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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我)-나를 알라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드러난 영적 각성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3. 15.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드러난 영적 각성

제인 오스틴(1775-1817)은 영국인이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좋아한다고 알려진 작가입니다.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 1811년),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1813년),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 1814년), “엠마”(Emma, 1816년), “노생거 사원”(Northanger Abbey, 1817년), “설득”(Persuasion, 1817년)이라는 6편의 장편으로 전 세계 수많은 세대의 문학인과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41세로 요절한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지만, 자신의 종속적인 가내의 지위와 당대의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진정성’으로 여성적 삶의 ‘실재’를 생생하게 그려 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조선정 교수). 버지니아 울프가 “진정성”(integrity)이라고 일컬은 “분노에 찌들지 않은 자유로운 감수성”을 품고, 자기가 믿는 보편적인 도덕 원리와 건전한 덕성의 실천을 작품 속 등장인물의 목소리나 전지적 작가 시점의 독백 속에 담아 설득력 있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오스틴의 모든 작품은 청춘 남녀들의 애정과 결혼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몇 가정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들이 작중 인물들의 대화나 자연스러운 상황 묘사를 통해, 19세기 영국의 시대상과 사회상 및 여성적 삶의 실재성을 비추어주는 거울 역할을 자연스럽게 감당하게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어떤 경솔한 작가나 독자가 이해하거나 예상한 대로, 경박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면서 대중의 호기심에 영합한 연애 소설이나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요란하게 비판한 고발 소설들이 아닙니다. 무려 200년이 넘는 동안 수많은 전 세계인들의 동감과 사랑을 자아낸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하지요. 각각의 작품 속에는 한탄이나 분노 대신 기지와 재치로 생생하게 묘사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가 역동적인 플롯 속에 융합되어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인간관계의 진실이 포착되고 인간 내부의 진면목이 드러나도록 전개해 가는 작가의 탁월한 스토리텔링과 창의적인 문체도 그 장구한 인기에 한몫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여섯 작품 중 가장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오만과 편견”을, 최대한 수용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저자와 동일한 마음으로” 읽어 보고자 합니다. (작품의 한글 번역문은 '민음사'의 것을 주로 인용함)

 

-“오만과 편견” 줄거리-

“오만과 편견”의 스토리를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베넷(Bennett) 씨 가족은 딸 다섯을 두고 런던에서 30마일 떨어진 롱번(Longbourn)이라는 지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귀는 다른 가족처럼 부유하지도 않지만, 아들이 없었으므로 있는 재산마저 베넷 씨 사후에 친족인 목사 콜린스(Collins)에게 물려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베넷 부인은 부유한 집 청년과 자기 딸들이 결혼할 기회를 예의 주시하고 있지요. 그러던 중에 빙리(Bingley)라는 잘 생긴 부자 청년이 런던에서 그 이웃 지역인 네더필드 파크(Netherfield Park)로 이사 오게 됩니다. 그는 곧바로 베넷 씨 장녀인 제인(Jane)에게 반하게 되고 그녀도 빙리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빙리와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던 다른 부자 청년인 다아시(Darcy)는 베넷 씨 차녀인 엘리자베스(Elizabeth)와 만났지만 처음에는 그녀의 외모를 접하고 냉대했다가 나중에 그녀의 진면목을 보고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자베스를 다시 만날 때마다 다아시는 그녀의 위트와 진솔한 대화 방식에 매력을 느끼면서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그녀는 오만하고 속물적이라고 느낀 다아시에 대한 첫인상 때문에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빙리가 제인과의 관계를 더 진전시키지 않은 채 런던으로 떠나 버린 상황에서, 제인은 그가 다아시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되어 실망에 빠집니다. 이런 와중에 엘리자베스는 위컴(Wickham)이라는 청년을 만나게 되어 그에게 끌리게 됩니다. 위컴은 그녀에게 자기와 다아시와의 관계를 설명해주면서 그에 대한 험담을 입에 올리다가, 다아시의 아버지가 자기에게 선사해주려고 했던 유산을 다아시가 무효화했다고 거짓말하기까지 합니다. 예상과는 달리 위컴은 얼마 되지 않아 결혼할 다른 여자와 함께 그곳을 떠나버리게 되어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베넷 씨 사후에 그의 땅을 물려받게 될 콜린스(Collins)는 오만하고 무례한 목사로서, 처음에는 엘리자베스에게 마음을 두고 청혼하지만 퇴짜를 맞고는, 그녀 대신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샬롯(Charlotte)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샬롯 집을 방문해서 지내던 중에, 그곳 근처에 살면서 콜린스를 후원하던 자기 이모 캐서린 부인(Lady Catherine de Bourgh)을 방문하러 온 다아시와 다시 만나게 되고 예기치 않게도 그의 청혼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가 빙리와 제인 사이를 갈라놓고, 위컴(Wickham)을 부당하게 대우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 청혼을 거절하지요. 그녀가 자기를 물리친 이유를 알게 된 다아시는 그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어, 자기가 빙리와 제인 사이를 갈라놓게 한 것은 제인이 빙리에게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 자기가 친구로서 개입한 것이었다고 해명하고, 위컴의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며 그는 믿을만한 자가 못 된다는 점을 명백한 사례를 들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아시의 진심이 담긴 그 편지를 통해, 위컴을 신뢰하면서도 다아시를 불신했던 자신의 어리석음과 편견을 깨달은 엘리자베스는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그는 이미 런던으로 되돌아가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엘리자베스가 자기 외삼촌과 외숙모인 가드너 부부(the Gardiners)와 함께 펨벌리(Pemberley)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중에 다아시 소유 영지를 통과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시점에 다아시와 다시 마주치게 되었고 상냥한 성품의 그의 여동생도 소개 받게 됩니다. 그곳에 있는 저택을 관리하는 여인에게서 그녀의 주인 다아시에 대한 한없는 칭찬을 듣게 된 엘리자베스는 다시 만난 다아시에게서 새로운 풍모와 변화된 인격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에 대해 자기가 품었던 첫인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는가를 다시금 깨닫고 후회하며 엘리자베스는 그에 대한 샘솟는 애정을 느끼게 되지요.

