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명령: 대위임령이 지상명령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두고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이 있습니다. 그 명령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이 마태복음 28:16-20이지만 마가복음 16:15, 누가복음 24:44-49, 요한복음 20:19-23, 사도행전 1:4-8에도 유사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문맥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지 40일 동안 제자들과 만나 교제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이 바로 이 명령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 당신께서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은 상태이니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 모든 족속에게 나아가 그들을 제자 삼으라는 게 그 핵심 내용입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유언의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의 사역을 위임하시면서 지속해 가라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해서 기독교권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명령을 The Great Commission(대위임령)이라고 부르면서 세계 선교의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세계 방방곡곡으로 나아가 복음 전하고 교회 개척하는 일에 헌신했는지 모릅니다.
이 대위임령의 내용이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우선 이 대위임령(imperative)은 위대한 예수님의 “직설적 선언”(indicative)에 근거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애굽기 20:2)라는 직설적 선언으로 당신이 어떠한 존재이신지 드러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이 대위임령을 발하시기 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라는 직설적 선언으로 당신이 어떠한 존재이신지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직설적 선언이 중요하다는 점은 명령을 받는 이의 입장에 서 보면 압니다. 누가 그러한 명령을 내렸느냐가 그 명령의 의도를 결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얽어매는 규례로 생각될 수 있는 십계명이 인간을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요 지침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 공포된 직설적 선언에 잘 나타나 있는 대로 애굽에서 수백 년 간 종노릇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 치열한 과정을 통해 구원해 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시 그들을 노예 상태에 처하도록 하시겠습니까? 도리어 그들을 구원하신 분께서 그들이 자유롭고도 풍요로운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마련해 두신 규례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대위임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다니면서 선교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당신의 직설적 선언이 온전히 풀어주셨습니다. 즉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주적인 구속 역사를 성취하신 후 우주의 주재자가 되신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함께 해 주시겠다는 선언과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초대에 응대함으로 우리가 담대하게 당신께서 인도하시는 바를 따라 나아가 제자 삼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요?
두 번째로, 이 대위임령은 우주의 주재자 되신 예수님, 증거할 능력을 허락해 주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진행해 가야 할 과업입니다.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나가거나 사역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나아가고 그 사역을 진행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선교 학자나 선교사가 언급한 대로 선교사가 제자 삼기 위해 어느 족속에게 나아갈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사역하고 계셨고 그때도 사역하고 계십니다. 자신의 평가 대신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순종하는 사역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가 있고 전할 곳이 있는 법입니다. 제자를 삼아야 할 때가 있고 삼아야 할 장소가 있는 법이지요. 복음 전하고 제자 삼기 이전에 선교지 대상자들의 영적 상태와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분별하기 위해 상당한 기간 동안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삶을 잘 관찰해야 할지 모릅니다. 지혜로운 분별력("a wise and discerning heart"-열왕기상 3:12)은 귀 기울이는 심령("a hearing heart"-열왕기상 3:9)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그 수효를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백성들을 두고 그들의 사정을 지혜롭게 판단할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 바로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이었습니다. 즉 지혜로운 마음이 바로 듣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선교 현장에서 그 수많은 선교 대상자들을 바라보면서 솔로몬처럼 하나님께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심령을 겸허하게 구하고 그것을 받아 누리며 실천하는 복음 전도자나 목회자나 선교사를 얼마나 많이 발견할 수 있을까요?
셋째로,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진행되어야 할 대위임령은 “모든 족속”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측면과 연관됩니다. 요즘과 같은 지구촌 시대에 인터넷과 위성 방송을 통해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소통하는 시대에 이 복음을 들고 더 나아갈 곳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아직도 나아가 제자 삼아야 할 곳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작년에 “Christianity Today”에 소개된 통계를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직도 2% 이하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만 존재하는 “Unreached people groups”가 무려 수 천 군데(7,096개나 된다는 통계도 있음-Joshua Project)나 존재하고, 그들 중 2% 이하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만 존재한 채 선교적인 노력이 없는 “Unengaged unreached people groups”가 무려 300군데나 존재하며, 그들 중 0.1% 이하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만 존재한 채 토착적인 기독교 운동이 전무한 “Frontier people groups”가 무려 전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로 힌두교권과 회교권이 이 Frontier people groups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통계는 따로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 중 1/4을 차지하는 이곳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의 숫자가 겨우 1%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통계를 고려해보자면 선교사들의 개별적인 소명을 일일이 평가하기는 힘들겠지만 분명히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선교사와 교회들의 수가 적지 않다는 점이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까?
