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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我)-나를 알라

다이너마이트 같은 부적응자들의 서사로 자기만족을 깨뜨리는 플래너리 오코너(3)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10. 26.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 Courtesy of Gotta Be Worth It)

다이너마이트 같은 부적응자들의 서사로 자기만족을 깨뜨리는 플래너리 오코너(3)

-자기만족과 자기의(自己義)가 빚은 비극: “당신이 대체 뭔데요?”-

앞에서 토마스 머튼이 언급한 ’타락과 불명예‘는 인간의 ’오만과 독선‘과 직결됩니다. 인간의 타락은 근원적으로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께 반항하고 불순종하면서,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동에 옮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분수를 벗어난 주제넘은 행위요, 흙으로 빚어진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오코너가 폭력을 동반한 서사로 열어 밝히려 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만족(self-sufficiency)과 자기의(自己義, self-righteousness)였습니다. 이미 논의한 내용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지만, 두드러지는 몇 주인공들의 행태와 사고방식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교만한 자립>

먼저 무신론자들의 자기만족 혹은 자기 의존(self-reliance)의 태도가 눈에 띕니다. 그들은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존재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세상만사를 이해할 수 있고, 세상에서 직면한 문제를 다 해결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신앙과 연관된 이야기들은 죄다 헛소리로 간주합니다. 예컨대, “좋은 시골 사람들”의 철학 박사 노처녀 헐가는 자기가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꿰뚫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성경 판매원 청년에게 그것을 인식하는 구원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의 레크리에이션 지도사 셰퍼드는 무신론에 입각한 자기 생각으로 비행 청소년 존슨과 아들 노턴의 신앙적 사고를 반대하다가 나중엔 폄훼하기까지 합니다. 악마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다고 존슨이 말할 때나, 존슨이 지옥에 가면 안 되니까 그에게 회개하라고 노턴이 말한 때에도 ‘헛소리’(nonsense) 그만하라고 핀잔을 주지요. 게다가 그 아이들이 읽고 있는 성경을 가리켜, ‘비겁한 사람들’, 즉 자기 발로 서고 자기 머리로 이해하기 두려운 사람들’(cowards, people who are afraid to stand on their own feet and figure things out for themselves)을 위한 책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Judgement Day)에서 태너(Tanner)의 딸은 아버지가 지옥이란 단어를 언급하자, “저한테 지옥 어쩌고 하지 마세요. 저는 지옥을 안 믿어요. 그건 아버지가 믿는 침례교의 헛소리예요.”라고 대꾸하지요.

 

그런데 신앙인이라는 사람들의 언행에서도 자기만족 현상이 눈에 띕니다. 빌립보서 4:13(“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자기의 능력과 만족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는 태도와는 다른 결을 지닌 교만한 자립(prideful autonomy)의 자세입니다. 과거 언젠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앙인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죄성과 인간의 한계를 망각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인도와 도움을 갈구하는 자세와 신앙 공동체와 상호 의존하는 관계가 흐트러진 경우이지요. 하나님께 대한 첫사랑을 잊어버리고, 신앙 동료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진 채, 자기만족의 관성에 젖어 버린 상태입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신앙인은 스스로 자기만족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벗어나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족이 교묘한 형태로 변신해 있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불 속의 원”(A Circle in the Fire)의 코프 부인(Mrs. Cope)과 “계시”의 터핀 부인의 경우처럼, 이 자기만족이라는 죄악이 감사하는 데 목매는 태도 속에 잠복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 속의 원”에서 농장 주인인 코프 부인은 자기 농장에서 일하는 프리처드 부인(Mrs. Pritchard)과 자기 농장을 찾아온 세 아이에게, 자기가 하듯이 날마다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한다고 거듭 권고합니다. “제가 가진 건 뿌리가 곪은 이빨 네 개뿐이네요.”라고 괴로움을 토로하는 프리처드 부인에게는, “그러면 다섯 개가 아니라는 데 감사하세요.”라고 응수하고, 아버지를 잃고 의지할 곳 없어 찾아온 세 아이에게도 세상에는 감사할 게 많으니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언급하지요. 코프 부인은 가진 게 많습니다. 풍성한 목초지와 울창한 삼림에다 가축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농장 일꾼들도 여럿 고용하고 있지요. 프리처드 부인이 사모님이라면 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되받자, 코프 부인은 화물열차에 실린 소 떼처럼 시베리아로 가는 불쌍한 유럽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며, “우리는 하루의 절반을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보내야 해요.”라고 응수합니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가겠다던 삼촌이 오지 않게 되자, 코프 부인은 그들의 존재를 부담스러워 하면서, 그들에게 자기 집에서 예의를 지키고 행동하라고 거친 어조로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이 숲의 주인은 사모님이 아니고, 이 숲과 사모님 다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점점 더 과감하게 농장 이곳저곳을 휘젓습니다. 그 아이들이 목초지 건너편 숲에 방화한 후 떠나자, 감사에 대해 그렇게 결연한 태도를 취했던 코프 부인은 더 이상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녀는 ‘검둥이나 유럽 사람이나 파월[Powell, 세 아이 중 장남]’이 짓던 그 고통스러운 표정을 공유합니다. 결국 그녀가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과 자부심에 불과했습니다. 자기만족이 취하는 교묘한 양상이지요.

