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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我)-나를 알라

최고가 아니라도 괜찮아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11. 27.

(Courtesy of Kelly)

최고가 아니라도 괜찮아

소수의 유대인으로 시작된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을 정복했다. 역사적 신비 중 한 가지다. 그 과정의 선두 주자는 사도 베드로였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 제국 각지로 복음을 나른 이 중에는 사도 바울이 으뜸이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대표 격으로 펼친 사역 여정이 사도행전에 고스란히 실려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열린 결말을 고려해 보자면, 그의 배턴을 이어받아 선교의 장을 더욱 널리 확대한 이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록상으로는 그 이후에 혁혁한 선교 여정을 시도한 이들이 거의 없었다. 역사학자 바트 어만에 의하면, 그 이후부터 첫 4세기까지 단 한 가지 선교 활동과 연관된 일화라도 알려진 선교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겨우 세 명정도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즉 현재 터키 북부 폰토스에서 선교하면서 ‘기적을 행하는 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레고리우스, 프랑스 투르에서 이교도를 대상으로 전도 활동을 펼친 마르티누스, 그리고 가자의 이교 사당들을 폐쇄한 후 그곳 사람들을 개종시킨 주교 포르피리우스가 그들이다. 심지어 그들조차도 각기 다른 외딴곳에서 활동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지는 선교를 담당했을까? 놀랍게도 일반 신자들이었다. 노방 전도나 축호(逐戶) 전도, 즉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방문해서 하는 전도로 이웃의 개종을 인도한 게 아니었다. 일상에 펼쳐진 사회관계망을 이용하여 전도한 것이었다. 당시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와 그렇지 않은 시골에서,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방식으로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던 일반 신자들이 이룬 업적이었다. 생각해 보라. 사회관계망이란 것이 다른 사람과 서로 겹치는 대상도 있겠지만, 서로 똑같은 경우는 없지 않은가. 그 일반 신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사회관계망 안에 엮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의 사회관계망으로도 확장할 수 있었다​​(바트 어만, "기독교는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나")​. 서로 숨길 게 없이 열린 일상의 장 속에서 그들은 빛 된 삶을 살며, 이웃과 진정성 있게 소통했다.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 중에 그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해 물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분명하게 전할 수 있었다. 신자들의 언행을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들어온 이들은, 자기 가족들까지도 다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들도 각각 그 공동체 안에서 보고 들은 바를 자신들의 친구와 친지들에게 전했다. 무명의 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선교의 영웅들이었다.

 

선교 활동뿐이겠는가.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무명의 인물들 덕분이다. 자신의 능력과 은사를 가지고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 경주하는 이들 덕에 오늘도 우리는 산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각광을 받고 인기를 독차지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최고의 지위나 최고의 실력이나 최고의 인기를 가진 자들이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나 SNS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그래서인지 일반인 중에는 그들의 영향력과 인기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그 최고에 오른 이들 자리에 오르려고 불철주야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 노력과 열성이 그들을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성장시킬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원하는 자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을 대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보라. 이렇게 최고 자리에 오르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최고의 자리는 그 이름답게 극소수만이 지킬 따름이다. 그것도 짧은 일정 기간만.

 

어떤 의미에서는, 최고가 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선 특정 분야의 세세한 조건을 달지 않고서는 최고를 가리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예컨대 누가 달리기에서 최고인가? 올림픽 100미터 금메달리스트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는 딱 거기서만 최고일뿐이다. 달리기의 최고는 아니다.  그 누가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1,000미터, 마라톤에서 다 최고일 수 있는가? 심지어 온갖 세세한 조건을 붙여도, 그 조건을 평가하는 것이 주관적이어서 최고를 가릴 수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예컨대 인터넷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세계 최고 미인 후보들을 한번 주목해 보라. 그들만 놓고 보더라도 과연 누가 최고인가?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누가 최고 각선미 미인인가? 세계 모든 사람이 만장일치로 인정하는 미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더구나 특정한 기준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최고로 인정될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간 그 최고 자리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고를 좇는 것은 환상을 바라는 것이자, 신기루를 좇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고가 아닌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특정하게 세분화된 한 영역에 최고가 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면서 탁월한 수준을 유지하는 것도 얼마든지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이다. 에밀리 와프닉이 주장한 대로, 특정 분야에서 최고 수준과 완전히 평범한 수준 사이에는 수많은 중간 영역이 존재한다. 이것은 그 분야에서 필요한 정도로 유능하면, 자신의 창의력과 열정을 결합한 기술로 얼마든지 뛰어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정도로 유능한 사람들은 다른 분야에서도 최고 수준은 아니더라도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 와프닉이 ‘다능인’(multipotentialite)이라고 부르는 이들처럼 몇몇 분야에서 대단히 능숙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이들은 ‘다재다능한 사람’(jack-of-all-trades)은 아니겠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다재다능한 사람’이란 표현은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그가 그 일 하나에도 아주 능숙하지는 않다는 의미도 품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잘 계발하여 그 각각의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을 이루는 사람이다. 이런 상황을 잘 묘사하는 영어 표현이 바로 ‘Jack-of-many-trades, master of some’, 즉 ‘재주가 많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전문가’라는 말이다(에밀리 와프닉, “모든 것이 되는 법”). 어느 특정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보다는, 탁월하고 효과적인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 그 한 가지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자신을 갈고 닦는 과정에서 자기가 가진 다른 역량을 발견하여, 다른 분야에서 꽃피우는 덤도 누리게 된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최고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다양한 재능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여러 사람에게 베풀려고 태어났다. 최고가 아니라도 괜찮다. 적어도 나는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