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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전도의 시기와 방법: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한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12.

복음전도의 시기와 방법: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한다?

로마서에는 하나님의 의에 근거한 복음의 원리가 장대한 필치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대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왔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마땅하다면 하나님은 예배해야 마땅합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창조해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분의 존재를 잊고 무시하며 사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분 대신 다른 것들을 섬기며 살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진공상태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 권력, 쾌락, 인기들이 우리 마음 속 우상이 되어 우리 예배를 받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를 안다고 하고 그분께 예배하고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만, 외면적으로만 그분을 섬긴다고 할 뿐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자들이지요. 그분께 예물도 드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겉치레에 불과할 뿐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 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사실상 더 심각한 죄의 상태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점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며 살거나 외면적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삽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교류하지 못합니다.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누리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죽음의 상태입니다. 신체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것이지요. 신체적 수명을 다 하는 날 그는 영원히 하나님과 결별하게 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 사정을 아시고 특별히 보내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사실상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셈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동일한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삶을 영위하던 중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 후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예수님을 신뢰함으로 당신과 연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처럼 하나님을 무시하던 내가 죽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뜻이자 세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분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게 됩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우리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류하면서 그분의 은혜와 진리를 누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닌 현재의 몸은 사라지고 부패할 날이 오겠지만 그 후에는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롭게 재창조된 새 하늘과 땅에서 우리처럼 부활한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함께 영원토록 낙원의 삶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복음입니다.

 

이런 복음의 내용이 로마서의 전반부(1-8장)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연이어 9-11장에서 이스라엘 문제를 다룬 다음 로마서는 구원받은 자 즉 하나님의 의인이 영위해야 할 삶의 지침을 12장부터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이라고 권면할 것 같습니까? “그러므로 ......” 복음 전도를 삶의 존재 이유로 여기는 이들의 예상처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태복음 28:19=대위임령) 혹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마가복음 16:15)라는 권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엇하라고 하십니까? 로마서 12장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제 구원 받았으니 온 세상으로 나가서 전도하라고 명령하신 게 아니라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제물로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 보십시오. 무슨 의미일까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현장을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well-pleasing to Him) 예배요, 합당한 예배(spiritual or rational sacrifice)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이들에게 기대하시는 최고의 섬김입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7-4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상명령(The Greatest Commandment)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만일 복음 전파가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인의 “지상 명령”이었다면 이 지상 명령이 로마서 12:1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렇게 다루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로마서 12:1)라고 권면하는 로마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부르심 받은 일에 합당하게 살라”(에베소서 4:1),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립보서 1:27), “위의 것을 찾으라”(골로새서 3:1), "너희를 불러 당신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어울리는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라"(데살로니가전서 2:12) 등의 권계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 바울의 서신은 구원 받아 주님께 연합된 성도들이 취해야 할 삶의 제1원리는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을 드리는 것, 즉 당신의 나라를 먼저 구하며 당신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지침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복음 전파가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 활동의 올바른 자리 매김은 어디까지나 진정한 “지상 명령” 속에서만 가능합니다(본 블로그 중 “지상명령: 대위임령이 지상명령이다?” 참조할 것).

 

복음 전파와 연관하여 주목할 점은 사도 바울의 “일관된” 접근 방식입니다. 자신이 개척하거나 자기 동료가 개척한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일반 성도들에게 “직접적으로 복음 전파하라”라는 권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예가 있는지 한 번 마음먹고 바울 서신서 총 13권을 주의 깊게 묵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직접적으로 복음 전파하라”라는 취지의 명령이나 선언이 있을 때 “복음 전파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잘 살피는 일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일관되게 직접적인 복음 전파 대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복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고 도리어 그 복음을 빛낼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조선진의 “선교의 길을 묻는 그대에게” 중의 “복음전파의 원리”를 참조할 것).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복음 전파의 역할이 암시되어 있는 구절 두 곳이 눈에 띕니다. 먼저 골로새서 4장을 보면 불신자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매일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지혜롭게 행동하면서 주어지는 기회들을 분별하여 최대한도로 선용해 가고 항상 말을 은혜롭고 적절하게 해 가라는 권면이 등장합니다(5-6절). 여기에서도 “직접적으로 복음 전파”하라는 권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5-6절을 계속 읽어봅시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이 시점에서 주목할 단어가 바로 “마땅히”입니다. 성도들이 불신자(‘외인’의 의미)와 함께 지낼 때 절호의 기회(“세월”의 의미)를 포착하여 그들에게 복음에 근거한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현시하고 그들과의 대화를 은혜롭고도 맛깔스럽게 지속해감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불신자들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영적인 관심사를 표명하거나 혹은 직접적으로 성도들의 내적인 소망에 대해 묻는 경우가 마련될 수 있겠지요. 바로 그 때 성도들이 그들의 관심과 질문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고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이라고 골로새서는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에베소서 6:15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골로새서와 함께 읽으라고 한 에베소서(골로새서 4:16)의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한글 번역 세 가지와 NASB를 서로 비교하면서 한번 읽어 보세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개정개역)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공동번역)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새번역)