 

“계시”에서 또 다른 농장 주인인 터핀 부인이 감사하는 것 중에 가장 감사하는 것은 자기가 착하다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이 그녀 인생의 원칙이었지요.”(To help anybody out that needed it was her philosophy of life.) 이것에 덧붙여, “하나님이 자기를 깜둥이로도, 백인 쓰레기로도, 못생긴 여자로도 만들지 않았다!”(He had not made her a nigger or whitetrash or ugly!)는 점에 대해 그녀는 감격해 합니다. 예수님께 세 번씩이나 고맙다고 읊조리지요. 그런데 그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실제로 돕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도와야 하는 건 맞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을 돕기란 불가능했다.”(Help them you must, but help them you couldn’t.)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터핀 부인의 감사는 어떤 의미를 띠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해 주신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드리는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품위 있고 예쁘고 착한 백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자기도취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도착적인 자기기만에서 비롯된 ‘인생의 원칙’이 공허하고 허무할 것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참모습은, 돌연한 폭력적 상황이 전개된 후에 온전히 드러나지요. 그때 그녀는 자기기만에 대해 회개하는 대신, 하나님을 향해 “당신이 대체 뭔데요?”라고 항변합니다. 자기만족이 끝장에 이른 양상을 보여 주지요. 이렇게 약삭빠르게 변신하는 자기만족의 실상을 폭로하는 데,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력적 급변 사태가 필요했습니다.

 

<’좋은 사람‘의 실상>

자기만족과 더불어 자기의(自己義)나 독선적 태도라는 보편적인 병폐도 여러 작품 속에서 제시됩니다. 그 태도를 엿볼 수 있는 표현 한 가지가,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먼저 이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좋다’라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wonderful’, ‘good’, ‘nice’, ‘right’라는 영어 단어와 상응하는 것이므로, 편의적으로나 예의상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선입견이나 편견이 잔뜩 배인 채로 빈정대며 활용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계시”에 보면, 병원 진료실에서 한 여자가 터핀 부인에게 “날씨가 참 좋지요?”(This is wonderful weather, isn’t it?)라고 말하자, 터핀 부인이 이렇게 응답합니다. “깜둥이들한테 시킬 수 있다면 목화 따기에 참 좋은 날씨예요.”(It’s good weather for cotton if you can get the niggers to pick it,) “이발사”(The Barber)에 보면, 이발사가 자기 손님인 레이버(Rayber) 교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레이버 선생님은 좋은 분이에요. 투표할 줄은 모르지만 사람은 괜찮아요.”(“Rayber’s all right. He don’t know how to vote, but he’s all right.”) 이처럼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입 떼기 위해 쓰는 ‘좋다’도 있지만, 흑인이나 자기와 다른 정치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을 빈정대며 사용하는 ‘좋다’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서나,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군가의 마음을 사려고 따리 붙이기 위해 ‘좋다’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공원의 중심”(The Heart of the Park)에서 어떤 여자가 헤이(Haze)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댁은 좋은 남자야. (...) 나는 깨끗한 남자는 바로 알아봐.” [You’re a nice boy. (...) I know a clean boy when I see one.] “좋은 사람은 드물다”(A Good Man is Hard to Find)에서 탈옥한 범죄자인 ‘부적응자’(The Misfit) 일당 때문에 위기에 처한 할머니가 그에게 아첨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I know you’re a good man.) 당신은 평민의 피가 흐르는 사람 같지 않아요. 품위 있는 가문 출신이 틀림없어요! (I know you must come from nice people!)”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무려 네 번씩이나 거듭 따리 붙인 것은 무효했습니다. 결국 그의 총 세 방을 가슴에 맞았으니까요. 그런 그녀를 부적응자가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 본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평생 누가 옆에서 1분에 한 번씩 총을 쏴 주었다면 그녀는 좋은 여자가 됐을 거야.”(She would of been a good woman, if it had been somebody there to shoot her every minute of her life.) 이 두 사례에서 ‘좋다’는 의미가 ‘깨끗하다’와 ‘말 없다, 잠잠하다’라는 의미로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좋다’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경우는, 자기의 관성적 사고와 제한된 경험에 비추어볼 때 긍정적인 자질과 유익한 특성을 지닌다는 의미로 활용될 때입니다. 예컨대, “가정의 안락”(The Comforts of Home)에서 토머스(Thomas)가 ‘어린 탕녀’(the little slut)이라고 부르는 세라(Sarah)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옥에서도 나를 원하지 않아요. 내가 자살하면 하느님은 나를 원할까요? (...) 가장 좋은 건 자살하는 거예요. (The best thing to do is to kill myself.)” 아무도 원치 않는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한 말입니다. “제라늄”(The Geranium)에서 더들리(Dudley) 영감은 아파트 계단에서 나동그라진 자기를 부축해서 도와준 흑인 청년이 자기 등을 두드리면서 ‘어르신’(old-timer)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분개하면서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지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신을. 좋은 곳 출신인 자신을. 좋은 곳.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곳.”(Him that knew such as that couldn’t be. Him that had come from a good place. A good place. A place where such as that couldn’t be.) 레이비 같은 흑인이 자기를 시중들던 고향 땅을 그리워하며 한 말입니다.

