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신들린 삶과 시인의 삶
인생 60을 넘기고 보니 삶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첫째는 벌거벗고 태어났으니,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데서 살기 위해 진력하자는 방향이 있습니다. 이 방향의 특징은 자족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의식주가 해결되어도 탐욕이 발동하여 더 나은 사치스러운 의식주 환경을 추구하다 생을 마감합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은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둘째는 벌거벗고 태어났지만, 내 속에 부족한 것을 찾아 회복하는 데 주력하는 방향입니다. 이 방향의 특색은 가까운 미래에 대한 염려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해 미래 계획을 구상하고 현재 주어진 일에 열심을 기울이지만, 근접한 미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은 채 생을 영위합니다. 그 대신 인생의 기원과 귀착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질문들이 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첫째가 외면적인 것들을 더 많이 취하자는 방향인 데 반해, 둘째는 내면적인 세계를 더 가꾸자는 방향입니다. 요약하자면 첫째가 걸신들린 삶이라면 둘째는 시인의 삶입니다.
돈에 걸신들린 사람 얘기부터 좀 해보겠습니다. “올 더 머니”(All the Money in the World, 2017)라는 영화에는 폴 게티(Jean Paul Getty, 1892-1976)라는 억만장자가 나옵니다. 1973년 당시 석유 생산으로 재산을 일군 세계 최고 갑부였지요. 납치범들이 로마에 사는 그의 손자인 존 폴 게티 3세(16세)를 인질로 삼아 1,700만 불의 몸값을 요구합니다. 당시 그 손자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빠인 존 폴 게티 2세가 마약 중독으로 이혼하면서 엄마인 게일 해리스(Gail Harris)가 위자료 대신 양육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손 한 번 벌린 적 없던 그녀가 직접 게티를 찾아가 사정하려 했지만, 그는 텔레비전 인터뷰를 통해 손자/손녀들(총 14명)의 추가 납치를 부추길 수 있다며 거절합니다. 그 대신 자기 보안 요원이었던 플레처 체이스(Fletcher Chace)에게 사건을 맡아서 가장 적은 금액을 써서 손자를 석방해 오라고 요청합니다.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 몇 주가 더 지나자 납치범들은 폴의 오른쪽 귀를 잘라 신문사에 보냅니다. 일련의 사건이 전개되고 새롭게 한 팀이 된 게일과 체이스가 납치범들과 계속 협상을 벌인 끝에 몸값이 4백만 불로 낮춰집니다. 게티는 게일이 자녀의 양육권을 당시 식물 인간이나 다름 없는 아들에게 넘긴다는 조건하에 몸값을 지불하기로 동의합니다. 그것도 아들에게 그 돈을 빌려주는 모양새를 취하여 그 이자를 사업 손실로 처리할 수 있도록 조처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약속과는 달리 백만 불만 지불합니다. 그것이 미국 세법으로 세금 공제받을 수 있는(tax-deductible) 최고 금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체이스가 게티를 찾아가 열띤 설전을 벌인 끝에 게티는 결국 4백만 불을 내놓게 되어 존 폴 게티 3세를 구출해 냅니다. 1976년 게티가 죽은 후에 게일은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상속받은 재산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게 되지요. 게티가 평생 수집한 방대한 컬렉션[그림, 조각품, 기타 유물 등] 중 대부분이 현재 로스앤젤레스의 J. 폴 게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인질 협상 초기 단계에서 게티는 손자 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어느 정도 몸값을 지불할 의향을 보입니다. 나중에는 그럴 여유가 없다면서 체이스를 난처하게 하지요. 그러던 중 폴의 귀가 잘리고 사태가 더욱 위중해진 상태에서도, 몸값 4백만 불로 게일을 쥐락펴락하지요. 보다 못한 체이스가 그를 찾아가 마지막 설전을 나눕니다. 그때 체이스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말 속에 이 영화의 제목이 등장합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들’? 우릴 그렇게 부르지 않으셨나요? ‘난 내 돈을 걸고. 넌 목숨을 걸고.’ 완전 헛소리네요. 당신이랑 나? 우린 살면서 위험을 감수한 적 없어요. 보통 사람들이 하는 모험을 해본 적도 없죠.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당신은 그냥 싸구려예요, 폴. 당신은 세상 모든 돈을 가질 수 있어도, 여전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참한 개자식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잘 있어요, 게티 씨.”(‘Men of risk’? Isn't that what you called us? ‘I risk my money. You risk your life.’ You're so full of shit. You and me? We never risked a thing in our lives. We never took the chances ordinary people take. That's why we are where we are now. You're just cheap, Paul. You could have all the money in the world, and you are still a no-good miserable son of a bitch, and don't you forget it. Goodbye, Mr. Getty.)
돈에 걸신들린 삶의 결말입니다. 게티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은 일찍이 자기에게 허여된 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중간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래와 같이 그가 체이스에게 얘기할 때는 확실하게 떠올렸던 안목입니다.
“남자가 부자가 되면 자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해. 자기가 원할 수 있는 모든 선택에 대한 자유 말이야. 심연이 열리는 거지. 난 그 심연을 지켜봤어. 그것이 남자들과 결혼들을 망치는 걸 봤지.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망치는 걸 봤어.”(When a man becomes wealthy, he has to deal with the problems of freedom. All the choices he could possibly want. An abyss opens up. Well, I've watched that abyss. I've watched it ruin men, marriages. But most of all, it ruins the children.)
