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식민주의의 단면을 통해 어두운 인간 내부를 조명하는,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속”(3)
-인간성 상실: 본능에 굴복하여 인간 한계 넘기-
이 작품 속에는 제목인 “어둠의 속”(heart of darkness)이란 표현도 나오지만, “속의 어둠”(darkness of the heart)라는 어구도 등장합니다. 물론 그 은유적 표현들이 사용된 문맥에서는 각각 미지의 세계, 야만 세계의 중심을 가리키고, 그 중심이야말로 참으로 미개하고 야만적이라는 뜻으로 풀립니다. [예: “우리는 어둠의 심장부 속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었어.” / “어둠의 심장부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 나온 갈색 강물은 상류로 올라올 때의 두 배의 속도로 우리를 바다 쪽으로 들고 가더군.] 그렇지만 그 어둠이 또 다른 은유 역할을 함으로써 인간의 어두운 죄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즉 이 세상의 어둠의 중심부에는 인간의 검디검은 죄성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죄성은 어둡기 그지없다는 것이지요. [예: “표현의 재능이란 (...) 반면에 꿰뚫을 수 없는 어둠의 심장부에서 나오는 기만적인 흐름이기도 한 것이야.” / “그 환영은 나와 함께 그 집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어. (...) 정복을 일삼는 어둠의 심장도 같이 들어서는 것 같았어.] 아프리카 대지의 심장부에 있는 심오한 어둠은 그저 지리적으로 알려 지지 않아 어두운 곳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내부에 있는 심오한 어둠은 하나님의 신성한 빛 대신 인간의 욕심이 득세하여 영적으로 어두워진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 지리적인 ‘어둠의 속’으로 들어간 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들의 어두운 죄성을 드러내게 되었을까요? 말로가 만난 사람들 중 어둠의 식민지를 경영해 가는 자들에 주목해 보세요. 남다른 건강을 구가하던 중앙출장소 지배인은 “이곳으로 오는 자들은 오장육부가 없어야 해.”(Men who come out here should have no entrails.)라고 언급합니다. 이 말을 봉인이라도 하듯이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말로는 그가 자기 말이 “어둠으로 통하는 문”으로 여긴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아프리카에 나오면 외적인 견제가 없으니까”(out there there were no external checks.), 그의 말은 자기에게는 “안팎으로 견제가 없다”는 말이 되지요. 그렇습니다. 보편적 원리나 숭고한 신조에 비추어 자신을 절제하기를 포기한 삶은 오장육부가 없는 삶입니다. 사랑하거나 긴장할 때 두근거리는 ’심장‘도 없고, 너무 근심스럽고 안타까워 타들어 갈 ’간‘도 없고, 몹시 슬퍼서 끊어지는 듯한 ’창자‘도 없는 비인간의 상태와 같다는 말입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그만이 간직해 온 어둠으로 통하는 문”(a door opening into a darkness he had in his keeping)이었겠지요. 그의 인간성이 부패해진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이에 덧붙여 “빈민가의 푸줏간 주인” 같은 외모에다 “교활한 표정”을 짓던 그의 삼촌은 기묘한 손동작을 취하면서, “잠복한 죽음과 숨어 있는 악과 그 대지 심장부의 심오한 어둠”(the lurking death, to the hidden evil, to the profound darkness of its heart)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합니다. 자기 사업을 도와줄 악의 세력을 규합할 뿐 아니라, 밀림이 자기들의 범죄를 가려줄 것을 기대하는 동작이었지요. 그가 주도한 무리가 바로 엘도라도 탐험대였습니다. 그들은 “금고를 터는 강도처럼 그 욕망의 뒤에는 도덕적 목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정글로 들어갔을 때, “그 정글은 바다가 뛰어든 잠수부를 집어삼키듯 원정대를 집어삼켜 버렸습니다.” 말로는 그들을 “당나귀만도못한 짐승들”로 표현합니다. 자기들이 갈망하는 금은보화를 탈취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악한 세력의 도움까지도 받을 태세를 취한 이런 인물들도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지요. 자기들의 범죄를 가려줄 것을 기대한 ’어둠의 속‘은 허망하게도 그 비인간들 모두를 삼켜 버렸습니다.
