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
지난번 “인생나눔멘토링”을 담당하기 위해 준비하는 중에 떠오른 의미 있는 생각이 한 가지 있습니다. 멘티들에게 자기 마음속에 담고 있는 꿈을 소중히 여기라고 제안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닌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생겨난 꿈도 우리가 의도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라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원하거나 의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듯 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꿈과 소원이라는 것도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붙잡고 성취해가는 게 인생을 사는 도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인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것들 간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각자가 신비로운 형성 과정을 통해 현재 태어나 존재한다는 이 현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그 탄생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연히 알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현 존재의 실체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최소한 우리는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생을 영위해야 합니다. 물론 이 생을 자기 의지로 마감할 수 있는 자유도 존재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특별할 경우(예컨대 합방된 나라를 바라보며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자살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 선택을 하는 이들을 칭송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삶을 영위해 가는 게 일반적인 선택이고 심지어는 죽지 않겠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 치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자기가 돌보아야 할 사람이나 마무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는 경우에 그런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엔 죽음이 두려워 그럴 것입니다.
이미 태어나 버린 “나”라는 생명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힌트가 과연 존재할까요? 전 존재한다고 봅니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우리의 됨됨이가 아닐까 합니다. 즉, 우리의 성, 외모, 기질, 성격, 특기와 같은 것들 외에도 우리만이 품고 있는 꿈이나 소원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라고 봅니다. 이것들 또한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현시대는 외모뿐 아니라 성까지도 바꾸며 한 세상 살아갈 수도 있는 때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기본적인” 혹은 “천부적인” 것들을 바꾸며 사는 데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자유이겠지만 그 자유에 대해 많은 다른 것들을 희생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꿈이나 소원이 “주어진” 것이라고 할 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이도 있을 줄 압니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누군가가 힙합 가수가 되기를 원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가 어릴 때부터 혹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인가 접하거나 만난 음악 혹은 가수의 영향을 받아 그런 꿈을 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런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런 음악이나 가수가 심금을 울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각각 엄존한다는 점입니다. 힙합을 밥 먹듯이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을 소음으로 여기며 거리를 두는 사람들 또한 현존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환경적 요소가 우리의 꿈이나 소원 형성에 기여한다고 하더라도 “천부적인” 자질이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각자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다른 이들과는 다른 꿈과 소원의 씨앗이 배태되어 있다는 점은 경험적인 진실입니다. 이것들을 무시하고 사장시켜버리거나 이것들을 품고 발아시키고 열매 맺도록 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각 개인이 결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 인생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라면 우리 마음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꿈과 소원을 소중히 여기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요?
지난 제 60 평생은 이 꿈과 소원을 품고 간직해 오던 중 시일이 흘러 열매 맺은 기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느 시점부터 읽고 공부하는 게 좋았고 그 과정에서 배운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을 즐겼던 전 자연스럽게 가르치는 직업을 원했고 급기야 교사직, 강사직 및 교수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단 한 시기라도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지낸 적은 없었지만 밥을 굶을 만큼 궁색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겪었던 것이 자랑스럽다거나 마음 편안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유학 시절과 해외 진출 초기에 경제적인 압박을 받은 적이 있고 지금도 그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당장 먹고살 것은 있었지만 장차 먹고살 것이 막막한 시기였기 때문이지요. 유학 시절에는 형제/자매들의 도움으로, 해외 진출 초기에는 동료들의 재정 협력 시스템 덕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귀국한 이후에도 저희 사정을 걱정해 주는 형제/자매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경제적인 압박으로 더 고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제 인생 중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생존했던 시절이 언제였던가였습니다.
단연코 그런 시절은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대학원까지 부모님의 도움으로 마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당시는 과외금지령이 내려진 때였음)? 설령 대학 재학 기간 동안 과외를 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하더라도 학비까지 대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했다고 생각한 고교 교사 시절도 한 장로님의 배려로 그 학교로 인도되었고 말레이시아에서 누린 교수 시절도 그 이전 7년 여 기간 동안 버틸 수 있도록 재정 협력 시스템으로 도와준 동료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이 각각의 기간 동안 번 돈으로 유학 준비도 할 수 있었고 아이들 교육까지 책임질 수 있었지만 그 기간들이 존재하는 데 있어 부모님의 희생과 형제/자매들의 지원과 동료들의 성원의 힘은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저 홀로 서지 못한 때가 많았다고 자책하며 부끄럽게 여긴 것이 자만심이거나 오판이었던 셈이지요. 저 혼자 섰던 때가 있었다고 자부했던 시기도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의 어깨 위였음이 판명된 셈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 꿈을 성취해가던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꿈의 성취를 도운 것 역시 맞습니다. 제가 그동안 곳곳에서 가르친 제자들이 어디서 무엇하며 사는 지 알 길 없지만 그들의 인생 한 자락에서 제가 그들의 꿈의 성취에 기여한 측면이 분명 존재할 터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희생과 사랑 가운데 제가 자라왔고 꿈을 성취할 수 있었듯이 저도 다른 이들의 꿈의 성취에 기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의 기여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제 기여에 대한 자부심 또한 품어 마땅한 게 아닐까 합니다.
자 이제 제 인생3막 상황으로 돌아옵니다. 지난 인생1막과 2막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지원으로 제 꿈을 이루어갈 것이고 제 꿈을 통해 다른 이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기대됩니다. 당장 미래의 먹고살 거리에 대해 막막하기는 지난 세월 동안 경험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지만 “던져진 인생”, “주어진 인생”이라는 제 삶의 진실에 주목할 일입니다. 던져졌으니 다시 되돌아가는 것, 주어졌으니 다시 돌려주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이겠습니까? 무신론을 믿어도,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도 당당하게 인생살이에 임할 수 있는 게 바로 이런 심사일 거라고 봅니다. 하물며 유신론, 그것도 유일하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는 제 경우엔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대해 일시적으로 고뇌할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인 고뇌 가운데 허덕이는 삶은 그 근본적인 세계관과 믿음을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무신론보다 못한 신앙이란 게 말이 될까요?
저도 모르는 새에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꿈과 소원을 품고 성취해가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엔 이것들의 성취에는 많은 이들의 희생과 도움이 어우러져 있다는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이야기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본질이자 묘미가 아닐까요? 제가 추구하는 꿈이나 소원이라는 것도 결국엔 다른 사람들의 꿈과 소원을 이루는데 활용되는 도구일 테고 다른 사람들이 추구하는 꿈이나 소원도 결국엔 제 꿈과 소원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자원이 된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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