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호기심이란 키워드로 인간의 본질을 섬세하게 관찰한 에드거 앨런 포(2)
-포의 고딕소설의 특징-
영문학사에는 고딕소설(Gothic fiction), 고딕공포물(Gothic horror)이란 장르가 등장합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 영국에서 유행한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로서, 주로 유령이나 괴물이 등장하거나 초자연적인 사건이 발생하여 공포감과 신비감을 자아냅니다. 이 장르에 속한 초기 소설들의 배경이 유럽 중세의 고딕 양식 건축물이었기에 ‘고딕’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포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 바로 이 고딕공포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포의 고딕소설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 유행한 ‘페니프레스’[6센트인 일반 신문과 달리 1센트라는 낮은 가격을 내세워 전 계층에서 널리 읽힌 저급 신문들]나 각종 범죄 팸플릿들과는 차원을 달리했습니다. 그것들은 폭력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공포의 스릴을 추구하거나[‘페니프레스’의 경우] 극악한 이야기들을 또렷하게 묘사하여 본능과 호기심을 자극하는[범죄 팸플릿들의 경우]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포의 고딕소설은 “화자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 인간 내면의 무의식과 불안, 광기를 탐구하는 계기로 삼음으로써 공포물을 세련된 심리물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습니다.”(권진아 교수)
-공포물이 드러내는 인간 내면의 심연-
김석희가 번역한 12편의 단편소설 중에 고딕소설 장르에 해당되는 것이 8편[“병 속에서 발견된 수기”(MS. Found in a Bottle), “어셔가의 붕괴”(The Fall of the House of the Usher),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A Descent Into the Maelstrom), “붉은 죽음의 가면극”(The Masque of the Red Death), “구덩이와 진자”(The Pit and the Pendulum), “검은 고양이”(The Black Cat), “생매장”(The Premature Burial), “절뚝 개구리”(Hop-Frog)]입니다. 그것들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 바로 “어셔가의 붕괴”와 “검은 고양이”입니다. 이 두 작품과 “구덩이와 진자”의 간략한 줄거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어셔가의 붕괴”: 어릴 적 친구인 로더릭 어셔(Roderick Usher)의 부탁으로 그의 저택을 방문한 화자는 우선 그 저택이 압도적인 음산함을 띠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로더릭은 건강하고 쾌활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과는 달리 창백하고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화자가 그 집에 도착한 이후로 그의 쌍둥이 여동생인 매들린(Lady Madeline)의 건강 상태가 더 악화되어 숨을 거둔다. 그런데 나중에 그들은 그녀를 산 채로 매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매들린은 자기 관에서 기어 나와 로더릭의 몸을 덮쳐, 그를 “시체로, 그가 예견한 공포의 제물로 만들어 버린다.” 화자가 공포에 질려 그 집에서 도망쳐 나오자, 그 저택의 벽들이 다 부서지고 옆에 있던 호수가 그 잔해들을 다 삼켜 버린다.
■“검은 고양이”: 내일 죽게 되는 화자의 회상 내용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화자는 자신의 검은 고양이 플루토(Pluto)를 고문하다 그 목에 올가미를 감아 나뭇가지에 매달아 죽인다. 그러던 중 술집에서 가슴팍에 있는 하얀 털을 제외하고는 자기가 죽인 고양이와 거의 똑같이 생긴 길고양이를 발견하는데, 그놈이 자기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온다. 그 고양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 녀석의 하얀 털이 교수대 형틀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 그 녀석을 미워하게 되어 비이성적이고도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러던 중 그는 도끼로 귀찮게 구는 그 고양이를 죽이려다 실수로 자신의 아내를 내리찍는다. 그는 아내의 시체를 지하실 벽 속에 집어넣고 회반죽으로 발라 버린다. 그런데 실수로 그 고양이까지 벽 속에 집어넣게 된다. 집을 조사하러 온 경찰들이 지하실을 둘러보고 올라가던 중 그는 “허세를 부리고 싶은 광기”가 발동하여 자기 지팡이로 그 벽을 치는 실수를 범한다. 바로 그때 그 벽 뒤 아내의 시체 위에 있던 애꾸눈 고양이가 울음소리를 내는 바람에 모든 것이 밝혀지고 결국 화자는 교수형을 당한다.
