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我)-나를 알라

다이너마이트 같은 부적응자들의 서사로 자기만족을 깨뜨리는 플래너리 오코너(4)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11. 1.

(뉴욕 센트럴 파크, Courtesy of TravelScape)

다이너마이트 같은 부적응자들의 서사로 자기만족을 깨뜨리는 플래너리 오코너(4)

-부적응자의 섬뜩한 진리 선언: “그 사람이 모든 것을 흔들었어요.”-

오코너의 작품 속에서 폭력적 행위나 충격적인 발언을 매개로 우리 안에 잠복해 있는 자기만족과 독선을 무너뜨리는 주인공들은 뜻밖의 인물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을 포괄할 수 있는 영어 단어가 바로 “좋은 사람은 드물다”에 등장하는 ‘부적응자’(The Misfit)를 가리키는 ‘misfit’과 “성령의 성전”(A Temple of the Holy Ghost)에 나오는 ‘freak’(기인 혹은 미치광이로 번역됨)일 것입니다. 전자의 의미는 ‘다른 모든 사람과 행동이 매우 달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이고, 후자의 의미는 ‘행동이나 태도가 대다수의 사람들과 매우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 두 단어가 그 두 작품 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작품 곳곳에서 사람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진실의 메시지를 천명하는 이들의 면모를 드러내기에 딱 들어맞습니다. 예를 들어, “계시”에서 터핀 부인이 자신의 독선을 깨닫도록 ‘계시’를 전달해 준 이는, 별안간 자기에게 책을 던지고 자기 목을 조른 여대생 메리 그레이스였습니다. “좋은 시골 사람들”에서 온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듯 자신만만한 철학박사 노처녀 헐가의 무신론적 오만을 깨뜨린 이는, 그녀의 의족을 가지고 달아난 사기 절도범이자 성경 판매원 맨리 포인터였습니다.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에서 셰퍼드가 자신의 공허와 자기 환상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이는, 내반족을 가진 비행 청소년 존슨이었습니다. 그리고 “불 속의 원”에서 자기 소유에 집착하며 사는 코프 부인의 자기중심적 태도를 무너뜨린 이는, ‘이 숲과 사모님 다 하느님의 것이에요.’라고 언급하면서 그녀의 농장에 방화하고 떠난 짓궂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misfit’(부적응자)과 ‘freak’(기인)이라는 단어의 주인공 두 사람이 전해 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부적응자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원래 아버지를 살해하고 감옥살이를 하던 중에 탈옥해서 도주하다가, 여행 중 길을 잘못 들어 차 사고가 난 한 할머니 일가족을 만나 그들 모두를 살해해 버리는 냉혈한입니다. 가장 나중에 총살당하는 할머니와 그가 대화를 나누는 중에, 할머니가 그에게 기도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이후에 그녀는 예수님이 도와 주실 테니 기도해 보라고 무려 다섯 번씩이나 권면합니다. 그렇게 권면할 때마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대꾸하다가, 한번은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요. 혼자서도 잘해요.”(I don’t want no help. I’m doing all right by myself.)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권면을 들은 후에, 그는 할머니에게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이렇게 응수합니다.

 

“죽은 자를 일으킨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는 모든 것을 흔들었어요. 만일 그가 자기 말대로 했다면, 우리에게는 모든 걸 버리고 그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죠. 그런데 만일 그가 안 그랬다면, 우리는 남아 있는 짧은 시간을 한껏 즐기는 수밖에 없어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불을 지를 수도 있고, 다른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어요, 나쁜 짓만큼 재미난 게 없거든요.” [Jesus was the only One that ever raised the dead. (...) and He shouldn’t have done it. He thown (sic) everything off balance. If He did what He said, then it’s nothing for you to do but throw away everything and follow Him, and if He didn’t, then it’s nothing for you to do but enjoy the few minutes you got left the best way you can—by killing somebody or burning down his house or doing some other meanness to him. No pleasure but meanness,]

 

비록 그의 답변이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린 경우를 언급하면서 전개되고 있지만, 그 취지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심도 있게 논의하는 고린도전서 15장과 같은 맥락에 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즉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대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했다. 그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5백 명 이상이나 되고, 그 대부분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들이 이 부활 사실을 전파하는데, 왜 믿지 않는가? 예수님이 죽은 자 중에 첫 번째로 부활했기 때문에, 그를 믿는 우리도 장차 몸의 부활을 누릴 것이다. 만일 이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을 좇으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우리는 이 세상 누구보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내일 죽을 텐데,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게 [LET US EAT AND DRINK, FOR TOMORROW WE DIE. (30절)] 더 낫다.’ 부적응자의 논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죽은 자를 살렸기 때문에, 온 세상을 뒤흔들었다는 말이니까요. 죽음을 정복한 그가 온 세상의 구세주요 주관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밝혀진 이상, 그를 따라 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지요.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죽음을 극복할 수 없었다면, 이 세상은 무의미할 뿐입니다.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더 낫겠지요.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니까요.