 

그런데 위컴이 16살밖에 되지 않은 엘리자베스의 막내 동생인 리디아(Lydia)와 사랑의 행각을 벌이다 달아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베넷 씨와 가드너 씨가 런던으로 가서 그 둘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정작 그들을 찾은 것은 다아시였습니다. 다아시가 그 둘을 수소문하여 발견했을 뿐 아니라, 위컴이 리디아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그에게 지참금도 주고 앞으로 일정 부분의 수익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는 사실을 엘리자베스가 전해 듣게 되지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다아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지만 어떻게 자기 마음을 전달할지 갈등하게 됩니다.

 

그 새에 빙리가 네더필드 파크로 돌아와 제인에게 구애하기 시작하게 되었으나, 다아시의 이모이자 콜린스의 후견인인 캐서린 부인이 갑자기 베넷 씨 집에 나타나 엘리자베스와 직면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자기 딸과 다아시가 결혼하기로 약정되어 있으니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결코 맺어질 수 없으므로 관계를 끝내라고 종용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자기 뜻에 반하여 캐서린 부인의 뜻에 굴할 수 없다는 소신을 명백하게 밝힌 엘리자베스의 기개에 놀란 캐서린 부인은 경악하며 돌아갔지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다아시는 도리어 자기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진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아시가 다시 베넷 씨 집으로 와서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게 되고 그녀도 그 청혼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두 쌍은 한 날에 결혼합니다.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

“오만과 편견”에서 제인 오스틴이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것을 접하면서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매력적이고도 독창적인 문체와 생생한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방식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천재적 면모입니다. 더구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근원적인 오만과 욕망과 기대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편견과 선입견과 아집이 그토록 다양한 상황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접하며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 소설의 제목은 다아시가 소설 전반부에서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취한 오만한 태도와, 그나 다른 사람에 대한 피상적인 관찰과 정보로 그들을 판단하고 단정하는 엘리자베스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에 대한 다아시의 일반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교양 있는 여성”에 대한 묘사를 들 수 있습니다. 화판에다 그림 그릴 줄 알고 수를 놓을 줄 아는 것을 여성의 교양의 조건으로 지적하는 빙리의 말에 그의 여동생이 반박하면서 음악, 노래, 춤, 외국어 구사 실력도 그 조건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하자, 다아시는 한술 더 떠서 그것들에다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통해 지성을 계발함으로써 더 실속 있는 내면(something more substantial, in the improvement of her mind by extensive reading)을 갖추어야 한다고 덧붙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충돌이 불을 튀기지요. 엘리자베스는 그런 조건을 갖춘 여성을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다고 지적하면서 그 교양 있는 여성의 척도가 너무 엄중하다며 항변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아시는 자기 가문에서나 접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춘 여성들 6명 정도 외에는 모든 여성을 교양 없는 여인들로 여기는 오만을 뽐내고 있지요.

