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글쓰기가 예술로 승화된,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과 “1984”(2)
-1. 빅브라더의 시대(The Age of Big Brother)-
앞에서 인용한 윈스턴이 쓴 일기에서 발신자를 넷으로 설정해 두고 보니, 그 수신자도 아래와 같이 각각 서로 대응을 이루는 것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발신자> <수신자>
빅브라더의 시대 ------> 사상의 자유가 있는 미래 혹은 과거
획일적인 시대 ------> 저마다의 개성이 존중받는 미래 혹은 과거
이중사고의 시대 ------> 진실이 존재하며 행해진 것이 사라질 수 없는 미래 혹은 과거
고독의 시대 ------> 홀로 고독하게 살지 않는 미래/과거
오웰은 디스토피아 형성과 관련하여 특정한 연도나 시대를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1984’를 택한 이유도 이 소설 초고가 작성된 1948년의 ‘48’을 ‘84’로 바꾼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디스토피아가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열어 두었기에 이 작품이 전 시대를 아우르는 보편성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요?
먼저 ‘빅브라더의 시대’가 ‘사상의 자유가 있는 미래 혹은 과거’에게 보내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수신자를 염두에 둔 것을 보면 발신자에게는 사상의 자유가 없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겠지요. 빅브라더가 존재하는 곳에는 왜 사상의 자유가 존재할 수 없을까요?
빅브라더가 통치하는 오세아니아에는 공통어인 영어, 공식어인 신어(Newspeak)가 존재하지만, 수도(首都)도 없고 빅브라더가 어디 사는지 아무도 모르며 어디에도 중앙집권적 요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빅브라더는 “당이 세상에 자기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설정한 가공인물”(the guise in which the Party chooses to exhibit itself to the world)로서, “실수가 전혀 없는 전능한”(infallible and all-powerful) 존재이고 삶 속의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이 모조리 “그의 지도력과 영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모두가 믿는 존재입니다. 그가 맡은 일은 “어떤 조직보다는 어떤 개인에게 더 수월하게 느껴지는 사랑과 공포, 숭배, 감동을 위한 초점(a focusing point)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소비재 생산이 증가해도, 초콜릿 배급량이 늘어도 “현명한 지도력으로 새롭고 행복한 삶을 하사한 빅브라더”(the new, happy life which his wise leadership has bestowed upon us)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깃발 들고 거리를 행진하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당과 당권을 쥔 자들은 이 허구의 인물인 빅브라더를 통해 자기들의 뜻을 성취합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이루기 원하는 것은 단 두 가지입니다. “전 세계를 정복하는 것과 모든 독립적인 사고의 가능성을 근절하는 것”(to conquer the whole surface of the earth and to extinguish once and for all the possibility of independent thought)입니다. 전 세계 정복은 허울뿐인 목표입니다. 오세아니아뿐 아니라 다른 초국가의 지도자들은 “자기 인생을 세계 정복에 바쳤지만 전쟁은 승리 없이 영원히 계속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Their lives are dedicated to world conquest, but they also know that it is necessary that the war should continue everlastingly and without victory.) 적대적 공생 관계 때문이지요. 결국 가장 중요한 당의 목표는 독립적인 사고의 가능성 근절뿐인 셈입니다. 당의 이상은 당이 진리와 진실을 결정한다는 점을 온 국민들이 신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통하는 “정통주의는 생각하지 않는 것, 즉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정통주의란 무의식 그 자체인 것이지요.”(Orthodoxy means not thinking—not needing to think. Orthodoxy is unconsciousness.)
이것을 돕기 위해 끊임없이 기존 단어들이 없어지고 신어들이 생성됩니다. 예컨대 신어에는 ‘과학’(science)이란 단어조차 없습니다. 명예(honour), 정의(justice), 도덕(morality), 국제주의(internationalism), 민주주의(democracy), 종교(religion) 같이 이단적인 의미(a heretical meaning)를 띤 단어들도 죄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포괄적인 어휘 몇 개가 이러한 이단적인 단어들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상죄(crimethink)라는 단어가 자유와 평등의 개념과 비슷한 모든 낱말들을 포함하고, 구사고(oldthink)라는 단어가 객관성과 합리주의의 개념과 비슷한 낱말들을 포괄합니다.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2050년까지는 구어(Oldspeak)에 대한 모든 지식이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지요. 초서나 셰익스피어, 밀턴, 바이런 같은 작가들의 작품은 어떻게 될까요? 모두 다 신어로 번역된 작품 속에만 존재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오세아니아의 당이 수많은 구어들을 없애고 신어로 대체하거나 번역하려고 기를 쓸까요? 그 정답은 언어학자로 신어 전문가인 사임이 한 말속에 들어 있습니다.
“자네[윈스턴]는 신어를 만드는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일이 문자 그대로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 거라고. 사상을 표현할 단어가 없을 테니 말일세. (…) 해마다 단어가 점점 줄어들면 의식의 범주도 조금씩 작아질 테니까.”(Don’t you see that the whole aim of Newspeak is to narrow the range of thought? In the end we shall make thoughtcrime literally impossible, because there will be no words in which to express it. (…) Every year fewer and fewer words, and the range of consciousness always a little smaller.)
국민들의 사고의 폭을 좁히고 의식의 범주도 작게 만들어 사상죄를 범하는 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 구어 대신 신어 체계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언어학자들이 구어를 없애고 신어를 만드는 예를 보면 대략 그 신어 조성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good)이란 단어가 있기 때문에 ‘나쁜’(bad)이란 반의어는 불필요하다고 봅니다. ‘안 좋은’(ungood)으로 쓰면 되니까요. ‘탁월한’(excellent)이나 ‘훌륭한’(splendid) 같은 모호한 말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됩니다. ‘더 좋은’(plusgood)이나 ‘더욱더 좋은’(doubleplusgood)이 존재하니까요. 국민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제거하거나 대체함으로써 그들의 사고나 의식을 축소하여 사상죄를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당은 아예 국민들의 현실 인식 자체도 좌지우지하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윈스턴이 애정부에 잡혀 심문받을 때 오브라이언과 나눈 대화 내용을 참조해 보세요.
