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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我)-나를 알라

자기가 기뻐하고 즐기는 일 지속하기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7. 5.

자기가 기뻐하고 즐기는 일 지속하기

-다섯 번째 책 출간-

새로운 책이 한 권 더 교보 퍼플을 통해 출간되었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회교권 선교”라는 제목입니다. “선교의 길을 묻는 그대에게”의 속편 격입니다. 회교와 회교도들에 관한 세밀한 정보들이 담겨 있습니다. 회교권의 정치, 경제, 역사, 사회, 교육 및 문화 전반을 두루 다루기 위해 애썼습니다. 회교와 회교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의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교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지상 명령의 맥락 하에서 진행되는 사역이라면, 선교 대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선 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이해하는 게 긴요하고 그들의 가장 깊은 필요가 무엇인지 깨닫는 게 절실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인 사람들을 올바로 대우하고 사랑하는 첫 단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그들의 신체적, 지적, 정서적 및 영적인 측면 모두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에 대한 이런 전인적인 이해는 저희와 그들 간에 보다 깊고 친밀한 관계를 낳을 수 있습니다. 또한 상호 신뢰와 존경을 근거로 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시간이 갈수록 자라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깊이 이해해주는 사람만을 깊이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저희가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알기 원하고 믿기 원한다면 복음을 나누어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복음을 믿지 않아도 그들을 사랑해야 할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와 비를 이 세상 모든 이에게 골고루 내려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온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통해 회교(도)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회교(도)에 대해 관심을 품은 이들에게 더 진전된 공부를 해 나갈 수 있는 동인이 된다면 이 책의 소임을 다하는 셈입니다.

 

이 책은 여러 모로 제게 특별합니다. 우선 이 책에 담긴 글 대부분은 저희 가족이 말레이시아로 진출한 이후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작성된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시편 23:4)를 통과할 때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 책은 회교의 실상과 회교도들의 생활상을 선교적인 차원에서 세세하게 논의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불분명한 근거로 회자되는 회교(도)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을 뿐 아니라 회교도들을 섬길 수 있는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입니다. 세 번째로 이 책은 기록하는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증거입니다. 신문이나 잡지나 책이나 저널에서 의미 있는 자료들을 접할 때 바로 그것들을 처리해서 기록하는 작업이 없었다면 이 소중한 정보들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정약용이 강조한 초서(抄書)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사전적 의미에서의 초서 작업이었을 테지만, 이 기록은 나중에 다시 묵상할 때도 도움이 되었고 다른 것들과 통합되어 더욱 의미 있는 정보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제가 지난 20여 년간 해외에서 영위한 삶을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되찾은 시간”으로 품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윌리엄 캐리의 표현처럼 그저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어느 명백한 일감을 인내로 감당한 것’(“I can plod. I can persevere in any definite pursuit. To this I owe everything.”)밖에는 내세울 것 없는 기간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주님께서 허락해주신 위로와 교훈을 숨겨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 하기-

귀국한 이후에 이제 책 5권을 출간한 셈입니다. 오랜 숙제를 마감한 느낌이 듭니다. 각 권은 아래와 같은 방향성을 담고 있습니다.

 

1. “영어, 소통의 도구/성숙의 동반자” - 영어교육과 인문학의 연결

2.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서인문학” - 인문학과 성서의 연결

3. “선교의 길을 묻는 그대에게” - 성서와 선교의 연결

4. “트인 마음으로 성경 읽기” - 성서 주제 묵상

5. “심금을 울리는 회교권 선교” - 성서와 회교권 선교의 연결

 

이 방향들은 앞으로 제가 인생3막 기간 동안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영역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영어교육, 인문학, 성서 및 (회교권) 선교 영역을 서로 통합하고 연결 짓는 작업입니다. 각 영역에 대해 내실을 기하면서 그 영역들을 의미 있게 결합하여 새로운 시각과 방식을 창안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길 간구하고 고대합니다. 이 영역들은 제가 오랫동안 기쁨으로 탐구한 분야들일 뿐 아니라 제게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치 있는 장이라고 믿습니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11세 소녀 캐롤리나 프로첸코(Karolina Protsenko)에게 어떤 인터뷰 진행자가, “사람들이 자기 열정을 따르는 게 자기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느냐?”(Do you think it is good to people for them to follow their passion?)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물론이라고 답을 하자, 그 진행자는 곧바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그 소녀가 한 답변이 이러합니다. “자기가 기뻐하고 즐기는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지요.”(When you do something you love, the people like it.) 영어에서 ‘love’라는 동사의 기본적 의미는 ‘사랑하다’이지만, ‘love books’ 경우처럼 ‘(...)를 기뻐하다’(to delight in), ‘(...)를 즐기다’(take pleasure in)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예문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목적어가 사람이 아니라면 그럴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결국 그 소녀가 말한 내용은, 우리 각자가 본성적으로나 후천적으로 기뻐하고 즐기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을 계속 실행해가는 것이 인생의 순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좋아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11세 소녀의 입술을 통해서 제게 절실한 인생관 혹은 인생 경영 방식을 배우게 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내실을 다져 실행하기-

제가 영어, 인문학, 성경 및 선교와 연관된 일들을 기뻐하고 즐기지만, 계속하여 내실을 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도 명심하고 있습니다. 각 영역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만 해대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시간을 들여 그 전문성을 더욱 개발함으로써 각 분야에서 탁월성을 증진해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측면은 스토아학파의 거두인 에픽테토스(50-135)의 글에서 한 수 배웠습니다.