 

이런 다아시가 그 오만한 태도로부터 구원 받은 것은 엘리자베스와의 만남 때문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에 대해 하신 말씀, 하나 그른 것이 있었던가요? 당신의 비난들은 근거 없고 잘못된 전제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 당시 당신에 대한 제 행동은 무슨 꾸지람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건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합니다. (...) 그 날 저녁 내내 내가 한 말, 태도, 표현을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죽, 그리고 지금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롭습니다. 당신의 비난은 어떻고요. 너무나 잘 들어맞아서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좀 더 신사다운 태도를 보이셨더라면’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이 얼마나 저를 괴롭혔는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아마 상상조차 못 하셨을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시인할 정도로 사리 분별이 생긴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지만요.” (3부 16장)

 

다아시가 변화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백은 나올 수가 없었겠지요. 비록 엘리자베스의 지적이 편견에 찬 것이긴 했지만 자기 자신의 언행을 돌이켜 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오만한 언행을 일삼은 자신을 돌아보며 그는 사리 분별이 생기기 시작하여 결정적인 성품의 회심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경우는 처음 다아시나 위컴을 만났을 때 그들 각각에 대해 편견을 품게 되었습니다. 다아시는 오만하고 다른 사람 무시하는 인간으로 낙인을 찍었지만, 위컴은 점잖고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는 사람으로 이해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러한 관찰과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은 채 그들과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그러던 중 다아시에게 직접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고 그에게서 장문의 편지를 받은 후부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여 급기야 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다아시를 생각하든 위컴을 생각하든 자기가 눈이 멀었고 편파적이었으며 편견에 가득 차고 어리석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사랑에 빠져 있었다 해도 이보다 더 기막히게 눈이 멀 수는 없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허영심이었어.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은 나를 무시해서 기분이 나빴고, 다른 한 사람은 특별한 호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난 두 사람에 관해서는 선입관과 무지를 따르고 이성을 쫓아낸 거야. 지금 이 순간까지 난 나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거야. (Till this moment I never knew myself.)” (2부 13장)

 

처음 그들을 각각 만났을 때 자기를 대해 주던 태도에 근거하여 그들을 판단한 후 그 판단을 근거로 계속 그들을 재단해 가는 식으로 자신의 편견을 키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을 활용하지 않고 단지 감성적인 반응에만 목을 맨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결함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성을 되찾아 그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하자, 위컴에게도 자신이 다아시를 더욱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며 일러 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제가 자주 만나니까 [다아시의 태도가] 나아졌다고 한 것은, 그분의 마음이나 태도 자체가 나아졌다는 말이 아니라 그분을 더 잘 알게 되니까 그분의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었어요.” (2부 18장)

 

이것이 다가 아니라 나중에는 존경과 존중의 마음이 들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그토록 무례하고 편견에 찬 안목으로 그를 냉대했던 자기를 여전히 사랑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존경과 존중보다도 더욱더 그녀 마음속에 간과할 수 없는 호감의 동기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감사였다. 한때 자기를 사랑했다는 데 대한 것뿐 아니라, 그를 거절할 때 토라져서 톡톡 쏘아대던 무례함이라든가 그러면서 퍼부은 모든 부당한 비난들을 용서해 줄 정도로 자기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데 대한 감사였다. (...)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 아니라 감사한 마음까지 생겼다. 사랑, 그것도 열렬한 사랑 때문임이 분명했다. 그런 변화에서 그녀는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다 해도 불쾌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고 왠지 고무되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를 존경했고, 높이 평가했으며, 그에게 감사했고, 그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랐다.” (3부 2장)

 

그리고 나중에 이모로부터 곤경에 처한 리디아를 구해 준 이가 바로 다아시였다는 서신을 받은 후 엘리자베스는 그에 대해 자신이 저지른 언행에 대해 회개하는 심정에 도달하기까지 합니다.