■“구덩이와 진자”: 화자는 스페인 종교재판소(the Inquisition)의 사악한 재판관들 앞에서 죄목도 명시되지 않은 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기절했다가 나중에 깨어나 완전히 어두운 방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자기가 무덤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만, 감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감방을 탐색하기로 결심하지만, 전체 둘레를 측정하기도 전에 기절한다.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근처에 음식과 물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가 다시 감방의 둘레를 측정하려고 시도하던 중 넘어져서 깊은 구덩이 가장자리에 떨어지는 바람에 목숨을 유지한다. 다시 의식을 잃은 화자가 깨어났을 때 감옥에 불이 약간 켜져 있고 자기가 천장을 바라보는 나무 프레임에 등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게다가 그 위에 흔들리는 진자가 달린 천장이 있었는데, 그 진자는 앞뒤로 흔들리며 천천히 내려온다. 그것이 자기를 두 조각으로 쪼갤 것 같아서 그는 겁에 질린다. 그러나 자기 고기를 자기를 묶은 재료 근처에 놓아 두자, 쥐들이 그것을 먹어치우면서 그의 결박도 끊어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진자가 자기 가슴을 자르기 직전에 빠져나온다. 이제는 진자가 천장으로 물러나더니 감방의 벽이 뜨거워지면서, 자기의 위치를 향해 움직인다. 그는 천천히 방의 중앙을 향해 구덩이로 떨어지게 된다. 마지막 발판을 잃고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자, 갑자기 굉음과 나팔 소리가 들리고 벽이 물러나면서 팔 하나가 그를 안전하게 잡아당긴다. 프랑스 군대가 톨레도(Toledo)를 점령한 것이었다.
이 세 작품을 비롯한 포의 공포물 속에는 우리가 절감하는 삶의 공포와 연관된 의미 있는 교훈들이 여럿 발견됩니다.
공포의 기원, 우리의 영혼. 공포의 종류 중에는 먼저 분석 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이나 지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생명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포물에 자주 등장하는 유령이나 괴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 생명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개인의 기질이나 망상에서 비롯된 공포도 있습니다. 우선 광장공포증(agoraphobia)이 있는가 하면, 폐소공포증(claustrophobia) 같은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포로서 각각 넓은 장소와 밀폐된 장소를 두려워하는 증상이지요. 한편으로 “검은 고양이”의 화자가 두 번째 검은 고양이에 대해 느낀 공포와 두려움은 “상상하기도 힘들 한낱 망상”(one of the merest chimaeras) 때문에 더 심해진 경우이지요. 그 녀석 가슴팍의 흰색 털이 교수대 형틀 모양을 띠고 있어서, 공포와 범죄(Horror and Crime), 고통과 죽음(Agony and of Death)을 연상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들은 각 개인의 기질과 주관적 신념과 연관된 문제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셋째로, 도무지 그 원인을 종잡을 수 없는 공포도 엄존합니다. “어셔가의 붕괴”에 보면, “억누를 수 없는 전율”과 “까닭 모를 공포”라는 악령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매들린을 지하실에 안치한 지 일주쯤 지난 밤에 잠을 자려고 할 때 이런 감정이 화자를 덮쳤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참을 수 없는 강한 공포심”은 아무리 “논리적으로 떨쳐 내려고 애써“ 보아도 소용없었습니다. 이처럼 공포감은 논리와 이성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상과 같이 공포의 종류를 살펴보니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공포의 대상은 외부적인 것일 수 있지만, 공포의 기원은 우리 영혼 내부에 있다. 외부적인 대상이 주는 공포가 인지되는 곳도 결국 우리 영혼 속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항상 우리에게 공포를 안겨다 주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발발한 하와이 마우이섬의 산불처럼 우리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때만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포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공포를 제재(題材)로 하는 작품이 많을지 모르지만, 그 공포는 영혼에서 유래한다.”
공포의 본질, 공포에 대한 공포. 공포가 우리 각자의 영혼에서 유래한다면, 그것이 개인적이면서도 특수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접하고도 무덤덤한 사람이 있고 비애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똑같은 상황에 놓여서도 무감각한 사람이 있고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인이 공포감을 느끼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적이고 특이한 공포의 본질이 “어셔가의 붕괴”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어셔가의 장남 로더릭은 “이상한 공포에 노예처럼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두려워 한 것은 현재 상황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the events of the future)이었습니다. 그것도 미래의 “위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야기할 절대적인 결과인 공포”(no abhorrence of danger, except in its absolute effect-in terror)가 두렵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가 느낀 공포 현상은 사실상 ‘공포에 대한 공포’(The fear of fear)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소름 끼치는 유령과 같은 두려움과 맞서 싸우다가 목숨과 이성을 함께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조만간 닥쳐올 것”(the period will sooner or later arrive when I must abandon life and reason together, in some struggle with the grim phantasm, FEAR.)이라고 느낍니다.