다음으로 “암흑 같은 대륙의 오지가 길러낸 이 망령”으로 묘사된 커츠는 “원시인들을 매료시키거나 공포에 몰아넣어 자신을 숭배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작 “엽총 두 자루와 대형 라이플 총 한 자루와 연발식 카빈 총 한 자루”로 그 원주민들의 주피터[혹은 제우스]로 군림했습니다. 추장들도 매일 그를 보러 와서는 기어서 접견했으니까요. 그가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원주민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사랑이니 정의니 인간의 행위니 하는 것들에 대한 멋진 독백”이 나왔지만, 살인과 억압과 공포로 원주민들을 통치하면서 그들의 노고의 산물인 상아를 탈취해 갔습니다. 평화롭게 살던 그 지역을 온전히 망쳐놓은 것이지요. 이런 그가 나중에 유럽으로 귀국할 때는 왕들이 기차역까지 나와 위대한 업적을 이룬 자기를 마중하기를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블랙코미디가 없지요. 말로가 그의 시체를 옮기던 “들것 위에서 모든 인류와 지구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욕심 사납게 입을 벌린 커츠의 환영을 보았어.”라고 언급한 게 무리가 아닙니다.
그의 마음을 덮은 어둠은 “꿰뚫을 수 없는 어둠”이었습니다. 자신을 신의 위치로까지 격상시키는 타락상(“his own exalted and incredible degradation”)을 연출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은 채, 자기 위나 밑에 아무것도 아무도 두지 않았지요. 야생의 정글에 살다 보니 그의 영혼은 자기 밖 대신 자기 속만을 보았습니다. 그 내면만을 보던 중 미쳐 버린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꿰뚫어 본 말로는 죽어가는 커츠를 원주민들 몰래 데려오면서 그가 완전하게 패배할 것이라고 그에게 경고해 줍니다. 이런 그의 심적 상태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커츠의 영적 문제의 실상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잊어버리고 있던 동물적 본능을 일깨움으로써, 한편으로 악한 욕정을 충족시켰던 기억을 되살려줌으로써 커츠를 무자비한 야성의 품으로 끌어당겼던 것처럼 보이는 그 마력, 그 무겁고 말 없는 야생의 마력을 나는 부수려고 노력했어. 내가 확신한 것은 그 야성의 마력만이 커츠를 숲의 가장자리로, 덤불 속으로, 번뜩이는 모닥불로, 진동하는 북소리로, 괴상한 주문의 응얼거림으로 끌어들였던 거야. 이것만이 법을 무시한 그의 영혼을 유혹하여 인간에게 허용되는 열망의 한계를 넘도록 한 것이었어.”(I tried to break the spell—the heavy, mute spell of the wilderness—that seemed to draw him to its pitiless breast by the awakening of forgotten and brutal instincts, by the memory of gratified and monstrous passions. This alone, I was convinced, had driven him out to the edge of the forest, to the bush, towards the gleam of fires, the throb of drums, the drone of weird incantations; this alone had beguiled his unlawful soul beyond the bounds of permitted aspirations.)
바로 이 본문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말로(혹은 조지프 콘래드)의 영적 혜안을 접합니다. 우리 성정이 타락하는 것은, 내재하지만 잊힌 동물적 본능이 격발되는 것, 즉 괴물 같은 욕정이 충족된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진척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성의 마력입니다. 엄중하고 말이 없으면서도 무자비한 성격을 띠고 있지요. 커츠의 경우에는 이 마력을 거듭 제어하지 못하여 인간에게 허용된 욕망의 범위를 넘음으로써 자기 영혼을 파괴하는 단계까지 나아갔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직면하는 온갖 유혹의 실체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본능의 격발 혹은 욕정이 충족된 기억을 제어하는 것이 인간성 회복의 길이자 인격 성숙의 관건이겠지요. 그런데 이 자기 절제(temperance)의 힘은 본능과 욕정이 요동치는 우리 내면에서 비롯될 수 없습니다. 이 측면은 성경도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예레미아 7:9-10)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마가복음 7:21-23)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예수님의 증언].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 대신 돈, 힘, 쾌락, 인기를 우상으로 삼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 내리신 총평입니다. 그야말로 “암흑의 권세”(the domain of darkness, 골로새서 1:13)하에 처한 상황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살 길은 무엇일까요? 먼저 커츠의 영혼과 다를 바 없이 ‘불법적인’(unlawful) 우리 영혼은 하늘의 별들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보편적 도덕법의 실존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도덕법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의 경계를 벗어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돌이킨 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범한 죄악과 흑암의 세력하에 있는 우리의 죄성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이니까요(로마서 7:24-8:2).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 즉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시작하여 생명력이 넘치는 샘물처럼 우리 안에서 솟아나 일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요한복음 7:37-39)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늘 샘솟는 샘물과 같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이지요. “내[사도 바울]가 또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16)
그러나 인류 역사는 우리가 내내 흑암과 같은 야성의 마력에 사로잡힌 종이었다는 것을 확연히 열어 밝힙니다. 숱한 개인들과 조직들의 일탈과 부패, 더 많은 재화와 권력에 대한 탐욕과 경쟁, 끊임없는 국가 간 혹은 국가 내 침탈과 분쟁으로 흥건히 물들어 있으니까요. 조지프 콘래드가 다른 책에서 언급한 대로입니다. 아래 글 속에 ‘최후의 지구’와 ‘최후의 날’이라는 그의 표현 속에 담긴 소설가의 자절에 주목해 보세요. 이 ‘최후의 날’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소망은 없다는 게 성서의 한결같은 언명입니다(히브리서 1:1-3).