“오브라이언이 왼손을 들어 손등을 윈스턴에게 보이고 엄지손가락을 감춘 채 네 손가락을 펴 보였다. ‘윈스턴, 내가 지금 손가락 몇 개를 펴고 있나?’ ‘네 개입니다.’ ‘그럼 당이 네 개가 아니라 다섯 개라고 말하면 몇 개가 되지?’ ‘네 개입니다.’ 대답을 하자마자 고통이 엄습했다. [고문] 조절기 바늘이 55를 가리켰다. (...) ‘네 개, 네 개인 것 같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섯 개로 보고 싶습니다. 다섯 개로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 ‘어느 쪽인가? 다섯 개로 보인다고 말만 하고 싶은 건가, 아니면 정말 다섯 개로 보고 싶은 건가?’ ‘정말 다섯 개로 보고 싶습니다.’”(O’Brien held up his left hand, its back towards Winston, with the thumb hidden and the four fingers extended. ‘How many fingers am I holding up, Winston?’ ‘Four.’ ‘And if the party says that it is not four but five—then how many?’ ‘Four.’ The word ended in a gasp of pain. The needle of the dial had shot up to fifty-five. (...) ‘Four. I suppose there are four. I would see five if I could. I am trying to see five.’ ‘Which do you wish: to persuade me that you see five, or really to see them?’ ‘Really to see them.’)
결국 고문의 강도가 더해져 윈스턴 머리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짐으로써 그는 머리 속에 큼직한 공간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오브라이언이 엄지손가락을 감춘 채 왼손을 들어 보였을 때, 윈스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손가락이 다섯 개로 보이는 것을 체험합니다. 오브라이언은 그 고문 과정을 통해 빅브라더나 당은 영원히 존재하지만 윈스턴 자신은 결국 실체가 없는 존재라고 믿는 단계까지 그를 밀어붙입니다.
“1984” 속의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가장 유명한 표현이 “빅브라더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라는 문구이기 때문에, 이 ‘빅브라더의 시대’가 “감시사회로서의 현대사회의 그늘에 대한 성찰적 계몽”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상의 논의에서 살펴 본 것처럼 “1984”의 텍스트는 그것보다 한발 더 나아갑니다. 국민 생활을 감시해서 그 부산물인 정보를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꾀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 빅브라더와 그 당은 이 과정을 통해 독립적인 사고를 구사하는 자들을 색출하여 제거하고 전 국민이 사고하지 않는 무의식 상태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그 당의 궁극적인 목적이 ‘순수한 권력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당의 핵심 세력인 오브라이언이 한 말을 한번 참조해 보세요.
“당은 오직 그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추구하네. 우리는 타인의 행복 따위에는 관심도 없단 말이네. 오로지 권력에 관심을 둘 뿐이야. 재산이나 사치품, 장수, 행복도 아닐세. 오직 권력, 순수한 권력만 바랄 뿐이야”(The Party seeks power entirely for its own sake. We are not interested in the good of others; we are interested solely in power. Not wealth or luxury or long life or happiness: only power, pure power.)
재산, 장수 및 행복도 제쳐둔 채 왜 그토록 순수한 권력을 갈망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권력만 있으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 때문 아닐까요? 이 첫 번째 ‘빅브라더의 시대’를 묵상하면서, 우선 국가 권력 맡을 자들을 선출하는 일에 너무 무책임하고 무관심했던 과거의 제 잘못들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의 소리에 따라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겠다는 다짐을 거듭하며 이 일에 형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2. 획일적인 시대(The Age of Uniformity)-
다음으로 ‘획일적인 시대’가 ‘저마다의 개성이 존중 받는 미래 혹은 과거’에게 보내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수신자를 염두에 둔 것을 보면 발신자의 시대에는 각 개인의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겠지요. 우선은 획일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각 개인의 유일한 성정이나 다양한 성품과 역량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을 시사하기에 그 시대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살펴본 대로 이 시대는 빅브라더와 당(the Party)만이 온전히 존재하고 각 개인은 허상에 불과한 상태이니, 그들의 개성이나 유일성을 인정해줄 리가 없겠지요. 사실상 작품 속에 등장하는 3대 초국가[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는 외견상으로는 서로 전쟁을 하며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는 사회 구조, 경제 체제 및 지배 철학은 대동소이합니다. 피라미드형의 사회 구조(pyramidal structure)와 반신성화된 지도자 숭배(worship of semi-divine leader)가 지속되고 전쟁에 의해,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경제(economy existing by and for continuous warfare) 체계가 고착화되어 있지요. 오세아니아의 지배적인 철학이 ‘영사’(Ingsoc‘, 즉 영국 사회주의<English Socialism>)이지만, 이것은 유라시아의 ‘네오 볼셰비즘’(Neo-Bolshevism, 즉 현대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이나 동아시아의 ‘사망 숭배’(Death-Worship, 즉 ‘자아 말살’<Obliteration of the Self>)와 다를 바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자아 말살’이란 표현이 동아시아의 철학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그 세 가지 철학이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하다”(the three philosophies are barely distinguishable)는 구절을 고려해 보자면, 결국 그 모든 철학의 본질이 개인적인 자아를 소멸시키는 데 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배 철학을 품고 있는 사회가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직업이 주어지긴 하지만, 일감도 정해져 있고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도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각 개인의 생각을 발표하는 것은 물론 쓰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일기 쓰다가 발각되면 사형이나 25년 강제 노역에 처해집니다. 국민은 당이 생각하라는 대로 생각하고 하라는 대로 하게 되어 있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거나 행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획일화가 성문법 없이도 완벽하게 이루어집니다. 물론 이런 생각과 행동의 획일화는 사실 조작과 상황 합리화를 통해 조장됩니다. 특히 통계 수치를 조작하여 여론을 좌지우지하고 상황 합리화를 통해 빅브라더와 당을 신봉하면서 일사불란하게 따르도록 하지요. 예컨대 풍요부(the Ministry of Plenty)에서 내린 공지사항 한 가지를 참고해 볼까요?
