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我)-나를 알라

다이너마이트 같은 부적응자들의 서사로 자기만족을 깨뜨리는 플래너리 오코너(2)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10. 19.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 Courtesy of Kelly)

다이너마이트 같은 부적응자들의 서사로 자기만족을 깨뜨리는 플래너리 오코너(2)

-폭력을 매개로 하는 은혜와 진리의 계시: “내 다리 내놔!”-

<폭력적인 인간의 죄성에 대한 계시>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소설 31편에는 거의 항상 폭력이 등장합니다. 작가가 이렇게 자주 폭력을 매개로 한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유는, 인간의 내부에 폭력적인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오코너의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폭력의 주체들과 폭력의 내용들을 한번 주목해 보세요성가시게 구는 사람에게 핸드백을 휘두르거나(“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듣기 싫은 소리를 남발하는 사람의 얼굴을 책으로 가격하고 목을 조르거나(“계시”), 논쟁하던 타인을 손으로 치거나(“이발사”), 아버지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이나 딸을 때리거나(“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숲의 전망”),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옆집 노인을 벽에다 대고 쾅 밀었다가 멱살을 잡고 집안으로 밀어 버리거나(“심판의 날”), 남편의 맨등을 거듭 빗자루로 거듭 세차게 때려 흉터가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파커의 등”) 정도는 약과입니다. 황소의 뿔이 여자 주인의 가슴을 꿰뚫거나(“그린리프”), 앙심을 품고 자동 권총으로 고위 인사들을 살해하거나(“파트리지 축제”), 우연하게 만난 일가족을 냉혹하게 총으로 몰살시키거나(“좋은 사람은 드물다”), 실수인 척하면서 트랙터로 사람을 으깨 버리거나(“추방자”), 아들이 노모를 권총으로 살해하거나(“가정의 안락”), 자기 손녀의 머리를 돌덩이에 내리찧어 버리는 경우(“숲의 전망”)도 등장하니까요. 심지어 어린이가 자살하는 경우도 두 편(“강”,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이나 있어 독자들을 당혹하게 합니다. 폭력 행위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가 다 저지를 수 있는 엄연한 실상으로 제시됩니다. 

 

폭력을 가하는 사람과 그 피해자들의 연령과 성별과 계층도 다양합니다. 흑인 여성이 백인 노부인에게(“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여대생이 중년 부인에게(“계시”), 자유주의자인 교수가 이발사에게(“이발사”), 아버지가 아들이나 딸에게(“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숲의 전망”), 흑인 이웃이 옆집 백인 노인에게(“심판의 날”), 아내가 남편에게(“파커의 등”) 폭력을 가할 뿐 아니라, 황소가 여자 주인에게(“그린리프”), 정신질환자가 고위 인사들에게(“파트리지 축제”), 자칭 부적응자(The Misfit)가 다른 일가족 모두에게(“좋은 사람은 드물다”), 백인 일꾼이 폴란드에서 이주해 온 일꾼에게(“추방자”), 아들이 어머니에게(“가정의 안락”), 할아버지가 손녀에게(“숲의 전망”) 치명적인 폭력을 행사하지요. 여기에다 직접적인 폭력은 아니지만, 그것에 준하거나 그것 이상의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 기상천외한 사례를 덧붙여 보겠습니다. 즉 농아인 아내와 결혼한 후 그녀를 길가 음식점에 버려둔 채 그녀 집의 자가용을 훔쳐 달아나는 외팔이 사기꾼이나(“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 의족을 끼고 생활하는 노처녀 철학 박사를 현혹한 후 그 의족을 갖고 도망치는 성경 판매원이나(“좋은 시골 사람들”), 자기들의 아버지가 이전에 일하던 농장으로 찾아와 온갖 분탕질을 일삼다가 결국엔 농장 목초지 건너편에 불을 내고 떠나는 세 남아의 경우(“불 속의 원”)를 고려해 보면,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다양성과 포괄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만큼 폭력성이 인간 사회에 만연한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폭력의 보편성이야말로 인간의 죄성에 대한 확연한 증거입니다. 

