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성화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천사의 빵’,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4)
-내가 단테다-
“신곡”을 읽으며 제가 접한 최대의 반전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토록 사모하던 그녀를 만나게 되면, 얼마나 애틋한 사랑의 교감이 이루어질까 궁금해하던 차였습니다. 그 호기심과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그를 만난 베아트리체는 여왕처럼 의젓한 자태로 근엄하게 한 마디 던집니다. 그것은 결코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애인의 말투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잘 보아요. 나는 진정 베아트리체요. / 그대는 어떻게 이 산에 오르게 되었지요? / 여기 행복한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연옥-30곡) 즉 인생의 길을 잃은 단테가 어떻게 감히 죄가 설 자리가 없는 축복의 영역, 이 성스러운 지상 천국으로 올라올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단테가 영적 정화를 통과할 수 있도록 과거의 실패를 직시하라고 촉구한 책망이었다는 점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당장 그 장면에서는 단테가 아닌 제삼자인 저도 찬 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한 마디에 자기 모습이 부끄러워진 단테는 눈물바다를 이루며 참회합니다. 잠시 후 베아트리체는 경건한 천사의 무리에게 자기가 단테에게 이렇게 엄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선 단테가 자신이 대변하는 영적, 도덕적 원칙에 충실하지 않았던 점에 대해 실망감을 표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성스럽고 방대한 은총으로 그에게 잠재적인 많은 능력과 은사를 허락해 주셨지만, 단테가 그것들을 낭비하여 영적, 도덕적으로 더 낮은 수준에 속한 것들을 추구함으로써 너무나도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꿈이나 다른 방식을 통해서 그런 삶에서 돌이키라고 호소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어 결국 ‘죽은 자들의 입구’[=림보]까지 방문해서 베르길리우스에게 울면서 부탁한 것입니다. 단테에게 ‘길 잃은 사람들’[=지옥의 죄인들]이 얼마나 참혹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 보여 줌으로써, 그를 구원의 길로 돌이켜 달라고 간청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입니다. “만약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 어떠한 / 참회의 대가도 전혀 없이 레테의 / 강을 건너고 또 그 물을 마신다면, / 하나님의 높으신 뜻이 깨질 것입니다.”(연옥-30곡) 그녀의 질책은 단테가 과거의 실수를 직시하고 회개하여 진정한 영적 변화를 추구하도록, 엄중하게 촉구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단테의 궁극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영적 지도자로서, 그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그의 잘못을 일깨우고 정화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던진, 애정과 진심이 한데 어우러진 가혹한 책망은 지난 제 삶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두말없이 ‘내가 단테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습니다. 자연계와 초 자연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신성한 섭리와 은총으로 제게 잠재적인 능력과 은사를 풍성하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인물로 성숙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갖추어 주신 셈입니다. 베아트리체가 활용한 비유를 빗대어 본다면, 제 영혼과 성품은 제대로 경작하기만 하면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비옥하고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전도유망한 그 땅이라도 경작하지 않거나 나쁜 씨앗을 뿌린 채로 방치해 두면, 황무지로 변모하거나 비옥한 만큼 그 악한 씨앗이 더 왕성하게 성장하여 파멸만 낳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제게 허락해 주신 잠재력 중 상당 부분을 계발하지 않았거나 낭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테가 들었던 질책은 제 것이기도 합니다.
-‘향주삼덕’ 여인들과 ‘사추덕’ 여인들-
그런데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기대했던 삶의 열매는 그가 이룩한 대단한 업적이나 명성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성숙한 성품과 선한 행실이었습니다. 이것들은 “신곡” 곳곳에 자주 등장하는 ‘향주삼덕’(向主三德)과 ‘사추덕’(四樞德)으로 요약됩니다. ‘향주삼덕’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한 세 가지 성스러운 덕성으로서, 믿음(faith), 소망(hope), 사랑(charity or love)을 가리킵니다(연옥-8곡). ‘신학적 덕목’(the theological virtues) 혹은 ‘대신덕’(對神德)[=하나님에 대한 덕]이라고도 불리는 이 세 덕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만이 이 세 가지 덕을 인간의 영혼에 채워 주십니다. 이 신학적 덕목의 순서는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누리는 영적 여정의 진행을 반영합니다. 먼저 믿음은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출발점이고, 소망은 그 믿음에서 흘러나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도록 우리를 지탱해 줍니다. 그리고 사랑은 최고의 덕목으로서 믿음과 소망을 완성하여,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움직입니다.