자기가 설파한 그대로 최고 부자인 자기 앞에 열린 자유의 심연 앞에서 게티는 자기를 망치는 선택을 감행했습니다. 재산을 축적하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자선 명목을 띤 가족 신탁을 형성했습니다. 신탁의 성격상 그 재산을 쓸 수는 없지만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해서 막대한 양의 예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했습니다. 자기 자녀를 비롯한 인간들이 외양과는 달리 행동하고 변질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기에, 겉과 속이 같고 변하지 않고 실망시키지도 않으며 순수함을 간직한 예술품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세금 내기가 아까워 자선 신탁 재단을 만들어 놓고는 자선 활동 대신 골동품 수집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파렴치한의 핑계였지요. 그는 자족이란 걸 몰랐습니다. 석유 사업을 통해 계속 거액을 벌어들였으나 “여유가 없다.”(I have no money to spare.)라는 이유로 임박한 위기에 처한 손자의 몸값 지불 약속을 번복했으니까요, 그때 체이스가 그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죠. “안전하다고 느끼려면 도대체 뭐가 필요하단 말입니까?”(What would it take for you to feel secure?) 그가 뭐라고 답했을까요? “더 많이.”(More)였습니다. 돈에 걸신들린 삶의 전형이지요.
시인의 삶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향에 본을 보인 시인 중에 윤동주(1917-1945)가 있습니다. 그의 시 한 편[“길”, 1948]을 잠시 묵상해 보겠습니다.
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첫 연(1연)과 마지막 연(7연)에서 시인은 삶의 유일한 의미가 ‘잃은 것’을 찾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물질적인 것(‘무얼’)을 잃어버렸나 생각해서 주머니를 더듬다가 거기가(‘어디다’)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길을 나섭니다[1연]. 그 길에는 돌담이 끝없이 이어 있어, 그 돌담을 곁에 두고 걸어가게 됩니다[2연]. 그 돌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그 건너편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할 뿐 아니라,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워 두려움과 염려를 안겨줍니다[3연]. 그 끝이 없는 돌담길은 연속된 시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4연]. 오랫동안 헤맨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눈물 흘립니다. 땅에만 머리 박고 다니다가 문득 푸른 하늘을 쳐다보니, 땅의 것만을 찾고 있던 자기가 부끄러워집니다[5연].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길을 한없이 걷는 이유는 담 저쪽(걷고 있는 담 바깥쪽 건너편에 있는 안쪽)에 남아 있는 나 때문이라는 것을요[6연].
결국 시인이 잃어버려 찾는 것은 ‘남아 있는 나’였습니다. 시인은 길을 걷는 것과 사는 것, 즉 인생 여정을 동일시합니다[1연과 7연]. 그 길에서 찾고 경험하고자 하는 것은 ‘나’입니다. 인문학적인 여행 공식입니다. 다만 그 ‘나’를 찾는 것이 ‘잃은 것을 찾는’ 과정이라고 일컫는 것이 독특합니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이전에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때가 언제였을까요? 우리 중에 자기가 태어난 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저 추정만 합니다. 그때가 바로 ‘나’라는 유일무이한 인격이 태어난 때입니다. 이렇게 60여 년을 ‘나’로 살았어도, ‘나’라는 존재는 신비롭기만 합니다. 나와 남들이 인식하는 ‘나’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식되고 경험되지 못한 ‘나’는 잃어버린 ‘나’입니다. 그 ‘남아 있는’ ‘나’를 찾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라고 시인은 지적합니다.
나는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당신과 사랑으로 교제하며 다른 이웃들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도록 창조되었지요. 나는 그 사랑의 길을 마다하고 고집스럽게 내가 욕망하는 길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고 이웃들에게서 소외되는 순간입니다. 그때 나는 내 ‘영적인 생명’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토록 동행할 생명을 ‘잃어버리고’, 백 년도 채우지 못하는 육적인 생명을 부여잡고 살아갈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내 길 위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무성해도 제대로 된 풀 한 포기 절로 나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것이라곤 온통 단단하고 굳은 돌, 돌, 돌투성이입니다. 그 돌로 형성된 돌담만이 그 그림자로 어둠만 드리울 뿐입니다. 숨 막히고 공포스럽고 염려스러운 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깨닫습니다. 내가 내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요. 또 그 생명의 기원은 이 돌담이 닿을 수 없는 저 너머 ‘하늘’에 있다는 것을요. 이제 내가 할 일은 ‘저 하늘 생명’과 내내 접속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담이 드리운 ‘긴 그림자’도 돌담 너머 하늘에서 비롯된 빛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가까운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 시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통해 출간된 것은 1948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원래 이 시는 윤 시인이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1941년 9월(만 23세)에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정에 비추어 보자면, 그 나이는 대학교를 졸업할 연령대입니다. 그때 이미 결연하게 자기 인생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던 윤 시인의 기개외 혜안이 부럽습니다. 걸신들린 삶 대신 시인의 삶을 지향한 그의 본이 있었기에 저를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후세대가 그 덕을 보았을까요. 우리에게 단순히 물리학적 영역을 초월하는 형이상학(metaphysics)의 세계를 고찰한 인문학적 스승이 아니라, 그 세계조차 메타 인지(metacognition)한 그리스도교 시인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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