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식민주의의 단면을 통해 어두운 인간 내부를 조명하는,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속”(2)
-방랑자 찰리 말로의 최고 경험-
찰리 말로는 “뱃사람”이었지만, “방랑자”였습니다. 뱃사람이라면 의례 정착된 삶을 영위하지만, 그는 떠돌이 신세를 자처했다는 말입니다. 이리저리 세계를 떠돌며 여행하는 것도 즐겼지만, 그 기간 중에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친구들에게 나누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6년간 동양을 여행하고 돌아와서는 빈둥거리며 지내고 바쁜 친구들 집을 방문해서는 “그들을 계몽시킨다는 거룩한 사명이라도 가진 사람”처럼 군 것을 보세요. 이런 그가 상아 교역소 책임자인 커츠를 만나기 위해 떠난 그 여행이 자기 생애에서 최장 항해이자 절정의 경험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사건 자체는 “어둡고 비참하고, 그렇다고 유별나지도 않고 분명치도 않은” 것이었지만, 자기 주위 모든 것과 “자기 생각 속까지 빛을 던져주는 일”같았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과연 어떤 빛을 맛보았을까요?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콩고로 떠나기 전에 숙모와 이야기하고 헤어진 후 든 한 가지 생각이었습니다. 자기가 아프리카 대륙의 중심으로 가는 게 아니라 “지구 중심을 향해 출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곳에서 전개되는 상황이 전 세계 유럽 식민지의 전모를 파악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곳은 지구 중심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콩고에서 소위 ‘문명화’라는 빌미로 레오폴드 2세의 하수인들이 벌인 식민지 사업은, 정도의 차이만 존재했을 뿐 전 세계 모든 식민지에서 시행된, 끊임없는 수탈과 착취 과정의 견본이었습니다. 그래서였겠지요. 여행을 진행해 가면 갈수록 말로를 엄습한 것은 막연하지만 목을 죄는 듯한 의혹이었습니다. 마치 자기가 어렴풋한 악몽을 통과해 가는 고달픈 순례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정명(正名)의 부재, 즉 명칭['문명화']에 상응하는 실질[식민지 상황의 개선]이 존재하지 않는 데서 오는 의혹과 좌절감이 그의 순례 여정 내내 옥죄었을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똑같은 취지로 말합니다. 자기가 마치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고 하면서, 이런 처지를 인생 전체로 확대시키지요. 즉 우리 인생이란 게 혼자서 꿈꾸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둘째, 말로는 이 악몽의 여정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의 진면목을 가슴으로 새기게 됩니다. “원초의 시대적 밤 속”에서 “선사시대의 땅”을 헤매는 방랑자 신세를 겪다 보니, 자기와 동료들이 아담과 하와와 같은 인류 역사 최초의 인간들이라고 상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족쇄에 채워지지 않은 괴물”이라고 여긴 원주민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차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들이 “혹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야성적인 격렬한 소란이 우리와 먼 인척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자기를 오싹하게 했습니다. 비록 자기들이 태초의 시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그들의 소음 속에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즉 “기쁨, 두려움, 헌신, 용맹, 분노 등”이 그 소리 속에 담겨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것은 말로에게 “세월의 겉옷을 벗어버릴 적나라한 진실”로 다가왔습니다. 더구나 20명이나 되는 식인종들을 자기 승무원으로 모집해서 데리고 갔지만 서로 잡아먹지도 않았고, 수적으로 우세한 그들이 배고픔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자기들에게 덤벼들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말로는 놀랍니다. 그때 그가 절감한 것이 바로 “인간에게 내재된 어떤 비밀”, 즉 “어떤 억제하는 힘”이 그들 속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야수 같은 야만인이 아니라, 고상하고 품위 있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주민들을 구원해서 문명화하러 왔다는 커츠와 같은 식민주의자들이 그 억제력을 잃어버린 채 급기야 “야비하고 탐욕적인 망령들”과 같은 존재로 변질된 것은 인류 역사의 크낙한 아이러니입니다.
