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성화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천사의 빵’,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3)
-지성의 유익을 상실한 채 고통당하는 사람들-
“신곡”에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 처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옥의 문 위에 적힌 글귀를 보고 무서워하는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가 한 말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지성의 진리를 상실한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보게 되리라.” (지옥-3곡) 여기에서 ‘지성의 진리’라는 표현은, 영어로는 ‘The good of intellect’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지성의 유익’이나 ‘지성의 행복’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지옥에 있는 자들은 지성을 선용하지 않거나 그 유익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아서, 그곳에 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늘이 증오하는 것은 ‘모든 사악함’이고(지옥-11곡), 구체적으로는 ‘무절제, 미친 야수성, 악의’라는 세 가지 성향입니다(지옥-11곡). 눈먼 탐욕과 어리석은 분노와 타인을 해치는 폭력이나 기만이, 이 ‘짧은 삶에서 우리를 뒤쫓고, 영원한 삶에서 저렇게 괴롭힙니다!’(지옥-11곡) 그렇지만 이런 탐욕과 분노와 기만적 태도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등불[=지성 또는 이성의 등불]과 자유 의지’(연옥-16곡)를 마음 챙기며 활용하지 않은 결과물들입니다. 선악을 분별할 새도 없이 본능에 이끌리면서, ‘그릇된 쪽으로 기울어, 결국에는 이성이 감성에 얽매이는 경우들’(천국-13곡)입니다. 탐욕을 눈멀었다고 하고 분노를 어리석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지옥-11곡). 이런 악한 성향과 행태는 인간들을 자기 ‘밑에 잠기게 하여’, 아무도 자기 ‘물결 밖으로 눈을 돌릴 수 없도록 만듭니다.’(천국-27)
결국 지옥에 처한 영혼들은 자신들에게 허락된 이성과 자유 의지를 잘 활용하여, 특히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는 유혹의 첫 단계를 잘 극복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유혹을 이겨내기가 힘들겠지만, 그 단계를 잘 넘어가면 ‘결국 모든 것을 이깁니다.’ 그렇게 되면 ‘더 큰 힘과 더 나은 본성에 자유롭게 종속되고’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만들었을 것입니다(연옥-16곡). 사정이 이러한데도, 자신들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하늘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는 것도 “신곡”은 일러줍니다. 마치 하늘에서 ‘모든 것을 필연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온갖 이유를 하늘로 돌린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시각이 무분별하다는 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모든 게 필연적으로 진행된다면, 자유 의지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선악에 대한 보상이나 형벌에 대한 정의가 사라진다는 것이지요(연옥-16곡). 하늘이 자기 주권을 활용하여 자기 섭리를 펼쳐 가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만,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성과 자유 의지를 선용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유일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천명합니다. ‘부모를 통해 자신을 빚은 하나님 대신 다른 대상을 추구하면서 자기 유익을 우선하는 자기중심적인 삶’이 온갖 불행한 일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교의 복음”). 이 무도하고 몰인정한 면모의 중심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교만과 물질과 명예와 쾌락에 대한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이겠지요. 팀 켈러 목사는 죄를 정의하면서, 어떤 규칙을 어기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우리의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의 원천으로 삼는 것”(making something besides God our ultimate source of value and worth)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자각하지는 못할 뿐,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 대신 무언가를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에 덧붙여, 우리가 취하는 물질과 명예와 쾌락이 우리 마음속에 우상으로 자리 잡아 우리를 정신적, 영적으로 속박함으로써, 우리가 허락한다면 심지어 지옥으로까지 몰고 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Is Hell for Real or Does Everyone Go to Heaven?”)