 

“보답할 수가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음을 안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It was painful, exceedingly painful, to know that they were under obligations to a person who could never receive a return.) 리디아를 되찾고 불명예를 씻은 것 등 모든 것이 그의 덕분이었다. 아! 그녀는 자기가 지금까지 품고 키웠던 온갖 배은망덕한 감정(every ungracious sensation), 그를 향해 쏘아댔던 온갖 건방진 말들(every saucy speech)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는지(how heartily did she grieve over)! 그녀 자신은 콧대가 꺾였으나, 그가 자랑스러웠다.(For herself she was humbled; but she was proud of him.) 동정심과 명예를 위해(in a cause of compassion and honour) 그가 스스로를 이겨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3부 10장)

 

그렇지만 위컴에 대해서는 다아시에 대한 이해와는 반대 방향으로 흐르게 되지요. 나중에 엘리자베스의 막내 여동생인 리디아와 눈이 맞아 도망쳐서 결혼하게 된 위컴이 결혼식 올리기 위해 돌아왔을 때 그의 뻔뻔함에 치를 떠는 단계까지 가게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뻔뻔스러울 줄은 전에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후안무치한 인간의 후안무치에는 앞으로 한도를 두지 않기로 내심 결심하였다(resolving within herself to draw no limits in future to the impudence of an impudent man).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고, 제인도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정작 남들을 당혹스럽게 한 장본인들의 뺨에서는 색채의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3부 9장)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다아시의 오만과 엘리자베스의 편견을 접하면서 우리 자신도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오스틴은 베넷 씨의 셋째 딸인 메리의 입을 통해 ‘오만’에 대한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오만(pride)은, 내가 보기에는 가장 흔한 결함이야.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바로 미루어 볼 때,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기 만족감(a feeling of self-complacency)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vanity)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1부 5장)

 

오만은 인간의 본성상 아주 일반적인 것이라고 오스틴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에 신경 쓰는 허영심이 없더라도 오만한 자세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함으로써, 오만이 자기 과시하는 경향보다 더 근원적인 본성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위 인용문에서 메리가 밝힌 대로 오만이 자신의 긍정적인 자질에 대해 품고 있는 자기 만족감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자긍심(self-respect)을 그릇되었다고 보는 이가 누구이겠습니까? 이 자긍심이 도가 지나쳐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이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오만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자긍심과 오만을 구분 짓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 혹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닐까 합니다. 자기 자질을 대할 때처럼 다른 사람의 자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자기 자질과 비교하여 폄하하는 자세가 바로 오만의 구체적인 행태가 되겠지요.

 

성서에서 제시하는 죄의 본질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자질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만큼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인간의 무례하고 무도한 자세가 바로 죄인 것이지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란 소설 제목의 죄라는 러시아어 단어가 가리키는 문자적 의미처럼, 인간의 분수를 깨닫지 못하고 그 ‘경계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죄입니다. 이 근본적인 죄로부터 인간의 모든 작위, 부작위 죄들이 다 비롯됩니다. 신, 즉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가치도 존중하지 않게 되고, 자신을 절대화하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착취하거나 급기야 죽이게도 되지요.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런 인간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초인으로 보고 전당포 노파 같은 이는 사회 변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희생되고 사라져도 괜찮은 존재로 보는 안목을 가진 인간 말입니다.

 

이런 오만한 인간의 경향을 어떻게 교정할 수 있을까요? 다아시가 언젠가 밝힌 바에 의하면, “진정으로 뛰어난 지성”(a real superiority of mind)이 존재한다면 이 오만(pride)이 통제될 수 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만을 다스릴 수 있다고 장담했던 다아시도 나중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요.

 

다아시: “제가 믿기에는 말이죠. 모든 본성에는 어떤 특별한 악, 즉 자연적인 결함을 지향하는 경향성이 있어요. 심지어는 가장 훌륭한 교육조차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죠.”

​엘리자베스: “그런데 당신의 결함은 모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죠.”

다아시: “그리고 당신 것은 그들을 의도적으로 오해하는 것이고요.”라고 웃으며 그는 대답했다.

(Darcy: “There is, I believe, in every disposition a tendency to some particular evil--a natural defect, which not even the best education can overcome.”

Elizabeth: "And your defect is to hate everybody.“

Darcy: "And yours," he replied with a smile, "is willfully to misunderstand them."​)

(1부 11장)

 

즉 인간 각자가 지니고 있는 기질이나 천성에는 어떤 특정한 악을 지향하는 경향성, 즉 자연적인 결함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최고의 교육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인간관이었던 셈입니다. 이 자연적인 결함은 대개 지나친 자존감인 오만이나 자기중심적인 시각으로서 모든 사람을 재단하는 편견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 오스틴의 시각으로 보이는 대목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이런 경향성이 어느 정도씩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겠으나, 이 작품 속에서는 특히 다아시가 전자를 엘리자베스가 후자를 확연하게 드러낸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지요.

