의 구원받을 뻔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의인 열 명만 발견하셨다면, 당신께서는 두 도시 전체를 살려 주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는 소돔을 거의 구원할 뻔했고 롯을 구원해 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비롯된 불이 다른 곳에도 내릴 수 있도록 어느 한 곳에 그 제단이 세워져야 한다'라고 찰스 윌리암스가 말한 바 있습니다. 지옥에서 비롯된 불이 다른 곳에 내리지 않도록 어느 한 곳에 그 제단이 세워지고 기도와 제사가 그 한 곳에서 드려져야 한다는 말 또한 진실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대학살과 지옥으로부터 구해 낼 수 있도록, 핵무기의 파괴와 영적인 파괴로부터 구원해 낼 수 있도록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덜 독창적인 일입니다. 즉 우리 마음과 영혼과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한 개인이 바로 그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바로 엄청난 존재를 무력하게 하는 마지막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그 한 표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세계를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