 

부적응자가 으르렁거리며 말하는 게 두려웠는지, 할머니는 자기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른 채, “어쩌면 그분이 죽은 자를 일으키지 않았을지도 몰라요.”라고 중얼거립니다. 죽음을 앞둔 할머니의 안타까운 불신앙 고백이지요. 그 말을 듣고 그가 주먹으로 땅을 치며 목소리 높여 말합니다.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 안 그랬다고 말 못 해요. 내가 직접 못 본 건 잘못이에요. 직접 봤다면 확실히 알았을 텐데, 직접 봤다면 확실히 알았을 테고,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럴듯한 논리이지만, 이 말은 성서적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조금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그 부활한 몸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못 자국’과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아서라도(요한복음 20:24-29) 그 사실을 확신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바로 의심 많은 제자 도마(Thomas)였고, 그 후에 그가 한 고백이 바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My Lord and my God!)이었지요. 왜 이렇게 직접 보고 확인해야 했을까요? 그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점 이후의 사람들은 그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믿는 것이 성서적 원리입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도 믿고 사랑하며 기뻐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나 사랑하고 있으며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그분을 믿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영혼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1:8-9,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바로 성서적인 구원의 길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의 성전”에 나오는 ‘기인’(freak)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12살 난 어느 소녀의 집에 14살 된 두 육촌, 조앤(Joanne)과 수전(Susan)이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육촌들은 로마 가톨릭 수녀원 학교에 다니며 주로 옷과 남자에 관심이 많습니다. 얼마 전 그들의 수녀가 고린도전서 6:19-20을을 인용하며, 몸을 ‘성령의 전’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성전 1, 성전 2라고 부르지요. 그 소녀의 어머니는 앞으로 설교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동네 소년 두 명이 그 육촌들을 박람회에 데려가도록 주선하지만, 12살 소녀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박람회 구경을 하고 돌아온 육촌들은 소녀에게, ‘온갖 이상한 사람들’(All kinds of freaks)을 다 봤다면서, 딱 한 가지만 빼고 다 좋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천막 안에서 기인(freak) 한 사람을 본 경험이었다고 수전이 말합니다. “그 사람은 남자면서 여자였어. 드레스를 올리고 보여 줬어. 파란색 드레스였어.”(it was a man and woman both. It pulled up its dress and showed us. It had on a blue dress.) 두 육촌은 수녀원으로 돌아갔지만, 육촌이 들려준 이야기가 소녀의 마음속에 맴돕니다. 얼마 후 그 박람회는 어떤 설교자들의 항의로 문을 닫습니다.

 

남자면서 여자인 이 기인은 누구일까요? ‘양성구유’(兩性具有, hermaphrodite), 즉 남성과 여성의 성적 특성을 다 갖추고 있거나, 또는 확연하게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성적 특성을 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영어 단어가 소설 본문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본문 내용은 이 단어를 묘사합니다. 보통 이 단어는 ‘자웅동체’(雌雄同體)라고 번역되어, 지렁이, 달팽이, 선충과 같이 한 개체에 암수 두 생식 기관을 갖춘 것을 가리키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구식이고 모욕감을 줄 수 있다고 해서, 요즈음에는 ‘intersex’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런데 이 기인이 소설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을까요? 그 박람회장에서 그 기인은 자기를 보러 온 남자와 여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저를 이렇게 만드셨고, 여러분이 웃는다면 여러분도 똑같이 만드실 겁니다. 그분은 저를 이렇게 만들기로 작정하셨고, 저는 그 뜻에 반항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걸 여러분에게 보여 주는 것은 이것을 달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신사 숙녀답게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저를 이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지만 저는 이 일을 달게 받아들입니다. 저는 반항하지 않습니다.”(God made me thisaway and if you laugh He may strike you the same way. This is the way He wanted me to be and I ain’t disputing HIS way. I’m showing you because I got to make the best of it. I expect you to act like ladies and gentlemen. I never done it to myself nor had a thing to do with it but I’m making the best of it. I don’t dispute hit.)