"and having shod your feet with the preparation of the gospel of peace"(NASB)

 

존 스토트는 이 구절을 석의 하면서 'preparation'으로 번역된 헬라어(hetoimasia)는 채비(readiness), 준비(preparation), 견고함(firmness)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의미가 불확실한 것은 소유격(genitive)을 나타내는 "of"가 주격(subjective)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혹은 목적격(objective)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the rise of the sun"은 "the sun rises"라는 뜻이고 "The war promoted the production of weapon"은 "The war produced weapon"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전자의 경우(주격)라면 "평화의 복음이 믿는 이들에게 허락해주는 어떠한 견고함 혹은 확고함을 신으로 삼아라"라는 의미로 개정번역이나 공동번역과 유사합니다. 후자의 경우(목적격)라면 "평화의 복음을 견고하게 하는 것을 신으로 삼아라" 혹은 "평화의 복음을 준비하는 것을 신으로 삼아라"라는 의미가 되어 새번역과 유사합니다. 'Of'의 의미가 목적격이고 헬라어 hetoimasia가 준비(preparation)라는 의미라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구절의 의미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는 골로새서 4:6 말씀의 의미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평화의 복음을 항상 전할 채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하기"(베드로전서 3:15)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즉 일반 성도들의 복음 전파는 일상의 삶을 영위하면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중에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 성도들에게 “직접적인 복음 전파”에 대한 권면을 제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선 그 직접적인 복음 전파가 일차적으로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 혹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전도자들의 몫이요 책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 일을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하고 훈련된 일꾼들이었습니다. 복음 전파를 가장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자질, 지식 및 능력을 부여 받아 복음 전파에 최적화된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복음 전파 사역이 효과적으로 펼쳐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전도할 문' 혹은 '말씀의 문'(골로새서 4:4)을 열어주셨습니다. 전도에 있어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결정적이었음을 깨달았기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갇혀 있던 감옥의 문이 열리는 것보다 이 전도할 문이 열리길 갈구하면서 성도들에게 '전도할 문"이 열리도록 기도 부탁했습니다(골로새서 4:3-4,18; 에베소서 6:19-20). 사정이 이러한데도 요즘 목회자들에게서 이런 기도 부탁 듣기가 너무 희귀하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직접적인 복음 전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복음 전도자들의 임무입니다. 그 사실을 바울 서신서에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도록 영어 성경 콘코댄스(concordance: 용어 색인집)를 통해 제가 찾아본 것을 아래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괄호 안의 단어는 그 관련 동사의 주체 혹은 주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컨대 "I"는 사도 바울을 가리키고 "we"는 사도 바울 전도팀을 의미합니다.

 

1. “preach”(=전파하다)의 용례

로마서-1:9, 1:15(I), 2:21(you=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유대인), 10:15(they=보내심 받지 않은 그들), 15:1(I), 15:16(I), 15:19(I), 15:20(I)

고린도전서-1:17(I), 21(message-수동구문), 23(we), 27(I), 9:16(I), 18(I), 15:1(I), 2(I), 11(we)

고린도후서-1:19(Christ Jesus), 4:5(we), 10:16(we), 11:4(we), 7(I)

갈라디아서-1:8(we), 1:9(anyone), 1:11(gospel-수동구문), 16(I), 2:2(I), 2:17(Christ Jesus-수동구문), 3:8(the Scripture), 4:13(I), 5:11(I)

에베소서-3:8(I)