“인간의 이중적인 본성과 경쟁 구도를 보면, 최후의 지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최후의 날이 되면 신들도, 열정도, 심지어 인간 자신도 인간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 협력자이자 적들 때문에 인간은 위태로운 지배를 이어나가고 덧없는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소설가가 언급하고 해설할 이야기는 그런 것들이 전부일 것이다.”(“유럽, 이성의 몰락”)
-자기 발견: 집단적인 자아 대 개인적인 자아-
이 소설의 서사 구조는 3겹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집니다. 소설의 중심에는 커츠라는 콩고 지역 상아 내륙 출장소장이 있습니다. 그다음 동심원은 그를 구하러 간 증기선 선장인 말로입니다. 세 번째 동심원은 말로의 탐험 이야기를 듣는 ‘나’를 포함한 4인[이사, 변호사, 회계사, 나]입니다. 이 인물들은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에 주로 등장하고 말로의 이야기 중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말로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길어지다 보니 ‘나’와 다른 한 사람 외에는 모두 유람 요트 넬리 호에서 잠든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말로도 그 탐험 중에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으니,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 특히 ‘나’도 이 심오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 발견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자기 발견은 ‘개인적인 자아’(Individual self)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자아’(Collective self)도 포함됩니다. 문명화란 이름으로 자기를 포함한 서구인들이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탈취하고 억압한 역사를 회고하면서 그 실상을 파악하는 게 ‘나’의 집단적인 자아입니다. 커츠의 기이한 삶의 역정을 복기하면서 한 사업가가 사악한 망령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성찰하는 게 ‘나’의 개인적인 자아입니다.
‘집단적인 자아’ 발견. 말로가 콩고 탐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친구 4명에게 나눈 얘기 중에는 영국을 ‘지구상에서 어두운 변방의 하나’로 묘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때 영국이 “어둠에 맞설 만큼 남자다웠던” 로마군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영국도 옛날 로마 시대에는 암흑이 잔뜩 깃든 어둠의 세계, “극단적인 야만성”이 가득 찬 세계에 불과했으며, 그곳을 점령한 인물들이 그 땅의 어둠을 극복하고 빛을 가져다준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로마군에게 점령당한 벨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당시 영국이나 벨기에에 거주했던 이들은 둘 다 켈트족에 속하지요.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이 어둠의 세계에 속한 국가들이 자기들 빛을 전수해 주겠다며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습니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 곳곳이 그 대상이었지요. 그러나 정작 그들이 한 일은 “폭력을 동원한 강도질(robbery with violence)이고 질이 나쁜 대규모 학살(aggravated murder on a great scale)”에 불과했습니다. “남이 약하다는 데서 기인하는 우연에 불과한” 자기 힘을 가지고 그 연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착취(a squeeze)만 감행했을 뿐입니다. ‘어둠의 세계’였던 곳이 또 다른 ‘어둠의 세계’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 말로와 ‘내’가 발견한 ‘집단적인 자아’인 셈입니다. 이런 자아 인식이 있었기에 말로는 벨기에의 브뤼셀이라고 추정되는 도시를 “죽음의 도시”나 “늘 회로 하얗게 칠한 무덤을 연상시키는 어떤 도시”로 명명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했지만 그 도시는 이미 죽음의 도시에 불과했습니다. “인류 양심의 역사를 더럽힌 가장 사악한 전리품 쟁탈전”(the vilest scramble for loot that ever disfigured the history of human conscience)에 앞장선 도시였기 때문입니다(조지프 콘래드).
