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我)-나를 알라

'수선화'가 그대를 부를 때 하늘이 열린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4. 26.

'수선화'가 그대를 부를 때 하늘이 열린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느라 홀로 있는 시간이 어느 때보다 많아졌습니다. 일부러 찾은 고독의 시간이 아니라, 부득이한 사회 공동체의 사정으로 마련된 고독의 시간이라 그런지 외롭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아니었다면 적어도 일주에 몇 번씩은 벗들과 만나 교유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지만, 지난 두 달 동안은 집에서만 지내야 했으니까요. 외로움을 진하게 느끼고 있던 제 마음을 두드린 시 한 편이 있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였습니다.

 

우선 그 시 속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라는 부분에 특히 눈이 많이 갔습니다. 제가 쓴다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대신에 “사람이니까 외로운 거야”라고 표현할 것 같았지만, 3행이 바로 그 의미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외로우니까 사람이야/사람이니까 외로운 거지”의 의미가 되겠지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외로움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이렇게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외롭다고 하소연하는 친구에게 인간이란 본래 외로운 존재라는 점을 수용하라고 권고하던 정 시인도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외롭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혼자 길을 가다가 문득 엄습해오는 외로움 때문에 걸음을 멈출 때도 있습니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거나 차를 들거나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더 외로워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결혼도 외로운 일이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일 또한 외로운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한테서 가장 많이 상처를 받듯이 가장 가까운 이들한테서 가장 큰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

 

하나님께서 독처하는 게 좋지 않다고 여기셔서 마련해주신 결혼도 외로운 일이 된다는 점에 동감이 되시나요? “가장 가까운 이들”이 아내와 자식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지만, 너무 가까운 존재라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이들한테서 가장 큰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는 시인의 고백에 저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군요. 그들도 저처럼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어 자기 외로움에 사로잡히게 될 때가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그들로 인해 제가 느끼는 외로움은 제게 있어 가장 큰 외로움이 되겠지요.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이 왜 “수선화에게”일까요? 이 세상에 꽃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게 아닐 텐데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 시인은 그 많은 꽃들 중에 왜 하필 “수선화에게” 이런 시 한 자락을 읊어주고 있을까요? 김용규 선생은 이 시 제목이 수선화와 연관된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수선화를 영어로 narcissu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자기 사랑’ 혹은 ‘자기도취증’이라는 의미를 띤 narcissism과 연관된 것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나르키소스(Narkissos-고전 그리스어)라는 인명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 이름의 주인공은 물에 비친 아름다운 자기 모습에 반해 물에 빠져 죽었다는 미모의 청년입니다. 그가 죽은 그 자리에 피어난 노란 꽃이 바로 이 수선화였던 것이지요. 정 시인은 이 수선화에게 이 시를 건넵니다. 수선화가 물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외로움 때문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외로워서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수선화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라고 일러준 것이지요.

 