빌립보서-4:15(I)

디모데전서-6:2(you-Timothy)

디모데후서-4:2(you-Timothy)

 

2. “proclaim”(=전하다)의 용례

로마서-1:8(Your faith-수동구문), 9:17(God's) NAME-수동구문)

고린도전서 9:14(those=복음 전하는 자들)

빌립보서 1:18(Christ-수동구문)

골로새서 1:23(the gospel-수동구문)

데살로니가전서 2:9(we)

디모데전서 3:16(God-수동구문)

 

3. "defense of the gospel"(=복음을 변명<변증>하다)의 용례

빌립보서-1:7(I), 16(I)

 

4. "speak the gospel of God"(=복음을 전하다)의 용례

데살로니가전서 2:2(we)

 

5. 기타 용례

"entrusted with the gospel"(=복음전함을 맡음)-갈라디아서 2:7(I)

"set apart for the gospel of God"(=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음)-로마서1:1(Paul)

 

이상의 구절들을 종합해 보면 복음을 전하다, 전파하다, 변명(변증)하다라는 동사의 주체는 거의 다 사도 바울을 가리키는 "I"이거나 자기 선교팀을 의미하는 “we"입니다. 그 외의 다른 주어들은 대부분 수동 구문에 사용된 것으로서 전파의 목적어 격인 복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이만큼 되면 일관성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일관성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일까요? 직접적인 복음 전파와 복음 변증은 일차적으로 복음 전도를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일꾼들, 초대 교회 당시의 사도들과 전도자들, 현대의 목회자나 선교사들의 몫이라는 점입니다.

 

예컨대 로마서 1:1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어 사도로 부르심 받았다는 것이 바울의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로마서 15:16에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가진 자로, 갈라디아서 2:7에서는 특히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할 직분”을 맡은 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6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이 납득되지 않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그 영광스러운 복음을 위임 맡은 자신이 느끼고 있던 마음의 부담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지요. 사람들의 생명이 그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자기 역할에 달려 있었으니까요. 언젠가 빌레몬서를 영어 성경으로 읽다가 19절을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I, Paul, am writing this with my own hand, I will repay it (not to mention to you that you owe to me even your own self as well).>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조금도 얼굴을 붉히지 않은 채 아주 태연자약한 어투로 빌레몬이 자기에게 그의 생명을 빚졌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딕체 부분의 의미=네가 네 자신을 내게 빚진 것). 이것은 과장이 아닌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그가 영생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이었기에 바울은 로마서 2:16과 16:25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일컬을 수 있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 전하는 부르심을 입었기에 그 사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도록 주님께서 허락해주셨다고 그는 역설하기도 합니다(고린도전서 9:14).

 

사도 바울에게는 함께 더불어 복음 전파하는 사역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예컨대 골로새서 문맥만 보더라도 ‘아리스다고’와 ‘에바브라’(골로새 교회 개척자)가 있고(4:10, 빌레몬서 23) 감옥에 갇힌 그를 대신하여 심방 사역 중이었던 ‘두기고’(4:7)가 있으며 골로새 교회에서 온 “오네시모”(4:9)도 있었습니다. 여기에다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4:14)까지 보태봅시다. 빌립보서 4:3을 참조해 보자면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동역자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이였습니다(빌립보서 2:22). 디모데후서 4:21을 보면 자신의 죽음을 앞둔 마지막 서신에서 그 아들을 불러 교제하고 싶은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나서 그 유명한 디모데후서 4:2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여기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기를 힘써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교회의 일반 신자들이 아닙니다. 바로 이 목회 서신의 수신자인 디모데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로 선택하여(사도행전 16:1-3) 아들처럼 여기며 함께 내내 사역한 그는 당시 사도 바울이 사역을 맡긴 어디에선가 복음 전도자(evangelist)요 교회 지도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딤후4:5). 디모데후서 4:5에 등장하는 '복음 전도자'라는 단어의 헬라 원어는 신약에서 이곳을 포함해서 단 세 군데만 등장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입니다(다른 두 곳-사도행전21:8, 에베소서 4:11). 다시 말씀 드리자면 "자기에게 복음을 전할 호기가 되든지 그렇지 못한 사정에 처하든지 복음 전할 기회가 열리기만 하면 직접적으로 말씀을 전파하기를 힘써야 할 사람"은 디모데요, 디모데와 같이 직접적인 복음 선포, 말씀 전파에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골로새서는 명백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4:3,4)