이 대목에서 레오폴드 2세나 커츠의 후손들이 어떻게 ‘집단적 자아’ 발견을 이루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지난 2020년 한겨레신문 최현준 기자의 글에 보면, 자기 조상들의 식민지 역사에 대한 벨기에 국민들의 인식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한 해 전에 벨기에의 인종차별 문제를 조사한 ‘아프리카계에 대한 유엔 전문가 워킹그룹‘이 밝힌 바에 의하면, “벨기에 고교 졸업생 중 4분의 1이 콩고가 벨기에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잘못일 리가 없지요. 그곳 교사들과 교과 과정 탓입니다. 그 잔인했던 자국 통치 역사는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은 채, 그저 자국 식민 통치로 인해 아프리카 경제 발전이 성취되었다는 사실무근의 주장만 제시하는 교과 과정 말입니다. 여기에다 레오폴드 2세가 통치하던 1885년부터 1908년까지 1천만 명이나 되는 콩코인이 학살된 역사적 사실은 간과한 채, 그를 ‘건축왕’에다 흑인 노예제를 반대한 영웅으로 각색하는 데 온 사회가 앞장섰으니 청소년들이 무슨 역사관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식민지 근대화론’에다 선택적인 역사만을 기억하는 일본의 유럽판 쌍둥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벨기에에 여전히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하고 그 나라가 “식민지화의 진정한 범위와 부당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비판받고 있다고 하지요.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이런 오도된 역사관을 벨기에 왕실이 주도했다는 점입니다. 아직도 그 왕실은 레오폴드 2세가 저지른 ‘인류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감싸면서 문명화를 이끈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기에 분주합니다. 이런 후안무치한 집단에 대해 일찍이 C. S. 루이스가 일갈한 바 있습니다.
“나는 관료들보다 박쥐들을 훨씬 더 좋아한다. 나는 경영의 시대이자 ‘행정’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제 가장 큰 악은 디킨스가 즐겨 그렸듯이 지저분한 ’범죄의 소굴‘에서 행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제수용소나 노동수용소에서 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장소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악의 최종적인 결과이다. 가장 큰 악은 카펫이 깔려 있으며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따뜻하고 깔끔한 사무실에서, 흰 셔츠를 차려입고 손톱과 수염을 말쑥하게 깎은,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는 점잖은 사람들이 고안하고 명령(제안하고 제청받고 통과시키고 의사록에 기록)하는 것이다.”(I like bats much better than bureaucrats. I live in the Managerial Age, in a world of “Admin.” The greatest evil is not now done in those sordid “dens of crime” that Dickens loved to paint. It is not done even in concentration camps and labour camps. In those we see its final result. But it is conceived and ordered (moved, seconded, carried, and minuted) in clean, carpeted, warmed, and well-lighted offices, by quiet men with white collars and cut fingernails and smooth-shaven cheeks who do not need to raise their voice.) (“The Screwtape Letters”, 1961)
그렇습니다. 콩고에서 그 숱한 원주민들이 살해당하거나 신체 절단당하면서 억압받은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악’이 아니라 그 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사실상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악’이 자행된 곳은 어둡고 더러운 도둑의 소굴이 아니라, 환하고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벨기에 왕실이나 일본 왕실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말끔하게 차려 입고 고상하게 말하던 레오폴드 2세나 히로히토 같은 왕들과 그 각료들이 문명화를 빙자하여 자국 이익의 극대화 방안을 고안해서 지시했습니다. 그 크낙한 악의 산물이 ’인류에 대한 범죄 행위‘였지요. 물론 그 책임은 그 왕들이 져야 합니다. 그들은 알기나 했을까요? 장차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들의 범죄 사실을 낱낱히 고해야 할 날이 속히 오리라는 것을요(요한계시록 17:14, 고린도후서 5:10).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 범죄자들의 후손들의 입에서는 사죄의 고백 대신 그들을 찬양하는 소리가 드높습니다. 언제 어떤 처지에 놓여 봐야 이 나라들이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집단적 자아’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자아’ 발견. 우리는 언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말로가 커츠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커츠를 만나기 위해 내륙 출장소로 가던 도중에 커츠의 숙소 울타리 기둥에 원주민들의 머리통이 장식품으로 줄지어 선 것을 보면서 커츠에 대해 한마디 합니다. 그 인물은 “자신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자제력(restraint in the gratification of his various lusts)”이 없고, “무언가 모자란 것(something wanting)”이 있다고 말하지요. 말로는 커츠가 그 결핍된 것을 인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는 깨달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야생의 세계(the wilderness), 즉 “이 엄청나게 외로운 장소”(this great solitude)가 이미 그에게 이 사실을 속삭여주었고, 이 속삭임은 “속이 텅 빈”(hollow at the core) 커츠의 내부에서 요란하게 메아리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홀로 자연 세계 속으로 들어와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 커츠는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에 대한 이 지식에 등 돌리고 있다가 죽을 때에야 비로소 그 진실을 깨닫게 되었겠지요.