외로움은 이처럼 인간뿐 아니라 새들, 꽃들, 산 그림자, 종소리, 심지어 하느님에게까지도 적용되는 우주적이고도 원초적인 엄혹한 감성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임을 명심하고, 괜히 오지도 않을 전화를 기다리지 말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걷고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 가는 게 인생의 도리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시가 선양하는 삶의 자세는, 최초의 불경인 “숫타니파타”(‘70개의 경을 모아 놓은 책’이라는 의미)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213번 게송(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이 기리는 정신과 흡사하지 않을까요?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라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렇지만 “수선화에게”의 진면목은, 원초적인 외로움을 홀로 극복하면서 어떠한 외부적 환경에도 굴하거나 유혹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의 길을 활보해 가는 정진의 삶을 존중하면서도, 그러한 삶을 초월하는 데 있습니다. 나 홀로 정진해 가야 하는 근원적인 임무의 차원 외에, 나를 바라보는 외로운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는 의무의 차원도 엄존함을 일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검은 색 가슴을 가진 도요새가 갈대숲에 앉아 나를 보고 있다는 7행입니다. 도요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은 외로움 때문이겠지만(9행), 그 외로운 도요새가 수선화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수선화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선은 수선화 자신이 외로움에 사로잡혀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이라도 보려고 애쓰고 있는 가엾은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어두운 갈대숲에 앉아 있는 도요새, 그것도 갈대 색깔과 비슷하거나 가슴이 검어 있는지 없는지 구분도 되지 않는 도요새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수선화가 무슨 재간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도요새를 영어로 snipe라고 합니다. 이 영어 단어를 보면 바로 떠오르는 단어가 있지 않습니까? 예, sniper(저격수)라는 단어이지요. 대개 몸집이 작고 빠르게 날며 움직임이 불규칙할 뿐 아니라 색깔마저 잘 알아보기 힘든 이 새(snipe)를 구식 장총으로 명중시킬 수 있는 사람이 명사수로 불렸고, 이 'snipe 쏘기‘가 sniping이 되었다가 여기에서 sniper라는 단어가 파생된 것이지요. 물갈퀴가 없는 도요새는 보통 때는 갯벌에서 열심히 영양분(게, 조개, 갯지렁이나 연체동물 및 곤충류들)을 보충하는 일에 전력 질주합니다. 습지에서 머무는 2주 내지 한 달간 잘 먹어두어야 겨울에는 멀리 호주와 뉴질랜드로(월동 여행), 여름에는 시베리아나 알래스카로 여행(산란 여행)하는 데 무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도요새가 갈대숲에 앉아 있는 경우는, 갯벌에 만조가 들어 먹이를 구할 수 없을 때입니다. 먹는 데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가 드디어 홀로 외로움을 느끼는 때를 맞게 되는 셈이지요. 이 고독한 때, 그 도요새는 눈앞에 있는 수선화를 바라봅니다. 마치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에서 작은 제비(a little Swallow)가 아름다운 갈대(a beautiful Reed)를 사랑하게 되어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는 타이밍을 놓치게 되듯이, 이 도요새도 그 아름다운 수선화를 바라보면서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수선화가 자기를 바라보는 외로운 존재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자신의 외로움을 ‘메타인지’(metacognition)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즉 자신이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 혹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외롭다고 몸부림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기처럼 다른 존재들도 외로움을 느낄 것이라는 인식의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면서 자기와 같은 꽃들, 산 그림자, 종소리, 하느님까지도 외로워하신다는 점을 깨닫게 되겠지요. 그리고 좀 더 유심히 관찰해 보면서, 평상시에는 갈대숲 속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조그마한 ‘가슴 검은 도요새’까지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자기를 지켜 보고 있는 도요새,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는 산그림자, 울려퍼지는 종소리 모두가, 각자의 외로움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여 취하는 행동이라는 점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전에 자기를 찾아온 숲의 요정(nymph) 에코(Echo)도 할 일 없어 이리저리 거닐다 우연히 그를 만난 게 아니라, 자기를 흠모하고 사랑해서였다는 것도 깨닫게 되겠지요. 에코의 내밀한 짝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기가 냉대한 것으로 인해, 에코는 절망한 나머지 몸은 없어진 채 메아리(echo)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영적 각성이 생길 때에야 비로소 이 외로운 이들에게, 외로운 자기가 먼저 손을 내밀게 되지 않을까요? 외로움에 물들어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이라도 보려는 도로(徒勞)에서 벗어나, 홀로 자기만의 길을 활보하고 정진해가는 만큼이나 주위를 돌아보며 외로운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의 벗이 되어 주라는 것이, 정 시인의 깊은 의도가 아니었나 묵상해 봅니다. 정 시인은 삶이 고단할 때마다, 빈민과 노숙자를 위한 엠마우스 운동의 창시자인 아베 피에르(피에르 신부, 1912-2007)가 언급한, “인생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라는 잠언을 되새긴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 시인이, “수선화에게”를 소개하는 글 속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외로웠을 때는 내 마음 속에 사랑이 부족했을 때였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 사랑할 때는 그리 외롭지 않았습니다. 외롭다는 것은 어쩌면 내게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는지요. 사랑이 있는 한 외로움은 견뎌낼 수 있습니다. 왜 외로운가 하고 고민하기보다 왜 사랑이 부족한가 하고 고민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금번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서도 절감하고 있지만,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전 시대에는 잘 인식하지 못한 사실이지만 현시대에서는 극명한 사실입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고 국가 간의 무역이 활발하지 않은 이전 시대에는 사람 간, 국가 간의 교류가 존재하긴 했으나 상당히 제한적인 사람들만, 한정된 지역에서만 가능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현시대는 다양하고도 우수한 교통수단이 마련되고 첨단 의사소통 수단이 다변화됨으로써, 국가 간 무역뿐 아니라 개인 간 교류도 원활하게 진행되어, 여유가 되고 마음만 먹으면 세계 어디라도 갈 수 있고 그곳에 있는 이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갖가지 혜택과 유익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이전 시대에 살던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잘 살게 되고 더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숱한 질병에서 해방되어 더 장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혜택과 유익에는 그 대신 치러야 할 대가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경제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 자연환경을 훼손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발생하고, 문화적 혜택을 누리기 위해 더 많은 환경오염을 일으키게 될 뿐 아니라, 장수하지만 “유병 장수”하면서 만성질환이나 치매 같은 노년기 현상을 장기간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게다가 이번 사태처럼 지구 한편에서 발생한 바이러스 사태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비극에도 쉽게 노출되지 않습니까?

