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불행이란 없다
불행하다고 말하고 싶을 때, 잠시만 생각해 보라. 무엇 때문에 불행한지, 그것이 정말 불행한 것인지 말이다. 부자가 아니라서? 권력이 없어서? 인기가 없어서? 혹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부자가 아니라는 게 문제라면, 얼마가 없어서 불행한가를 따져 보라. 권력이 없다는 게 원인이라면, 무슨 권력을 원하는지 물어보라. 인기가 없는 게 문제라면, 어느 정도의 인기를 끌어야 만족할지를 자문해 보라. 혹은 건강 문제라면, 어느 정도 건강해야 하는지도 질문해 보라. 그다음으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라. “그대에게 지금 남아 있는 행운 중에서 아주 작은 일부라도 가질 수 있다면, 하늘에라도 오르기라도 한 듯이 기뻐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보라.” 서울 강남 부자들만큼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지금 내가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를 가질 수만 있다면 하늘로 나를 듯 기뻐할 사람이 어찌 한둘일까? 아파트가 아니라면, 적어도 내게는 숙소가 있지 않은가. 건강 문제로 고뇌할 수 있겠지만,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건강만 누릴 수 있다면 뭐든 다 주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앓아누워 있다면, 적어도 나는 살아 있지 않은가.
앞 문단의 인용문은 보에티우스(Boethius, 480?-524?)의 “철학의 위안”(On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는 동고트족 왕이었으나 서로마제국의 황제로 대우받던 테오도리쿠스 왕의 인정을 받아 집정관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왕의 비서실장까지 역임한 정치인이다. 그런데 원로원 의원들과 왕이 전 집정관인 알비누스를 반역죄로 고발한 상황에서 그를 변호하던 중에, 함께 반역 혐의를 받게 되어 투옥된 후 고문을 받고 처형당한다. 그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며 집필한 작품이 바로 이 철학서이다. 이 책은 지혜와 위안을 상징하는 ’철학의 여신‘(Lady Philosophy)과 보에티우스 자신의 대화를 담고 있다. 산문과 시가 결합된 형태를 띤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논리적 추론과 감정적 표현을 통해, 보에티우스가 인간의 운명과 행복 및 신의 섭리를 탐구해 가는 내적 투쟁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중세의 토대를 이루는 문헌 중 하나로 인정되면서, 그리스도교인들과 일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책 2권에 보면, 보에티우스가 ’철학의 여신‘에게 질책을 받는다. ‘운명의 여신’(Lady Fortune)이 이전에 자신에게 베풀어 준 온갖 좋은 것들에 대해 그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명의 여신’의 논지는 이렇다. ‘자연이 너를 낳았을 때, 내가 너에게 누릴 모든 귀한 것들을 다 공급해 주었다. 이제 내가 그것들을 거두어 간다고 해서 불법을 행하는 게 아니다. 너는 그것들을 잃어버린 게 아니니까. 그것들은 내 시녀들이고 나는 여주인이다. 하늘이 대낮을 선물했다가 어두운 밤으로 대지를 덮어버려도, 세월이 따뜻한 봄을 내었다가 살을 에는 겨울을 선사해도, 바다가 잔잔한 파도를 허락했다가 폭풍우를 일으켜도, 사람들은 다 받아들이지 않느냐. 전에 너를 행복하게 한 것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네가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잘못이다. 지금 네가 겪는 그 불행도 언젠가 다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철학의 여신’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오해하고 착각한 대가일 뿐이다. 행운의 여신이 네게 준 선물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아직 네 소유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최대 바람이 생명의 보존이고, 그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바로 네 가족인데,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지 않으냐. 이 세상에 너무 완벽하게 행복해서 조금도 불만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존재할까? 아직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하고, 겪어 본 사람은 몸서리를 치는 사연을 누구나 지니고 있는 법이다.’ 그러면서 한 말이 앞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그 말을 이어 ‘철학의 여신’은 이렇게 지적한다. “네가 유배지라고 부르는 바로 이곳만 해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고향이지 않으냐. 이렇게 네가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불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고요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감내하기만 한다면, 너의 운명은 무엇이 되었든 네게 행복하고 복된 것이 된다.”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지난 삶을 돌아보며 온갖 회한에 빠져 있었을 법한 보에티우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인생을 복기하면서 깨달은 보석 같은 지혜들이 내 가슴을 절절히 울린다. 내가 지금껏 누린 것을 죄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천부적 권리로 여기면서, 그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잘못되면 세상 무너진 듯 절망하고 고뇌하던 어리석은 시절이 떠오른다. 내 오해와 착각의 결과였다. 낮과 밤, 봄과 겨울, 잔잔한 바다와 폭풍우 치는 바다 같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진행되는 우주적인 섭리로 받지 못한 내 불찰이다. 더구나 내 인생이 어느 한순간에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익히 알면서도, 내가 누리던 것들에 어떠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못 견뎌 하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너는 너의 죽음으로 행운이 끝나는 것과 네가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에 행운이 너를 떠나버리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행운의 여신’) 내 인생에 불행이란 없다. 불행처럼 '보이는' 것을 불행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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