셋째, 말로가 누린 빛은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할 기회”였습니다. 자기가 본래 일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일하는 것이 자기를 발견할 기회가 되기 때문에 일을 좋아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자기가 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일 속에 담긴 자기의 참모습을 자신만 알아볼 수 있다는 측면이 자기에게 매력적이라고 지적하지요. 타인들은 자기 일을 아무리 유심히 관찰해도 그 일의 참뜻을 알 수 없지만, 자기만은 그 참뜻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들은 “단순한 표면적 일상사”(the mere incidents of the surface)만 볼 수 있을 뿐, “실재하는 실체”(the reality), 혹은 “내적 진실”(the inner truth)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는 그 내적 진실을 여전히 느낄 수 있지요. 겉으로만 보면 말로는 “저 잔악무도한 유령”(that atrocious phantom)과 같은 커츠와 그 음산한 땅에서 동업자 관계를 맺어 “양철 조각 같은 증기선”(the tin-pot steamboat) 선장 노릇을 담당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처럼, 현세와 격리된 곳에서 자기에게 강요된 악몽을 앞뒤 가리지 않고 선택한 행위였습니다. 그렇지만 말로는 “불건전한 방법”을 사용하는 그 탐욕적인 인간 패거리 중에서 자기가 외톨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나중에 그들과 분리됩니다.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에 충실했기 때문이지요. 말로의 생각에 빛의 세례를 안겨준 이런 측면들을 조금 더 깊이 각각 상고해 보겠습니다.
-문명화: 식민주의 정복자들의 수탈 과정-
콩고의 상아 교역소 책임자인 커츠가 품고 있던 미션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가 툭하면 내뱉은 다음 한 문장에 그 이상적인 목표가 드러나 있습니다. “각 출장소는 항상 지향하는 길을 밝히는 횃불이 되어야 하고 물론 교역도 하지만 교화시키고 향상시키고 교육하는 센터 역할도 해야 한다.”(Each station should be like a beacon on the road towards better things, a center for trade of course, but also for humanizing, improving, instructing.) 무역은 기본이고 현지인들을 가르쳐서 그들의 삶을 인간답게 만들고 개선하는 것이 자기들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커츠와 같은 인물들을 파송한 유럽인들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몇백만 무지몽매한 인간들을 그 끔찍한 생활에서 해방시키는 일”(weaning those ignorant millions from their horrid ways)이 그 식민지 사업의 목표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미션이나 목표가 과연 그대로 수행되었을까요?
말로가 계약한 곳은 “해외에 거대한 제국을 운영하고 무역으로 끝없는 돈을 벌어들이던”(to run an oversea empire, and make no end of coin by trade) 회사였습니다. 어떤 무역이었을까요? “제조된 상품들, 싸구려 무명, 구슬들, 놋쇠 철사 다발이 이 어둠의 오지로 들어오고 그 대가로 값진 상아가 줄줄 새나가고 있었다.” 호혜적인 무역이 아니라, 순전한 탈취였을 뿐입니다. 원주민들에게 강제력을 가하여 값비싼 상아를 자기들에게 가져오도록 해 놓고는 그 대가로 준 것은 달랑 구슬이나 철사 다발이나 무명과 같은 싸구려 제품들뿐이었습니다. 말로도 자기 증기선 운행을 위해 계약한 흑인들에게 일주에 약 9인치 되는 철사 세 조각씩을 급료로 각각 지불해 주었습니다. 그 철사가 화폐로 활용된다는 가정하에서 지급한 것이었지만, 그 지역에는 마을도 없었고 주민들도 적개심에 불타는 자들이었기에 그 철사 화폐가 아무리 많아도 조금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원주민들의 필요에 걸맞은 물품을 제공해 주거나 그들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술이나 지식을 전수해 주기는커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철사 조각으로 그들의 노동을 사서 자기들이 원하던 상아나 고무를 탈취해갔을 뿐입니다. 중앙 출장소 지배인의 삼촌이 운영하던 ‘엘도라도 탐험대’(the Eldorado Exploring Expedition)가 그러한 무역을 실행하는 대표격이었지요. “대지의 창자에서 금은보화를 찢어내는 일이 그들 욕망의 전부였어. 금고를 터는 강도처럼 그 욕망의 뒤에는 도덕적 목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어.”(To tear treasure out of the bowels of the land was their desire, with no more moral purpose at the back of it than there is in burglars breaking into a safe.) 탐험대다운 배짱이나 대담성이나 용기는 없으면서도, 무모하고 탐욕스럽고 잔인하기만 한 야비한 약탈자 집단에 불과했지요.
