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 내적 인도를 따르면 된다?
신앙인으로 사는 데 있어 가장 관심 있는 주제가 있다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합니다.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은 성경 상의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잘 드러나 있지만 특수한 하나님의 뜻은 오리무중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진로, 진학, 직업, 결혼 상대 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여간 난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결혼 전에 사주팔자를 보러 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하고 진로 문제 때문에 용하다는 점쟁이 집을 들락거리는 이들이 있다는 게 이런 갈등상태를 반영해주는 게 아닐까 합니다.
마치 바다 위에서 항로를 찾지 못한 선원이나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사냥꾼처럼 앞으로 나아갈 길이 막막할 때를 느끼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있어 기도보다 더 유용한 해결책은 없을 것입니다. 평상시에 잘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이라도 중대사에 대한 결정을 앞에 둔 상태에서라면 얼마든지 기도하려 들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 인도받는 과정에서 자주 거론되는 것이 바로 “내적인 인도”(inward guidance)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특정한 방식으로 인상 지워 주신다고 느낀 대로 행하면 된다는 조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갈 길을 들려주시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이렇게 심적으로 느끼는 직관이나 감정상의 경향을 의미 있게 여기는 이들이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한 심적 변화를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표현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직관적인 감정이 논리적인 판단과 상반되어도 그것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믿는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많은 신앙인들의 간증이나 우리 인생을 돌이켜 볼 때 이런 내적인 직관이 효력을 발휘하는 때가 존재한다고 봅니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보다 더 이런 내적인 직관이 더 뛰어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특별하게 허락해 주시는 직관을 활용하여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이런 내적 인도에 대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어떤 것일까요? 이 시점에서 우선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것은, 블레인 스미스가 내적 인도에 대해 역설한 점입니다. “성경에서 누군가가 내적인 인상(inner impression)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 즉 하나님의 절대 무류(無謬)한 표시나 당신의 뜻에 대한 유일한 지시로 간주한 예는 단 한 건도 없다.”("The Yes Anxiety")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인도를 허락해 주신 예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말씀하셨다”(spoke)라거나 성령께서 누군가 어떤 일을 하도록 “인도하셨다”(led)라는 선언이 동반됩니다. 그 어느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에게 말씀하셨는지를 밝혀주는 본문이라면 언제나 그 사람은 분명히 귀에 들리는(audible) 음성을 들었다는 점을 지적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선교의 길을 묻는 그대에게” 속에서 말씀 드린 대로 사도행전 속에서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신 인물들 중 네 사람이 주님 혹은 성령 혹은 주의 사자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음으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첫 번째는 빌립의 경우입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8:26)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바울의 경우입니다. 9:5 이하와 26:16-18을 참조해 보면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26:16)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세 번째의 경우는 베드로입니다. 10:9 이하를 참조해 보면 그는 환상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나중에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나바의 경우입니다. 사도행전 13:2을 보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라고 하셨습니다.
내적인 인상이나 직관이 불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령의 직접적인 음성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의 깊은 내적 감정과 의도를 읽어주는 창문으로 여긴다면 그 효용도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내적인 직관이라는 것이 우리의 잠재의식을 읽고 드러내는 감정적 표현이라면 그것은 깊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우리의 소원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식하는 내용을 가리키는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차원의 것이지 영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즉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밝히 드러내는 차원이라기보다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제시된 정보들을 종합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식하는 차원(perception)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내적 인식은 더 다양한 정보가 제시된다면 얼마든지 변경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지점에서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문제가 되는 사안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하게 되고 신뢰할만한 대상으로부터 의미 있는 정보를 더 얻게 될 뿐 아니라 환경적인 요인이 덧붙여지기도 해서 그 내적 인식이나 직관이 얼마든지 조정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이지요. 이런 시간적인 시험에도 불구하고 그 내적 직관이 불변한다면 그 직관은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적인 직관이나 심리적인 감성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다른 수단들과 함께 견주어 볼 때 더욱 빛을 발한다고 봅니다. 자신의 은사와 적성, 자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조언이나 공동체의 평가나 환경적인 요인들과 이런 내적인 인도를 비교해 보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요인들과 내적인 직관이 조응한다면 그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은 배가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요인들과 내적인 인도가 서로 상충한다면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진로를 선택하거나 결혼 상대를 선택할 때 마음에 온전한 평화 대신 어떤 의혹이나 불안감이 자리 잡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표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완전한 평화가 내 맘에 깃든다"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선 이렇게 주장하는 성서적 근거가 무엇 일지부터가 궁금합니다. 혹시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이사야 26:3)라는 말씀을 떠올릴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그 마음을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직관적으로 파악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씀의 문맥은 그 사람이 바로 “영원한 반석 되신 주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는 자”(사26:3하, 4)라고 분명히 일러주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심리적인 감흥으로 직관이 생겨 어떠한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영원한(everlasting) 반석 되심을 영원히(forever) 신뢰하는 늘 한결같은 마음(steadfast mind)을 가진 사람(새번역 참조)입니다. 내적인 감정이나 직관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한 하나님을 영원토록 신뢰하는 견고한 믿음이라는 차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 신뢰를 품고 실행해가는 사람의 마음을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완전한 평화가 내 맘에 깃든다"라고 언급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 혹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로새서 3:15)라는 말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너희”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직관적으로 파악한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씀의 문맥은 그 “너희”가 바로,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이라는 구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채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 성도들”(3:11, 12, 15)임을 영광스럽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 속에서 평강을 현시하고 누릴 뿐 아니라 이러한 복에 대해 감사하는 자가 되는 게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감정이나 직관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받는 성도들의 한 몸 됨이라는 차원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을 받아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해 주시는 평강은 일시적으로 우리 마음을 요동치는 감정이나 직관의 차원이 아니라 반석 같이 믿음직한 믿음의 대상을 한결같이 신뢰하는 인격과 삶에 부어지는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차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평강의 기원은 그리스도시오 그 평강의 열매는 공동체가 누리는 샬롬입니다. 개인적으로 적용되는 평강의 경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전에 누릴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믿음으로 순종해서 나아갈 때 당신께서 허락해주시는 심적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리적 상태를 강압적으로 제압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은 현존하는 두려움을 초월하는 평강입니다. 사실상 어떤 중대한 선택에 직면하게 되면 우선 어느 정도의 의혹과 불안감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성정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그 선택에 대한 결정을 하기에 앞서 온전한 평강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그러한 불안한 상황 속에서 그 감정을 영원한 반석 되신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지각을 초월하는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이사야 26:3-4, 빌립보서 4:6,7 참조). 이런 우리 마음의 역동적인 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중대한 인생의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영원히 신뢰할만한 우리 주님만을 의지함으로 지혜롭고 담대하게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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