 

<다이너마이트 같은 서사의 효과성>

작가가 폭력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두 번째 이유는, 폭력적인 서사가 지닌 강력한 효과 때문입니다. 오코너의 단편 소설을 처음 접하는 독자 중에는, 돌연히 등장하는 폭력 사태들로 인해 당혹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폭력이 이야기의 전개상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도구라고 인식된다면, 이런 당혹감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개연성 있는 많은 설정 중 한 가지로 선택된 것이 폭력이고, 그 수준도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에 독자의 정신이 헷갈리게 되는 것이지요. 이쯤 되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 폭력이란 수단을 자기 메시지 전달의 도구로 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폭력적 상황은 서사의 주인공들에게 충격을 가해 그들을 변화시키는 만큼, 그 폭력적 서사에 노출된 독자에게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앞에서 줄거리를 소개한 네 작품에서 이 측면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계시”. 터핀 부인은 병원 진료실에서 여대생 메리의 공격을 당합니다. 책으로 얻어맞고 목이 졸리는 공격이었습니다.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사태에 아연실색하던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메리에게 자기에게 할 말이 있냐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을 때, ‘계시’를 기다리듯 기다렸다(waiting, as for a ‘revelation’)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 계시는, “아줌마 고향인 지옥으로 가요, 이 늙은 멧돼지.”였습니다. 그 말은 터핀 부인의 마음속에 메리의 폭력보다 더 큰 상흔을 남겼습니다. ‘대기실에는 그 말을 들어 마땅한 쓰레기 여자’(trash in the room to whom it might justly have been applied)도 있었지만, ‘점잖고 성실하고 신앙심 깊은’(a respectable, hard-working, church-going) 자기에게 그런 폭언이 가해진 데 대해 분노가 끓어 올랐으니까요. 처음에는 애꿎은 돼지 새끼들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하나님을 향해 잽을 던지기 시작하지요. 자기가 왜 돼지냐고, 자기보다 쓰레기가 더 좋다면 쓰레기에게로 가라고, 그렇게 쓰레기를 원한다면 왜 자기를 쓰레기로 만들지 않았냐고, 자기를 지옥의 멧돼지라고 불러보라고. 급기야 하나님께 한 방 먹입니다. “당신이 대체 뭔데요?” 이 질문은 목초지와 간선도로와 목화밭으로 날아갔다가, ‘숲 너머에서 보내는 대답처럼 똑똑하게 돌아왔습니다.’(returned to her clearly like an answer from beyond the wood.) ‘네가 대체 뭔데?’(Who do you think you are?) 그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남편과 깜둥이들이 탄 트럭이 어린애 장난감(a child’s toy)처럼 허약하게 도로를 달려가는 것이었고, 큰 트럭이 그것을 박살 내고 ‘그들의 골을 도로에 흩뿌릴 수도 있다’(scatter Claud’s and the niggers’ brains all over the road)는 생각이 그녀의 앞을 가립니다. 마치 ‘신비의 핵심’(the very heart of mystery)을 꿰뚫어 보듯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들이 몰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터핀 부인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생명의 지식을 흡수합니다.’(absorbing some abysmal life-giving knowledge) 자기가 바로 지옥에 가야 마땅한, 그 연약한 멧돼지 새끼에 불과하다는 계시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책으로 얼굴을 얻어맞고, 목 졸림을 당하고, 폭언에 노출된 결과였습니다.

 