믿음.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실체인 하나님을 무한 신뢰하는 것입니다. 단테는 자기가 ‘영원한 세 위격’으로 존재하면서 ‘유일하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은, ‘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증거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기록인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해서라는 점을 밝힙니다. 이것들이 진리를 담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그 계시에 ‘뒤따른 기적들’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만약에 기적들이 없는데도 세상이 / 그리스도교를 향했다면, 그것이 기적이니 / 다른 것은 백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라고 언급합니다(천국-24곡). 단테가 지상에서 가장 큰 죄와 치욕이 성경의 왜곡과 복음에 대한 침묵이라고 지적한 게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천국-29곡).
소망.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궁극적 미래에 대한 낙관입니다. 하나님과 당신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낳는 덕입니다. 단테가 “소망이란 미래의 영광을 / 확실히 기다리는 것이며, 하느님의 / 은총과 이전의 공덕이 희망을 낳습니다.”라고 정의한 대로입니다(천국-25곡).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이전의 공덕’이란 표현은 믿음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선한 행실로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 소망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영혼들’이 ‘자기 땅에서 두 겹 옷을 입는다는 것’입니다.(천국-25곡)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천국에서 부활하여 영혼과 육신의 옷을 새로 입는 영광스러운 장래를 가리키지요.
사랑.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전인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실천적 섬김입니다. 이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즉 ‘우주에 흩어져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에 의해’ 하나로 묶으시는 분입니다(천국-33곡).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신과 함께 천국을 누린다는 소망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낳을 뿐 아니라, ‘지상에서 선을 사랑하게 만듭니다.’(천국-25곡) 단테는 자기 영혼이 품고 있는 최고의 사랑이 겨냥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라면서, 자기에게 ‘크든 작든 사랑을 가르치는 / 모든 <성경>의 알파와 오메가’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천명합니다(천국-26곡). 게다가 하나님은 단테 자신의 삶, 세상의 사정들, 신자들과의 교제를 다 지휘하셔서 단테를 ‘그릇된 사랑의 바다에서 구하여 / 올바른 해변으로 인도’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천국-26곡). 믿음과 소망을 견실하게 계발하여, 올바른 동기와 방식으로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하도록 하나님께서 주관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사추덕’(四樞德)은 인간의 행동을 인도하고 인간이 상호 관계를 진행해 가는 방식에 뿌리내리고 있는 덕목으로서, 분별(prudence), 정의(justice), 용기(fortitude), 절제(temperance)를 가리킵니다(연옥-1곡). 모든 덕의 ‘중추적’ 구실을 한다는 뜻(the cardinal virtues)인 ‘사추덕’의 순서도 각 덕목의 중요성과 상호 관계를 반영합니다. 즉 분별[=덕으로 구성된 마차를 운행하는 마부]은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도록 도와줌으로써 다른 덕목들을 이끌어 주고, 정의는 이러한 도덕적 이해가 타인에 대한 우리의 행동에 적용되도록 하고, 인내는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주며, 절제는 욕망을 억제하여 도를 넘거나 과잉되지 않도록 합니다. “신곡” 안에서 이 두 무리의 덕성은 각각 3개의 별이나 3명의 님페[=님프]로, 4개의 별이나 4명의 님페로 표현됩니다. 별로 상징될 때, 3개의 별은 저녁에 떠서 밤을 관장하는 것으로, 4개의 별은 새벽에 떠서 낮을 관장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각각 저녁 시간에 이루어지는 관상 생활의 덕성과 낮 시간에 진행되는 활동적 삶의 덕성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덕성 중에 단테가 계발하지 않고 방치해 두거나 악한 씨앗을 뿌린 영역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단테가 천국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만나 각각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후련합니다. 