 

두 육촌이 그 사람 이야기를 한 이후에 그 기인의 말이 소녀의 귀에 울렸듯이, 그의 메시지가 제 마음속에도 울렸습니다. 게다가 소녀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 기인이 엄숙하고 정숙하게 구경하는 남자와 여자들에게 한 말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고, 나는 반항하지 않는다. 나는 그분을 찬양한다. 여러분은 성령의 전이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벌주실 것이고, 여러분이 웃으면 여러분도 이렇게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이 저를 창조해 주신 대로 용납할 뿐 아니라 찬양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라는 점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제 몸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 몸은 거룩한 실체가 되었습니다. 이 신령한 메시지를 intersex인 기인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탈주범이자 냉혈한인 부적응자와 박람회에서 전시물과 같은 취급을 받는 기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 준 메시지는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요, 성령의 성전이라는 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몰랐거나 그가 거짓된 인물이라고 알았다면,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몸도 ‘육체의 욕망’(sinful nature, 갈라디아서 5:17)을 따라 쾌락을 채우거나 재물을 취하거나 인기를 누리면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한 세상 살다 가면 그만인데.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 죽은 자 중에 처음으로 부활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를 믿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 되고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이 취할 길은 한가지뿐입니다. ‘자기의 죄악 된 본성의 욕망과 정욕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거기에서 그것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이제는 ‘성령에 따라 살아가고 있으니, 자기 삶의 모든 부분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Those who belong to Christ Jesus have nailed the passions and desires of their sinful nature to his cross and crucified them there. Since we are living by the Spirit, let us follow the Spirit’s leading in every part of our lives.” (갈라디아서 5:24-25, NLT)] 물론 거짓 선지자를 삼가야 합니다. 자칭 부적응자와 기인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더구나 부적응자는 이미 여러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그렇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평생 진리만을 말하는 사람도 없지만, 항상 거짓말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가 무엇을 말하든 분별해서 듣고 취해야 합니다. 자칭 부적응자가 한 말 중에는 거짓된 말이나 정신 나간 말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평생 그가 진지하게 여긴 예수님과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논의는 누구나 고려할 만한 제안이었습니다. 기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성령의 성전’에 대한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취할 가치가 있는 진리였습니다.

 

-참 자아 누리는 길: “너는 세상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어.”-

오코너의 단편 소설 중에는 나중에 장편 소설로 확장된 것들이 좀 있습니다. 그녀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인 “현명한 피”(The Wise Blood, 1952)의 1장은 “기차”(The Train)라는 단편 소설의 내용을 확장한 것이고, 그 나머지 장들은 “감자 깎는 칼”(The Peeler), “공원의 중심”(The Heart of the Park) 및 “이녹과 고릴라”(Enoch and the Gorilla) 같은 작품을 중심으로 다시 쓴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작품들을 읽을 때 뭔가 개운한 맛이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인 “힘쓰는 이들이 차지한다”(The Violent Bear It Away, 1960)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You Can’t Be Any Poorer Than Dead)라는 단편 소설이 그 장편 소설의 1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단편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매이슨 타워터(Mason Tarwater)는 자기 주관이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자기 여자 조카의 아들(great-nephew)인 프랜시스(Francis)를 자기 남자 조카 레이버(Rayber)의 집에서 납치해 숲속 오두막에서 키웁니다. 글과 셈도 가르치고, 아담의 타락에서 시작하여 미국 역대 대통령을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역사도 가르칩니다. 이것은 그 아이를 ‘구속받을 만한 사람으로 키우라’(raise him up to justify his Redemption)는 하나님의 ‘뜨거운 환상’(a rage of vision)에 그가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매이슨은 84세에 죽기 전에 이제 14세가 된 프랜시스에게, 자신의 무덤을 기독교식으로 제대로 묻어주고 십자가를 세워서 심판의 날에 부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작은할아버지가 죽은 후에, 먼저 그를 묻으라는 어떤 ‘낯선 사람’(a stranger)의 목소리를 듣고, 프랜시스는 무덤을 파기 시작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 ‘낯선 사람’(the stranger)은 그에게 자기를 평생 속여 온 그 노인을 이제 잊으라고 말합니다. 프랜시스는 그 말을 따라 술을 마시기 시작하다 술에 취합니다. 술에 취한 채 잠들었던 그는 깨어나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작은할아버지의 시신이 아직 그 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곳을 뜹니다. 사실상 그 시신은 부퍼드 먼슨(Buford Munson)이란 흑인이 그가 취해 잠든 사이에 그 집을 방문했다가 이미 땅에 묻은 상태였습니다. 프랜시스는 길을 걸어가다, 구리 연통을 파는 영업 사원의 차를 얻어 타고 도시로 향합니다.

