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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심(心)-마음을 따르라

현재와 미래를 대하는 자세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11.

현재와 미래를 대하는 자세

작년 초에 귀국한 후에 새로운 사역과 일감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동안 불안정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를 앞두고 있는 제게 깊은 위로가 된 조언 중에 조지 맥도날드의 지혜로운 삶의 지침이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뜻을 아는 경우엔 그 뜻대로 행하고, 주님의 뜻을 모를 경우엔 멈춰 서서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사도행전 22:10) 외의 다른 질문을 하는 것은 그분께 입장 표명을 강요하거나 빨리 일하시라고 재촉하는 것입니다.”(Faith is that which, knowing the Lord's will, goes and does it; or not knowing it, stands and waits (...) But to put God to the question in any other way than by saying, "What wilt thou have me to do?" is an attempt to compel God to declare Himself, or to hasten His work.) ("George MacDonald: An Anthology", 29번)

 

“믿음의 팔짱을 끼고 어둠 속에서 빛이 떠오를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십시오. 제가 말하는 것은 믿음의 팔이지 행동의 팔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체 말고 그 일을 하십시오. 방 청소 건, 식사 준비 건, 친구를 찾아가는 일이건 바로 행하세요. 자신의 감정에 개의치 마십시오.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Fold the arms of thy faith, and wait in the quietness until light goes up in thy darkness. For the arms of thy Faith I say, but not of thy Action: bethink thee of something that thou oughtest to do, and go to do it, if it be but the sweeping of a room, or the preparing of a meal, or a visit to a friend. Heed not thy feeling: Do thy work.) ("George MacDonald: An Anthology" 39번)

 

미래에 대한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 그 뜻을 보여주시도록 하나님을 재촉하는 것과 현재 감당해야 할 일을 등한히 하는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주님의 뜻을 모를 때는 믿음의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기다리며 지금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는 데 집중하라고 맥도날드는 조언해 주고 있습니다. 여전히 기다리는 일에 연약할 뿐 아니라 현재 감당해야 할 일을 자꾸 미루려는 경향이 많은 제게는 합당하면서도 실제적인 지침이어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계획하고 준비하는 일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영소성 에듀"(EngCG <English, Means for Communication/ Mate for Growth = 영어, 소통의 도구/성숙의 동반자> EDU)라는 기관을 통해서 영어교육을 의사소통 능력 배양과 인문학적인 교양 함양이라는 측면에서 진행함으로써 영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중고교생, 대학생 및 젊은이들의 깊은 필요를 채우는 사역을 담당하고자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인문학 센터”(HuBIL <Humanities and Bible Integrated Learning> CENTRE)라는 공간을 통해서 인문학과 성서와의 접점 찾기를 시도함으로써 인문학을 향해 마음을 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영적 양식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일반 교회가 미치지 못하는 대학생 및 청년들을 말씀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들 중에는 교회 생활하다 중단한 이들(‘가나안 신자’)도 있겠지만 자신들과 현대 교회나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을 도무지 체감할 수 없는 이들이 더 많을 것으로 봅니다. 이런 그들에게 보다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는 매개로 영어 학습 기회나 인문학적인 요소를 활용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청년뿐 아니라 외국 청년들에게도 영어, 인문학 및 성서를 통합하여 제시함으로써 일방적인 복음 선전이 아닌 일관성 있으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복음의 소통을 지속해 갈 것입니다.

 

이런 사역과 연관된 사역의 문을 주님께서 열어 주실 때까지 잠잠히 기도하며 기다리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제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부터 메모장이라는 도구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글은 쓰면 쓸수록 쓸 거리들이 계속 생긴다는 점입니다. 샘물을 계속 퍼내면 퍼낼수록 계속 샘물이 솟아나듯이 글도 쓰면 쓸수록 계속 다른 글감들이 생각나고 글쓰기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을 새롭게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전에 매달 써 내려간 ‘복연소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쓴 글로 인해 어느 누군가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제 마음속에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그게 내가 쓸 수 있던 최고의 글이었어, 다시 그런 글을 쓰기 어려울 거야.”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저 자신의 글쓰기 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글쓰기의 근원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우선 글 쓸 수 있는 제 능력을 일천하다고 여기면서 복연소식은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지만 언젠가는 그 글쓰기도 접을 때가 오겠지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최고의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된 글 다음에도 제가 보기에 주목할 만한 글감이 계속 나왔습니다. 계속 무언가를 읽고 묵상하고 있었으므로 그 과정을 통해 대충 윤곽이 잡힌 글들이 직접 글 쓰는 과정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형태와 논리를 갖춘 좋은 글들로 생산되었습니다. 결국 제게 글 쓰는 능력을 부여해주신 하나님을 제한한 자세였습니다. 글은 쓰면 쓸수록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그 은혜로 진행되는 주님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는 동안 은연 중에 자리 잡은 다른 생각도 마찬가지의 결론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글의 근원이 제가 아니라 다른 곳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 글이 제 머리와 논리와 글쓰기를 통해 나오지만 그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치 제 자녀가 저를 통해(through)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저로부터 말미암지(from) 않은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글쓰기에 대해 취해야 할 자세도 분명해졌습니다. 자녀가 가는 길을 부모가 재단해서 막거나 주도해선 안 되듯이 글쓰기도 제가 주도해서 함부로 그 능력이나 그 글감의 한계를 재단하면 안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넘치는 생명수를 계속 퍼내지 않으면 허비되고 급기야 고갈될 수 있다는 걸 직감하기에 글로 그 생명수를 옮기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글을 누가 보고 생명을 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물 위에 던지는" 심령으로 글을 쓰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여러 분들에게 사랑의 빚은 졌습니다만 전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습니다. 전 자유롭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 대로, 말씀의 원리에 삶을 조명하면서 믿음대로 살면 된다고 믿습니다. 누구 눈치도 볼 일이 없습니다. 늙었다고 위축될 필요도 없습니다. 사철 중 겨울에 접어들었다거나 하루 중 오후 6시에 접어들었다는 메타포는 거부합니다. 도리어 해가 갈수록 잎이 더 청청하고 중후해지며 열매가 풍성해지는 나무를 닮았다고 상상해봅니다.

 

빨리 뛰지 못하고 머리도 빨리 돌아가진 않지만 천천히 꾸준하게 걸을 수 있고 천천히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으며 말이나 글도 더욱 깊이를 더하고 있습니다. 관심의 외연과 깊이가 날로 넓어지고 더해질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벗들도 더 많아지고 함께 동역하는 이들도 더 확장될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나 다른 활동을 통해 더 많은 이들과 의사소통하며 천국을 향한 순례의 길을 함께 더불어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반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입니다. 자연스럽게 저와 연결될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밥은 두 끼면 족하고 옷도 이미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살 곳이 문제이긴 한데 여유가 되는 대로 옮겨 살면 될 듯합니다. 자기 소유인 집 한 채에 매여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이동하며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꼭 시골 생활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롭고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곳이면 족할 듯합니다. 대중교통 편리하고 자가용 천지인 시대이니 좁은 우리나라 어딘들 자유롭게 오가며 사람들과 교통 할 수 없겠습니까? 인생3막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