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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양서 읽기: 성경 읽기는 주식이고 독서는 간식이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6.

양서 읽기: 성경 읽기는 주식이고 독서는 간식이다?

지난 세월 동안 제가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었던 것은 성경 묵상과 독서였습니다. 체계적으로 읽거나 공부하거나 암송한 성경 본문이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 제 것으로 소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파악하지 못했던 본문의 면모가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하는 과정을 통해 환히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묵상하지 않거나 묵상되지 않은 성경 본문은 쉽게 뇌리에서 사라져 버려 실제의 삶 속에서 적용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관련 책자를 읽는 중에 성경 묵상이 다시 시작되거나 더 심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연관된 참고 서적이 성경 본문을 읽을 때 파악하지 못했던 측면을 일깨워주거나 심화시켜준 경우이지요. 이렇듯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성경을 읽으며 성령의 조명을 받는 것과 더불어 좋은 성경 교사들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어떤 글이든 제대로 그 의미를 파악해서 읽으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언급한 M. T. Brauch라는 성서학자가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다름 아닌 그 글의 성격, 목적 및 그 글이 기록된 상황 혹은 콘텍스트입니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도 이 세 가지가 필요할 것입니다. 성경의 성격 및 목적에 대해서는 디모데후서 3:15-17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영감으로 계시된 것이므로 신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게 성경의 두드러진 특성입니다.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도록 하는 게 성경의 기록 목적이지요.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어가더라도 특정 본문을 잘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각 성경 구절들이 기록된 상황이나 콘텍스트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성경에 통합된 66권의 책들이 각각 그 저자나 그 기록된 시기와 장르와 상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양한 측면들을 고려하여 읽지 않으면 각 책의 특정 본문들의 진의를 곡해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그것들의 의미를 해석하는 단계에서 역사적이고도 문화적으로 조건 지워진 가르침이나 교훈과, 문화와 역사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가르침이나 교훈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합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어떤 특정 상황에서만 통하는 가르침이나 교훈을 보편적으로 적용해야 할 원리로 오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신학자들과 성경 교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복수의 좋은 교사들("사도들"-사도행전 2:42)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J. I. 패커가 언급한 대로 성경 각 권에 정통할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꿰뚫는 통합된 시각으로 총체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잘 전달해 줄 수 있는 신학자나 교사가 절실합니다.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좋은 교사를 만나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신앙 서적을 통해 그 교사들을 만나 배우는 게 긴요합니다. 언젠가 제가 마가복음 7장을 읽는 중에 당면한 문제는 좋은 교사의 도움이 절실한 예가 됩니다. 24절 이후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참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그 전후 문맥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개로 취급하시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도울 자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 말씀에 대한 강해를 한 팀 켈러의 설교를 통해 저는 성령의 조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를 개로 지명한 것은 모욕적인 언사라기보다는 하나의 비유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우선 "dogs"에 해당하는 용어를 사용하시지 않고 "puppies"를 가리키는 단어를 쓰시면서 당신의 선한 의도를 환기시키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진의를 켈러는 다음과 같이 풀어 썼습니다. “그대도 알다시피 가정에서 식사를 할 때 우선 아이들이 식탁에서 식사를 한 후에 애완동물들이 먹게 되어 있지 않소. 그 순서를 어기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요. 아이들이 먹기 전에 애완동물들이 식탁 음식을 먹어선 안 되지요.” 켈러는 예수님의 뜻을 더 밝히기 위해 마가복음보다 더 길게 이 상황을 묘사한 마태복음 본문 중의 한 구절에 주목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태복음 15:24) 이 구절을 통해 이스라엘에만 당신 사역의 초점을 맞춘 예수님의 독특한 측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성경의 모든 약속의 성취요, 진정한 선지자, 제사장 및 왕의 모습을 온전히 성취한 존재라는 것을 현시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에 주목하지 않으시고 즉각적으로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라고 언명하셨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은 모욕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당신의 의도를 분명히 담아 구속사적으로 진행될 구원의 순서를 계시하신 셈이었습니다. “좀 이해해 주세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는 순서라는 게 있어요. 난 먼저 이스라엘에게 다가가게 되어 있고 그 후에야 비로소 이방인들(모든 다른 족속들)에게로 갈 거예요.” 그런데 도전(challenge)과 제안(offer)이 결합된 예수님의 이 비유적 표현의 의미를 수로보니게 여인은 온전히 납득한 채 주님을 놀라게 하는 응답을 하지요. “예, 주님, 그렇지만 강아지들도 식탁에서 아이들이 먹다가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제 몫인 부스러기를 먹으려고 저도 식탁 아래 여기 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도 상처 받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채 구속사적인 계획에 따라 허락되는 풍성한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가장 겸허하고 정중한 자세로 받아 누린 이 여인이 그렇게 놀라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마가복음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켈러가 제게 가르쳐 준 것이 여럿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오해될만한 비유적 표현이 많이 있다는 점이나 동일한 상황을 묘사하는 다른 본문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는 것 뿐 아니라 예수님의 언행은 구속사적인 측면과 연관 지워 이해해야 할 때가 많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 있어 탁월한 신학자나 교사를 참고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고뇌하면서 성경을 파다 보면 그가 발견한 것들을 저도 누릴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비유의 성격이나 의미, 그리고 구속사적인 통합적 측면은 가르침 받지 않고서는 해득하기 힘든 영역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신학자나 탁월한 성경 교사들의 도움을 책을 통해 누리는 것이 성경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적할 것입니다. 아무 책이나 읽으면 안 된다고. 그렇습니다. 신뢰할만한 저자와 좋은 책을 골라 읽어야 합니다. 그 말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좋은 목사나 교사를 골라야 한다는 말과도 직결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성도들의 경우에 목사의 선택은 절대적입니다. 신앙 서적을 읽지 않고 목사의 설교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절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뢰할만한 인격을 갖추고 성경을 잘 아는 목사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출석할 교회를 선택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지만 교회를 선택한 후에도 여러 매체를 통해서 등장하는 목사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요즘에도 설교 중에 “성경 읽기는 주식이고 신앙 서적 읽기는 간식이다”라는 언급을 하는 목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독서와 담을 쌓고 사는 이들이 많은 이 시대에 신앙 서적 읽는 것을 가지고 가타부타할 목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왕왕 들었습니다. 성경 읽기가 주식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는 데 주력하라는 충언으로 이해합니다. 그런 기반 위에서 성령의 조명을 받아 당신의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신앙 서적 읽기를 간식으로 여기는 것은 조악하고 경솔한 비유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선 이 비유가 양서 읽기는 주식인 성경 말씀을 섭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 비유는 신앙 서적 읽기가 마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인 것처럼 취급합니다. 이미 논의한 것처럼 양서 읽기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에게 가르침 받은 것과 비교될 수 있는 신앙생활의 필수 요소라는 점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언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식과 간식이라는 은유의 맥락을 활용해 본다면 신앙 양서 읽기는 아마도 “반찬”의 역할에 더 가까울 듯합니다. 주식과 어우러져 흡수되면서 주식이 결여하고 있는 온갖 영양소를 갖춘 영양가 높은 반찬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식욕을 돋우어 주식을 더 맛있게 섭취할 수 있도록 하는 반찬이야말로 신앙 양서 읽기에 상응하는 적합한 비유가 아닐까 합니다. 자기가 설교하고 가르친 것만을 절대시 하면서 잘 분별하여 가르침이 건전한 목사의 설교를 듣거나 신앙 양서를 읽는 성도들을 백안시하는 목사나 교사는 멀리 하는 게 지혜입니다. 더구나 신학이 필요 없다거나 좋은 신앙 서적을 간식 따위로 여기고 공언하는 목사가 있다면 무시하는 게 상책입니다. “신학이 불필요하다는 신학”을 갖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 대우해 주면 될 일입니다. 신학은 누구나 갖고 있는 법입니다. 어떤 신학이냐가 문제가 되겠지요.