로더릭의 공포는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인 요인들이 결합된 극단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겠지만, 미래 사건의 결과를 경험하기(=공포)를 두려워하는 것은 상당히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경향입니다. 예컨대 스피치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실상 스피치 자체보다 망신살이 뻗칠 그 경험의 결과(=공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아예 리허설도 하지 않게 되어 스피치를 못하게 되거나 그 기회를 망칠 가능성이 큽니다. 애정 고백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백 자체가 아니라 상대방의 거절로 이어질 그 결과(=공포)를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은 일찌감치 그 시도를 접을 공산이 큽니다. 결국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는 공포의 대상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공포)이 야기하는 공포인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포에 대한 공포’입니다. 미래 사건을 경험하는 공포를 두려워하게 되면, 로더릭의 경우에는 자기가 “예견한 공포의 제물”이 되어 목숨과 이성(life and reason)을 함께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정상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이성적인 삶(reasonable life)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공포를 경험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공포 조성자이자 조장자, 인간. 공포물 속에는 귀신이나 괴물이 나타나 공포를 안겨다 주기도 하지만, 인간이 공포를 조성하고 조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원래 반려동물의 사랑에는 “인간의 하찮은 우정과 덧없는 충성”(the paltry friendship and gossamer fidelity of mere Man)보다 훨씬 고결한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돌변하여 자기와 아내가 아끼던 고양이의 눈알 한쪽을 도려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 녀석이 자기를 피하고 미워하는 것처럼 느끼자 한편으로 아픈 마음이 들면서도, 그 마음이 차츰 짜증으로 변하면서 심술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녀석을 학대하던 중 급기야 목에 올가미를 감아 나뭇가지에 매달아 죽여 버리지요. 이런 돌발적인 행동의 원인으로 두 가지가 지목됩니다.
첫째는 “무절제한 폭음”입니다. 그는 몇 년에 걸쳐 자기의 전반적인 기질과 성격이 “악마 같은 음주벽”(the Fiend Intemperance) 때문에 나쁜 방향으로 급격히 변했다고 고백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격이 변덕스럽고 급해지고 남의 감정에 무관심해졌고, 아내에게도 폭언을 가하고 폭행을 휘두르는 상태가 되었으니 고양이에게 포악해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둘째는 “심술궂은 마음”(the spirit of PERVERSENESS)입니다. “이유 없이 화를 내고 싶어 하는 영혼의 이 불가해한 갈망”(this unfathomable longing of the soul to vex itself)입니다. 이 심술은 “인간 마음의 원초적 충동, 인간의 성격을 방향 짓는 불가분의 기본 정서 중 하나”(one of the primitive impulses of the human heart—one of the indivisible primary faculties, or sentiments, which give direction to the character of Man)로 파악되지만, 철학적으로는 아무런 설명을 제시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입니다.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본성에 해가 되는 것”이 뻔한데도, “잘못을 위해 잘못을 저지르고 싶어 하는”(to do wrong for the wrong's sake only) 영혼의 갈망이니까요. 이 불가해한 측면을 인식해야 비로소 다음과 같은 비논리적인 문장들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는 녀석이 나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녀석에게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녀석을 목매달았다. 그런 짓을 함으로써 내가 죄를 짓고 있다는 것, 가장 자애롭고 가장 무서운 신의 무한한 자비조차 내 불멸의 영혼-그런 게 존재하기라도 한다면-을 구원할 수 없을 만큼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녀석을 목매달았다.”(—hung it because I knew that it had loved me, and because I felt it had given me no reason of offence;—hung it because I knew that in so doing I was committing a sin—a deadly sin that would so jeopardize my immortal soul as to place it—if such a thing wore possible—even beyond the reach of the infinite mercy of the Most Merciful and Most Terrible God.)
그 고양이를 목매단 이유가 그 녀석이 자기를 사랑했고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가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을 극악한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심술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PERVERSENESS’ 자체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불합리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고의로’(deliberately does things that are unreasonable or that result in harm for themselves) 자행하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왜곡된 상태로 진전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열어 밝히는 키워드입니다.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이것이 인간 사회와 개인적인 삶의 현실입니다. 처음에는 도리에 맞지 않고 자기에게 해가 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위를 자행하다가, 그것이 계속 이어지면 나중에는 그것이 불법적이고 자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기꺼이 행하는 상태로 변질되는 것이지요. 탈선하는 심리와 자기 파괴적인 광기는 이렇듯 한 끗 차이입니다.