“동지들 주목하십시오! 영광스러운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우리는 생산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방금 완료된 각종 소비재 생산 보고서에 따르면 생활수준이 작년보다 20퍼센트 이상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오세아니아 전역에 걸쳐서 열화와 같은 자발적 집회가 벌어졌습니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온 노동자들이 현명한 지도력으로 새롭고 행복한 삶을 하사한 빅브라더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는 깃발을 든 채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텔레스크린에서 터무니없는 통계 수치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면“(The fabulous statistics continued to pour out of the telescreen), 노동자들이 빅브라더를 찬양하는 집회와 행진으로 화답하는 획일화된 사회가 연출되지요. 사실상 윈스턴도 이런 당의 취지에 부합하는 일감을 갖고 있습니다. ‘영사’[영국 사회주의]의 강령과 당의 전망에만 의지하여 정교하게 문서를 위조하는 일이나 신어로 작성된 ‘타임스’ 내용을 현재와 미래에 맞게 조작하는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바로 얼마 전 2월에 풍요부(the Ministry of Plenty)가 1984년에는 초콜릿 배급량(the chocolate ration)을 줄이지 않겠다고 약속(공식 용어로 ‘절대 서약’<a categorical pledge>)했다. 그러나 윈스턴이 알고 있듯 실제로는 이번 주말부터 초콜릿 배급량이 30그램에서 20그램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윈스턴은 처음에 한 약속(the original promise)을 4월 중 불가피하게 배급량을 줄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a warning)로 바꿔 놓기만 하면 되었다.”
당이 초콜릿 배급량을 절대도 줄이지 않겠다고 한 맹세를 깬 것을 윈스턴이 경고의 내용으로 조작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벌어진 상황은 더 기가 막힙니다. 무의식과 흡사한 망각 증세에다 획일적인 충성 경쟁을 보이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세요.
“그[윈스턴]는 잠시 주위에서 나는 소리를 외면하고 텔레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일주일에 초콜릿 배급량을 20그램으로 올려 준 데 대해 빅브라더에게 감사하는 집회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초콜릿 배급량을 일주일에 20그램으로 줄인다고 방송한 것이 바로 어제였다. 겨우 24시간 만에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그들 모두는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었다. 동물처럼 아둔한 파슨스는 쉽게 잊어버렸다. (Parsons swallowed it easily, with the stupidity of an animal.) (...) 그렇다면 윈스턴 혼자만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동물 농장”과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지요. 동물 농장의 동물들과 오세아니아의 인간들이 거짓 선전을 받아들이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점에서 서로 다를 바가 없다는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동물에 빗대는 것은 다른 문학 작품에도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지만, “1984”가 “동물 농장”과 긴밀한 연관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들에 특히 눈이 가는군요. 예컨대 아무런 의식 없이 지껄이는 소리를 오세아니아에서는 오리말(duckspeak)이라고 하지요. “돼지(swine) 같은 놈들 중에 당신 목소리를 알아차릴 가능성은 항상 있어요. 하지만 여기는 괜찮아요.”라는 말이나 “그의 얼굴은 악의 없어 보이는 커다란 설치류(some large, harmless rodent)와 똑같이 생겼다.”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윈스턴이 “기묘한 딱정벌레처럼 생긴 조그만 남자(a small, curiously beetle-like man)”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어째서 딱정벌레 같은 인간들이 정부 기관마다 급증하는지 이상한 일이었다.”라고 지적합니다. 최종적으로 이 사회에는 전 인구의 85퍼센트를 차지하는 “노동자와 동물은 자유롭다.”(Proles and animals are free.)라는 당의 표어가 통합니다. “그들[노동자들]에게는 당의 이념을 세뇌시키려고 시도할 필요도 없었”(no attempt was made to indoctrinate them with the ideology of the Party)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만이 있어도 개념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불만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한 채 사소하고 특정한 불만 사항에만 초점을 맞추었지요.”(even when they became discontented, as they sometimes did, their discontent led nowhere, because being without general ideas, they could only focus it on petty specific grievances.)
오세아니아에서 개념(general ideas) 없는 노동자들을 당과 당원들이 요리하듯이, 동물 농장에서는 아무런 생각 없는 동물들을 나폴레옹과 돼지 위원회(a special committee of pigs)가 좌지우지합니다. 오세아니아에서는 텔레스크린이 당의 '대변인' 역할을 하지만, 동물 농장에서는 스퀼러(Squealer)라는 '대변돈'(代辯豚)이 존재합니다. 작고 뚱뚱한 식용 수퇘지인 그는 언변이 탁월해서 말도 안 되는 나폴레옹의 결정과 농장이 개악되는 상황에 대해 늘 궤변을 늘어놓곤 하지요. 예컨대 우유와 사과들을 돼지들이 독식하는 것에 대해 스퀼러가 한 궤변은 이러합니다. 돼지들은 우유와 사과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일을 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to preserve our health)입니다. (...) 우리 돼지들은 지식 노동자입니다. (We pigs are brainworkers.) 이 농장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건 전적으로 우리 돼지들 몫이라고요. (...) 우리가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는 것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 돼지들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십니까? 존스가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스노볼이 추방된 후 나폴레옹이 전권을 장악하자 스퀼러가 한 궤변이 있습니다. “나는 여기 있는 모든 동물이 나폴레옹 동지가 추가로 업무를 떠맡아 자기희생에 나선 일을 감사하게 여긴다고 믿고 있습니다. 동무들, 지도자 노릇이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자리는 아주 막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it is a deep and heavy responsibility.) 나폴레옹 동지만큼 모든 동물이 평등하다고 굳게 믿는 동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월이 지나갈수록 동물들의 삶은 더 힘들어지고 추운 겨울에도 식량이 더 부족해지자 배급량이 계속 줄어들었으나, 돼지와 개는 예외적으로 계속 같은 양을 공급받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스퀼러는 “평등한 배급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실시하려고 하면 그 자체로 동물주의의 사상을 위반하는 것”(A too rigid equality in rations would have been contrary to the principles of Animalism.)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쯤 되면 ‘아무 말 대잔치’인 셈이지요. 그런데 동물 농장에 있는 그 어느 동물도 그 궤변적 논리를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스퀼러가 자기와 같은 돼지들을 ‘지식 노동자’로 일컫는 것에 주목해 보세요. 지능이 낮은 다른 동물들에 비하면 돼지들이 지식인 자질을 갖추었다는 점을 인정해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알파벳을 배울 때 대부분의 농장 동물들은 알파벳 A에서 더 넘어가지 못했고, 말들은 알파벳 D를 넘어가지 못했지만, 돼지들은 완벽하게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며 사는 동물들을 속이고 궤변으로 홀리면서 자기 집단의 이익만을 꾀하는 돼지 같은 존재가 ‘지식 노동자’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을까요?