이러한 야만스러운 약탈자들이 정작 선량한 원주민들은 식인종, 짐승, “검은 사하라 사막의 모래 알갱이 하나만도 못한 야만인”이라고 부르지만, 자기들은 마치 고귀한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들로 인식하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모습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그러다가 증기선장 플레슬레븐처럼 목숨을 잃기까지 하지요. 그는 “검은 암탉 두 마리” 가격을 흥정하다가 속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그는 본때를 보여주려고 시도합니다. 자기가 이미 그 지방에서 그들을 문명화시키는 대의명분을 위해 2년간이나 헌신했다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였지요. 그렇지만 그 마을 추장을 몽둥이로 패기 시작하던 중에, 그 추장의 아들이 그 선장을 창으로 찔러 숨지게 합니다. ‘야만적 풍습의 폐지’에 대한 커츠의 보고서에는 유럽인들이 식민주의에 대해 품고 있던 자기기만의 절정이 소개됩니다. 백인들이 자신들의 고도의 문명 덕에 “아만인들”(savages)에게 신으로 보여 그들 앞에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고 서두를 연 후에, 자기들의 의지력만으로도 “무한한 선”(good practically unbounded)을 베풀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거룩한 자비로운 존재가 다스리는 광대무변한 이국적인 땅덩어리(an exotic Immensity ruled by an august Benevolence)를 연상시키는 결론”으로 이어지면서, 급기야 “모든 야만인을 절멸시켜라!”(Exterminate all the brutes!)로 끝맺지요.
문명의 의미. 커츠의 이런 시각이 유럽 식민주의의 공통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커츠라는 이 인물이 “암흑 같은 대륙의 오지가 길러낸 망령”(This initiated wraith from the back of Nowhere)이기도 했지만, 온 유럽이 그의 탄생에 기여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All Europe contributed to the making of Kurtz.”). 모친 혈통의 절반이 영국계였고 부친 혈통의 절반이 프랑스계였지요. 그렇다면 커츠가 대표하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드러낸 문명에 관한 시각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애당초 자기 문명(civilization)이 다른 민족의 문명보다 더 우월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오류입니다. ‘문명’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시비타스’(civitas) 또는 ‘도시’(city)와 관련이 있습니다. ‘문명’이라는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도시로 구성된 사회’(a society made up of cities)이지요. 그래서 영어 사전에도 그 의미가 우선 중립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즉 문명이란 “고유한 사회 조직과 문화를 갖고 있는 인간 사회”(a human society with its own social organization and culture, "콜린스 영어사전"), 혹은 “특정 기간 또는 특정 지역의 사회, 문화 및 생활 방식”(a society, its culture and its way of life during a particular period of time or in a particular part of the world, "옥스포드 영어사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The ancient civilizations of Latin America)이나 ‘그리스, 로마 고대 문명’(the ancient civilizations of Greece and Rome)이라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 기본적인 개념에서, 보다 진전된 사회 조직이나 보다 편안한 생활 방식을 가진 사회을 일컫는 데까지 ‘문명’의 의미가 진전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콜린스 영어사전”과 “옥스포드 영어사전”이 각각 다음과 같은 다른 정의도 소개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진전된 수준의 사회 조직과 편안한 생활 방식을 갖춘 상태”(the state of having an advanced level of social organization and a comfortable way of life)와 “매우 발달하고 조직화된 인간 사회의 상태”(a state of human society that is very developed and organized).