 

이 작품 중에 제 주목을 끈 것은 바로 ‘낯선 이’라는 존재였습니다. 이 존재는 프랜시스의 작은할아버지가 죽은 이후 홀로 남은 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온갖 제안을 합니다. 처음에 프랜시스는 그 ‘낯선 이’의 목소리로, “죽은 자는 불쌍해.”(The dead are poor.)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 ‘낯선 이’의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이제 나는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어.”(Now I can do anything I want to.)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그 ‘낯선 이’는 실제 형태를 취하기도 하지만, 그 얼굴은 모자에 가려져 있습니다. 프랜시스에게는 점차 그 목소리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고, 가끔 그것이 ‘낯선 이’의 목소리처렴 여겨졌으나, “자신이 이제야 자신을 만나고 있는 것 같다.”(he was only just now meeting himself.)는 느낌을 받습니다. 문제는 이 ‘낯선 이’가 하는 말이 악마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노인이 좋은 분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그가 최후의 심판 날을 생각했다는 프랜시스의 말에 딴지를 걸면서 죽은 몸이 되살아난다는 것의 비합리성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프랜시스가 빈집에 혼자 사는 처지에 놓인 것을 지적하면서, “내가 아는 한 너는 세상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어.”(You don’t mean a thing to a soul as far as I can see.)라는 매정한 말을 던지기도 하지요.

 

그 ‘낯선 이’의 목소리는 급기야 자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그 노인은 미쳤다고 연거푸 외치다가, 프랜시스가 술을 한 모금 들이키자, “조금은 괜찮아. 적당한 음주는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아.”(a little won’t interfere. Moderation never hurt no one.)라고 부추기는가 하면, 프랜시스가 평생토록 그 노인에게 속아 살았다는 걸 새삼 강조합니다. 바깥세상은 프랜시스가 배우고 자란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산다면서, 그 노인이 가르친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며 도전합니다. 예컨대, 그가 다른 사람이 쓰지 않는 숫자 체계를 가르쳤을 수도 있고, 2 더하기 2가 4라고 가르쳤지만 그게 참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지요. 아담의 존재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역사적인 사실인지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이 모든 게 다 ‘미친’(crazy) 사람에 불과한 그 노인의 말뿐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최후의 심판’(Judgment Day)에 대해 언급하면서, “매일매일이 최후의 심판”(every day is Judgment Day)이라고 말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옳고 그름이 다 밝혀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있던 프랜시스에게, 그만큼 마셨으니 이제 남은 걸 다 마셔도 된다면서 하는 말이 기가 막힙니다. “절제의 선을 지나면 중단은 없어. 머리 꼭대기에서 아래로 빙글빙글 내려가는 느낌, 그게 바로 하나님이 네게 내리는 축복이야.”[Once you pass the moderation mark you’ve passed it, and that gyration you feel working down from the top of your brain, (...) that’s the Hand of God laying a blessing on you.] 심지어 프랜시스를 그 노인에게서 해방하는 가장 큰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Praise Him.)라고까지 권면하지요.

 