 

-자녀교육의 영향력-

다아시가 이렇게 오만한 태도를 갖게 된 데는 자녀교육의 영향이 지대했던 것으로, 오스틴은 다아시 자신의 입을 빌어 지적하고 있습니다.

 

“평생토록 저는 원칙에서는 아닐지라도 현실에서는 이기적인 인간이었어요.(I have been a selfish being all my life, in practice, though not in principle.) 어린 시절에 옳은 것이 무엇이라는 가르침은 받았지만, 제 성깔을 고치라는 가르침은 못 받았어요. (As a child I was taught what was right, but I was not taught to correct my temper.) 훌륭한 원칙들이 주어졌지만 오만과 자만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따르도록 방치되었지요. (I was given good principles, but left to follow them in pride and conceit.) 불행하게도 외아들이었던 까닭에 (여러 해 동안 하나뿐인 자식이기도 했고요.), 부모님들이 저를 버르장머리 없는 애로 키우셨던 것이지요. (Unfortunately an only son <for many years an only child>, I was spoilt by my parents,) 그분들은 참 좋으신 분들이셨지만(특히 제 부친은 더할 나위 없이 자비롭고도 따뜻한 마음씨를 가지셨는데), 제가 이기적이고 거만하도록 내버려 두고 부추기고 심지어는 가르치기까지 하셨습니다. 제 자신의 가문 혈족 외에는 아랑곳하지 않도록, 세상 사람들은 죄다 천하게 생각하도록, 적어도 그들의 생각과 가치가 제 것에 비해서 비천하다고 생각하길 원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그대 엘리자베스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그랬을 것입니다! 여덟 살 때부터 스물여덟 살에 이르기까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진 빚을 어찌 다 말할까요! 당신은 저에게, 처음에는 정말이지 가혹했지만 다시없이 유익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You taught me a lesson, hard indeed at first, but most advantageous.) 당신으로 하여, 저는 겸손해졌습니다.” (3부 16장)

 

즉 어릴 때부터 어떤 것이 옳은지에 대한 원리를 가르침 받긴 했지만, 그것을 어떤 성품과 자세로 실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교육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전자만큼이나 후자도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행동 혹은 인식과 실행 간의 균형을 배우지 못해 무려 20년 동안이나 방황해왔던 것이지요. 더구나 그의 부모는 그 원리의 핵심을 오해한 채 다아시가 이기적이고 거만하도록 북돋워주거나 가르쳤을 뿐 아니라 자기 가문 외의 세상 모든 사람들을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하도록 다아시를 가르쳤습니다. 부모의 자리가 자녀들의 교육에 있어 얼마나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깊이 묵상하게 하는 대목이지요.

 

-‘오만과 편견’과 영적 각성-

“오스틴은 영국 성공회 교구 목사의 딸이었지만, 소설에는 종교나 영성에 대한 언급 또한 거의 없다. 하지만 19세기 문화와 오스틴의 생각을 바탕으로 한 소설 속 인물들은, 교회와 도덕성, 뿌리박힌 영성을 보여 주며 말하고 행동한다. 소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하기는 하지만 오스틴의 기독교적 믿음과 교회 양육에 대한 자세한 관점들이 여기저기에 아주 잠깐씩 나온다. 신념, 구원, 비교, 위선, 양심 같은 주제들을 성경적 관찰과 비교를 통해 더욱 아름답게 기술하고 있다.”

 

미국 멀트노머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 스테파니 울지의 지적입니다. 오스틴의 작품 속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명시적으로 토의하거나 직접적으로 다루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더구나 Bible, biblical, Scripture, 혹은 Christianity(기독교)라는 단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Christian이라는 단어는 ‘오만과 편견’에서는 "as a Christian"과 "Christian forgiveness"이라는 표현 속에만 등장할 뿐이고, 다른 작품 속에서도 두세 번씩만 등장하는 게 일반적인데, 그것도 주로 "Christian name(s)"(세례명 혹은 성을 뺀 이름)이라는 표현 속에만 나타날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의도적이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와 연관된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그 작품 속에는 기독교적인 영성과 분위기가 넘칩니다.

