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의 맷돌’에 갈리는 젊은이들
여행 유튜버 한 사람이 미국 뉴욕 시에 갔다. 그곳 물가를 소개해 주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몸살 걸려 클리닉에 가서 진료를 10분간 받고 150불[=20만 원]을 지불하고, 약값은 따로 40불[=55,000원]을 냈다. 미용실에 파마를 하러 갔더니 그 비용 209불에다 팁을 41불 덧붙여 주어야 했다[=총 33만 원]. 커트 한 번에 300불을 받는 곳도 있다고 하니, 비싼 편이 아니라고 한다. 빵집에 들러 베이글 샌드위치 하나에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23.81불[=33,000원]을 냈다. 간단한 아침 식사 한끼 가격이 이 정도다. 그곳에서 최근에 입사한, 펜실베이니아 대학 출신 한국 직원의 원룸 아파트를 방문했더니, 월세가 3,125불[=433만 원]이었다. 그 직원의 월급은 세후 6,000불[=831만 원]이었다니, 월급 중 절반이 달세로 나가는 셈이다. 뉴욕에서는 한 달에 1억을 벌어도 잘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레슬리 뉴비긴(1909-1998)이라는 선교학자가 언급한 대로,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자유 시장 경제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런데 이런 고물가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곳에서 만난 여러 한인 청년들의 고백이었다. 그들은 그곳이 고물가라도 좋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많이 써야 하지만, 많이 버니까 괜찮다는 말이다. 이에 덧붙여, 그곳의 문화가 한국과 다르다는 것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꼽았다. 한편으로, 한 달에 2천만 원도 번다는 30대 한국 여자 간호사는, 월급을 그렇게 많이 버니까 좀 더 많이 돈을 모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며 그곳 생활을 한국 생활보다 선호했다. 그리고 한국 병원에서는 1인 몇 역을 감당해야 했지만, 그곳에서는 그 몇 역 중에 자기 전문 분야 외의 영역은 다른 전문인들이 처리해 주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면서 경이로웠다고 한다. 자기 간호 업무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남자 미용사는, 자기 실력을 개발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경제력을 더 빨리 늘일 수 있는 기회가 많아 흡족하다고 했다. 자기 실력에 따라, 기본적인 월수입도 증진되지만 부유한 사람들 간에 활성화된 팁 문화가 자기를 더욱 채찍질해준다는 것이다.
뉴욕의 일상생활을 엿보고 그들의 대화를 접하니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우선은 뉴욕 시의 물가가 열어 밝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막다른 골목이다. 그곳 물가보다 더 높은 다른 나라 도시가 홍콩뿐이라는 기사(2023년)가 있었으니, 그것은 현세대의 물가 최고봉인 셈이다. 그곳 물가가 더 오를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점은 그곳 주민들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의 말대로 오른 만큼 더 벌 테니까. 문제는 그들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떠받쳐주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전 세계 후진국 국민의 고통이다.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노동 착취’가 진척되었다. 노동자가 단순한 상품으로 취급되어, 가혹한 산업 생산 조건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복지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공동체 파괴’도 발생했다. 급격한 산업화는 농촌 공동체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뿌리 뽑아, 소외와 사회적 붕괴를 초래한 것이다. 이것들뿐인가? ‘자연 지배’라는 명목으로 생태 균형을 무시한 채 자연 자원을 착취한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일찍이 전통적인 경제 사조를 반대한 헝가리 지식인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가 자신의 대표작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 1944)에서 탐구한 내용이다. 그는 산업혁명과 시장 자본주의의 부상이 모든 가치를 자본이라는 단일 가치로 환원함으로써 인간성을 갈아 파괴했다는 의미에서 ‘사탄의 맷돌’(Satanic mills)이라는 극적인 상징을 구사했다. 결국 이 표현은 자본주의 시장 메커니즘이 사회의 가치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대한 폴라니의 경고를 반영하며, 경제 활동과 인간 복지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무려 80년 전에 그가 발한 이런 경고가 현시대 뉴욕 시민들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 그리고 과연 그들이 속한 사회가 변화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 수 있을까?
둘째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처한 척박한 현실이 떠올랐다. 2018년에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소개한 ‘저신뢰 각자도생 사회의 치유를 위한 교육의 방향’ 보고서가 있다. 미국, 중국, 일본, 한국 고교를 졸업한 대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이다. "고등학교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라는 질문에 세 가지 선택 사항을 제시했다. (1) 함께하는 광장 (2) 거래하는 시장 (3) 사활을 건 전장. 우리나라 학생들은 어떤 항목을 얼마나 선택했을까? 12.8%가 ‘함께하는 광장’을, 6.4%가 ‘거래하는 시장’을 선택했지만, ‘사활을 건 전장’을 선택한 학생이 무려 80.8%였다. 미국은 어떠했을까? 33.8%, 25.8%, 40.4% 순이었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다른 세 나라 학생들 중 41.8%가 ‘사활을 건 전장’을 선택했으니, 미국 학생은 그 항목에 관한 한 평균적인 수준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의 고교 시절이 엄혹한 경쟁에 돌입한 장이라고 인식한 만큼이나, 벗과 함께 삶을 나누고 우정을 꽃 피운 젊음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일본 학생의 경우는 76%, 10.5%, 13.8%로서, 절대 다수가 ‘함께하는 광장’을 선택했다는 점에도 우리 학생들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었다. 많은 측면에서 일본 사회를 따라 간다는 우리나라 사회가 이 교육면에서는, 일본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최악의 방향으로 질주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순전한 경제 논리 하나가 일찌감치 청소년 교육까지도 잠식해버린 것이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교육 현장을 전장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이 현실을 두고도 꼼짝달싹하지 않는 우리나라 사회가 개탄스럽다.
한편으로, 과중한 심적 부담으로 다가온 학업 경쟁을 뚫고 대학에 진학한 우리나라 대학생들이었기에, 고교 생활에 대해 ‘사활을 건 전장’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대학 시절부터는 그런 인식이 변화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없다. 현실적으로 대학 후의 취업 시장이 대학 입시보다 더 심각한 경쟁이 전개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전장을 탈출하여 ‘함께하는 광장’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오로지 경제적 합리성에만 기초를 두어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한, 그 길은 요원하기만 할 뿐이다. 김홍중 교수의 지적처럼, 비록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근대적 합리성의 표상을 구현하면서 현시대의 대표적 인간 유형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문제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정치적 인간’, ‘도덕적 인간’, ‘사회적 인간’을 파괴하면서, 삶의 모든 차원을 ‘경제적 서바이벌’로 환원시키는 운동의 무차별성이다.”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듯한 이런 시대 분석이 우리 젊은이들의 귀에 어떻게 들릴까? 그리고 그들이 ‘함께하는 광장’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설 가능성에 기대를 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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