 

사도 바울이 교회 신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런 시도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비효과적일뿐 아니라 역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도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복음 전파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 보셨는지요?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 기록을 보면 그의 복음 전도 방식이 일관성을 띠고 있음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있습니다. 그는 주요 도시로 진출해서 그곳에 있는 회당을 항상 먼저 찾아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예-사도행전 13:5, 14, 44, 14:1).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뿐 아니라 성경에 관심을 갖고 찾아 온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God-fearing Gentiles-사도행전 17:17, 18:7)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도 전략이었습니다. 빌립보처럼 회당이 없는 곳에서는 기도할 곳을 찾다가 문 밖 강가에 모인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경우(사도행전 16:13)가 있고,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사도행전 17:21)라고 묘사된 아덴에서는 회당 밖에서 장터에서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지만 회당에서 복음 전하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선교 전략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 특정한 강연 장소인 두란노 서원(사도행전 18:8, 9)을 이용한 것도 먼저 회당에서 석 달이나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중에 무리 앞에서 하나님의 도(the Way)를 비방하는 이들이 있어 장소를 그곳으로 옮긴 경우일 뿐입니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사도 바울조차 시도하지 않은 "시도 때도 없이 복음 전파하기"를 감행하려 하거나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죄의식에 빠져 있는 일반 성도들이 적지 않아 가슴 아플 뿐입니다. 그들은 죄다 신앙 생활 속에서 복음 전파가 차지하는 위상이나 복음 전파하는 방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채 '자기 책임'을 성도들에게 전가해버린 몰지각한 목회자나 선교사들의 피해자들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복음 전파하기"는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이 권면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야 할 말씀 전파"와도 차원을 달리 합니다. 설령 디모데에게 적용되는 이 임무가 이차적인 적용 과정을 거쳐 일반 성도들에게 해당된다고 하더라도 그 임무의 의미를 잘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이 언급한 "때"는 "특정한 기회"로 번역되는 "kairos"입니다. 즉 "기회가 되든지 되지 않든지 말씀 전파에 힘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기회가 된다는 말일까요? 복음 듣는 이가 아니라 복음 전하는 이입니다. 다시 풀어 설명하자면, "디모데 너에게 기회가 되든지 사정이 허락하지 않든지 상관하지 말고 말씀 전파에 우선 순위를 두라"는 말씀인 셈이지요. 예컨대 자기가 지금 피곤해서 쓰러질 지경이라 "자기에게는" 말씀 전할 기회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 말씀을 듣겠다고 준비된 이가 있다면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 듣는 이에게 기회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전하지 않아야 하지요. 복음의 문 혹은 말씀의 문(골로새서 4:3)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하며 계속 섬기며 그 앞에서 복음을 빛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엄연한 전도의 원리입니다. 

 

모쪼록 자신들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에 힘쓰라"라는 구절을 복음전파의 금과옥조처럼 되뇌이면서 일반 성도들에게 바로 적용시켜 직접적인 전도 활동을 독려하거나 강요한 목회자, 선교사 및 선교 단체 지도자들이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돌이키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릇된 말씀 이해와 전도에 대한 왜곡된 시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일반 성도들이 과도하게 직접적인 복음 전도에 헌신하거나 죄의식에 빠져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세계의 교회, 특히 우리 한국 교회 내에 복음 전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이제 복음 전파하는 일에 있어 자신이 맡은 역할에 주목하면서 진리의 말씀에서 비롯된 자유를 누립시다. 일반 성도들의 경우에는 불신자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빛이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뿐 아니라 복음 전도자들에게 복음 전할 문이 활짝 열려 그들이 명명백백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골로새서 4:2-4). 그리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불신자들과 지혜롭고 거룩하게 소통해감으로써 그들의 질문에 응답하여 복음을 설득해 갈 의무가 있습니다(골로새서 4:5-6). R. C. 루카스가 언급한 대로 복음 전파에 있어 목회자, 선교사 및 복음 전도자가 감당해야 할 의무를 "직접적인 전도"(Direct Evangelism)라고 한다면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의무는 "반응적인 전도"(Responsive Evangelism)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