“좋은 시골 사람들”. 32세나 된 노처녀 철학 박사인 헐가는 성경 판매원을 가장한 사기꾼에게 자기 의족을 뺏기는 폭거를 당합니다. “내 다리 내놔!”를 3회나 외쳤으나, 그 소리는 허공에서 머물다 흩어져 버렸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어머니와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조이(Joy)라는 예쁜 이름을 버리고 ‘모든 언어 중에서 가장 듣기 싫은 이름’(the ugliest name in any language)인 헐가(Hulga)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것을 ‘자기의 가장 창의적인 성과물’(her highest creative act)로 여기는 자신만만한 숙녀였습니다.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그대는 자기 내면을 봐?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실체를 파악해 보려고 노력해? 아이고 하느님!”(Woman! Do you ever look inside? Do you ever look inside and see what you are not? God!)이라고 말하며 핀잔주는 철학가였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을 다 꿰뚫어 보고 난 후, ‘이 세상에는 볼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는’(see that there’s nothing to see) 구원에 이르렀다고 자부하지요. 자연도 좋아하지 않고, 청년들의 친절 속에서 어리석음이라는 악취를 맡는 민감한 현자였습니다. 당연히 성경 판매원인 맨리 포인터가 처음 자기 집을 방문했을 때도, ‘치워 버릴 세상의 소금’[Get rid of the salt of the earth(어머니가 좋은 시골 사람을 일컫는 표현)]으로 언급하는 무례를 범하지요. 이런 그녀가 ‘자신이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you ain’t so smart.)는 것을 깨닫는 데는, ’바보도 아니고 어린애도 아니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I know which end is up and I wasn’t born yesterday and I know where I’m going!) ‘세상의 소금’ 한 명의 폭거가 필요했습니다.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존슨이 두 번이나 사고를 쳤을 때, 셰퍼드가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삼키면서 대화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기 결심은 흔들리지 않고, 존슨보다 더 강한 자기가 그를 구해 낼 거라면서, “선의는 이기는 법이야.”(The good will triumph.)라고 말합니다. 존슨은, “그 선의가 참되지 않다면 이기지 못해요.”(Not when it ain’t true.)라는 말을 연거푸 읊조립니다. 흔들리지 않는 결의로 존슨을 구해 낼 거라고 셰퍼드가 응답하자, 존슨은 “아저씨는 나를 구하지 못해요.”(You ain’t going to save me.)라고 되받고, 셰퍼드가 다시 그를 구해 낼 거라고 말하자, 존슨은 사나운 목소리로 퉁깁니다. “아저씨나 구해요. 나를 구원할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Save yourself. Nobody can save me but Jesus.) 이때 셰퍼드는 짧게 웃으며, “넌 날 못 속여. 소년원에 있을 때 나는 네 머리에서 그런 생각을 빼냈어. 나는 적어도 거기서는 너를 구했어.”(You don’t deceive me. I hushed that out of your head in the reformatory. I saved you from that, at least.)라고 응수하지요. 그때 존슨의 얼굴 근육이 뻣뻣해지고 그 얼굴에서 매우 강렬한 혐오가 얼굴에서 뿜어나와 셰퍼드는 뒤로 물러섭니다. 존슨의 눈에 셰퍼드의 모습이 기괴하게 비추어 보이는 순간에, 존슨은 “곧 알게 될 거예요.”(I’ll show you.)라는 속삭임을 남긴 채 자기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때 셰퍼드의 눈은 빛을 잃고, 망연자실하게 되고, 자기 얼굴도 자기 백발처럼 갑자기 늙어버리게 됩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을까요? 자기의 선의가 참되지 않다는 것과 자기를 구해 낼 존재는 셰퍼드가 아니라 예수님뿐이라는 “소년의 충격적인 계시”(the shock of the boy’s revelation) 때문이었습니다. 이 계시의 충격을 제대로 소화하지 않은 채 자기 고집을 꺾지 않았던 셰퍼드는 또 하나의 계시(revelation)에 무너집니다. “나는 내 아이보다 그 아이에게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어.”(I did more for him than I did for my own child.) 존슨의 비행과 폭언과 기행은 셰퍼드에게 총 맞은 것(‘a man who has been shot’)과 같은 효과를 내었고, 급기야 그의 영적 변혁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셰퍼드의 공허감’(his own emptiness)과 ‘자기 환상’(his vision of himself)은 노턴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빚어냅니다.

 