 

“양은 자기가 얼마나 먹었는지 보여 주려고 양치기 앞에 먹은 풀을 토해 내지 않는다. 뱃속에서 풀을 잘 소화시켜 털과 젖을 밖으로 내보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자들에게 철학의 규범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 다음, 행동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그가 지혜로운 사람에게 전한 권면으로서,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삶의 원리를 천명하는 내용입니다. 양들이 자기가 먹은 풀의 양을 과시할 목적으로 먹은 것을 토하지 않고 도리어 털과 젖을 내듯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자기가 배운 철학의 양을 뽐낼 목적으로 말만 해댈 것이 아니라 도리어 건전한 행동과 고매한 인격이란 열매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위에 인용한 번역문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글의 문맥이 궁금해서 영문판을 참고해 보았더니, 지혜로운 사람은 철학가들(philosophers)을 가리키는 표현이었고, 이 글 앞에는 “For"(왜냐하면)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문맥은 아래와 같습니다.

 

“결코 자기를 철학자라고 말하지 말고, 무지한 자들이 있는 곳에서 철학 원리들(theorems)에 대해 많이 말하지(talk a great deal)도 말라. 그러나 그 원리들에 적합하게 행동하라. 연회장에서는 사람들이 마땅히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말하지 말라. 그러나 마땅히 먹어야 하는 방식대로 먹으라.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소크라테스도 모든 허식(all ostentation)을 두루 피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와서 철학자들을 추천해달라고 할 때, 그는 철학가들을 붙들어서 추천해주었다. 무시당하는 것을 그렇게 잘 참은 것이다. 만일 무지한 자들 간에 철학 원리들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그대는 대부분 잠잠하라. 왜냐하면 그대가 소화하지 않은 것을 즉각적으로 제안하는 데는 큰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어떤 이가 그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대에게 말하는데도 그대가 그 말에 짜증 내지 않는다면, 그대의 사업을 이미 시작했다(you have begun your business)는 점을 그대는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양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를 양치기에게 보여 주기 위해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적으로 그 음식을 소화하여, 외적으로 털과 젖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무지한 자들에게 철학 원리를 보여주지 말라. 그러나 그것들이 다 소화된 후에 그것들에 의해 형성된 행동을 보여 주도록 하라.”(For sheep don’t throw up the grass to show the shepherds how much they have eaten; but, inwardly digesting their food, they outwardly produce wool and milk. Thus, therefore, do you likewise not show theorems to the unlearned, but the actions produced by them after they have been digested.)(“The Enchiridion of Epictetus”)

 

이 문맥 속에서 두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첫째는 철학 원리들에 대해 많이 말하는 대신 그것들에 합당하게 행동함으로써 모든 허세를 떨쳐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소크라테스조차도 그 길을 걸었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이런 식으로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 자체가 바로 철학가 사업의 시발점이라는 점입니다. 그 이후에 바로 양의 비유를 든 것이지요. 결국 처음 소개한 글 첫 문장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왜냐하면 양들조차도 자기 사업 혹은 과업이 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많이 먹은 것을 토하는 것이 아니라 털과 젖을 내어 놓는 것이 바로 자기 사업 혹은 과업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저는 말 대신 글로 많이 떠벌린 셈이기 때문에 허세에 두루 노출되어 있는 셈입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의도한 과업을 시작하지조차 못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제가 말한 바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행해감으로써 그것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지 못한다면 그러할 것입니다. 양들의 신실한 모습을 본받는 게 절실한 시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털과 젖’을 내어놓을 때까지 아무 말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게 지혜일 수는 없습니다. 에픽테토스가 문제 삼는 것은 말하는 것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 철학가의 너무 많은 말’이 문제의 실상인 것이지요. 철학가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말한 내용을 무효화시키는 행동을 하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의 삶 속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컨대 자주 제 뇌리를 스치는, 홍자성의 “채근담” 속의 한 구절이 이런 경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남의 단점은 되도록 덮어주어야 한다. 만일 그것을 들춰내어 알린다면, 이것은 자기의 단점으로 남의 단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남이 완고하면 잘 타일러 깨우쳐줘야 한다. 만일 성내고 미워한다면 이것은 자기의 완고함으로 남의 완고함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된다.”

 

자기 단점으로 남의 단점을 공격하거나 자기의 완고함으로 남의 완고함을 깨우치면서도, 자기 말을 무효화시키는 어리석은 자기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잦을까요?