넷째로, 대위임령의 본질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가라”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부수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좇을 이들(누가복음 9:23)을 세우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위임령 본문에 나타난 표현을 활용하자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는 것이 중추적인 과업입니다 (마태복음 28:20). 그러므로 이 일에 참여하는 모든 선교사와 교회는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선 현재 자신들이 주님께서 분부하신 총체적이고도 통전적인 뜻과 경륜을 잘 헤아려 순종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로 제자 삼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전 세계 교회가, 특히 우리나라 교회가 부르짖었던 제자 삼기와 교회 개척이라는 대위임령 과제가 이런 통전적이고도 통합적인 선교적 측면을 다 포함하고 있었을까요?
다섯 째로, 대위임령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더불어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을 일러줍니다. 마태복음 28장 문맥에 보면 이 대위임령을 받은 이들이 바로 “11명의 제자들”로, 사도행전1장에는 “사도들”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기초가 되는 이들이자 교회를 대표하는 이들입니다(요한계시록 21:14, 에베소서 2:20). 그들에게 이 위임령을 부여하셨다는 것은 이 위임령이 바로 교회 공동체에게 주신 명령이라는 점을 드러내어 줍니다. 비록 그들 중에 의심하는 자들도 있는 상태에서 이 위임령이 주어졌다는 점은 한편으로는 교회 공동체의 불완전한 측면을 시사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변화시켜 혹은 불완전한 그들을 활용하여 당신의 사역을 완성해 가시는 주님의 능력과 은혜가 드러나는 측면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고백했을 때 그를 베드로(‘반석’이라는 뜻)라고 칭하시면서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을 때의 상황도 이와 유사합니다. 당시 그에게 부여된 사도직이 바로 교회의 토대가 된다는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방금 주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가 돌연 예수님의 구속사적 경륜을 두고 항변하는 베드로가 기초라는 의미가 아니라 베드로가 대표하는 그 사도직이 바로 당신께서 세우실 교회의 토대라는 것을 뜻하셨을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는 불완전한 대표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얼마든지 당신의 구속의 경륜을 완성해 가실 수 있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이 대위임령을 수행해가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선교사나 교회 일꾼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만 잘 감당하면 됩니다. 자신이 직접 복음 전도하고 제자 양육하는 일을 맡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제자 삼는 사역 안에서 자기가 맡을 일에 충성하면 됩니다. 예컨대 선교지에서 운영되는 사업체에서 회계 업무를 주로 감당할 수도 있고 선교사 자녀 학교에서 교사로 혹은 기숙사 사감으로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선교사 자녀 학교에서 한국인 선교사나 선교 단체를 향해 이구동성으로 요구하는 것이 바로 한국인 교사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점이 큽니다. 그렇게도 많은 자국 선교사 자녀들을 선교사 자녀 학교로 보내면서도 그 학교에서 근무할 교사들을 파송하는 일을 등한히 하는 우리나라 교회의 무책임한 태도를 향해 항의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선교계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이런 역할을 감당하는 이를 선교사로 존중하고 그런 뜻을 품고 있는 이들을 양성해서 파송할 수 있는 선교적 시각과 안목마저도 부재하다는 것이 해외 선교사 파송 수 2위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선교계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거룩한 공회”(the universal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언제쯤에나 개교회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 된 우주적 교회를 상기하면서 각자가 영광스럽게 담당해야 할 선교적인 역할을 찾아 실행해 갈 수 있을까요?