문명 간의 비교. 이런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문화적으로 더 우월하거나 더 열등한 문명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고대 문명(ancient civilization)과 현대 문명(modern civilization)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지만, 어떻게 후자가 전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과연 현대 문명이 그리스, 로마 문명보다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현대의 과학기술로 인해 현대가 과거에 비해 더 편안한 생활 양식을 구가하게 된 측면은 부인할 수 없지만, 결코 사회 조직이나 문화가 과거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현대 서구 사회를 여는 데 혁혁한 기여를 한 계몽주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와 법철학자 몽테스키외가 함께 열렬히 지지한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추첨민주주의”였습니다. 추첨으로 국민의 대표자인 행정관, 재판관, 재정관, 전쟁사령관 등의 공직자를 뽑자는 이야기입니다. “추첨에 의한 선거는 민주주의의 본질에 속한다.”(몽테스키외, “법의 정신”)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추첨민주주의의 원형은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고대 그리스 문명의 본산이었던 아테네였습니다. 당시 그곳에서는 관직(1천 개 이상) 대부분을 추첨으로 뽑힌 시민이 맡았습니다. 임기는 1년이고 연임 불가였습니다. 이런 제도가 무려 약 3백 년 동안(B.C. 594-B.C. 322) 지속되었습니다(“조국의 법고전 산책”).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정치, 사회 문제 중 가장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것은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 견제받지 않고 전횡하는 현실입니다. 특히 (일부라고 믿고 싶지만) 검사와 판사들의 일탈과 부패는 이미 도를 넘었습니다. 의혹이 있는 범죄나 이미 드러난 범죄만 하더라도 중징계감인 전직 검사가 현직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는 현 상황은 참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아이러니이지요. 과연 국민들이 검사와 판사들을 뽑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도 못하는 현대 우리나라 문명이 추첨으로 자기 대표자들 대부분을 뽑은 고대 그리스 문명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C. S. 루이스는 현대의 것이 과거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이러한 사조를 “연대기적 속물근성”(chronological snobbery)이라는 표현으로 풀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지적 풍토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두 불신받는다는 가정”(the uncritical acceptance of the intellectual climate common to our own age and the assumption that whatever has gone out of date is on that account discredited.)을 가리킵니다(“Surprised by Joy”). 점점 더 과거와 단절된 채, 변화란 변화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진보(progress)에 대한 신화에서 비롯된 오류입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문명’이란 용어가 개발되던 초기에 인류학자와 다른 사람들은 ‘문명’(civilization)이나 ‘문명화된 사회’(civilized society)라는 용어들을 사용하여 각 지역에 있는 사회를 자민족 중심적인 방식(an ethnocentric way)으로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같이 문화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와, ‘미개한’(savage) 또는 ‘야만적’(barbaric) 문화나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회를 구분했습니다. 그리하여 ‘문명사회‘(civilizations)는 도덕적으로 선하고 문화적으로 진보된(progressive) 것으로 간주되지만, 다른 사회는 도덕적으로 잘못되고 ’후진적‘(backward)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National Geographic”).
그렇지만 이런 시각은 그릇되었습니다. 소위 문명사회와 다른 사회는 도덕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두 사회는 동일하게 타락하고 부패합니다. 이 점에서 예외가 되는 인간 사회가 어디, 어느 시대에 존재합니까? 게다가 진보적인 것과 후진적인 것에 대한 평가는 죄다 “우리 자신의 문명이 공동으로 저지르고 있는 큰 죄, 즉 인공물 숭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based upon that idolatry of artefacts which is a great corporate sin of our own civilisation.) 우리 손이나 기술(테크놀로지)로 만들어 우리 눈을 끄는 물건이나 장식품에만 사로잡힌 나머지, 우리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유용한 것들이 죄다 “우리의 선사시대 선조들”(our prehistoric ancestors)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잊고 있습니다. 즉 증기선, 총, 약품, 차, 텔레비전, 컴퓨터, 핸드폰과 같은 인공물에 매료된 나머지, “언어, 가족, 의복, 불의 사용, 가축 기르기, 바퀴, 배, 시(poetry), 농업”과 같은 문명의 핵심 요소들이 고대 문명의 산물임을 망각했습니다(C. S. Lewis, “The Problem of Pain”). 그 선조들에게 문명적인 빚을 진 역사적 진실은 외면한 채 그들이 미개하고 야만적이라니요!