그렇다면 커츠의 자아는 어떤 면모를 띠고 있었을까요? 커츠의 심령 속에는 온갖 욕정이 넘쳤고 그는 조금도 절제하지 않고 그것들을 충족시켰습니다. 그 욕망을 빼버리면 그의 속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아무리 우렁차도 그의 마음에는 황량한 어둠이 깔려 있었습니다(“the barren darkness of his heart”). 아무리 고상하고 고매한 표현을 내뱉을 수는 있어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부귀와 명성(wealth and fame)을 갈망하는 그림자 같은 환상(shadowy images)뿐이었습니다. 더구나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입에서 연이어 튀어나온 말을 보면 그의 인생의 주제가 바로 ‘나’였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나의 약혼녀, 나의 출장소, 나의 경력, 나의 사상.”(My Intended, my station, my career, my ideas) 결국 죽음을 기다리던 상아 같은 그의 얼굴(that ivory face)에 “강렬하면서도 절망적인 표정”(an intense and hopeless despair)이 엿보이더니, 그가 마지막으로 어떤 환영(some vision)을 향해 단숨에 속삭이며 외치지요. “무서워! 무서워!”(The horror! The horror!) 이것은 “자신의 삶을 요약한 영원한 유죄판결의 속삭임”(the summing-up whisper of his eternal condemnation)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커츠의 인생은 허망한 환상을 좇고 각양각색의 욕망을 누리며 ‘나’로 똘똘 뭉친 삶이었습니다. 아마도 일찌감치 이 인물의 진면목을 간파한 야생 세계가 그에게 읊조린 속삭임은 결국, “야, 커츠, 네겐 부족한 게 있어! 네겐 너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제발 정신 좀 차려!”였을 것입니다.
말로는 커츠라는 반면교사를 통해 진지한 자아 성찰의 시간을 통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말로는 커츠를 “이 지상에서의 자기 영혼의 모험에 판결을 내린 비범한 남자”(the remarkable man who had pronounced a judgment upon the adventures of his soul on this earth)로 존중합니다. ‘두려워!’라는 그 한 마디 유언 속에 자기 인생에 대한 커츠의 솔직한 신념과 떨면서 반항하는 면모와 섬뜩한 진리의 모습이 담겼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였겠지요. 커츠가 죽은 후에 말로가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자기가 “몸소 체험한 것처럼 느껴지는 커츠의 극한상황”(his extremity that I seem to have lived through)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말로는 커츠의 인생을 복기하면서, 자기도 ‘나’ 외에는 어떤 것도 없는 허망한 존재가 아닌지 자문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추구해 온 것이 “거짓된 명예(lying fame)와 허위의 명성(sham distinction)과 겉치레에 불과한 성공과 권력(all the appearances of success and power)”이 아니었는지 냉철하게 성찰해 보았겠지요. 그는 이미 우리 인생살이에서 자기 발견이 “너무 때늦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지울 수 없는 한 줌 실망만 안겨다 준다는 점”(that comes too late—a crop of unextinguishable regrets.)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커츠에게 ‘모자란 것’(something wanting)’이 무엇인지 소설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실천적 사랑이라고 증거합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재정립하고, 당신을 전인적으로 사랑하면서 이웃들을 자기처럼 섬기는 길입니다. 온갖 욕심과 우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나날이 새로워지고 성숙해가는 풍성한 삶의 요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일생을 보낸 사람의 마지막 말은 ‘The horror!’(두려워!)라는 속삭임 대신 ‘Hallelujah!’(하나님을 찬양하라!)라는 외침이 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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