세 사도도 모두 흡족해 하면서 단테를 축복해 줄 뿐 아니라, 곁에서 듣고 있던 축복받은 영혼들도 기뻐 노래로 화답할 정도니까요. 이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단테가 그동안 신학적인 지식과 덕목은 공들여 잘 계발해 왔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테가 베아트리체 앞에서 통곡하며 참회한 것은 이런 신학적인 덕목에서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니라, 활동적인 삶의 덕목에서 후회할 만한 행태를 보였다는 것 때문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짐작을 뒷받침해 주는 단서 한 가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마텔다가 레테의 강에서 단테에게 세례를 베푼 후에, 흠뻑 젖은 그를 여인 네 명에게 데려다줍니다. 지상 천국에서는 님페이기도 하고 하늘에서는 별이기도 한 그녀들 모두는 단테를 팔로 감싸 주고, 노래하면서 베아트리체 앞으로 안내해 줍니다. 그때 베아트리체는 그리폰을 응시하고 있었고,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눈 속에서 빛나는 이중적인 동물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바뀌는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의 기쁨을 끊임없이 채우다가, 앞의 네 여인보다 훨씬 더 높은 기상과 더 깊은 안목을 지닌 여인 세 명이 천사의 노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봅니다(연옥-31곡). 그 여인들의 자비로운 호소 덕에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향해 ‘성스러운 미소’를 짓게 되지요(연옥-32곡). 여기에 등장하는 네 여인과 세 여인이 누구인지 짐작되시지요? 바로 ‘사추덕’과 ‘향주삼덕’입니다. 그런데 참회의 세례를 받고 흠뻑 젖은 단테의 몸을 팔로 감싸 안은 여인들은 ‘향주삼덕’이 아니라 ‘사추덕’이었습니다. ‘향주삼덕’ 여인들은 고고하고 초월적이고 냉정한 자태로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보이나, ‘사추덕’ 여인들은 겸허하고 현실적이고 동정심이 넘치는 님페들입니다. 그들은 ‘향주삼덕’에서는 견실했으나, ‘사추덕’에서 연약했던 단테를 긍휼히 여겼습니다. 다시 한번 ‘내가 단테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신앙의 지식에서는 강한 듯하나, 실천적인 덕행에서는 연약하기 짝이 없기에 삼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합니다.
-돌머리 단테가 받은 소명-
소명 부여하는 베아트리체. “신곡” 속에는 단테에게 자기가 본 것을 기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라는 권면이나 명령을 하는 이들이 여럿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권면은 베아트리체의 입에서 나옵니다.
▪“그대는 잠시 동안 이 숲에 머물다가 /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저 로마[=천국]에서 / 나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 그러니 악하게 사는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 이제 저 수레를 잘 보고, 그대가 본 것을 / 저 세상으로 돌아가 글로 쓰도록 해요.”(연옥-32곡)
▪“그대는 내가 말한 이 말을 그대로 / 기억하여 죽음을 향한 달리기에 불과한 / 삶을 살아가는 산 사람들에게 전하시오. / 또한 그 말을 쓰게 될 때, 그대가 보았듯이 / 여기서 방금 두 번이나 약탈당한 나무[=선악과]를 / 숨기지 않도록 마음속에 잘 기억하시오.”(연옥-33곡)
즉 앞으로 자기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지만, 우선은 세상으로 돌아가 여전히 악행을 저지르며 사는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가 이번 여정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전하라고 제안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향한 달리기에 불과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베아트리체의 진단이 가슴을 찌릅니다. 베아트리체의 제안이 단순한 권면이 아닌 것은, 그녀의 독특한 어조와 직설적인 표현이 말해 줍니다. 지상 천국에 있는 선악과의 형상을 보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테에게, 그의 ‘지성이 단단하게 / 돌이 되고 흐릿하게 물들어 있어서’ 제대로 못 쓸 것 같으니 최소한 그림이라도 그려서 가져가라고 권한 것이지요. 단단한 돌머리 믿지 말고, 그림의 도움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 단련이 되어서인지, 단테도 이제는 지혜롭게 응수합니다. “봉인하는 밀랍이 찍힌 / 모양을 바꾸지 않는 것처럼 이제 / 내 뇌리에 당신 모습이 새겨졌습니다.”(연옥-33곡) 베아트리체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단테에게는 소명이나 매일반입니다.