결국 우화인 “동물 농장”의 성격을 고려해 보자면, 이런 상황은 과거, 현재, 미래 시대에 지식을 도구화해서 다른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속이면서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데 기민한 거짓 지식인들을 경계하라는 경고의 의미를 품고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동물 농장”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사악한 권력자와 그런 존재에 빌붙어 사는 무늬만 지식인들과 무늬만 언론인들을 분별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점을 천명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동물 농장”에서는 사람이 동물로 변하지 않고 동물이 사람으로 변모해갑니다. 그것도 자칭 지식 노동자인 영리한 돼지들이 서서히 인간으로 탈바꿈합니다. 지식 노동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인간이 동물 되는 것이 동물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알 수 없으나, 동물이 인간이 되는 것이 인간에게 끼치는 폐해가 어떠한지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이 확실하게 제시해 주고 있지요.
인간으로 변신한 동물들은 과거, 현재, 미래 각 시대에 이미 침투해 들어왔고, 들어오고 있고, 들어올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꿀꿀!’ 소리를 내는 이런 돼지들을 우리 시대에서도 이미 숱하게 목격하지 않았나요? 그들 중에는 자기가 “동물 농장” 출신 돼지임을 자인하는 이들도 눈에 띄지요. 자기가 온 정성 다해 봉사하고 섬겨야 할 일반 국민들을 (개나) 돼지로 보는 이들 말입니다. 온 세상보다 더 고귀한 존재인 사람을 (개나) 돼지 이상의 존재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 돼지의 한계이지요. 이들만이 아니라 ‘자기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평등하다’고 소리 지르고, ‘평등한 시험 관리 규정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실시하려고 하면 그 자체로 인본주의의 사상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따지는 이들 무리는 목하 파업 중이기도 합니다. 다른 동물보다 지능이 조금 높아 “완벽하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돼지들이 동물 농장에서 특권층으로 변모하여 온갖 특혜를 누리듯이, 다른 이들보다 지능지수가 다소 높아 지식인이 된 것으로 인해 특권층으로 변모해 버린 이 ‘돼지’ 지식인들이 과연 지능지수의 시대는 저물고 이미 ‘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s) 시대가 도래했다는 경천동지할 지식을 머릿속에 떠 올려 본 적이나 있을까요?
-3. 이중사고의 시대(The Age of Doublethink)-
다음으로 ‘이중사고의 시대’가 ‘진실이 존재하며 행해진 것이 사라질 수 없는 미래 혹은 과거’에게 보내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수신자를 염두에 둔 것을 보면 발신자의 시대에는 진실이 존재하지 않고 행해진 것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겠지요. ‘이중사고’란 “한 사람이 두 가지 상반된 신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그 두 가지 신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the power of holding two contradictory beliefs in one’s mind simultaneously, and accepting both of them)을 의미합니다. 즉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도 그 둘 모두를 믿고 상쇄되는 두 가지 의견을 동시에 지지하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이율배반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진실이 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공들여 꾸민 거짓말을 하거나,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거나, 민주주의가 불가능한데도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경우 등을 의미하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기억을 눌러 이기는 과정(an unending series of victories over your own memory)이 요구되므로 구어(Oldspeak)로는 ‘현실 통제’(reality control)라고 불렸지요. 그런데 이런 과정을 아주 정확하게 수행하기 위해선 의식적으로 실행해야 할 뿐 아니라, 날조를 한다는 느낌이 들어 죄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실행해야 하기도 해야 합니다.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존스, 에런스, 러더퍼드 세 사람이 반역과 파괴 공작을 했다고 자백하고 처형되었으나 윈스턴은 그 자백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사진[공작했다는 그 날에 그들이 뉴욕의 한 행사장에서 찍은 사진의 복사판]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무죄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브라이언이 그를 심문하던 중 그 사진을 다시 보여 준 후에 기억통(the memory hole)에 넣어 소각시켜 버립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것은 재가 되어 알아볼 수도, 증명할 수도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건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얘기하자, 윈스턴은 그 사실은 존재할 뿐 아니라 자기 기억 속에 남아 있다면서 오브라이언도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고 항변하지요. 그러자 오브라이언은 자기는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바로 그때 윈스턴은 그것이 바로 이중사고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윈스턴]는 완전히 무력감에 빠졌다. 오브라이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오브라이언이 정말로 그 사진에 대해 잊어버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부인한 사실마저 벌써 잊어버렸을 것이고 또 잊어버린 행위 자체도 잊어버렸을 것이다.”(He had a feeling of deadly helplessness. If he could have been certain that O’Brien was lying, it would not have seemed to matter. But it was perfectly possible that O’Brien had really forgotten the photograph. And if so, then already he would have forgotten his denial of remembering it, and forgotten the act of forgetting.)
조금 복잡하지만, 이중사고란 어떤 행위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 때 의도적으로 그 기억을 지워버린 후에 그 잊어버린 일까지도 무의식적으로 잊어버리는 작업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이중사고에 익숙해지면 오브라이언처럼 잊어 버릴 필요가 있는 것은 잊어버렸다가 나중에 필요한 순간이 되면 다시 기억에 떠올려 놓고는 곧바로 잊어버리는 능력이 생깁니다. 오세아니아에서 “평화부(the Ministry of Peace)가 전쟁(war)을, 진리부(the Ministry of Truth)가 거짓말(lies)을, 애정부(the Ministry of Love)가 고문(torture)을, 풍요부(the Ministry of Plenty)가 굶주림(starvation) 문제를 관장”하는 모순이 그저 우연이나 평범한 위선의 결과가 아니라 엄연한 진실로 인식되는 비밀이 바로 이 이중사고에 있는 것이지요.