 

이런 관성적이고 제한적인 ‘좋다’의 개념이 자기나 남에게 적용되는 경우도 여러 번 등장합니다. 바로 이 경우야말로 자기의(自己義) 혹은 독선의 길로 접어드는 시발점입니다. 먼저 자기에게 적용한 경우를 들어보겠습니다.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에서 셰퍼드는, “딱히 오만이 아니라도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에게는 질책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He knew without conceit that he was a good man, that he had nothing to reproach himself with.) 자기에게 질책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연거푸 네 번이나 되뇝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 목소리가 자기를 비난하는 것처럼’(as if it were the voice of his accuser) 들리게 되면서,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지요. “계시”의 터핀 부인은, 예수님이 “너는 상류층이 되어서 돈을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고 몸매도 날씬해질 수 있지만, 착한 여자(good woman)는 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렇다면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저를 좋은 여자(good woman)로 만들어 주시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아무리 뚱뚱해도 아무리 못생겨도 아무리 가난해도!”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지금의 자신으로 만들고 모든 것을 조금씩 골고루 주었다.”(He had made her herself and given her a little of everything.)라며 부푼 가슴으로 고백합니다. 자기가 이미 이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한 ‘좋은 여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좋은 여자’의 실상은 돌연한 폭력적 상황과 예기치 않은 ‘계시’로 완연히 드러납니다.

 

한편으로 이 ‘좋다’의 개념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된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좋은 사람은 드물다”에서 할머니는 기회가 생기면 ‘좋은 사람’ 타령입니다. 주유소 사장 레드 새미(Red Sammy)와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확실히 사람들이 예전처럼 ‘친절하지 않다’(not nice). 그런데 레드 새미는 ‘좋은 사람’(good man)이라서 남에게 잘 당한다. 그러자 레드 새미는 “좋은 사람은 참 드물다.”(A good man is hard to find.)라며 모든 게 험악해지고 있다고 응대하고, 그녀는 그와 함께 ‘더 좋았던 옛날’(better times)을 회상하지요. 각자가 서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인증해 주는 형국입니다. 이 ‘좋은 사람’ 타령은 무자비한 범죄자인 부적응자마저  좋은 사람’이라고 언급한 후에야 끝이 납니다. 그 부적응자도 자기가 사고하고 경험한 대로, 할머니가 ‘좋은 여자’로 변모하도록 조치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좋은 시골 사람들”의 호프웰 부인은 프리먼 부부를 고용하고 있는 이유가, ‘그들이 쓰레기(trash)가 아니라, 좋은 시골 사람’(good country people)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성경 판매원 청년에게도 이제는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하는 ‘좋은 시골 사람’이 부족한 게 문제라고 언급합니다. 그 청년에게 잘 대해 준 것도, 그가 상식 없는 사람들과는 달리, 정직하고 성실한 ‘좋은 시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고 언급한 이 청년은 그 딸의 의족을 갈취해서 달아나는 파렴치범이라는 게 드러나지요. 결국 그녀가 다른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하면서 입에 올리는 것도, 자신이야말로 단점 없고, 상식이 풍부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교묘한 방식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좋은 사람’의 실체가 밝혀진 셈입니다. ‘좋은 사람’은 자신의 사고와 판단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자기중심적 기호나 관성적 사고나 제한된 경험에 비추어 형성된 존재입니다. 근시안적인 자기 사변과 시각으로 자신이나 타인들을 이리저리 요리하고 판단하다 보니, ‘좋은 사람’이라고 지목하는 대상면에서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연관된 논의면에서도 확연한 모순을 드러내는 경우도 여러 번 눈에 띕니다. 그렇지만 이런 오류와 모순은 ‘좋은 사람’을 지목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로 대두되지 않습니다. 핵심 사안은 자기가 ‘좋은 사람’이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우리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자기의(自己義)나 독선적 태도는 마음 챙겨 경계하지 않으면, 또 다른 보기 좋고 매력적인 독버섯의 형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쑥쑥 자라날 것입니다.