 

이런 연결사회 혹은 초연결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우리들의 관계는 외로운 섬들처럼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마르틴 부버가 “나와 너”에서 언급한 ‘나-그것’의 관계나, 장 폴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지적한 ‘외적 관계’와 궤를 같이하는 인간관계가 세계를 뒤덮고 있는 아이러니한 형국이지요. 이 세상에는 온통 ‘나’라는 1인칭 외에 ‘그것’이라는 3인칭 혹은 제삼자만 존재할 뿐, 서로 응답하고 배려하는 ‘너’ 혹은 ‘그대’라는 2인칭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3인칭 대상은 “나에게 현존(現存)이 아니고 부재(不在)다”라는 가브리엘 마르셀의 지적처럼, 나에게 응답하지 않고 나를 배려하지 않는 그들의 존재는 나에게는 죄다 무의미할 뿐이고 그들에게도 나는 그저 3인칭의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하겠지요(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참조).

 

이런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나-그것’의 관계를 ‘나-너(그대)’의 관계로, ‘외적 관계’를 ‘내적 관계’로 변혁하는 것입니다. 마르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호주관적 매듭”을 형성해야 합니다. 사랑을 통해 내가 ‘그것’을 ‘그대’라고 부르게 되고, ‘그대’가 ‘나’를 ‘그대’라고 부를 때 내가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타인 사랑을 통해 자기 사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악수나 포옹을 할 때 내가 타인의 손을 잡거나 타인을 안게 되지만, 그 순간 나도 타인의 손에 잡히게 되거나 타인에게 안기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김용규 선생은 마르셀이 이 개념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쳐 준 사랑의 개념에서 얻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본성인 사랑에는 사랑하는 자(amans)인 성부와, 사랑받는 자(quod amatur)인 성자, 그리고 사랑(amor)인 성령, 이 세 요소가 사실상 하나이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은 ‘사랑하는 것이 곧 사랑받는 것이 된다(amor amatur)'는 것”을 설파했지요. 이 “상호주관적 매듭”에서 상호주관성이 주관성을 정립하는 역전이 이루어집니다. 즉, 내가 존재하기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존재한다”(Dous sommes)라는 명제가 전제되어 있기에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이 외롭고 고독한 시기에 손을 먼저 내밀거나 포옹을 먼저 시도하려고 하다가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 직면해 있으니, 이것보다 더 큰 고통과 비극이 어디 있을까요? “상호주관적 매듭”조차 실행에 옮기지 못함으로 인해 내 존재 의식은 더 희미해져 갑니다. 그렇지만 다른 형태로 나의 ‘그대’에게 악수하고 포옹하는 길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예컨대 ‘그대’를 사랑하고 성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전화나 편지 혹은 메시지를 통하는 길 말입니다. 며칠 전 말레이시아에서 가르쳤던 제자 한 사람이 안부 인사와 함께 자기와 같이 공부한 동료들의 사진들을 보내왔을 때, 마치 사막에서 생수를 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요즘 상황에서 더욱 가까워진 가족들 간에, 서로의 깊은 필요들을 채워줄 길을 모색하여 실행하는 길도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가끔은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시는 하느님을 향해서도 손을 내밀며 당신의 이름 “아바 아버지”를 간절하게 불러 드리는 것과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도 잊지 말 일입니다.

 

수선화가 ‘그대’ 이름을 부를 때 하늘이 열립니다. 수선화로 인해 내 존재가 정립되고, 수선화와 내가 함께 더불어 '우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이 열리는 일은 내가 먼저 수선화를 주목하고 수선화를 '그대'로 부르는 일부터 시작되리라 믿습니다. 무려 두 달 만에 오늘 저희 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사회적 거리 두기 준칙에 유념하면서, 감격스러운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로 ‘그대’라는 이름을 부르며 나와 ‘그대’가 함께 더불어 우리가 됨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성도 ‘그대’들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 얼굴을 뵙는 듯했습니다. 그곳에 하늘이 열린 것은 먼저 성도님들이 나를 ‘그대’로 불러주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