이 ‘낯선 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실제 모습을 띠고 자기에게 말하는 누군가로 여겼다가, 점차 자기가 자기를 만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 ‘낯선 이’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며 자신감 넘치게 말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는 세상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는 존재라며 실의에 차 있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서 접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을 품기도 하지만, 적당한 것은 괜찮다며 술과 쾌락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과감하게 손을 댑니다.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심판의 의미는 왜곡하지만, 자기를 거짓된 권위로부터 해방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다그치기도 하지요. 이 ‘낯선 이’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그가 프랜시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시점이 그의 작은할아버지가 죽은 이후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때 그는 작은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몰랐던 자신을 만나고 있다고 느낍니다. 즉 그 ‘낯선 이’는 후견인의 권위를 가진 할아버지의 역할을 대체하면서, 프랜시스의 내적 욕망을 드러내고 그것의 성취를 부추기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할아버지가 여태껏 프랜시스를 속이고 거짓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세뇌했다면서, 그리스도인인 할아버지를 미쳤다고 단정합니다. 게다가 술 마시기 시작한 프랜시스를 독려하고 절제의 선을 넘도록 부추기면서, 술 취한 몽롱한 상태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그 ‘낯선 이’는 프랜시스가 처음 생각한 것처럼 자신의 온전한 자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자아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그 자아는 하나님께 불경하고 그의 뜻을 거역하는 사악한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여전히 그 긍정적인 측면들이 남아 있지만,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경향성이 지배적입니다. 인문학적 성찰이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기 발견을 꾀할 때, 이 두 가지 측면이 우리 내면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자아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자기비하일 뿐이고, 자기중심적이고 흉악하기까지 한 자아의 면모를 모른 체하는 것은 자기기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Holy Ghost or Holy Spirit)이 우리 자아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고 더욱 온전해지도록 이끄시기도 하지만, 마귀(Devil)도 우리 자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과 쾌락만을 꾀하도록 강력하게 유도할 수도 있습니다. 프랜시스가 술을 들이키기 시작하고 ‘낯선 이’가 적당한 음주는 무해하다며 부추길 때, “악마가 이미 타워터(=프랜시스)의 영혼에 손을 대려고 몸 안에 손을 넣은 듯 소년의 목구멍 아래로 불타는 팔이 내려갔다.”(A burning arm slid down Tarwater’s throat as if the devil were already reaching inside him to finger his soul.)라고 묘사된 부분을 주목해 보세요. 프랜시스의 사례는 자아를 탐구한다는 것이 이런 사악하고 허망한 대상에 귀 기울이고 그를 좇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경종을 울립니다. 자신이 이제야 자신을 만나는 기분이 강력하게 들더라도,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지혜롭게 분별해야 자신의 참 자아를 발견하여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잔인한 섭리’를 안고 예언적 비전을 빚은 플래너리 오코너-

플래너리 오코너(1925-1964)는 어릴 때부터 신체적인 장애를 겪으며 자랐습니다. 안짱다리 때문에 교정 신발을 신어야 했고, “독특한 방식으로 성큼성큼 걸었습니다.”(had a distinctive kind of loping walk.) 연애도 서툴게 몇 차례 시도했지만, 제대로 된 사랑의 화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25세 때부터는 아버지도 앓은 ‘루푸스’(lupus)라는 ‘자가면역질환’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 질병은 이상이 생긴 우리 몸의 면역계가 다른 조직을 공격해 다양한 증상을 낳는 질환입니다. 이때부터 그녀는 조지아주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28세 때부터는 목발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되었고, 병세는 호전되지 않은 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인생 자체가 ‘하나의 굴욕’(a humiliation)이었던 셈입니다. (캐런 프라이어 스왈로우, “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

 

그렇지만 그녀는 이 굴욕적인 신체 상황을 하나님의 잔인한 섭리(severe providence)로 수용하고, 자신의 마음을 넓혀 세상과 연결하는 인생을 구가하다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특이하게 현대적 의식에 사로잡힌 가톨릭 신자”(a Catholic peculiarly possessed of the modern consciousness)였던 그녀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우리 문화 속에 ‘구속받을 이유’(the cause for Redemption)가 없다는 세속적 믿음이 작용해 온 것에 주목하고,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the people who think God is dead)을 청중으로 삼아 소설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그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성육신’(the Incarnation)이라는 ‘오직 하나의 실재’(only one Reality)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구속과 무관하다고 여기던 그 시대가 자기에게 강하게 맞서고 있었기에, 그녀도 그만큼 강하게 밀어붙여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그 시대 사람들이 귀가 둔했기에 소리쳐야 했고, 눈도 흐릿했기에 크고 놀라운 형상을 그려서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플래너리 오코너, “Collected Works”) 비록 자신은 날마다 죽음을 대비하는 삶을 영위했지만, 그녀는 “사랑은 투쟁이다. 삶은 죽음과의 투쟁이다.”(Love is a struggle: life is a struggle against death.)라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에마뉘엘 무니에(Emmanuel Mounier)의 경구에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투쟁을 탁월한 상상력으로 승화하여, 성육신적이고 예언적인 비전들로 빚어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