이 세상에는 지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 단언에 대해 과학적인 증거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묵묵부답입니다.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어느 쪽이 더 적절하고 합리적인 단서가 더 많으냐를 따져서 믿음으로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한편으로 지옥은 비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이 창조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미 논의한 내용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만, 다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한다면, 지옥은 그가 악인을 심판한 결과이기도 하고, 악인이 선택한 곳이기도 합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죄의 본질과 지옥의 관계입니다. 죄는 하나님 대신 다른 대상을 숭배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영위하는 행태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유일신을 업신여기고, 이웃의 처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욕심에만 사로잡힌 채 물질과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경천애인의 원리를 부인하고 자행자지한 삶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정의를 세우는 것은 사랑의 원리와 배치되지 않습니다. 정의 없는 사랑은 맹목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나 자신도 무너뜨립니다. 인류 역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온갖 불의를 자행한 개인, 가정, 특정 집단 및 국가의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진행 중인 ‘교제 살인’, ‘헬리콥터 부모’(Helicopter parent), 인종차별(racism) 및 침략 전쟁의 사례들을 보세요. 장차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정의롭게 심판하는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 혹은 선택과 지옥의 관계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빛과 사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장차 사람들이 그곳에 처하게 되는 것은 죄다 하나님의 빛과 사랑을 거부하여 자초한 결과입니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입을 빌려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하는 눈먼 탐욕’은 그들을 ‘마치 굶어 죽으면서 유모를 내쫓는 어린아이처럼 만들었습니다.’(천국-30곡) 자기 영혼이 굶주리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젖어머니를 몰아내는 유아 같은 이들이 이 세상에 수두룩합니다. 하나님의 빛과 사랑을 선택했지만, 그곳으로 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합니다. 혹시 천국에 가는 사람들도 지옥에 가는 사람들처럼 다 죄를 짓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도 다 죄인입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고, 하나님이 사죄해 준 이들입니다. 그 사죄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그 죄악의 대가를 몸소 대신 치러야 했습니다. 이것이 지옥을 비합리적인 처소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성경이 계시하는 합당한 단서들입니다. 더 늦기 전에 선택해야 합니다. 자꾸 그 결단을 미루다 보면 하나님의 빛과 사랑을 받아 누릴 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곡” 지옥 편은 현생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준엄한 경고이자, 더 늦기 전에 그 지옥의 삶에서 벗어나라는 초대입니다.
-연옥 혹은 현생의 성화-
“신곡”의 연옥은 어떤 영혼들을 위한 공간일까요? 연옥은 구원받은 사람이 죽은 이후에 ‘영혼이 깨끗이 씻겨 하늘로 올라가기에 합당하게 되는 저 두 번째 왕국’입니다(연옥-1곡). 이곳으로 온 사람들은 ‘좋은 죽음으로 선택받은 영혼들’입니다(연옥-3곡). 베르길리우스가 지적한 대로, 지옥이 ‘영원의 불’이라면, 연옥은 ‘순간의 불’이고(연옥-27), 단테가 언급한 대로, “하느님께 돌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눈물로 무르익게 하는 영혼”들이 거하는 곳입니다(연옥-19곡). 또 베르길리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임해서 십자가에서 구원 사역을 완성한 이후부터 이 연옥은 존재했습니다(연옥-6곡). 사실상 그가 지금 지옥의 림보[=고통은 없지만, 어둠 가운데 슬퍼하는 곳]에 거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에 태어났기에 예수를 믿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옥은 그리스도를 믿은 영혼 중에, 신앙과 성품의 성숙이 더 필요한 이들이 가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들 중에는 게으름 때문에 삶의 막바지까지 참회를 늦추었던 영혼들도 있고, 죽기 직전까지 참회를 미루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영혼들도 있습니다. 한편으로 죽음 직전에 흘린 참회의 눈물 한 방울로 운명이 바뀐 부온콘테 같은 영혼도 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거두자 지옥의 사자가 이렇게 외치지요. “오, 하늘의 너는 왜 / 빼앗아 가느냐? 눈물 한 방울 때문에 / 그의 영원한 것을 나한테서 빼앗는다면 / 나머지[=영혼이 떠난 죽은 시신]는 내가 마음대로 처리하겠다!”(연옥-5곡) 결국 구원받은 자가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를 실행했느냐가 하늘로 바로 갈 것인가, 연옥에 머무르게 될 것인가를 결정짓습니다.