베아트리체가 맡긴 소명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단테는 이 저승 여행을 당대의 일반인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고향 피렌체의 토스카나 방언으로 기록했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일반 서민들도 다른 이들의 낭독을 통해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당대의 문필가들이 라틴어를 사용하는 전통과 결별한, 용감하고 분별력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곡”은 읽기가 수월찮은 서사시입니다. 역사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면모, 중세 유럽과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서 전개된 정쟁과 대립의 복잡성, 스콜라 철학과 신학적 논쟁의 깊이, 유럽과 다른 지역들에 대한 지리 지식과 천문학적 소양 및 단테 자신과 연관된 사건들과 인물들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으면, “신곡”을 읽거나 듣는 일은 너무 난해한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상을 뒤엎고 14세기 이후로 “신곡”은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이곳[=지상 세계]에서 맛볼 수는 있지만 충분히 / 배부르지 않은 천사의 빵[=영원한 진리]을 향해 일찍부터 / 목을 내밀고 있는 그대들”(천국-2곡)이 무수하게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였겠지요. 폴 스트래던 교수가 지적한 대로, 단테의 “신곡”은 토스카나 방언이 현대 이탈리아어의 근간을 이루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했습니다. 단테를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피렌체 사람들 이야기”).
소명의 양면성. 단테에게 같은 소명을 부여한 이 중에 천국에서 만난 그의 고조부 카차구이다의 영혼도 있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이나 / 타인의 부끄러움으로 흐려진 양심은 / 분명히 네 말을 거칠게 느낄 것이다. / 그러나 모든 거짓을 떨쳐 버리고 / 네가 본 것을 모두 명백히 보여서 / 옴 있는 자는 긁도록 만들어라. / 너의 목소리는 처음 맛보기에는 / 거슬리겠지만, 나중에 소화될 때는 / 생명의 자양분이 될 테니까.” (천국-17곡)
즉 자신이나 타인이 저지른 부끄러운 행실 때문에 양심이 흐려진 사람들은 거짓 없이 명백한 단테의 간증을 거북하게 느끼고 물리치겠지만, 그의 말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참회하여 참 생명을 누리는 이들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이 권면을 하기 전에, 카차구이다는 단테가 이 소명을 실행해 가는 길에 심각한 장애가 있을 것을 예언합니다. 그가 힘겨운 망명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즉 사랑하는 모든 것을 떠나 다른 사람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단테는 “다른 사람의 빵이 얼마나 짠지, / 또 남의 집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곡>은 망명객 단테가 무려 20년의 세월 동안 이 집 저 집 낯선 침대에서 꾼 꿈의 이야기입니다.”(박상진 교수) 단테가 짠 빵을 먹고 힘겹게 남의 집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 방대하고 위대한 서사시를 써 내려갔다는 게 경이롭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글쓰기라는 소명이 있었기에 단테가 그 지난한 망명 생활을 견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이엔 애커먼이 지적한 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을 시적으로 바꿔놓고 싶어” 합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현실 세계와 나란히 존재하는 상상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상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시적인 요소를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욕망을 전달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는 말입니다(“마음의 연금술사”). 그 시적인 요소가 우리 삶을 지탱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을 잠시 돌아보면,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보낸 글이나 귀국해서 쓰기 시작한 이 블로그의 글을 읽기 거북하다고 여긴 이들이 좀 있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을 비롯한 많은 유명 불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한 한 섀도복싱을 하고 있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여러 영역에서 터널 비전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으니 양쪽 모두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던 차였습니다. 아직 불신자들의 직접적인 피드백은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누구를 가르치려고 드느냐, 우리 목사님은 그렇게 복잡하게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나누기는 곤란하다는 식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복음주의 목사와 신학자들에게 배운 성서적인 시각들을, 다양한 주제들과 연관하여 풀어 설명한 제 글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피드백치고는 뜻밖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글을 처음 읽을 때는 다소 언짢은 기분이 들거나 부담스러웠지만, 나중에 그것을 묵상하고 반추한 후에는 영적인 자양분이 되었다고 여긴 이들도 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단테에게 던진 카차구이다의 권면 덕분입니다. 