현재 절대 권력을 쥔 오세아니아의 빅브라더와 당은 어떠한 과거의 역사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미래와 상응하도록 과거를 조작하는 것도 손바닥 뒤집기처럼 수월합니다. 당의 기록과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중사고를 통해 통제하면 됩니다. 기록과 기억 중 어느 쪽이 이길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라는 당의 표어는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과거를 조작하면서 통제하기 위해 당은 각 건물에 수천 개, 혹은 수만 개에 달하는 기억통(the memory hole)을 비치해 두고 온갖 서류들을 소각합니다. 이런 사정은 “동물 농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퀼러에 의하면 전권을 쥐고 있는 나폴레옹과 돼지 위원회는 매일 소위 ‘서류철’(files), ‘보고서’(reports), ‘회의록’(minutes), ‘각서’(memoranda) 등의 문서들을 처리하느라 엄청난 노동을 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글을 가득 적어 넣어야 하는 커다란 종이에다 이런 작업들을 진행했는데, 글이 다 적히면 화덕(furnace)에 집어넣어 태워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조작된 각종 수치는 스퀼러가 동물들 앞에서 모든 게 더 나아지고 있다고 궤변을 쏟아 놓을 때 중요한 증거가 되지요. 그렇지만 동물들에게는 그 수치 이외에 비교할 만한 근거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저 속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퀼러가 “그런 소각 작업이 농장의 번영에 가장 중요하다.”(This was of the highest importance for the welfare of the farm.)라고 말하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지요.
지금 이 시대에도 과거의 진실을 조작하는 작업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세아니아의 빅브라더나 당처럼 현재의 권력을 틀어쥔 자들에 의해서이지요. ‘동북공정’[중국에서 만주 지방의 지리, 역사, 민족 문제 따위를 연구하는 국가 연구 사업]을 밀어 붙이는 중국이나 강점기 시대의 ‘위안부’와 ‘징용’의 진실을 왜곡시키는 일본이 현재 국력이 없다면 그렇게 시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만 특별한 권력 없이도 과거 조작하는 일은 왕왕 벌어집니다. 오세아니아의 ‘텔레스크린’ 수준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일상과 도무지 분리될 수 없는 인터넷과 핸드폰을 통해 과거와 현재 사실들이 거침없이 날마다 가짜 뉴스로 생산되고 있으니까요.
형제단의 지도자인 골드스타인이 말한 대로, “과거의 신문이나 역사책이 언제나 미화되고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기 마련이지만”(Newspapers and history books were, of course, always coloured and biased), “실력을 쌓으려면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아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to be efficient it was necessary to be able to learn from the past, which meant having a fairly accurate idea of what had happened in the past.)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교훈을 얻어 유능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역사를 직시하고 교훈을 받는 나라가 있고 역사를 조작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거울로 삼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과거를 변명하고 미화시키려는 이들이 존재하는 법이지요.
‘진실이 존재하며 행해진 것이 사라질 수 없는 미래 혹은 과거’에 살기 위해서는, 첫째로 언론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역사를 매일 기록해가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것은 김훈 작가의 제안입니다.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저널리즘으로 존재하냐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존재할 것이냐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진보니 보수니 따지는 것에 앞서, 구체적인 삶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혼란의 중심에 “객관적 저널리즘 대신 사회세력으로 존재하기”로 결단한 언론 세력들이 버티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진실이 존재하며 행해진 것이 사라질 수 없는 미래 혹은 과거’에 살기 위해서는, 둘째로 우리 각자가 이중사고를 물리치고 성화된 분별력을 개발해 가는 게 절실합니다. 언론과 에스앤에스에 등장하는 뉴스에 대해 팩트 체크를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에 그 사실의 의미를 분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거짓 뉴스에 대해 항의하고 진실을 알리는 일에 참여하는 경우도 생길 것입니다. 오세아니아의 권력자 오브라이언도 진지하게 동의하는, ‘과거가 미래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면,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라는 계명이 통하는 시대를 맞보게 될 것입니다.
-4. 고독의 시대(The Age of Solitude)-
다음으로 ‘고독의 시대’가 ‘홀로 고독하게 살지 않는 미래 혹은 과거’에게 보내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수신자를 염두에 둔 것을 보면 발신자의 시대에는 홀로 고독하게 산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겠지요. 왜 오세아니아 사람들은 고독할까요? 우선 친구들(friends)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동지들(comrades)만 존재하지요. 이 동지들과의 관계가 어느 정도일까요? 면도날 품귀 현상이 생기자 윈스턴에게는 숨겨둔 게 두 개 있었지만, 사임이나 파슨스 동지가 빌려달라고 할 때 없다고 둘러 댑니다. 다음으로 가족이란 게 존재하지만 가족 간의 사랑과 희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정은 그저 모든 사람이 밤낮으로 자기를 잘 아는 정보원에 둘러싸이게 되는 장치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감시하면서 고발하도록 아이들에게 “열쇠 구멍으로 방 안 얘기를 엿들을 수 있는 나팔형 보청기”(Ear trumpets for listening through keyholes)를 지급해 주는 상황이니까요. 실제로 파슨스는 자기가 꿈속에서 “빅브라더를 타도하자”라는 말을 했다며 일곱 살 난 딸이 고발해서 감옥에 가게 되지요. 친구와 가족이 있어도 외롭다고 하는 판에 온통 동지들로 둘러싸여 있고, 자기를 고발할 거리만 찾고 있는 가족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사회 속에서 외롭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연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욕은 사상죄에 해당되고 쾌락을 느끼는 성행위는 반역으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왜 오세아니아의 당은 이렇게 당원들의 성욕을 통제하려 들까요? 윈스턴과 연애하는 모험을 감행한 줄리아는 그 이유를 간파하고 있습니다. “성 본능은 당의 통제권 밖에 자체 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에 당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것을 파괴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성욕을 박탈하면 히스테리를 유발하기 때문에 당의 입장에서는 이를 전쟁열과 지도자 숭배로 전환할 수 있어서 바람직한 것이라고 했다.”(It was not merely that the sex instinct created a world of its own which was outside the Party’s control and which therefore had to be destroyed if possible. What was more important was that sexual privation induced hysteria, which was desirable because it could be transformed into war-fever and leader-worship.) 고독할 충분조건을 다 갖춘 셈이지요.