“파커의 등”. 파커는 아내 세라 루스에게 두 번 맞습니다. 첫 번째는 그가 트럭을 고치던 중에 욕설을 몇 번 내뱉었을 때, 그녀의 가시 돋친 손이 갑자기 날아와 뺨을 맞고 쓰러진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등에 예수님 얼굴 문신을 한 후에 집에 돌아와, 그녀에게 보여 주면서 ‘그냥 하나님 그림’(just a picture of him)이라고 말했을 때, 그 등짝을 빗자루로 호되게 맞은 경우입니다. 자기 집에서는 욕이나 우상숭배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하는 그녀만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죽을 뻔한 경험은 따로 있었습니다. 새길 문신 생각만 하면서 트랙터를 몰고 가다가 농장 주인 여자가 손대지 말라고 당부한 나무를 들이받아, 자기는 내동댕이쳐지고, 나무는 불타고, 트랙터가 폭발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외친 소리가, ‘하나님 살려주세요!’(GOD ABOVE!)였습니다. 바로 차를 몰아 도시로 들어갈 때, 그는 ‘자기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there had been a great change in his life)을 깨닫습니다.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자기 등에 예수님 얼굴 문신을 한 후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또 다른 신비로운 형태의 폭력을 경험합니다. 문 앞에서 갑자기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 지평선 위로 노란 줄 두세 개가 지나가고, 하늘 위로 빛의 나무가 터져 올라가는 것을 목격한 순간, 그는 ‘창에 맞아 문에 박힌 것처럼’(as if he had been pinned there by a lance) 탕 쓰러집니다. 그때까지 문을 열어 주지 않던 세라 루스에게 ‘오바디야’(=Servant of God)라는 자기 이름을 대자, 빛이 쏟아져 들어와 거미줄처럼 혼란했던 그의 영혼을 ‘완벽한 아라베스크로, 나무와 새와 동물의 정원으로’(into a perfect arabesque of colors, a garden of trees and birds and beasts)  변화시켰습니다. 그 이후에 그의 등짝에 가해진 빗자루 세례는 그가 예수님의 수난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눈물로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는데 트랙터 사건이라는 위험천만한 사건이 필요했고,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는 데 빛으로 주조된 ‘상상의 창’에 맞는 위험이 요구되었던 셈입니다.

 

<인생의 상수는 삶이 아니라 죽음>

작가가 폭력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세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폭력의 실상에서 도피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다면 그런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의 경험들에서 벗어나, 안락하고 태평한 상태만을 지속해 가려는 게 우리의 본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고난과 질병과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주변에서 제거합니다. 거지도 장애인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수용해 두고, 장애인 학교나 화장장이나 묘지도 혐오시설로 간주하여 우리 주변에서 쫓아냅니다. 개인의 안녕과 가족의 평안을 넘어서는 그 어떠한 범주에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웃들과 의미 있게 소통하지도 않고, 고통당하는 이웃의 고통에도 무관심하면서, 선입견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자기 사변에만 사로잡혀 살게 되지요. 그렇게 살면 우리가 품고 있는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대로, 고난과 질병과 죽음이 우리를 비켜갈까요? 플래너리 오코너는 그렇지 않다고 점잖게 말하는 대신, 폭력적 상황과 참혹한 정경과 죽음의 현실이라는 다이너마이트를 일상의 현장 속에 과감하게 터뜨려 버립니다. 먼저 고난과 질병과 죽음이라는 요소들이 인간 실존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 그것들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인생의 의미를 계시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피조물이나, 하나님과 분리되어 오만과 자기만족 속에 사는 비루한 존재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좇아,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오코너는 이런 근원적인 질문에서 도피하려는 현대인들이 각성하도록, 다이너마이트 같은 서사로 충격요법을 쓴 것입니다.

 