그리고 귀국한 후 성서인문학을 염두에 두고 글쓰기를 진행하면서 직면한 상황도 단테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귀국한 후 지난 6년간 5번 이사를 하고 현재 6번째 숙소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요. 공들여 외국에서 가져온 책들도 절반 이상은 이사하는 중에 버려야 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의 거류민 생활과 6년 간의 국내 나그네 생활을 버티도록 해 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조명으로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글로 옮기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명징한 글들이 제 영혼의 닻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소명의 근원. 단테는 글 쓰라는 소명을 받기 전부터, 자기는 “사람이 영감을 줄 때 / 기록하고, 사랑이 마음에 속삭이는 것은 /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일 뿐”(연옥-23곡)이라는 자기 인식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방문할 때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나중에 종이에 적을 수 있도록 / 그대들은 누구이며 또 그대들 등 뒤로 / 가는 저 무리는 누구인지 말해 주시오.”(연옥-24) 이런 태도는 “신곡”이 마치 단테가 직접 저승 세계를 방문해서 얻은 정보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지요. ‘보다 나은 죽음을 위해’ 저승 세계를 체험하는 그가 행복한 사람인 것처럼(연옥-24곡), 그가 제공하는 이 영적 정보를 누리는 우리도 행복한 사람인 셈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전문가적인 면모를 갖춘 단테의 태도는 그가 글 쓰는 일과 연관된 재능과 은사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서로 다른 성향과 은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 다른 임무나 과업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솔론으로 크세르크세스로, / 누구는 멜키체덱으로, 누구는 하늘을 날다 / 자기 아들을 잃은 자[=그리스의 명장 다이달로스]로 태어난답니다.”(천국-8곡) 심지어 천국에서도 우리 각자가 서로 대른 곳에서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그러니 이 왕국에서 우리가 서로 다른 곳에 / 있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당신의 의지로 / 만드시는 하나님과 온 왕국이 좋아합니다.”(천국-2곡)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하지 않는다면, 우리 각자의 자녀들은 우리와 비슷한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은사와 기질에 따라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은 다양한 됨됨이를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에 따라 사회에 기여하면서 사는 게 맞습니다. “본성이 자신과 맞지 않는 운명과 마주치면, / 자기 고장에서 벗어난 다른 모든 씨앗처럼 / 언제나 나쁜 시련을 겪게 되는 법입니다.”(천국-8곡) 자신의 됨됨이와 맞지 않는 대상이나 상황을 굳이 선택하여 혹독한 시련을 자초하는 일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요.
단테가 시인으로서 당신과 사회에 기여하기를 원한 하나님은, 그의 기억을 되살려 주고 그의 시적 표현에 대한 영감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내 말을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 다른 분[=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면 내 기억을 / 충분히 되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천국-18곡) 그래서였겠지요. 단테는 자신의 작품인 “신곡”을, “하늘과 땅이 도움을 주었으며 [=하늘과 땅이 손을 맞잡았으며] / 여러 해 동안 나를 야위게 했던 / 이 거룩한 시”로 묘사합니다(천국-25곡). 그리고 이 서사시에 대해 두 가지 기대를 겁니다. 첫째는, ‘어린양처럼 잠들어 있던’ 자기를 정적으로 몰아 자기 고향 피렌체 밖으로 몰아냈던 ‘싸움을 거는 늑대들’을 극복하고, ‘다른 목소리, 다른 모습의 시인으로 돌아가’ 자기가 세례 받았던 산조반니 세례당에서 월계관을 받는 것입니다(천국-25곡). 애석하게도 이 꿈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여행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숨을 거두었으니까요. 둘째는, 자기가 드높은 소망을 두고 있는 ‘전투하는 교회’[=지상의 삶에서 육체와 악마,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가리킴]가 일상생활 속에서 성화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천사의 빵’[=영원한 진리]을 공급하는 것입니다(천국-2곡). 이 꿈은 찬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사후 700년(2021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저와 여러분을 비롯한 수많은 독자들이 이 서사시를 통해 '천사의 빵'을 받아 먹고 있으니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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