그런데 고독감을 느낄 새가 없다는 게 이 사회의 아이러니입니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혼자 있을 수 없도록 온갖 일, 오락, 시위 활동과 같은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그 고독감을 글로 표현하고 연애를 통해 해결하려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윈스턴이 그 중 한 사람이었고 결국엔 당의 감시망에 걸려들어 희생당하게 되지요. 평균 수명이 60세인 무산 계급 노동자들에 비해 짧은 40세에 생애를 마감한 당원 윈스턴이 과연 단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미련이 남아 있었을까요? “사생활과 사랑, 그리고 우정이 있고 부모 형제가 이유를 묻지도 않고 서로를 지켜 주던 시대”는 사라진 채, 오직 “공포와 증오, 고통”은 존재하나 “감정의 존엄성”(dignity of emotion)도, “깊고 복잡한 슬픔”(deep or complex sorrows)도 없는 사회 속에서 그저 생존하기만 하는 삶 말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윈스턴이 고문당하는 동안에 결정적인 충격을 가하기 전에 오브라이언이 언급한 말은 가증스럽기만 하지요. “자네는 보통 사람들이 지니는 감정을 다시는 지니지 못할 걸세. 자네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무감각해질 거란 말이네. 사랑이나 우정, 삶의 기쁨과 웃음, 호기심, 또는 용기나 진실성도 다시는 지니지 못하게 될 걸세. 그야말로 텅 비게 되는 거지. 우리는 자네를 텅 비게 만든 다음 우리와 같은 것으로 채울 걸세.”(Never again will you be capable of ordinary human feeling. Everything will be dead inside you. Never again will you be capable of love, or friendship, or joy of living, or laughter, or curiosity, or courage, or integrity. You will be hollow. We shall squeeze you empty, and then we shall fill you with ourselves.) 마치 심문 당하기 전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윈스턴이나 다른 당원들이 그러한 인간적인 것들을 누릴 수가 있었다는 듯이 떠벌리는 그의 이중사고 말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윈스턴은 특이한 측면에서 고독한 존재였습니다. 그를 고문하던 오브라이언이 지적한 대로, 그가 ‘마지막 인간’(the last man)이기 때문에 고독했습니다.
“이보게, 윈스턴, 자네가 인간이라면 자네는 마지막 인간일세. 자네와 같은 인간들은 이미 멸종했네. 우리가 그 후계자들이지. 자네는 ‘혼자’라는 걸 이해하는가? 자네는 역사 밖에 있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단 말이네.”(If you are a man, Winston, you are the last man. Your kind is extinct; we are the inheritors. Do you understand that you are ALONE? You are outside history, you are non-existent.)
단순히 그가 인간(‘a man’)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같은 종류(‘your kind’)의 인간이기 때문에 외로운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 종류 중 다른 이들은 다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도대체 윈스턴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그 문맥을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오브라이언에게 고문당하는 동안에도 윈스턴은 그의 논리에 반항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온갖 논리로 빅브라더의 세계가 영원할 것이라는 얘기가 이어지자, 윈스턴은 그들이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그런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꿈이요, 불가능하다면서 그 이유는 “공포와 증오, 잔혹함 위에 문명을 세운다”(to found a civilization on fear and hatred and cruelty)는 건 “생명력이 없어서”(have no vitality) 자멸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지요. 그러자 오브라이언은 노동자나 노예들(the proletarians or the slaves)은 짐승처럼 무력해서 자기들을 전복시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윈스턴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반드시 그 노동자와 노예들이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될 것이고 결국엔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will tear you to pieces) 것이라고 말하지요. 그런 일이 일어나리란 증거라고 있느냐고 오브라이언이 묻자, 바로 그때 윈스턴이 하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믿습니다. 당신들이 실패하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당신들이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정신이랄까, 어떤 원칙 같은 게 있습니다.” (No, I believe it. I KNOW that you will fail. There is something in the universe-I don't know, some spirit, some principle-that you will never overcome.) 이 말을 듣고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이 신을 믿는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렇지만 윈스턴이 신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한 오브라이언은 그들을 패배시킬 그 원칙(this principle that will defeat us)이란 게 뭔가라고 묻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정신(The Spirit of Man)이라고나 할까요.” 윈스턴의 답변입니다. 바로 이 대화 후에 등장하는 게 바로 앞에서 소개한 오브라이언의 언명입니다.
어떠한 독재자, 권력가도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정신(spirit)이나 보편적 원칙(principle)이 이 세상에 엄존함을 믿는 존재가 이미 멸종됐다는 오브라이언의 말을 접하면서 고독감을 느끼는 분이 계신지요? 윈스턴과 동족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독립적인 사고를 근절하고 이중사고로 역사를 조작함으로써 인간 말살을 꾀하는 빅브라더 시대가 가능했던 것은 윈스턴과 같은 종족이 죄다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빅브라더와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의 후계자들인 셈이지요. 그렇다면 윈스턴이 지적한 정신이나 원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인간 본능(human instinct)의 일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닙니다. 예컨대 자기 마음속에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겠다는 감정이 들 때 이 감정은 그런 이웃을 도와야만 한다는 감정과는 다릅니다. 전자의 감정은 고귀한 본능입니다. 항상 생기는 게 아니니까요. 자기 필요들을 먼저 채우려는 이기적인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더 많은 게 인생살이 아닌가요? 비록 고귀한 것이지만 전자의 감정은 후자의 감정과는 다릅니다. 후자의 감정은 보편적인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지요. 이런 경우도 있겠지요.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지금 말해야만 한다는 감정과 말을 아껴야만 한다는 감정이 들 때와 같이 마음속에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이 생길 때 이것들을 판단하는 제3의 요소가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제3의 요소는 두 가지 감정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겠지요. 이처럼 우리 마음속에는 보편적인 성격을 띤, 도덕적인 판단 요소가 존재합니다. 이것은 본능과는 다릅니다. 이런 원칙을 교육으로 내재화된 사회적인 관행(social convention)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우측통행’과 같은 사회적 관행은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와 같은 수학적 공리(mathematical axiom)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전에는 ‘좌측통행’이었다가 요즘에는 ‘우측통행’으로 바뀌는 식으로 사회적 관행은 변경될 수 있지만, 수학적 공리는 항상 참인 명제이므로 변경될 수가 없으니까요. 윈스턴이 말한 원리는 수학적 공리와 같은 차원에 있습니다. 본능이나 사회적 관행을 초월한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러한 보편적인 원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C. S. 루이스가 전 세계 문화와 종교와 철학을 망라해서 정리한 후 “The Abolition of Man”에서 소개한 “Tao” 혹은 “도(道)”가 가장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1. 일반적인 선의에 관한 법(The Law of General Beneficence)
