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아(我)-나를 알라

공포와 호기심이란 키워드로 인간의 본질을 섬세하게 관찰한 에드거 앨런 포(1)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3. 9. 1.

공포와 호기심이란 키워드로 인간의 본질을 섬세하게 관찰한 에드거 앨런 포(1)

이 세상에는 공포 소설(horror fictions)이나 공포 영화(horror movies)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요즘엔 공포 장르보다는 스릴러물(thriller genre)을 좋아하는 이들이 더 많다고 하지만, 여전히 공포물을 선호하는 이들이 건재합니다. 무시무시하고 으스스한 배경하에서, 귀신이나 좀비나 뱀파이어 혹은 보기 흉측하게 변형된 괴물이나 곤충들이 나타나,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파국적인 사건을 낳는 공포물을 선호하는 심리는 언뜻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기 때문인지 공포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자기 경향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은 공포물에 끌릴까요?

 

-허구의 세계에 대한 선호-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보다 근본적인 다른 질문을 다루는 게 도움이 됩니다. 왜 사람들은 소설이나 연극이나 영화와 같은 허구(fiction)의 세계를 좋아할까요? 공포물들이 죄다 이 허구의 세계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은 전 세대에 걸쳐 이 허구의 세계를 사랑했습니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나 민담을 비롯하여 신화, 서사시, 희비극, 소설, 영화와 같은 것들이 각 시대의 깊은 필요에 응답해 주었습니다. 허구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사실이 아닌 것을 가리키지만, 인문학적으로는 ‘지어낸 이야기’ 혹은 ‘소설’을 지칭합니다. 상상력을 활용하여 ‘지어낸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보면 연극이나 영화도 허구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일어났던 일은 아니더라도 있을 법한 일”을 꾸며내는 이 이야기는 중차대한 가치를 띠고 있습니다. 당대의 비극을 그렇게 규정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허구의 가치를 이런 취지로 설명하지요. 그것이 비록 지어낸 것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것’을 탐구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록할 수밖에 없는 역사’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허구가 이렇게 가치 있는 장르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일구어내는 감성적인 반응과 떼어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정서적 반응이 없다면 사람들이 허구의 세계를 선취할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그 가치는 그 허구의 세계를 경험할 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허구의 세계가 어떻게 감정적 반응을 낳을 수 있을까요? 분석미학자인 이해완 교수에 의하면, 지난 세월 동안 몇 가지 답변이 제시된 적이 있습니다. 첫째, 불신의 유예(suspension of disbelief)로 인해 감정이 유발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구를 읽는 동안 자기 의지로 그것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믿음을 유보해둔다는 관점입니다. 이 시각의 문제는 자신의 내부에서 비롯된 인지적인 믿음을 의지로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는데 냉면을 먹은 것으로 믿자고 의지를 동원하는 일은 허사라는 것이지요. 이런 의지가 감정적 반응을 낳을 리가 만무합니다. 둘째, 허구의 플롯이나 수사법 같은 예술적 장치가 감정적 반응을 견인한다는 것입니다. 플롯이 탁월한 소설이 우리에게 더욱 명징한 시각을 선사해 주고 절묘한 은유적 표현들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것들이 우리가 소설에서 경험하는 주요한 감정적 반응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카야를 겁탈하고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체이스에게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은 그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이지 그 작품의 플롯 때문이 아닙니다.

 

셋째, 믿는 척하기(make-believe)가 정서적 반응을 야기한다는 것입니다. 허구를 접할 때 느끼는 감정은 그것을 도구로 하여 게임을 하던 중 발생한 ‘유사(pseudo) 감정’일 뿐, 참된 감정이 아니라는 입장이지요. 현상적으로는 감정으로 느껴지지만, 현실 속에서 행동을 견인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감정과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시각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더버빌가의 테스”에서 테스의 인생을 망친 망나니 알렉이 우리 속에 불러일으키는 것은 유사 감정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 눈앞에 있다면 욕이라도 퍼부어줄 수 있는 실제적인 분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분노가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유의하지요. 넷째, 우리 생각이 감정적 반응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확고한 명제를 참이라고 수용하는 믿음과는 달리 이 ‘생각’은 확고하지 않은 마음속 명제, 혹은 그저 머릿속에 떠올리는 상념 정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감정을 유발하는 인지적 요소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상상만으로 형성된 특별한 감정이 항상 합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특정 정치인이 자기 동료들과의 회합에서 취했을 법한 행태를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미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순신 장군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결단하고 실행했을 법한 행동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이런 감정 반응이 비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허구에 대한 우리의 감정 반응과 많이 닮았다는 점은 유의해야 할 대목입니다. 그리하여 요즘에는 감정의 인지적 요소가 믿음이라기보다는 ‘생각’이라는 이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리는 형국입니다. (이해완, “불온한 것들의 미학”)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이 허구의 세계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정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정에는 잘 짜인 플롯이나 정치한 수사법을 통해 전달되는 미적 감흥도 포함되겠지만, 대개는 작가가 묘사한 개연성 있는 상황과 문맥 속에 자신을 이입한 독자가 관찰하고 해석하면서 형성한 생각이 유발한 감정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 감정들은 그 허구가 지어낸 세계라는 믿음을 유보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그것이 진짜라고 믿는 척해서 형성된 것도 아닙니다. 이제 문제는 왜 우리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부정적인 경험이 주를 이루는 공포 소설이나 연극이나 영화를 선호하는가입니다.