현재 전 세계를 둘러보면, 국가 간 전쟁이나 국지전이 벌어지는 나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대 러시아,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레바논 간에 전쟁이 격화되고 있고, 수단, 콩고, 에티오피아, 예멘, 미얀마 등지에서는 정부군과 반군 혹은 민병대와의 전쟁이 장기간 진행 중입니다. 그 관련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삶에서 폭력과 재난과 죽음은 일상사입니다. 한편으로는 무슨 전쟁이나 사회적 분규가 발발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폭력이나 재난이나 죽음은 우리 주변에서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삶의 상수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초하는 비극적 상황도 있지만, 불가항력적으로 닥치는 사고나 재난도 다반사입니다. 예컨대 지난해(2023년) 자살 사망자 수는 13,978명이었고(2002년보다 1,072명 증가),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는 2,016명이었으며(2002년보다 207명 감소),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2,551명이었습니다(2002년보다 184명 감소). 자살의 경우와는 달리, 산업재해나 교통사고의 경우는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다 삶의 각 시점에서 불쑥 찾아드는 질병이란 요소를 더해 보세요. 지난 주에 소천한 한 선교사님은 저와 동갑이었습니다. 갑상선암이 폐로 전이된 것이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전 어느 날 갑자기 갑상선암이 그분의 몸에 자리잡기 시작했지만, 본인을 비롯하여 아무도 그것을 제때에 인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래전 어느 날 선교지에서 돌연히 나타난 강도에게 총상을 입은 후에도 건재할 수 있었으나, 아무도 모르게 찾아온 질병은 단기간에 그분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두 사건 모두 예기치 않은 일이었고 돌연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총상과 갑상선암을 인생의 상수로 받아들이고, 의젓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생의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 그분이 그립습니다. 이렇게 우리와 밀접하게 존재하는 폭력이나 질병이나 죽음에서 도피하려는 것은 환상이요,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삶이냐 죽음이냐가 아닙니다. 죽음을 상수로 두고, 존재 가능한 다양한 삶의 변수들을 선택하며 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적은지를 깨닫고, 어떤 재난과 역경이든 찾아올 수 있음을 예상하면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태도였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근본 자세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을 모색하는 것은 그 다음 과제이지요. 줄스 에반스(Jules Evans)가 한 말을 활용해 본다면, 먼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여 수용함으로써 ‘자신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고’(be doctors to ourselves), ‘자신의 마음을 넓혀 사회, 과학, 문화, 우주와 연결하는’(broadens our minds and connects us to society, science, culture, and the cosmos.) 인생을 구가해 가야 합니다. [“철학을 권하다”(Philosophy for Life and Other Dangerous Situations)]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상적이고, 포괄적이며, 보편적인 폭력성을 매개로 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설파하는 오코너의 단편 소설은 우리의 영혼에 일시적인 충격과 더불어 심오한 치유를 선사해 줍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며 당혹하고 의아하던 중에, 서서히 그런 일이 이 세상에 사는 누구에게나, 심지어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 비극적 사건을 통해 등장인물이 누리게 된 통찰의 내용이, 독자인 우리의 것이 되지요. 이 치유를 경험하고 나면,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습니다. 비극적 상황이나 죽음을 미리 경험하고 난 후, 그 상황이나 죽음을 극복한 셈이니까요. 가톨릭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논평이 제 가슴을 울립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를 읽을 때, 나는 헤밍웨이, 캐서린 앤 포터, 혹은 사르트르를 떠올리지 않고, 오히려 소포클레스 같은 인물을 떠올린다. 어떤 작가에 대해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경의를 담아 그녀의 이름을 쓴다. 그녀가 인간의 타락과 불명예를 보여주는 그 모든 진리와 그 모든 장인의 기예를 기리며 말이다.”("When I read Flannery O'Connor, I do not think of Hemingway, or Katherine Anne Porter, or Sartre, but rather of someone like Sophocles. What more can you say for a writer? I write her name with honor, for all the truth and all the craft with which she shows man's fall and his dishonor." (“A Literary Guide to Flannery O'Connor's Georgia”)

 

소포클레스(497-406 BC)는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한 사람으로서 90세 이상을 향수하면서 약 120여 편의 작품을 남긴 문호입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테바이 3부작’으로 알려진 “오이디푸스 왕”,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를 비롯한 7편입니다. 치밀하고 복잡한 플롯에다 대립과 대조가 부각되는 복합적인 대화를 가미하면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감정을 깊이 천착하는 데 중점을 두는 작품들입니다. 특히 인간 존재의 근원적 모순을 탁월하게 그린 두 편의 오이디푸스 작품은, 독립적인 인간이 자유 의지로 취한 행위가 신들이 설정한 운명을 수행하는 것이 되고야 마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임철규 교수, “그리스 비극”). 한편으로 이 두 작품은 인간의 비극적 고통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욥기”와 “리어왕”에 비견됩니다. 오이디푸스도 부당해 보이는 운명적 고난을 통해 황폐해진 자기 영혼 속에서 자신의 무지와 어둠과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초한 눈먼 상태는 자기의 참모습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은 오만(pride)과 독선(self-righteousnesss), 즉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보다 미덕의 구조물을 세워 자신의 삶을 다스리는 경향’(the tendency to govern one’s life by setting up a structure of virtues rather than by submitting to Cod’s will)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루이스 카우언, “Invitation to the Classics”). 오이디푸스와 같이 우리 각자에게 드리워진 이 오만과 독선의 어둠을, 폭력이란 수단을 통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열어 밝히는 것이 오코너의 특장입니다. 그녀가 표현한 대로, ‘평생 지속될, 섬멸하는 빛의 폭발’(a kind of blasting annihilating light, a blast that will last a lifetime) 속에서 자신을 보지 않는 한, 이 오래 묵은 어둠은 우리에게서 결코 물러가지 않습니다(플레너리 오코너, “The Habit of Being’).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