 

제게는 마치 “반지의 제왕”의 작가인 J. R. R. 톨킨이 하나님이나 기독교를 연상시키는 어떠한 용어도 사용하지 않은 채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관통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오스틴의 작품들이 한결같이 교리 부분이 생략된 신약의 사도 바울 서신서의 소설화 작업으로 비치기까지 합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서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예컨대, 신약 갈라디아서 5:22-23)를 철저하게 규명하여 펼쳐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불신과 교만의 상태에 처해 있다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점진적으로 성품과 삶이 변화되는 “성화”(聖化)의 과정을 다룬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명목상이나마 대부분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스틴은 설교사처럼 퉁명스럽게 진정한 위계의 개념을 설파하지 않는다. 그녀는 위대한 소설가 특유의 기예와 유머로 우리가 진정한 위계에 공감하고 그 반대의 위계에 혐오감을 느끼도록 이끈다. 그녀는 자신이 우선적이라고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서 나머지를 읽기 위해 저녁을 후딱 먹어치울 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재미있는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 그 이유를 보여준다. <맨스필드 파크>를 읽고 나면 우리는 오스틴이 우리를 끌어냈던 현실 세계로 다시 들어가 그녀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대로 사람들에게 반응하고, 탐욕이나 오만이나 자만을 간파하여 거기서 물러서고, 우리 자신과 남들 안에 있는 선에 이끌리게 된다.”

 

오스틴과 그녀의 작품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지적입니다. 비록 그녀가 작품들을 통해 기독교적인 덕성과 성품을 선양하고 있지만, 결코 우리에게 설교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가 작중 인물들의 생생한 대화와 역동적인 플롯의 전개에 몰입해 있는 동안, 심금을 울리는 대화나 장면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인격적 결함을 간파하게 되고 선한 덕성으로 변화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그녀 작품의 면모는 소설이란 장르에 대한 자신의 지론에 “순도 높은 진정성”(버지니아 울프)을 기하려는 오스틴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노생거 사원”에서 오스틴은 소설이란 아래와 같다고 밝히고 있으니까요.

 

“가장 위대한 인간 정신력이 발휘되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완벽한 지식, 인간 본성의 다양한 모습에 대한 가장 행복한 묘사 및 가장 생생하게 발산되는 재치와 유머가 최고로 정선된 언어로 세상에 전달되는 작품”(some work in which the greatest powers of the mind are displayed, in which the most thorough knowledge of human nature, the happiest delineation of its varieties, the liveliest effusions of wit and humour, are conveyed to the world in the best-chosen language.)(“노생거 사원”, 5장)

 

19세기 영국에 사는 몇 가정들 속에서 일어나는 가정사를 다루면서 오스틴이 “우리 삶을 비평하고, 그럼으로써 그 삶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고 알랭 드 보통이 평가한 것은, 자신의 모든 작품 속에서 오스틴이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기만"(self-deception)의 요소를 폭로하면서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묘사하고 있다고 C. S. 루이스가 독해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C. S. 루이스는 이 과정을 “자기기만 탈피”(undeception) 혹은 “영적 각성”(awakening)이라는 용어를 들어 설명합니다. 즉 “오만과 편견”을 비롯하여 “이성과 감성”, “엠마”, “노생거 사원” 같은 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그 소설 속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들의 성품 속에 내재된 심각한 자기기만적 요소를 간파하게 되면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재해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인공 중 어떤 이는 이 단계에서 머물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자기 인식”(self-knowledge)에 도달하게 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앞에서 이미 인용한 것처럼 그녀는, “지금 이 순간까지 난 나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거야.”(Till this moment I never knew myself.)라는 고백을 하게 되지요. 각 작품의 구조를 고려한다면 이 ‘자기기만 탈피’라는 요소야말로 그 스토리들의 중심축이자 분수령이 된다는 점을 루이스는 역설합니다.

 

이 네 작품과는 달리 다른 두 작품(“맨스필드 파크”와 “설득”)에서는 주인공들이 이런 자기기만하는 실수를 범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작품의 플롯이 전개되는 세상 속에서 이런 자기기만이 발생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지요. 위 네 작품 속의 여주인공들에 비하면, 이 두 작품의 여주인공들(패니<Fanny>와 앤<Anne>)은 사회적인 교제나 물리적 거주 환경 면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이었기에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들은 홀로 고독이라는 고통을 받고 있는 세상 속에서 자기기만의 사례들을 관찰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지만, 그 자기기만의 피해자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어둠의 삶을 지속하게 되거나 새로운 자기 인식에 도달하게 되지요.