 

-공포물에 대한 선호(3C)-

공포와 두려움의 통제(Control of horror and fear). 인생은 고단하고 어렵습니다. 삶의 각 단계마다 차원이 다른 난관과 고통이 기다립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릴 때가 허다합니다. 흥미롭고 아름다우며 보람찬 인생의 측면들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측면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생로병사라는 현실적 삶의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가 호텔에서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훈련소에서 단련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녹록하지 않은 삶의 현실을 더 가볍고 활기찬 마음으로 극복하게 해 줍니다.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덜해지는 경우란 없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가 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자발적으로 고통과 공포에 직면하게 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강도가 떨어집니다. 예컨대 이 세상 만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인 스피치도 일단 시작하고 나면 그 공포감이 확연하게 줄어들지요. 공포물을 접하는 것이 바로 이런 시도 중 한 가지입니다. 공포 소설과 영화를 통해 두려워하는 대상에 직면할 때, 그것의 가면을 벗겨내거나 그 정체를 밝혀냄으로써 그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 대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거나, 그 두려움을 통제할 수 있지요.

 

이런 공포물의 가치를 미국 판타지 소설 작가인 루사나 엠리스(Ruthanna Emrys)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녀는 공포물의 기반을 “세상은 무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한 가지 진실”(one truth: that the world is full of fearful things)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최고의 공포물”(the best horror)은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과연 그 이상의 것이 어떤 것들일까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how to live with being afraid), “진짜 악과 무해한 그림자를 구별하는 방법”(how to distinguish real evil from harmless shadows), “반격하는 방법”(how to fight back), “살아남든 살아남지 못하든 우리가 최악의 악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사실”(we can fight the worst evils, whether or not we all survive them.) 및 “그 후에 우리 이야기가 들려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how to be worthy of having our tales told afterward.)들입니다. 우리는 공포물을 통해 등장인물의 험난한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겪는 육체적, 감정적 고통을 느끼거나, 그들이 끔찍한 일이나 무시무시한 상황에 직면할 때 함께 나란히 서 있게 됩니다. 설령 그 과정이 지옥에 갔다 온 것처럼 느끼더라도, 이 모든 경험은 안전하고 통제된 상황하에서 진행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엠리스가 지적한 이런 특권들을 배우고 누림으로써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 부정적 감정의 해소와 마음의 정화). 공포를 주는 대상에 직면할 때 그 공포감의 정도가 줄어드는 것뿐 아니라, 그 공포감이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공포 소설 작가 전건우의 경험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전설의 고향"을 좋아하던 그의 어린 시절(10세) 이야기입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다세대 주택 1층에 살던 그의 집 문틈 사이로 시커먼 물이 넘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폭우로 인해 동네 하수구가 막혀 저지대에 있던 그의 집을 덮친 상황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바가지와 세숫대야를 동원해 온힘 다해 물을 퍼내셨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자기 집을 박살내기 위해 찾아온 귀신 같은 그 검디검은 물을 바라보면서, 그는 너무 무서워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따라 울 남동생 3명을 의식해서 울음을 꾹 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얼마 후 비가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물도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도 허리를 펴시고는 웃으시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날 밤 지치신 부모님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시고 난 후 그만 홀로 “전설의 고향”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몸져누운 남편을 살리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부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좋아하는 귀신이 나오지 않아서 실망했지만, 어떤 스님이 그 부인에게 한 말이 그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무덤을 파서 시체 다리를 잘라와 고아 먹이면 남편 병이 낫는다고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그 부인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밤에 식칼을 들고 부엉이가 울려 퍼지는 산으로 갑니다. 어느 무덤을 파헤쳐 관 뚜껑을 열고 시체의 한쪽 다리를 잘라 도망을 치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전 작가는 그동안 숱하게 시청한 “전설의 고향” 에피소드와는 차원이 다른 극한의 공포를 체험하게 됩니다. 자기 다리가 잘린 시체가 겅충겅충 뛰면서 그 부인을 쫓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내 다리 내놔라!” 그 귀신의 몰골을 보면서 전 작가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라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체가 그 말을 서너 번 외쳤을 때 전 작가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따뜻한 손길로 자기 머리를 만지고 자기 등을 쓰다듬기 시작하신 어머니 품속에서 그는 그날 쏟아진 폭우처럼 마구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습니다. “엄마, 나 무서워.” 폭우가 쏟아지고 속수무책이었던 그 시커먼 물을 볼 때부터 말하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말이었습니다.