끝으로, 대위임령은 우리나라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왕왕 주장되듯이 결코 “지상명령”이 아닙니다. 누가 이 “The Great Commission”(대위임령)이라는 표현을 지상명령(“The Greatest Commandment”)으로 번역하거나 회자되도록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우선 비록 'The Great Commission'이라는 표현이 중요한 의미를 띤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은 성경상의 용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느 선교 학자가 고안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The Greatest Commandment'는 성경에 명백하게 계시되어 있는 것으로서 The Great Commission과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Teacher, which is the greatest commandment in the Law?)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36절). 이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the first and greatest commandment)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7-40절) 즉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지상명령이지요. 주님에 의해 지상 명령이 확연하게 계시되어 있으니 아무리 중차대하게 보이는 대위임령이라도 이 지상 명령에 종속되거나 혹은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하고 실행되어야 합니다.
지난 세계 선교 역사,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면 이 대위임령이 지상 명령으로 그 의미의 전도(轉倒)가 이루어지면서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낳았는지 모릅니다. 이 대위임령이 마치 교회의 존재 목적이자 성도의 삶의 목적인 양 선전된 경우가 허다했으니까요. 이 대위임령이 지상명령으로 둔갑해서 강조되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명령을 위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과도하게 헌신하고 대가 지불했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마가복음 말씀(사본상의 증거로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지는 본문)이 지상 명령으로 소개되고 강조되면서 “제자를 삼으라”와는 다른 시각과 전략으로 국내와 국외에서 선교 활동이 진행됨으로써 그 가운데 이루어진 혼란과 혼선은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만민에게 복음 전하는 게 생애의 목표로 제시되었으니 시도 때도 없이 복음 전하는 게 성도라면 누구나 실행해야 할 성스러운 의무로 부각되었습니다. 심지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갈 때에도 복음 전할 기회를 찾아 실행하는 것이 성도의 거룩한 부담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았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실행하는 이는 칭송을 받기 마련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는 죄의식으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런 측면에 대해 계시된 말씀에 근거한 분명한 지침이 제시되는 경우가 희귀하니 수많은 성도들은 아직도 혼미한 상태를 거듭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위임령이 지상 명령으로 둔갑한 상황이 초래한 폐해는 아마도 KJV(흠정역 영어성경)가 에베소서 4:12의 “the saints" 다음에 첨가한 콤마(,)의 해악에 비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콤마로 인해 성도들의 몫인 ”봉사의 일“(the work of the service) 혹은 "사역의 일"(the work of ministry)을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에게 빼앗긴 셈입니다(https://hubil-centre.tistory.com/22?category=827394). 사실상 이 부분이 바로 번역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 폐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오랫동안 영어권 기독교계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다. 대위임령 사태가 수많은 성도들에게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 이상을 감당하기 위해 과도한 헌신과 지나친 대가 지불을 하는 피해를 야기했다면, KJV의 그 콤마(”the Wicked Comma“<사악한 콤마>로 불림)는 그와는 반대로 성도들이 신앙생활 속에서 감당해야 할 봉사의 책임에서 면제되게 하거나 그 봉사의 기회를 상실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즉 전자의 경우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벗어난 적극적이고도 과도한 헌신을 성도들에게 강요한 데 반해 후자의 경우는 계시된 성경 말씀을 왜곡시켜 성도들의 수동적이고도 빈약한 섬김을 조장했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쯤은 이런 오해와 곡해가 바로 잡힐 만도 한데 여전히 대위임령이 지상 명령으로, 복음 전도가 교회의 생존 목적으로 선전되거나 호도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요!
'문맥 묵상으로 풀어 쓰는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 바라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이다? (0) | 2019.08.07 |
---|---|
양서 읽기: 성경 읽기는 주식이고 독서는 간식이다? (2) | 2019.08.06 |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 앞에 벌벌 떠는 것이다? (0) | 2019.08.03 |
구원의 확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 (0) | 2019.08.02 |
금세와 내세: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다? (0) | 2019.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