그러므로 연옥에서는, 특히 가톨릭에서 칠죄종(七罪宗), 즉 7가지 대죄라고 일컫는 교만, 질투, 분노, 나태, 인색, 탐식, 음욕의 죄에 대해 자기 죄를 씻고 천국 생활로 진입하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중 처음 세 가지 죄[=교만, 질투, 분노]는 ‘이웃의 불행을 사랑하는 사랑’의 세 가지 양태입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 행복을 뒤쫓는 다른 사랑’이 취하는 전형인 모습이지요(연옥-17곡). 그리고 마지막 세 가지 죄[인색, 탐식, 음욕]는 사악한 쾌락을 촉발하는 유혹의 상징인 세이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연옥 편”에서는 이러한 죄들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시각을 여럿 소개해 줍니다. 예컨대 교만의 경우, 이 세상에서 평가하는 명성과 영광의 덧없음과 그 폐해에 대해 다각도로 일러 줍니다. 먼저 세상의 명성은 ‘왔다가 가는 풀잎의 빛깔’과 같아서, 비록 그것이 천 년을 지속한다고 하더라도, 영원에 비하면 눈 깜박할 시간에 불과하다(11곡). 세상의 소문은 ‘한 숨의 바람’과 같아서, 바람 방향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바뀐다(11곡). 몰락의 시대에나 꼭대기의 영광이 잠시 지속할 뿐, 그 영광을 누리는 기간은 얼마나 짧은가?(11곡) 다음으로 교만은 ‘마음의 눈이 병들어 뒤로 가는 발걸음’에 불과해서(10곡), 불친절을 낳으며, 자기에게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의 모든 친족을 함께 불행 속으로 몰아넣는 경우가 많다(11곡). 질투의 경우, 질투의 어리석음과 그 해결책을 제시해 줍니다. 먼저 질투는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두기 때문에 어리석기도 하고(14곡), 하늘이 우리를 부르면서 우리 ‘주변을 돌며 영원한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데’도 땅만 바라보고 있기에 어리석다(14곡). 그러므로 그 치유책은, ‘더 많은 사람이 저 위를 사랑’하는 것으로서, 그 ‘하늘의 사랑’이 더할수록 ‘사랑할 선은 더욱 많고, 더 사랑할수록 거울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되돌려 준다.’(15곡)
결국 이 칠죄종과 같은 죄악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죄악의 실상을 파악한 후에 ‘하늘의 사랑’을 진작해 가는 것입니다. 먼저 그 죄악의 실상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추하지만, 세이렌의 유혹처럼 일단 거기에 사로잡히게 되면 매혹적일 만큼 아름답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단테가 경험한 그 추한 모습의 실체는 이렇습니다. 꿈에 세이렌이 나타나 자기를 유혹하자, ‘성스럽고 재빠른 여인’이 나타나 세이렌을 어지럽게 하더니, “그녀를 붙잡아 옷 앞자락을 / 찢어 젖히고 나에게 배를 보여 주었는데, / 거기서 나오는 악취에 나는 잠에 깼다.”(19곡) 그리고 이러한 죄악으로 인한 쾌락은 오래 묵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늙은 요부’(19곡), ‘늙어 빠진 암늑대’라고 불리지요(20곡). 장구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을 약탈하여 그들을 울게 만든 주범이었지요. 이 요부와 암늑대를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까요? 첫째, 이 사악한 죄악들이 추하고 오래 묵은 요부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경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 죄악의 밥이 되었고, 종국엔 후회막급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 죄악에서 벗어나는 게 좀 더 수월해집니다. 둘째, 우리의 신원이 ‘위로 날기 위해 태어난 인간들’이고(12곡), ‘거침없이 정의의 심판을 향해 날아갈 천사 같은 나비가 되기 위해 태어난 벌레들’(10곡)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도 긴요합니다. 하늘로 오르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을 ‘거짓 즐거움’이 오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입니다. 베아트리체가 지적한 것처럼, ‘마치 구름에서 번개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듯이, 거짓 즐거움으로 인해 최초 충동[=선을 지향하고 하늘로 오르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이 땅으로 가기도 하지요.’(천국-1곡) 땅의 것들에 대한 욕망이 ‘거짓 즐거움’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가 마음을 챙기며 늘 하늘을 지향한다면, 죄로부터 분리된 삶이 더욱 함양됩니다. 셋째, 이 과정이 형통하게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내 영혼을 끌어당기는 험한 길을 넘어설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천국-22) 특히 ‘밤의 어둠이 의지를 사로잡아 힘을 잃게’(7곡) 만드는 경우가 왕왕 있기에, 밤의 유혹을 이기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노래를 늘 올려 드려야 합니다.