 

게다가 너무 말이 많다 보니 말을 해야 할 때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는 점도 에픽테토스는 함께 지적하고 있습니다. 남들과 대화할 때 거론되는 모든 주제에 대해 자기가 의견을 피력하는 게 의무도 아니고 지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자기를 큰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우리가 침묵한 것을 두고 우리가 무지한 것으로 오인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때에도 그 오해를 용납하는 도량을 발휘하는 것이 지혜요, 자기가 말한 것을 실행하는 자세가 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인하는 이들은 무지한 자들에 불과함을 덧붙일 필요조차 없겠지요.

 

-실행이 부족해도 진리를 전파하기-

철학가가 아니더라도 ‘행동이 동반되는 말’을 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계도하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들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역에서 실패하거나 뚜렷한 진전을 보이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공할 때까지, 현격한 열매가 드러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나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뚜렷한 열매가 맺히지 않은 상태에서라도, 계속 그 말을 이행하되 그 진리의 말을 삼가 외치고 알려야 되지 않을까요? 이번에는 톨스토이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그의 개인 편지 한 곳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지속성이 없는 내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한다. 내 현재의 삶과 내 과거의 삶을 보라. 그러면 내가 그것들[기독교의 교훈들-Christian precepts]을 실행하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 중 천 분의 일도 내가 이행하지 못했다는 게 사실이기 때문에, 이 점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이행하지 못한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유혹의 함정으로부터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내게 가르쳐 주고 나를 도와 달라. 그러면 내가 그것들을 이행하게 될 것이다. 도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들을 이행하기를 원하고 소망한다.

 

나를 공격하라, 이 일을 나 홀로 하고 있으니. 그러나 내가 따르는 길보다는 나를 공격하라. 그 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내게 묻는 사람 누구에게나 내가 지적하는 길이다. 만일 내가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는데 그 길을 술 취한 채로 걸어간다면, 내가 이쪽저쪽으로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 길이 덜 옳은 길이란 말인가? 만일 그것이 옳은 길이 아니라면 내게 다른 길을 보여 달라. 그러나 만일 내가 비틀거리고 그 길을 잃어버렸다면, 내가 그대를 지원해줄 준비가 되어 있듯이 나를 도와주어야 하고 내가 지속적으로 참된 길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나를 오도하지 말고, 내가 길을 잃어버렸다고 기뻐하지 말며, 기쁘게 소리치지도 말라. ‘그를 보라! 집으로 간다고 말하지만, 수렁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하지 말라, 고소해하지 말고 나를 도와주고 지원해 달라.”(Attack me, I do this myself, but attack me rather than the path I follow and which I point out to anyone who asks me where I think it lies. If I know the way home and am walking along it drunkenly, is it any less the right way because I am staggering from side to side! If it is not the right way, then show me another way; but if I stagger and lose the way, you must help me, you must keep me on the true path, just as I am ready to support you. Do not mislead me, do not be glad that I have got lost, do not shout out joyfully: “Look at him! He said he was going home, but there he is crawling into a bog!” No, do not gloat, but give me your help and support.)

(톨스토이, excerpt from a personal letter)

 

톨스토이(1828-1910)가 따른 길은 정통 기독교의 길은 아니었습니다. 루이스 카우언과 오스 기니스가 언급한 대로, 그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신성 같은 교리를 거부했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도덕적인 가르침에 역점을 기울인 다른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이행하면서 농부와 현자로 살기를 시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주권과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산상수훈 같은 예수님의 교훈을 일상에서 실행해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급진적인 그의 이상주의는 언제나 냉혹한 현실과 마주쳐야 했고 끊임없는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정통 기독교는 백안시하지만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에 대해서는 호감을 품고 있던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그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장을 기반으로 비폭력주의의 이행을 꾀한 톨스토이 협회가 전 세계적으로 수백 개나 형성되었지요. 그리하여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적 구루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이 짧은 편지글 속에 톨스토이의 위대한 면모가 엿보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한 영적 패배를 솔직하게 시인하면서 타인의 도움을 겸허하게 요청하는 그의 진정성이 흠뻑 묻어납니다. 자기가 세계적인 영적 스승이라고 인식하는 허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바를 따르기 위해 진력하고 그 진리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그것을 지적해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그 길이 ‘옳은 길’(the right way) 혹은 ‘참된 길’(the true path)이 아니라면 다른 진리의 길을 자기에게 보여주고 일러 달라는 겸손한 자세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원리와 어긋나는 그의 사상에 찬동하고 그것을 좇을 수는 없지만, 그가 취한 치열한 진리 탐구의 자세와 그가 몸소 행한 가식 없고 겸허한 구도의 여정은 기리고 본받기 원합니다. ‘내 연약함으로 비틀거리더라도 내가 밟아야 할 순례 여정을 지속해가면서 참된 고향으로 나아가는 옳은 길을 전파하겠다’라는 그의 각오와 소망을 제 것으로 삼고자 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 인생 순례를 진행해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실행하고 전파하고자 하는 저와 독자 여러분들의 소원이 우리 생애 내내 넉넉히 성취되는 복이 임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