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온다
아침, 저녁으로 바깥바람이 매섭다. 겨울이 오고 있다는 징조다. 9월 예보는 이번 겨울이 이전 해보다 더 춥겠다고 했지만, 최근 예보는 평년과 같거나 약간 높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일 테다. 한 가지 거는 기대는 이곳 거제도가 윗지방보다 최소한 몇 도는 더 높다는 점이다. 춥되 즐거운 마음으로 견딜 수 있을 만큼이면 족하다. 추위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경기가 진작에 얼어붙어 많은 분들이 격심한 고통에 처해 있는 현실이다. 대기업도 어려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고 하니, 서민들의 생활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간 어렵게 버텨온 자영업자들의 곡소리가 전국 각지에서 요란하다. 돈이 여유가 있다면, 밖에서 외식도 많이 하고 다양한 곳에서 소비도 많이 하고 싶지만, 그저 마음뿐인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이런 서민들의 사정을 읽어주면서 그들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적실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해야 할 대통령이나 정부 부처의 발빠른 대처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의 됨됨이를 알았으니 무슨 기대를 걸 수 있겠느냐만, 그래도 제정신을 가진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경기 침체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럽이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되었고, 중국이나 일본도 그로기 상태에 놓여 있다. 미국에서는 벌써부터 지난 1920년대 ‘경제 대공황’ 이전 상황과 유사한 경제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면서 경고음을 내고 있다. 게다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라는 변수도 이번 겨울의 경제적 불투명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와의 전쟁과 중동 지역의 국가 간 분쟁은 세계 경제를 더욱 요동치게 한 데서 그치지 않고, 전 세계적인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면에서 이번 겨울을 더욱 암울하고 오싹하게 하고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제는 지난 세월 이루어진 급속하고 경쟁적인 산업화로 인해 지구 곳곳의 환경이 오염되고 기후가 변화할 뿐 아니라, 생태계가 하나하나 붕괴하는 조짐을 매일 목격하고 있다. 날로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와 생태계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합의한 협약마저도 준수하지 않거나, 그 합의에서 이탈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는 마당에 무슨 미래가 기다리겠는가? 처참할 뿐이다.
세계 경기가 회복되고, 세계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전과 똑같은 약육강식의 경제 논리와 각자도생의 국가 철학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한, 우리 인류는 멸망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태를 미리 예견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예견을 일상의 화두로 삼고 살아간 사람은 거의 찾기 힘들다. 그 희귀한 인물 중에 우리나라에는 김종철 선생(1947~2020)이 있다. 지속 가능한 생태 문명과 공동체 건설을 주장해온 영문학자요 사회운동가요 사상가로서, 이러한 뜻을 진작할 의도로 1991년 11월에 계간지 “녹색평론”을 창간하고 이끌었다. “지금은 생태학적 관심을 중심에 두지 않는 어떠한 새로운 창조적인 사상이나 사회운동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나는 믿는다.”라는 그의 확신이 빚은 결실이었다. 비타협적이었던 선생의 삶과 사상은 약 30년간 이 계간지를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발간한 데서 빛난다. 그는 인간이 살아남을 유일한 길로, ‘공생공락의 가난한 사회’ 또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지목했다. 한없는 탐욕과 자연 착취와 절연하고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성숙한 벗들과 함께 더불어 공생공락하는 가난한 삶 말이다. 이런 인물이 우리 곁에서 지난 30년간 공생공락했던 게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지난 30년간 우리나라가 겪은 경제 위기 중 세 번째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절에, 그는 “시사IN” 창간 1주년을 기념하는 특강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성장이 멈췄다, 춤을 추자.” 온 세상을 공멸로 몰아넣는 무차별적인 개발과 경쟁적인 성장이 일시적으로 멈춘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춤을 출 수 있는 시간도 잠깐에 불과했을 뿐, 개발과 성장이라는 두 바퀴의 동력으로 운행되는 세계 경제 체제는 다시 온 생태계를 무너뜨리며 파국을 향해 진격 중이다. “녹색평론”을 창간할 때 그가 던진 이 질문이 지금도 내 가슴을 울린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지금부터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지금이 바로 그때다. 꼭 33년 후다. 그는 가고,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우리가 남았다. 이제 겨울이 온다. 인류사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과연 봄이 또 다시 올 수 있을까? 봄을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데, 시간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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