지옥이 불신자들에게 걸림돌이라면, 연옥은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 거리입니다. 그들은 연옥의 존재가 비성서적이어서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개신교인들이 성찰해야 할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연옥에서 고통당하면서 참회하고 자기 영혼을 성결하게 하는 신자들처럼, 과연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성화에 힘쓰고 있는가?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된다면서, 세상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살고 있지는 않은가? 아마도 C. S. 루이스가 고민했던 지점이 바로 여기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조이 데이빗먼(Helen joy Davidman, 1915-1960)이 얼마나 훌륭한 존재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직선적이고 똑똑하고, 칼(a sword)처럼 담금질이 잘 되어 있는 영혼”이었던 그녀도 “완전한 성자”(a perfect saiint)는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도 자기와 같은 죄인으로서, “아직 완치되지 못한 하나님의 환자들”(God’s patients, not yet cured)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우리가 죽음과 동시에 완전한 상태가 되어 평화를 누리는 상태로 곧바로 도약하기보다는, “눈물을 말리고, 얼룩도 문질러 닦아내고”(there are not only tears to be dried but stains to be scoured), “칼도 훨씬 더 빛나게 되는 과정”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습니다. [C. S. 루이스, “A Grief Observed”]
그러나 정경 외에 외경이나 전통을 수용하지 않는 개신교 그리스도인은 연옥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정경 어디에도 죽음 이후에 죄를 정화하는 특정한 장소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죽는 날까지 죄악과 구별된 삶(요한일서 1:9-2:1),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성화된 삶(에베소서 4:13)을 치열하게 붙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평생 이루어가야 할 구원의 과정이라고 성경이 명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빌립보서 2:12) “신곡”은 우리에게 연옥을 믿으라고 권면하기보다는, 현생의 성화에 목숨을 걸라고 초대합니다. 그 옛날, 연옥의 존재를 부각하면서 면죄부로 돈을 벌려고 했던 가톨릭의 선례가 있다고 해서, “신곡”의 연옥 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크낙한 영적 혜택을 무시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신곡”은 죽은 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산 자들을 위한 영적 지침서입니다.
-‘지복직관’(beatific vision)의 복-
연옥을 거친 단테는 곧바로 천국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먼저 지상 천국으로 올라간 다음, 그곳에서 꿈에도 그리던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됩니다. 옛사랑의 ‘불꽃’이 남긴 ‘흔적’을 느끼며 ‘떨리지 않는 피’가 한 방울도 없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는 단테를 베아트리체가 부르며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묻자, 그는 눈길을 돌려 레테의 강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그는 부끄러움을 느낀 채, 고통스럽게 한숨을 쉬고 통곡하며 참회하기 시작합니다. 이 ‘참회의 고통’이 자기 마음을 찌른 후에, 단테는 자기를 미혹하던 모든 것들이 죄다 증오스럽게만 보이다가, 급기야 가슴을 짓누르는 ‘죄의식’ 때문에 정신을 잃고 쓰러집니다(연옥-30곡). 이후에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따라 레테의 강물 속에서 완전히 몸을 씻고, 에우노에 강물을 마신 다음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이 두 강물은 두 가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쪽으로는 사람에게 죄의 기억을 / 없애 주는 힘과 함께 흐르고, 저쪽은 / 온갖 선행의 기억을 되살려 줍니다.” 즉 한쪽 강의 이름은 레테로서 죄의 기억을 씻어주는 강이고, 다른 한쪽 강의 이름은 에우노에[=좋은(eu)+정신(nous)의 합성어, 기억을 뜻함]로서 레테와는 반대로 잃어버린 선의 기억을 새롭게 해주는 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쪽과 저쪽을 모두 맛보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고, / 그 맛은 다른 모든 맛보다 뛰어나지요.” 하나님이 사죄해 주신 우리 죄는 온전히 잊으시고, 우리의 선행은 죄다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열어 밝히는 장면입니다. 할렐루야!
“신곡”에서 천국은 누구를 위한 공간일까요? 단테의 사례가 그 답을 알려 줍니다. 참회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죄를 다 씻은 사람들을 위한 곳입니다. 물론 그 참회의 기반은 예수 그리스도가 치른 대속의 희생이었습니다. 이 점과 연관하여 천국 편은 요즘도 자주 논의되는 구원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으나 훌륭한 덕성을 가진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와 그리스도에 대해 듣지도 못한 인도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단테가 거대한 독수리의 형상으로 모인 천국의 영혼들에게 던진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서로 비슷한 답변이 주어집니다. 우선은 세상이 하나님의 뜻을 다 담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 지성의 한계로 인해 각 개인의 구원을 결정하는 하느님의 정의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시야로 ‘영원한 정의 속’을 바라보는 것은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면서, ‘물가에서 아무리 바닥을 들여다보아도 깊은 곳을 보지 못하니, 바닥은 있지만 깊음이 그것을 감추기 때문’이라고 비유하지요. 그러면서 “그런데 너는 누구이기에 설교대에 앉아 / 한 뼘도 안 되는 짧은 시야로 천 리나 / 멀리 떨어진 곳을 감히 판단하려 하느냐?”라는 핀잔이 들립니다. 이에 덧붙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속하기 이전이나 이후에 그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오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여, 그리스도여!> 외치는 / 많은 사람이 심판 때는 그리스도를 몰랐던 / 사람보다 그분에게서 더 멀리 있게 될 것이다.”라는 독수리의 음성이 들립니다(19곡). 현 시대에도 여전히 이런 질문에 대해 유효한 답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이 누구인지 아십니다(디모데후서 2:19).