돌이켜 보면, “어셔가의 붕괴”, “검은 고양이”, “구덩이와 진자”에 등장하는 공포의 조성자나 조장자는 하나같이 인간이었습니다. 쌍둥이 여동생을 생매장한 로더릭이나, 반려동물을 학대하고 아내를 폭행했을 뿐 아니라 결국 둘 다 살해해 버린 비정한 한 인간을 보세요. 그리고 자기들의 입장과 다른 것을 믿는 신자들을 참혹한 방식으로 제거하려는 종교재판관들의 광기에 주목해 보세요. 그 신자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 주어졌습니다. “육체적으로 지독한 고통을 겪으면서 죽느냐, 아니면 정신적으로 소름 끼치는 공포에 시달리면서 죽느냐 하는 선택”(the choice of death with its direst physical agonies, or death with its most hideous moral horrors)뿐이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full of grace and truth)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14)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당신의 뜻을 좇아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그 종교인들이 취한 광기 어린 재판과 형 집행은 가증스럽기 그지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심각한 모독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도리어 자기들이 하나님의 고귀한 뜻을 실행하고 있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언한 대로입니다, “그들[문맥상 유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씀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서 10:2-3)
우리가 당면한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 착취와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변화의 결과가 섬뜩한 공포를 우리에게 안기며 우리 마음을 옥죄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욱 두려운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먼저 지난 역사를 살펴보세요. 인간 공동체에 가장 극악무도한 공포를 안겨다 준 존재는 무엇(혹은 누구)이었습니까? 광기 어린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레오폴드 2세,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폴 포트를 비롯하여 각 시대마다 암군(暗君)들이 넘쳐났습니다. 현재에도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자국민들에게 공포를 자아내는 이들이 적지 않고, 이웃 나라까지 침범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가하는 이들도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 1년 3개월간 대다수 국민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선사한 이는 다름 아닌 현 대통령이었으니까요.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에다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까지 과용하고 남용하면서도 늘 노기에 찬 모습으로 국민과 정부 각료들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 ‘이유 없이 화를 내고 싶어 하는 심술궂은 마음’이 발동하여 아내와 반려동물과 자신까지도 파멸시킨 “검은 고양이”의 비정한 주인공이 오버랩됩니다. 자신이 민복(民僕)임을 망각한 채 우리나라 천지에 공포를 조성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데만 능한 이 ‘겁도 없는 5년짜리 공무원’[자기식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포와 두려움 극복하기-
“검은 고양이”에 나오는 표현을 활용하자면,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인 나에게”(for me a man, fashioned in the image of the High God) 감히 이 세상의 어떤 대상이 견딜 수 없는 공포를 안겨다 줄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번번이 이 공포의 공격에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기질상의 요인에서 비롯된 공포나 원인을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제외한다면, 그 관건은 대부분 공포의 본질이 ‘공포에 대한 공포’(The fear of fear), 즉 공포를 경험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점을 인식하는 데 있습니다. 그 경험이 얼마든지 긍정적일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부정적이고 끔찍할 것으로만 왜곡하여 인식한 채 그것을 두려워하는 심적 상태 말입니다. 아마도 1933년에 미국 제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가 첫 취임 연설에서 언급한 ‘두려움’도 바로 이 ‘왜곡된 공포의 경험’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 즉 후퇴를 전진으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마비시키는, 이름도 없고, 터무니없고, 정당화되지 않은 공포뿐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So, first of all, let me assert my firm belief that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nameless, unreasoning, unjustified terror which paralyzes needed efforts to convert retreat into advance.)