2. 특별한 선의에 관한 법(The Law of Special Beneficence)
3. 부모, 연장자 및 조상에 대한 의무(Duties to Parents, Elders, Ancestors)
4. 자녀 및 후손에 대한 의무(Duties to Children and Posterity)
5. 정의에 관한 법(The Law of Justice)
6. 신뢰와 진실에 관한 법(The Law of Good Faith and Veracity)
7. 자비에 관한 법(The Law of Mercy)
8. 도량[관대함]에 관한 법(The Law of Magnanimity)
중세의 종교와 근대의 이성이라는 가치를 이분법적인 구분이라고 간주하고 이 두 가치들로부터 벗어나는 ‘해체’를 외치며 다양한 가치들을 인정하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추구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 보편적 원리들을 품고 실행하는 일에 고독하게 느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세월 따라 왔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시대사조 말고 영원히 변함없는 도덕적 원리를 붙드는 게 더욱 가치 있는 선택이 됨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더구나 삶의 여러 영역에서 다양성과 다원성의 필요성은 얼마든지 인정하더라도,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철학 사조를 따르는 것은 무분별한 자세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다.’라는 그 언명 자체도 상대적일 테니까요. 자가당착이지요. 다음으로는 이 보편적 원리들의 근원을 성찰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이 원리들의 근원은 ‘유일신’(God) 아니면 ‘그 무엇’입니다. 이 성찰의 결과가 우리 각자의 인생 항로를 결정할 것입니다. 성찰의 결과 그 근원이 유일신이라면 그 신을 신뢰하며 사는 길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겠지요. 혹은 그 근원이 ‘그 무엇’이라면 ‘그 무엇’이 지향하는 길을 따르는 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인문학과 성경의 접점을 모색하는 이 블로그에서는 그 근원이 유일신이라는 가능성을 두고 진지하게 성찰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그 무엇’의 가능성은 다 타진해 보면서도, 성서와 예수님과 역사와 교회라는 중차대한 단서들이 존재하는 이 한 가지 가능성을 성찰해보지 않는 것은 무모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 보편적인 원리와 그 근원에 관한 문제를 의미 있게 다룬, C. S. 루이스의 “Mere Christianity”(‘순전한 기독교’로 번역됨)와 “The Abolition of Man”(‘인간 폐지’로 번역됨)을 일독할 것을 권합니다.
-조지 오웰의 인본주의와 기독교 신앙-
조지 오웰은 인문학이나 정치에 진지한 관심을 둔 이들에게는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46세라는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점철된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소련식 사회주의와 영미식 자본주의를 동시에 반대했습니다. 그의 평전을 쓴 박홍규 교수는 그의 사회주의를 ‘decency’라는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흔히 ’인간다운 품위’ 정도로 번역되는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으나, 나는 ‘본질적인 품위, 무엇보다도 솔직한 관대함’으로 이해한다. 이는 어떤 도그마나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치적 교조주의나 계획적 사회 개혁 또는 종교적 절대주의 등에 반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 속에 오웰과 같이 ‘품위 있는’ 지식인 혹은 ‘품격 높은’ 사상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오웰의 에세이에 의하면 그는 철저한 인본주의자(humanist)입니다. 그는 평생토록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믿음, 그리고 우리한테는 하나뿐인 이 지상에서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the belief that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and that our job is to make life worth living on this earth, which is the only earth we have)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이런 확신이 다음 글의 토대가 되었겠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꽤 많은 즐거움을 누리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인생은 고통이며 아주 어리거나 아주 어리석은 자들만이 달리 생각한다. 궁극적으로 봐서 이기적이고 쾌락주의적인 건 기독교적 태도다. 그런 태도의 목적은 언제나 속세 생활의 고통스러운 투쟁을 벗어나는 것이며, 일종의 천국이나 열반 속에서 영원한 평화를 찾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인본주의적 태도는 투쟁이 계속되어야 하며, 죽음은 삶의 대가라고 본다. (...) 인본주의자와 신앙인 사이에 휴전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는 듯하지만, 두 입장은 사실 화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세상 아니면 저 세상을 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을 이해한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이 세상을 택하게 되어 있다. 다른 어디선가에서 새로운 생활의 연장을 얻을 희망 때문에 타고난 능력을 불구로 만드는 대신 일하고, 번식하고, 죽어가기를 계속한다면, 그들은 이 세상을 택할 것이다.”(Most people get a fair amount of fun out of their lives, but on balance life is suffering, and only the very young or the very foolish imagine otherwise. Ultimately it is the Christian attitude which is self-interested and hedonistic, since the aim is always to get away from the painful struggle of earthly life and find eternal peace in some kind of Heaven or Nirvana. The humanist attitude is that the struggle must continue and that death is the price of life. (...) Often there is a seeming truce between the humanist and the religious believer, but in fact their attitudes cannot be reconciled: one must choose between this world and the next. And the enormous majority of human beings, if they understood the issue, would choose this world. They do make that choice when they continue working, breeding and dying instead of crippling their faculties in the hope of obtaining a new lease of existence elsewhere.) (“Lear, Tolstoy and the Fool” 중에서)
기독교[그의 글 속의 종교는 기독교를 가리킴]에 대한 조지 오웰의 인식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항상’ 지상의 삶에서 겪는 고통스러운 투쟁에서 ‘도피’하여 천국 혹은 ‘열반’에서 누릴 영원한 평화를 구하기를 겨냥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생존’이 연장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자기의 능력을 ‘손상’시키는 존재들로 묘사하고 있지요. 먼저 그의 오해부터 풀어 보겠습니다.