 

이 주제를 다루면서 주님께서 지난 세월 동안 제 영적인 성숙을 도모하는 데 활용해 주신 소중한 신학자들과 탁월한 성경 교사들을 기억이 나는 대로 기록해 두기 원합니다. 그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강영안, 거스리, 그루뎀, 그리피스, 그린, 김기석, 김용규, 놀, 뉴비긴, 라이트1, 라이트2, 라이트3, 라인하트, 롱맨3세, 루이스, 루카스, 리틀, 마샬, 마우, 마이어즈, 맥그래스, 맥도날드, 맥도웰, 머리, 모티어, 밀른, 바넷, 바즈, 볼프, 브라운, 브로취, 브루스, 브릿지즈, 사이어, 세이어즈, 송인규, 쉐이퍼, 스미스, 스타인, 스토트, 스트로벨, 아우구스티누스, 얀시, 웰즈, 윌라드, 윌콕, 윤종하, 정용섭, 지브스, 체스터턴, 카이저 주니어, 칼뱅, 칼힐티, 켈러, 콜린스, 크리프트, 키너, 키르케고르, 투르니에, 트리톤, 파스칼, 패커, 포울리슨, 피, 피터슨1, 피터슨2, 핸드릭슨, 험멜, 화이트, 힌클리 등(한글 발음의 자모 순으로 정리함).

 

신뢰할 수 있는 교사 두 세 사람에게 배우는 중에 그들이 소개해 주는 또 다른 신뢰할만한 교사들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들 또한 평생 다양한 방식을 통해 배우는 이들이었지요. 이렇게 배운 것들이 여전히 부족하지만, 오늘의 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조명과 이 교사들의 도움으로 제게 흘러오는 하나님의 생수를 퍼내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는 길이야말로 제가 살고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길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