 

<난무하는 ’쓰레기‘과 ’깜둥이‘>

자기만족과 독선의 태도는 오코너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편견과 선입견의 뿌리입니다. 이것들은 특히 민족이나 사회 계층 간 혐오와 흑백 갈등의 형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먼저 민족 간의 혐오와 갈등은 “추방자”(The Displaced Person)라는 작품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조지아의 한 농장에 귀작 씨(Mr. Guizac)라는 폴란드인 난민 가족이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농장은 부유한 미망인인 매킨타이어 부인(Mrs. McIntyre)이 소유하고 있으며, 그 가족의 도착은 그들과 쇼틀리 씨(Mr. Shortley) 가족을 포함한 기존 농장 일꾼들 간의 역학 관계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기존 일꾼들은 특히 귀작 씨의 존재와 부지런함에 위협을 느낍니다. 그래서 농장의 다른 일꾼들은 모두 추방되어 온 귀작 씨를 적대시합니다. 긴장이 고조되는 초기에 매킨타이어 부인은 열심히 일하는 귀작 씨를 지지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노동자들의 편견과 조작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결국, 매킨타이어 부인의 묵인하에서 귀작 씨는 사고로 위장된 비극적인 사건으로 목숨을 잃게 되지요. 이 귀작 씨 가족을 폄훼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전 유럽인들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은 어마어마합니다. 예컨대, 쇼틀리 부인의 유럽인 평가를 들어보세요. ‘악마가 부추겨서 그들은 온갖 부정한 짓은 다 저지르고, 발전도 개혁을 일굴 줄도 모르고, 종교도 천 년 전하고 똑같이 유지하고 있다. 늘 쌈박질하고 분란을 일으키고 난 후 우리까지 끌어들인 덕에, 우리가 벌써 두 번이나 거기 가서 그 사람들 문제를 해결해 주고 돌아왔다.’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영국을 비롯하여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과 같은 유럽 국가에서 이주해 온 정착민들로 형성된 사실을 망각한 비난에 불과하니까요. 오죽하면 영국 태생으로 식민지 독립을 주장했던 사상가이자 언론인인 토마스 페인(Thomas Paine)도 “미국의 모국은 영국이 아니라 유럽”이라고 언급했겠습니까.

 

다음으로 사회 계층 간 혐오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사는 백인들이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 가운데 처한 백인들을 ‘쓰레기’(trash), ‘백인 쓰레기’(white trash), ‘허섭스레기’(the dirt under my feet, 흑인도 포함될 것)라고 부르는 게 예사이니까요. 흥미로운 것은, “계시”의 터핀 부인이 잠자기 전에 간혹 하는 놀이 장면입니다. 자기 방식으로 주위 사람들의 계층을 나누는 놀이입니다. 맨 밑 계층은 흑인 대부분(most colored people)이 차지합니다. 그다음에는 그 상위 계층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냥 다른 곳에 위치한 백인 쓰레기(the white-trash)가 있습니다. 그들 위의 계층에 주택 소유자(the home-owners)가 있고, 그 위에 집과 토지 소유자(the home-and-land owners)가 있습니다. 또 그 위 계층에는 돈이 많고 집과 땅도 훨씬 넓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터핀 부인은 자기와 남편의 경우는 세 번째 계층인 집과 토지 소유자에 속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만 계층 구분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출신이나 가문이라는 변수가 대두되거나, 예외적인 경우들을 고려하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해지기 때문입니다. 더욱 흥미진진한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이 놀이의 결말이 똑같은 꿈으로 끝이 나곤 했다는 점입니다. 즉 그 모든 계층이 유개 화물차(box car) 속에 뒤엉켜, ‘가스 소각장’(gas oven)으로 실려 가는 것이었지요. 이 ‘gas oven’이란 표현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주방용 가스레인지, (2) 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화장터, (3) 유독 가스를 방출하여 내부의 사람을 죽이는 밀폐된 공간[사형 집행의 한 형태]. 여기에서는 (2)나 (3)의 의미로 사용되었겠지요. 엄연한 죽음과 그 이후의 실상을 고려한다면, 경제적으로 사회 계층을 나누는 이런 한가한 놀음이 얼마나 쓰잘머리가 없는 짓인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흑백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장면도 여럿 등장합니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폄하하는 경우가 도를 넘습니다. 그들이 어리석고 게으르며 혐오스럽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입으로 내뱉습니다. 오코너의 단편 소설 중에는 흑인을 가리키는 말로, ‘black’, ‘colored’, ‘Negro’, ‘nigger’라는 네 가지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모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Negro’(검둥이로 번역)가 139회, ‘nigger’(깜둥이로 번역)가 203회나 나옵니다. 백인들이 흑인에 대해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느 정도인지, “이발사”에 등장하는 철학 교수 제이콥스(Jacobs)의 행태가 잘 드러내 줍니다. 그가 언젠가 일주일 동안 흑인 대학에서 수업했을 때, 학교 규정상 위에 언급한 네 단어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밤 집에 돌아와서는 뒤창 밖에다 대고 “깜둥이 깜둥이 깜둥이”(NIGGER NIGGER NIGGER)라고 소리쳤다고 하지요. 철학 교수조차도 흑인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을 어찌할 수 없었나 봅니다.