1929년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해 실업률이 25%까지 치솟은 상태에서 당시 미국민들은 ‘근거도 정당성도 없는 익명의 공포’에 사로잡혀 후퇴한 사회를 전진시키려는 노력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즉 ‘공포에 대한 공포’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채 손 놓고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게 살고 있었지요. 이때 루스벨트는 정직하고 담대하게(frankly and boldly) 자국민들에게 제안합니다. ‘그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오늘날 미국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자.’(honestly facing conditions in our country today).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의 근거로 그는 미국의 과거 역사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소망을 가리켰습니다. “이 위대한 나라는 지금까지 견뎌온 것처럼 견뎌낼 것이고, 회복될 것이며, 번영할 것입니다.”(This great Nation will endure as it has endured, will revive and will prosper.) 이런 혜안은 우리나라의 상황이나 각 개인의 처지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60 성상을 인내하면서 헤쳐 나온 것처럼 여생도 넉넉하게 버티면서 마감할 것이고, 이전에 부족한 부분들이 앞으로 채워질 것이며 꽃피우지 못한 역량들이 앞으로 만개할 것이라고 소망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정당한 근거 없이 절망스러운 미래를 예상하고 두려워하며 좌절하는 것보다는, 객관적인 과거 역사나 경험에 근거하여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그 미래가 현실화될 수 있는 방안을 실행에 옮기는 데 진력하는 게 지혜가 아닐까요? 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을 믿는다면, 내 생이 끝나는 날까지 의심할 여지 없이(surely)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goodness and lovingkindness)이 나를 뒤쫓을(pursue) 것을 신뢰하는 태도는 너무나도 합리적인 선택입니다(시편 23:6).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이 ‘공포에 대한 공포’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포의 단편 “생매장”(The Premature Burial)이 강력하게 주창하는 입장입니다.
“아! 무덤이 전하는 수없이 많은 소름 끼치는 공포를 전부 공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프라시아브 왕[전설적인 인물로서 이란을 침략했다가 패퇴한 투르키스탄 서부의 왕]과 함께 옥수스강[아무다리야강]을 따라 내려간 악마들처럼, 그 공포는 잠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그 공포를 잠들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파멸하게 될 것이다.”(Alas! the grim legion of sepulchral terrors cannot be regarded as altogether fanciful —but, like the Demons in whose company Afrasiab made his voyage down the Oxus, they must sleep, or they will devour us—they must be suffered to slumber, or we perish.)
이 작품은 강경증[catelepsy, 몸이 갑자기 뻣뻣해지면서 순간적으로 감각이 없어지는 상태]에 빈번히 시달리는 어떤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화자는 자기가 혼수상태로 생매장될 것이라는 강박적인 공포와 끔찍한 악몽 때문에 괴로움을 당합니다. 생매장이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닥친 이 같은 고통 가운데 가장 극한의 공포”일 테니까요. 그 예방책으로 그는 자기 무덤에 탈출 경로와 식량을 준비해 둡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관에 갇혀 있다고 느끼지요. 그렇지만 나중에 자기가 작은 범선의 좁은 선실에서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후, 그는 병적인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의 영혼은 적절한 균형을 얻게 됩니다.
이 화자가 강경증에 걸리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몸이 뻣뻣해지기 전에 먼저 자기 영혼을 마비시킨 ‘섬뜩한 두려움’(charnel apprehensions) 때문이었습니다. 그 반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삶을 살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근거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쇠약하고 무신경한 삶을 낳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두려움과 공포를 처단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 작품의 주인공처럼 무시무시하고 상상을 초월할 만큼 섬뜩했던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out of Evil proceeded Good)고 그는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극도의 공포가 마음속에 필연적인 반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For their very excess wrought in my spirit an inevitable revulsion.) 이후에 그는 강경증도 사라져서 몸을 활발하게 움직여 활동하기도 하며, “천국의 자유로운 공기”(the free air of Heaven)를 호흡하는 단계까지 누리게 됩니다.
인간은 어떠한 사건 자체보다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에 영향을 받는 존재입니다. 스토아학파의 거두 에픽테토스(Epictetus)가 “인간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자기 생각 때문에 불안해진다.”(Men are disturbed not by things, but by their opinions about them.)라고 갈파한 대로입니다. 바로 이런 취지를 띤 문장들이 최근 들어 정신 건강을 향상하는 데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1950년대에 이 치료법을 개발한 앨버트 엘리스(Albert Ellis, 1913-2007)가 “ABC” 감정 모델(“ABC” model of the emotions)을 만들 때 영감을 얻은 것이 바로 위의 문장이었습니다. 이 모델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사건을 경험하고(A), 그것을 해석하고(B) 난 후에 비로소 우리 해석에 걸맞은 감정 반응을 느낍니다(C). [Experience---->Interpret---->Feel] 결국 우리 감정을 바꾸려면 경험한 사건에 대한 우리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지요(줄스 에반스, "철학을 권하다"). 왜곡된 생각이 추동한 허수아비 같은 공포의 감정에 속아 주저앉지 맙시다. 도리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상을 직시함으로써 그것의 진면목을 올바로 파악합시다. 한발 더 나아가 객관적인 과거 경험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소망에 근거하여 견결하게 힘찬 발걸음을 내딛읍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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