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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시(時)-장기적 시간 관점을 품으라

그리움은 갈망이다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4. 11. 12.

(Courtesy of Tomás Sanimbo)

그리움은 갈망이다

지난날이 그리울 때가 많다. 아니, 선의가 넘치는 배려와 오래 묵은 신뢰가 한데 녹아든 지난날의 장면들이 그립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일까? 특히 지난 두세 주간 그런 그리움이 진하게 밀려왔다. 외국에서 살던 때 이런 기분이 들면, 고향에 대한 향수나 가족과 절친들에 대한 그리움인 줄 알았다. 잠시 귀국해서 고향도 방문해보고, 가족과 절친들을 자주 만나게 되면서, 이 그리움이 많이 해소된 게 사실이다. 그 만남에서 얻은 위로와 격려가 다시 외국으로 돌아가서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이제는 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상태여서, 고향이나 그분들을 더 자주 접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적어도 1년에 두 번은 정기적으로 만나고, 전화를 통해서나 그 외의 일로 만나 회포를 풀 기회가 여러 차례 마련되었다. 여전히 만나면 반갑고 기쁘기만 하다. 항상 빨리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헤어지곤 했다. 그리고 다시 만나 교제할 날을 고대한다.

 

그런데 지난 두세 주간은 이전의 그리움이 슬며시 밀려 들어왔다. 언제나 보면 위로가 되었던 영화나 드라마도 시들해졌다. 그 플롯도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지고,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사도 김빠진 탄산음료처럼 밋밋하고 풍미가 없었다. 도리어 최근에는 본 적이 없던 예전 리얼리티 쇼 한 가지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이미 3년 전에 종방이 되었지만, 중년에 접어든 연예인들이 함께 모여 숙식하면서 새로운 우정을 쌓아가고 해가 지남에 따라 그 우정을 다져가는 모습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요즘 보기 드문 세심한 배려와 아름다운 심성이 짧은 동거 기간 은연중에 드러나고, 명랑한 웃음과 악의 없는 유머와 연륜이 묻어나는 페이소스까지 자연스럽게 선사해 주는 통에 그리운 심정을 많이 달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지난달에는 그 어느 때보다 그리운 벗들을 많이 만났던 게 떠올랐다. 절친 두 가정과 존경하는 제자 선생님이 이곳까지 방문해 주었다. 제자 선생님 가정은 지난해에 함께 만나 교제할 수 있었으나, 절친 두 가정이 우리 가정과 한자리에 모인 것은 무려 5년 만이었다. 여기에다 국내에서 동역하는 믿음의 동료들과도 함께 우정을 나누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 시간에, 그날 결혼기념일을 맞은 부부가 마련해 온 바비큐 거리를 구워 함께 먹고 즐긴 후에,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한바탕 놀았다. 이게 끝이 아니다. 장기간 만나지 못한 두 조카[한 사람은 파주, 한 사람은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거주]와 대학 후배[강원도 동해에 거주]가 먼저 전화로 연락을 해주어서, 목소리를 주고받으며 진한 회포를 풀 수도 있었다. 벗들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할 기회를 그렇게 많이 누린 기간이었는데도, 왜 그 그리움의 감정이 더 절절하게 가슴에 남아 있었을까?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인식한 것이 사실상 미래에 온전히 향유할 영적 실체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을까? 그 결정적인 시점까지 우리 마음의 공허함은 일시적으로, 일정 수준까지 채워질 수는 있겠으나, 온전한 충족의 단계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미다. 그때까지 우리의 그리움은 미래에 대한 갈망의 형태로 우리 영혼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결여된 동물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간다. 동물에게도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그리움이라는 게 분명히 존재한다. 기억력이 좋다는 코끼리나 귀소본능이 있는 어류들을 보라. 잃어버린 새끼를 발견한 어미 코끼리가 기쁨을 가누지 못할 수도 있고, 치어 상태에서 바다로 내려가 3-4년간 지내던 연어가 자발적으로 자기가 태어난 냇가로 돌아와 산란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동물은 거기까지이다. 미래에 대한 끈질긴 갈망은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194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이 자기 에세이에서 나눈 소중한 시각에 귀기울여 보자.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초자연적 현실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것을 창조해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아래에서 발전한 결과로 설명될 수 있거나, 아니면 무엇인가가 위로부터 와야 한다. 이 딜레마는 피할 수 없다. 즉 우리는 유물론자가 되든지, 초자연주의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만약 ‘인간’이라는 단어에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인간에게 부여한 모든 것을 제거한다면, 인간은 결국 단지 매우 영리하고, 적응력 강하며, 장난기 많은 작은 동물에 불과하게 보일 것이다.” (Man is man because he can recognize supernatural realities, not because he can invent them. Either everything in man can be traced as a development from below, or something must come from above. There is no avoiding that dilemma: you must either be a materialist or a supernaturalist. If you remove from the word ‘human’ all that the belief in the supernatural has given to man, you can view him finally as no more than an extremely clever, adaptable, and mischievous little animal.) (“Selected Essays”)

 

인간이 현실적인 방문과 만남과 동거로 가장 심오한 사랑과 우정을 나눌 수 있어도, 그것만으로 우리 마음이 온전히 충족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일정 수준의 공허감이 우리 영혼에 남고, 무언가 온전한 것이 미래에 존재할 것이라는 갈망이 끈질지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다. 엘리엇은 이런 현상을 초자연적인 존재인 인간이 '초자연적인 현실'을 ‘인식한’ 것으로 파악한다. 인간이 그저 동물과 같은 차원의 존재라면, 결코 ‘창조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유물론자라면 그 이름에 걸맞게 인간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죄다 땅에서, 물질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해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그 모든 것 중 일부가 하늘의 것, 영적인 실체를 만들어 내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우리 마음 속에 용솟음치는 그리움은 미래에 이루어질 영적 현실에 대한 갈망의 전령이다. 그 그리움이 있기에 오늘 내가 산다. 내일도 살아갈 것이다. 갈망의 영적 실체를 누릴 그 날을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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