문명이라는 우상. 결국 현대 문명 속에는 현대인이 손과 기술(테크놀로지)로 생산한 인공물과 재화를 우상으로 섬기는 사회 조직과 문화로 전락할 가능성이 항존합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인물 중에는 중앙 출장소 지배인이 있습니다. 그는 외부인들이 적응하고 살아가기에 온갖 측면에서 열악한 식민지 환경 속에서 건강 하나로 지배인이 된 인물입니다. 선원이었지만 뭍으로 올라가서 출장소를 맡게 된 그는 학식도 없고 지능도 없었지만, 약품도 필요 없을 만큼 한 번도 앓지 않았습니다. 3년 임기를 세 번이나 채울 수 있었으니까요. 그에게는 “건강 자체가 일종의 권력”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지배인의 사정은 식민주의가 판치던 시대에 소수의 유럽인들이 다수의 아프리카인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 두 가지 중 한 가지와 연관됩니다. 그 두 가지가 바로 1850년부터 공급된 말라리아 예방 약품인 키니네의 발명과 1884년에 등장한 기관총과 같은 새로운 무기들의 개발이었으니까요(루즈 판 다이크,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 즉 당시 유럽인들은 키니네(건강 보장 약품)와 기관총(혹은 대포)이라는 인공물로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초자연적인 존재로 군림하여 온갖 착취와 수탈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그 인공물 우상을 숭배하고 널리 활용하던 중에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던 그들은 야수들로 변신해 버렸습니다.
폴 마샬이 언급한 대로 우리의 창의력과 과학기술 자체는 선한 것입니다. 이것들은 유용할 수 있으며, 유용하게 활용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테크놀로지가 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는 시각(The “technology-is-the-key” view)은 과학만능주의적 견해에 불과합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의 처지, 인간 자유의 현실 및 인간의 책임이라는 중대 고려 사항들을 무시하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테크놀로지가 바로 문제”라는 견해(The “technology-is-the-problem” view)는 테크놀로지의 본질과 기능을 경시하는 시각입니다. 테크놀로지를 섬김의 도구로 보지 않고 지배와 군림의 수단으로만 보는 비이성적인 태도입니다. 성경은 테크놀로지의 선한 점과 악한 점에 대해 각각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성을 하나님 형상의 일부로 볼 뿐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그 창조성이 발휘된 악기와 벽돌과 목축의 발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what is natural)과 “인위적인 것”(what is artificial)을 구분하지 않고 그 둘 모두를 ’창조적인‘(creative)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창의성과 과학기술을 자기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 욕망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정죄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바벨탑이었지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인간의 문화적, 기술적, 예술적 업적들에 대해 항상 그것들을 이룬 방식과 연결지어 평가했습니다. 불의와 압제와 교만의 소산물들은 결코 아름다운 것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것들의 엄중한 종말을 경고했습니다. 하박국 2:12-13을 참조해 보세요(폴 마샬, “Heaven Is Not My Home”).
“그들이 너를 보고 ‘피로 마을을 세우며, 불의로 성읍을 건축하는 자야, 너는 망한다!’ 할 것이다. 네가 백성들을 잡아다가 부렸지만, 그들이 애써 한 일이 다 헛수고가 되고, 그들이 세운 것이 다 불타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나 만군의 주가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새번역)
이 구절 첫 부분의 ‘그들’과 ‘너’는 누구일까요? '너'는 자기 나라를 부유하게 하려고 부당한 이득을 탐내고 많은 민족을 꾀어 망하게 한(9-10절) 바벨론이고, ‘그들’은 담의 벽돌들(11절)로서 바벨론이 다른 나라의 건물에서 약탈했거나 약탈한 물건으로 산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 벽돌들이 12절에서 바벨론의 악행을 증언하고 있지요. ‘피’와 ‘불의’는 영원히 영토를 점령할 의도로 바벨론이 자행한 습관적인 잔인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바벨론뿐 아니라 이런 무도한 방식으로 민족주의적인 자기 확장을 꾀하는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정의로 심판하시는 날이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바벨론은 이미 B.C. 539년에 페르시아에게 멸망당했지요. 이 구절들을 읽으며 벨기에[레오폴드 2세가 대표한]를 비롯한 유럽 식민주의 국가들과 일본의 숱한 지난 악행들이 떠올랐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국가들의 무자비한 악행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과 과학기술도 결국 영적인 문제입니다. (계속)
'아(我)-나를 알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걸신들린 삶과 시인의 삶 (0) | 2023.08.18 |
---|---|
유럽 식민주의의 단면을 통해 어두운 인간 내부를 조명하는,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속”(3) (2) | 2023.08.11 |
유럽 식민주의의 단면을 통해 어두운 인간 내부의 심연을 조명하는,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속”(1) (0) | 2023.07.18 |
벌레와 같은 현대 직장인 가장의 실존을 열어 밝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2) (0) | 2021.07.31 |
벌레와 같은 현대 직장인 가장의 실존을 열어 밝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1) (2) | 2021.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