 

좀 진정이 된 후 전 작가가 텔레비전을 쳐다보니, 그 귀신은 사라지고 솥뚜껑을 여는 부인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커다란 산삼이 들어 있었지요. 결국 그 산삼 달인 물을 마신 남편이 완쾌되어 환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게 됩니다. 그 남편처럼 전 작가도 아주 개운하고 환한 얼굴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뭉쳐 있던 응어리가 풀려나간 느낌이었습니다. 가난한 단칸방 신세는 여전했고 수챗물이 언제 또 넘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나, 그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태가 급박하고 무시무시해도 ’다리 내놔라’ 귀신보다 더 무서울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무섭다는 감정의 저 아래에는 그걸 극복한 뒤 찾아오는 놀랄 만큼 개운한 해방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 바로 그때였다고 합니다. 이런 긍정적인 경험들이 그의 삶 전반에 녹아들어 전 작가는 자기가 “인생의 큰 공을 굴러가는 한 계속해서 호러를 사랑하고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전건우, "난 공포 소설가: 놀놀놀 시리즈 01")

 

죽음에 대한 직면(Confrontation with death). 미국 소설가 스티븐 킹(Stephen King)은 두려움(fear)과 죽음(death)이 “인간의 두 가지 상수”(two of the human constants)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단편 소설 모음집인 “Night Shift”의 서문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시대를 초월한 공포 소설의 거대한 매력은 바로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리허설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And the great appeal of horror fiction through the ages is that it serves as a rehearsal for our own deaths.”) 그는 먼저 코끼리의 일곱 가지 부위를 움켜잡은 일곱 명의 장님에 관한 우화를 나눕니다. 그들 중 한 명은 뱀(snake), 다른 한 명은 거대한 야자수 잎(giant palm leaf), 또 다른 한 명은 돌기둥(stone pillar)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다 함께 모였을 때, 자기들이 코끼리의 전모를 파악했다고 여깁니다. 킹은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란 감정이 바로 우리를 장님으로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킹은 손이 젖었을 때 불을 끄는 것, 신체검사가 끝난 후 의사가 전해 줄 말, 비행기가 갑자기 공중에서 크게 흔들리는 것, 깨끗한 공기와 물이 사라지는 것, 11시까지 귀가하기로 한 딸이 12시 4분이 되어도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은 예를 들지요. 그리하여 “두려움은 우리를 장님으로 만들고, 우리는 코끼리와 같이 있던 장님들처럼 백 개의 부분으로 그 전체를 이해하려고 이기심에 가득 찬 호기심(all the avid curiosity of self-interest)으로 두려움 하나하나를 건드립니다.”

 

백 가지 두려움을 합친 전체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머리, 귀, 눈, 코, 입, 팔, 손가락, 배, 다리, 발가락과 같은 부분들을 합체하면서 조만간 우리는 그 전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이불 밑에 있는 몸의 모양”(the shape of a body under a sheet)입니다. 우리의 모든 두려움이 합체하여 “하나의 큰 두려움”(one great fear)이 되고, 우리의 모든 두려움은 그 큰 두려움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요. ‘이불 밑의 몸’에 해당하는 그 큰 두려움이 무엇일까요? 킹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죽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공포 소설이야말로 죽음이 우리 각자에게 닥친 실제 상황인 것처럼 직면해서 대비하도록 해 주는 소중한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번영신학에 경도된 설교가들이 “당신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something good is going to happen to you)이라고 말할 때, 공포 소설은 “당신에게 나쁜 일도 일어날 것”(something bad is also going to happen to you)이라고 경고해 주는 셈이지요. 우리가 사는 날 언제라도 교통사고나 암이나 심장마비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두려운 삶의 위경이 닥쳐오기 전에 공포물을 통해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사생관두의 상황으로 단련된 마음은 죽음이란 최대 공포를 초극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염두에 두면서, “현대 단편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의 단편 소설을 독해해 보겠습니다. 그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시인, 단편 소설가, 문학 이론가, 문학 비평가 및 잡지 편집자 역할을 두루 섭렵한 천재 문인이었습니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해 갈 수 있던 젊은 나이(40세)에 생을 마감하게 되어, ‘요절한 천재 작가’의 대명사가 되곤 했습니다. 그의 단편 소설은 공포, 탐정, 풍자, 공상과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하위 장르를 포함하고 있는데, 특히 추리 소설 혹은 탐정 소설은 그가 창시한 영역입니다. 코난 도일(Sir Arthur Conan Doyle)이 쓴 탐정 소설의 주인공인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와 그의 조수 존 왓슨(Dr. John Watson)도 포의 작품에 등장하는 뒤팽(C. Auguste Dupin)과 그의  무명의 조수를 모방한 것이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문학을 윤리나 실용성의 굴레에서 해방시킨 낭만주의자였던 그는, 윤리성과 계몽성을 강조하던 자기 나라에서보다는 예술적으로 관대했던 프랑스에서 훨씬 더 인정을 받았습니다. 1847년에 처음 포를 접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인 보들레르[시집 악의 꽃 저자]가 “여기에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있다.”라는 극찬을 한 바 있지요. 포가 남긴 66편의 단편 소설 중 김석희 씨가 12편을 선정하여 번역한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열린책들)을 중심으로 논의해 보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