 

돈과 사회적 지위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 변수가 된 것은 19세기 영국이나 현대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스틴의 작품이 뿜어내는 고귀한 사랑과 관용의 기운은, 자기기만 속에 빠진 심령을 일깨우고 상처 받은 마음을 위무하며 손상당한 사회의 기조를 바로 잡는 기수 역할을 톡톡히 담당할 것입니다. 물질적 부와 사회적 지위를 우상으로 삼은 사회가 거칠 것 없이 질주하고 있지만, 자신의 내적 기품과 타인에 대한 인격적 덕성을 선양하고 그것들이 일상생활 속에 실행되는 것을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결국엔 득세하고 승리할 것을 오스틴은 일깨워줍니다. 마치 자선 행위(charity)가 설득력 있는 행동을 존중하는 “행동의 시”(the poetry of conduct)로 인식되듯이, 오스틴이 높이 치켜든 도덕적 원리가 “행실의 기본 원리”(the grammar of conduct)가 된다고 일컬은 루이스의 안목에 한 표 보탭니다.

 

-제인 오스틴의 기도-

제인 오스틴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생각됩니다. 우선은 그녀의 아버지 뿐 아니라 두 오빠와 네 명의 사촌이 모두 목회자였습니다. 게다가 그녀 오빠인 헨리(Henry)가 남긴 그녀에 대한 개인 이력 소개문에서, 그녀를 “철저하게 종교적이며 독실하다”(thoroughly religious and devout)라고 묘사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 대한 보다 많은 자료를 섭렵한 후에 좀 더 세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늘 저녁 시간마다 실행한 것으로 보이는 기도의 내용을 접하고 나서는 그녀의 신앙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기회가 되는 대로 그녀의 저녁 기도문 세 편을 읽어 보시길 권해 드리면서, 아래에 그 기도문 일부를 소개해 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매일 밤이 올 때마다, 우리가 지난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지난 하루 동안 무엇이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을 사로잡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악으로부터 얼마나 해방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소서. 주님께 대해 불손하게 생각한 적이 있는가? 주님의 율법을 어긴 적이 있는가? 이미 알려진 어떤 의무를 소홀히 한 적이 있는가? 혹 어느 누군가에게 의도적으로 고통을 준 적이 있는가? 우리가 우리 마음에게 이러한 질문들을 할 마음이 들게 하소서, 오! 하나님, 그리고 교만이나 허영에서 오는 자기기만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소서.”

(May we now, and on each return of night, consider how the past day has been spent by us, what have been our prevailing thoughts, words, and actions during it, and how far we can acquit ourselves of evil. Have we thought irreverently of thee, have we disobeyed thy commandments, have we neglected any known duty, or willingly given pain to any human being? Incline us to ask our hearts these questions. Oh! God, and save us from deceiving ourselves by pride or vanity.

 

이 기도문의 앞부분 중, “지난 하루 동안 무엇이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을 사로잡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하소서”라는 부분을 읽으며 신약 성경 중 요한복음 17:17이 기억났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 내용 중에 나오는 한 부분입니다. 제자들의 심령이 항상 진리에 사로 잡혀 있기를 위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의 거룩함을 결정짓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 어디에 살고 있느냐,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오로지 무엇이 우리 마음을 붙잡고 있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인, “교만이나 허영에서 오는 자기기만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소서”를 읽으며 오스틴의 각 작품 속에서 항상 발견된다고 루이스가 언급한 “자기기만 탈피”(“undeception”) 혹은 “영적 각성”(“awakening”)의 요소가 기억났습니다. 자기 과대평가하는 오만과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허영심은 자기기만을 낳고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합니다. 이러한 현실에 눈 뜨고 각성하여 새로운 심령으로 거듭 나야 합니다. 자신의 됨됨이를 하나님의 안목으로 관찰하면서 자신의 인격과 은사를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위한 도구로 활용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아주 가는 붓으로 작업을 하여 많은 노동을 한 뒤에도 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아주 작은(5센티미터 폭의) 상아”(the little bit <two inches wide> of ivory on which I work with so fine a brush, as produces little effect after much labour)라는 겸손한 표현으로 오스틴은 자신의 문학 세계를 묘사했지만, 그녀의 소설 작품들은 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깨우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도구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녀에게 심심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