 

흑인(black)이나 유색인(colored)이란 표현은 그야말로 편견과 선입견의 산물입니다. “인조 깜둥이”(The Artificial Nigger)라는 작품에는 헤드 씨(Mr. Head)가 손자인 넬슨(Nelson)에게 도시 구경을 시켜 주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넬슨은 생전 처음으로 커피색 피부의 남자 흑인(coffee-colored man)을 보게 됩니다. 그가 흑인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넬슨에게 헤드 씨가 그 사실을 알리자, 넬슨이 성난 목소리로 항의합니다. “그들은 까맣다고 하셨잖아요. 갈색(tan)이라고는 말씀 안 하셨어요. 할아버지는 제대로 말씀 안 해 주시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요?” 10세 아이의 정직한 관찰입니다. 흑인은 커피색 피부를 가진 사람도 있고, 기차 식당칸에서 일하는 웨이터들처럼 ‘검은색이 아주 진한 검둥이’(very black Negroes)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아프리카계 미국인’(Afro-American)들을 흑인이란 부르는 행태 이면에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편견과 선입견에서 비롯된 과도한 일반화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유색인’(colored)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어는 마치 백인은 ‘무색인’, 즉 ‘색이 없는 인종’이라고 이해하도록 오도합니다. 그런데 백인이 정말로 색이 없는 종족일까요? 백인은 분명히 피부색을 갖고 있고, 그 색 또한 백색인 것도 아닙니다. 이 사실과 연관하여 영국의 문화연구자 리처드 다이어(Richard Dyer)는 한 가지 오래 묵은 역사적 비밀을 한 가지 폭로합니다. 백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유색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흰색은 색이 아니며 색을 초월해 있다’는 그들의 관념이 반영된 것입니다. 흰색이 색이 없는 상태이지만 백색이기도 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백인들은 자기들이 유색인들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과 아울러 자기들이 정신, 순수, 고결 등의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백인들은 자기들을 ‘인종’(race)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 단어는 유색인종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은 인종이고, 우리는 그냥 인간이다.”(Other people are raced, we are just people.)라는 게 그들의 철학이지요(리처드 다이어, “White”). 백인들의 경성(警省)과 회개가 요구되는 지점입니다.

 

이상에서 인간의 오만과 독선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자기만족과 자기의(自己義)라는 양상으로 잠복해 있다가, 각각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과 자기도취나 선함과 선행에 대한 강박의 형태로 발현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존재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 연합하여 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대신,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과 자기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그것들에 매달리며 그림자 같은 인생을 영위하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차고도 넘칩니다. 헛헛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폭식가처럼 선행을 욱여넣어도’(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그 공허감이 사라질 리 만무합니다. 도리어 시간이 지날수록 이 자기중심적 습성은 온갖 편견과 선입견을 낳기도 하고, 그것들과 동맹을 맺어 우리 마음을 더욱 옥죄고 편협하게 만듭니다. 작품 곳곳에서 펼쳐지는 편견과 선입견의 향연을 접하면서, 제가 이전에 품었거나 현재 취하는 생각들이 그것들과 얼마나 다를 게 있을까라는 반성을 해봅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면밀히 관찰하고 여러 정보를 취합해서 형성한 생각 대신, 구태의연한 생각들로 특정 사람이나 주위 상황을 재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복음 7:1-5)고 언명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더욱 새롭게 다가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