기독교는 삶의 투쟁에서 ‘도피’하기를 겨냥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능동적인 자세를 상찬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베드로전서 3:17)라든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suffering unjustly)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답다.”(베드로전서 2:19)라는 구절들이 차고 넘칩니다. 천국을 누리려면 고난의 풀무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사도행전 14:22)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대대로 자기에게 고난이 닥치면 기쁘게 여기는 태도를 배양하면서 그 고통의 과정을 통해 인격적인 온전한 성숙이 이루어지길 갈망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2-4)
기독교의 천국은 ‘열반’(Nirvana)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열반’이란 힌두교적 개념으로서, ‘카르마’(karma), 즉 환생을 통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라 끝없이 진행되는 윤회[삼사라(samsara)]를 통해 자신의 악행의 열매를 먹어야 하는 인간이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가리킵니다. “개인적 존재가 소멸되어 비인격적인 신적 실체(Brahman)로 흡수되는 것을 포함하는 최종적 해방”(the final release involving the extinction of individual being and absorption into impersonal divine reality [Brahman]-존 스토트) 상태이지요. 기독교인이 고대하고 누릴 천국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아닌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로 허락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더구나 개인적 존재가 소멸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한 고유한 인격체가, 비인격적인 신적 실체가 아닌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인격적인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영원한 교제를 누리는 장이지요. 천국은 단순한 ‘생존’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토록 지속될 풍성한 ‘신생’의 향연입니다(요한계시록 21장 참조).
기독교는 각 개인의 능력을 ‘손상’시키는 것을 명령하기는커녕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그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공익을 위해 봉사하라고 명령하고 그런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자가 마땅히 취해야 할 바른 자세라고 성서 곳곳에서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곳만 보겠습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common good)을 위한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7) 이 구절들이 밝히고 있는 놀라운 점 한 가지는, 우리가 품고 있는 재능과 맡은 직무와 그 결과를 통해서 공동 이익을 겨냥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주님을 섬기는 길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인간의 행복이 서로 상충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길이 바로 우리 모두의 공동 이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기독교가 어떻게 오웰이 지적한 그런 퇴행적이고도 병적인 영적 상태를 ‘항상’ 겨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에 대한 조지 오웰의 인식이 안타까운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지적한 대로 기독교 신앙과 ‘인본주의’(humanism)는 양립할 수 없지만, 기독교 신앙과 ‘인문주의’(Humanism)는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휴머니즘이란 용어는 철학과 문학에서 사용되는 의미가 각각 상당히 다릅니다. 철학 사조상으로 휴머니즘(humanism)이란 “교회의 권위와 대비하여 자율적인 인간 이성을 강조하는 입장”(a philosophical position that stresses the autonomy of human reason in contradistinction to the authority of the Church-“The Free Dictionary”)으로서, “인간의 능력이나 가치보다 더 우월한 어떠한 능력이나 도덕 가치도 부인”(the denial of any power or moral value superior to that of humanity)하지요. 이 휴머니즘 앞에는 주로 ‘세속적’(secular)이란 단어와 ‘과학적’(scientific)이란 단어가 따라붙습니다. 종교의 권위와 자율적 인간성에 기반을 둔 세속성 사이에 균열을 보인 것이 18세기 계몽주의(the eighteenth century Enlightenment) 시대에 과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시대로부터 근대(modern times)가 시작되어 이런 의미의 휴머니즘(인본주의)이 철학 사조를 장악하게 되었지요(로널드 웰즈).
한편 문학사조상으로 휴머니즘(Humanism-주로 대문자 사용)이란 고전 연구에 근거한 르네상스 문화 운동으로서, “탁월성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적인 잠재력을 중시하고 고전적인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학, 예술 및 문명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를 장려한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적이고도 지적인 운동”(A cultural and intellectual movement of the Renaissance that emphasized human potential to attain excellence and promoted direct study of the literature, art, and civilization of classical Greece and Rome-“The Free Dictionary”)입니다. 이 휴머니즘 앞에 주로 ‘고전적’(classical)이라는 단어가 붙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부활 혹은 회복(rebirth)이란 의미를 띤 채 ‘고전주의의 부활’(rebirth of classicism)을 가리켰으므로, 그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연구하여 모방하거나 개인을 자유롭게 해방하려는 분위기가 두드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오웰도 인용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man the measure of all things)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정확한 것으로 수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인문주의자들에게는 이 르네상스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우위”(the elevation of ‘man’ over ‘God’)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전자의 인문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잠재력, 즉 인간 지식과 행동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품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르네상스가 무엇보다도 인간이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예배하며, 발견의 시대(an age of discovery)라는 새로운 시대 상황 속에서 기독교적 삶을 살기 위한 방식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로널드 웰즈는 이 시대의 휴머니즘(인문주의)을 ‘철학’(a philosophy)이 아니라 권위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a way)으로 정의했습니다. 모든 권위에 대항하는 ‘반란’(rebellion)이었다기보다는 잘못된 권위 대신에 올바른 권위를 다시 확립하기 위한 반란이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당시 북부 유럽에서 진행된 ‘반란’ 중에는 기독교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예컨대 대부분의 인문주의적 학문은 기독교적 학문이었고(더 정확한 신약성서를 번역하려고 노심초사했던 에라스뮈스가 하나님께 반란한 것일까요?), 대부분의 인문주의적 예술 또한 기독교적 예술이었던 것입니다(탁월한 예술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헌신한 미켈란젤로가 하나님께 반란한 것일까요?).
유일신을 믿지 않는다면 인본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본주의가 유일신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의 가치를 백안시한 기반 위에 서 있다면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18세기 계몽주의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춘 인본주의가 합리주의(rationalism-이성의 활용이 지식에 대한 가장 주요한 근거를 제시한다고 보는 이론)라는 세계관으로 지난 200년 이상 인류 사회를 주도해 온 후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막다른 현실을 한번 살펴보세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면서 인간 이성과 그 활용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인간의 지식과 능력을 절대시한 결과 말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야기된 전 세계적인 피해를 접하며 최근엔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는 와중에도, 수백만 에이커나 되는 삼림 지역을 불사르며 몇 주째 지속되는 미국 서부 지역 산불 피해자가 한 말이 요즘 제 귓전에 맴돕니다. “아마겟돈처럼 느껴져요!”(It feels like Armageddon.) 인간 이성의 한계가 있다는 점을 철학과 과학이 밝힌 지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도대체 언제쯤 우리가 그 이성과는 다른 차원의 보편적인 원리 혹은 이성의 세계를 초월하는 영적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될까요? 그리하여 그 원리와 가치의 근원 되시는 유일신을 믿는 것과 인간의 행복이 서로 상응할 수 있고, 유일신의 말씀과 원리를 좇는 길이 바로 우리 모두의 공동 이익이 된다는 엄연한 진실을 온 인류가 깨닫게 되는 그 날을 소망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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