천국이 단테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곡”은 천국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이 되는 이유가 하나님을 관조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가톨릭에서 ‘지복직관’(beatific vision)이라고 일컫는 축복입니다. 베아트리체가 천사의 품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축복받음은 / 보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지, 나중에 / 뒤따르는 사랑에 토대를 두지 않으며, / 또한 보는 것은 은총과 훌륭한 / 의지가 낳는 공덕으로 측정되니, / 그렇게 단계에서 단계로 나아가지요.”(28곡) 이 말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천국에서 축복받는 것은 몇 단계를 통해 진행되는데, 먼저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나눠주는 은총에서 시작하여 공덕으로 이어지고, 그 공덕에 따라 하나님을 직관할 수 있으며, 그 직관의 결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 사랑이 바로 천국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이겠지요. 신구약 모든 성도가 온 마음 다해 바라보는 대상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옛사람과 새사람들로 가득한 / 그 확고하고 즐거운 왕국은 사랑과 / 눈을 온통 한 표적[=하나님]에 향하고 있었습니다.”(31곡) 결국 단테도 성 베르나르두스가 성모 마리아에게 드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빛을 직접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의 전통에 근거한 상상의 결과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그의 간증 한 자락을 들어 보세요.
“그 심오함 속에서 나는 보았노라. 우주에 흩어져 있는 모든 것들이 / 사랑에 의해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을. / 실질들과 우연들, 그리고 그 속성들이 / 모두 융합되어 있었으니, 지금 말하는 것은 / 단지 한 줄기 초라한 빛에 지나지 않는다. / 나는 그 결합의 우주적 형상을 보았다고 / 믿는데, 지금 이런 말을 하는 동안에도 / 더욱더 커다란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33곡)
즉 자기가 목격한 바를 밝히는 이 간증이 원래 경험한 빛나는 광경에 비하면 초라한 빛 한 줄기에 불과하지만, 자기는 온 우주에서 진행 중인 ‘실질들과 우연들’이 경이적으로 결합하는 양태를 기적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인 증거로 자기가 이런 말을 할 때 가슴속에서 용솟음치는 크낙한 기쁨의 존재를 가리키지요. 아마도 그 기쁨은 이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을 뵙는 단계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흘러넘친 결과였을 것입니다. 천국의 사정이 이러하니, 죽음을 슬퍼하는 자는 무지한 자요,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존재하지 않지요.
▪“저 위에서 살기 위해 여기에서 죽는 것을 / 슬퍼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영원한 비[=은총의 비]의 / 즐거움을 보지 못햐였기 때문이오.”(13곡)
▪“덧없는 것에 대한 사랑 때문에 / 그 사랑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자는 / 끝없이 괴로워해야 마땅하리라.”(15곡)
결국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허락해 주신 목적은, 단순히 인간의 죄악을 용서해 주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인간이 당신과 함께 더불어 영원토록 교제를 나누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을 충분히 위로 들어 올리시려고, /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용서하시는 것보다 / 너그러이 당신 자신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 만약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몸을 낮추어 / 사람의 모습을 갖추시지 않았다면 / 다른 모든 방법이 정의에 부족했을 것이요.”(7곡)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허락된 최고의 특권이며, 이 특권을 본성적으로 깨달아 아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꺼지지 않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대들의 영혼은 최고의 자비가 / 직접 불어넣어 주고, 따라서 그 자비를 / 사랑하여 이후에 영원히 그리워하지요.”(7곡) 우리를 창조해 주신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 이 천국의 지복이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도 온전히 임하길 기원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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