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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심(心)-마음을 따르라

종교 행위와 진실한 신앙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19. 8. 17.

종교 행위와 진실한 신앙

언젠가 ‘아모스’ 말씀을 읽으며 회개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경종을 듣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이며 종교적인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그릇된 삶을 살아갈 때(3:9-4:5), 그 죄악에 대해 벌주시겠다고 단호히 말씀하시는 것을 접하게 되었습니다(3:1,2). 그러나 자연과 인간 만사를 주관하시는 당신의 역사(4:6-11)를 통해서 택함 받은 백성들이 다시 전능하신 하나님을 깨닫고(4:12-13) 당신께로 돌아와 당신을 찾으라고 하나님께서는 권고하십니다(5:4-6). 이 경고를 받아 드리지 않는 당신의 백성들의 운명은 단지 통곡의 노래요(5:1-3), 불(5:6)과 패망(5:9)뿐임을 거듭 언급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적 열심이나 종교적인 행위 면에서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 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 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4:4-5). 그들은 날마다 희생제물을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렸을 뿐 아니라 누룩 넣은 빵으로 감사제를 드리고 다른 것들도 자발적으로 제물로서 바쳤습니다. 그들의 종교 행위는 스스로 보기에도 기뻐하고 많은 이들 앞에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적어도 하루 단위로 진행되는 신실한 예배 행위이자 희생적인 제사 행위였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섬겼던 우상들에게 드린 것입니다. 이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토록 열심어린 제사 행위가 지속된 것은 그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짓는 죄악과 사회적으로 짓는 죄악으로 인해 상처 받은 양심을 무마시키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은 복을 누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우상들에게로 달려가 종교 행위를 감행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 우상들로부터 개인적으로 짓는 죄악과 사회적으로 짓는 죄악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리 만무합니다. 만일 그 백성들이 당시에 참된 하나님을 찾고 만났다면 그들의 죄악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릇된 종교 행위에 도취되어 스스로 기뻐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도처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종교성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들의 삶을 바로 잡을 가능성은 아예 그들의 관심 밖의 사안이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 없이 이렇게 종교적인 행위로만 취해 살 가능성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전파된 곳이라면 어디든지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에 열심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더 주의를 요합니다.

 

C. S. 루이스의 작품 중에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Great Divorce)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언급한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라는 표현이 결국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게 된다는 ‘보편적 구원론’을 지지하는 시도일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사실상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현격한 분열이 존재하며 모든 개인의 영원한 운명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풍유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 이야기는 꿈의 형태로 전개되는데,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굴고 화를 잘 내고 냉소적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기적인 남녀들로 가득 찬 버스 속에 루이스 자신은 꿈속의 방문객으로서 동승하여 지옥의 회색 도시에서 천국의 영광스러운 주변까지 가는 상황 중에 그들의 면모들을 낱낱이 고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그 모두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들어오라는 순순한 영들의 따뜻한 초청을 거부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인생의 무수한 선택들은 필연적으로 한 영혼으로 하여금 영원한 세계를 준비시키기 마련인데 그 선택들은 그 개인 의지의 완전한 반영이라는 기독교 교리(루이스의 작품 세계 전체에 나타나 있는)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조지 맥도날드’의 설명을 통해서 루이스는, “모든 마음의 상태, 곧 그 자체로 놓아두면 피조물을 그 자체의 마음의 감옥 속에 가두어 두는 모든 상태는 지옥”이라는 의미에서 지옥이란 마음의 상태로 볼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국이란 마음의 상태가 아니며 오히려 실재 자체라고 할 수 있다는 점도 아울러 밝히고 있습니다. 즉, 저주받은 영혼들이 그러한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실재, 기쁨 및 하나님보다 못한 무언가를 항상 선택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 다른 무언가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찾는 이들은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심지어 아주 가치 있는 활동들조차도 하나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증명하는 일에 너무 흥분된 나머지 “선한 주님께서 존재하시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하나님보다 자신의 변증론에 더 마음 쓰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그리스도께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상황은, “어떤 애독자가 유명한 책들의 초판들과 유명한 저자가 사인해 준 책들이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읽을 힘을 잃어버린 경우나 어떤 자선 행사를 조직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모든 사랑을 죄다 잃어버리는 경우”에도 잘 드러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It is nearer to such as you than ye think. There have been men before now who got so interested in proving the existence of God that they came to care nothing for God Himself ... as if the good Lord had nothing to do but exist! There have been some who were so occupied in spreading Christianity that they never gave a thought to Christ. Man! Ye see it in smaller matters. Did ye never know a lover of books that with all his first editions and signed copies had lost the power to read them? Or an organiser of charities that had lost all love for the poor? It is the subtlest of all the snares.")

 

그리고 이어서 왜 천국의 영들이 사랑으로 가득 찬 존재들인데도 지옥의 영들을 구조하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저 그 평야지대에서 그 영들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조지 맥도날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의 영들이 지옥의 영들을 위해서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왔다는 점을 그대에게 이야기해주어야겠네. 우리들 모두는 그저 산 속으로 깊숙하고도 더욱 깊숙하게 진행하면서 여행하며 살아오고 있다네. 우리들 모두는 오늘 지옥의 영들 몇 명을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가능성 때문에 그 여행을 중단한 채 도무지 측량할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거슬러 와서 이렇게 내려왔다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또한 기쁨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를 비난해서는 안 되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네. 만일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미친다면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이 잘하는 일이 아니라네(The sane would do no good if they made themselves mad to help madmen.).”

 

그리고 천국 주변으로 가는 버스에 한 번도 타 보지 못한 불쌍한 지옥의 영들에 대해 따지는 질문에 대해서도 ‘조지 맥도날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하게 되어 있지. 두려워하지 말게. 결국에는 단지 두 종류의 사람들만 존재한다네. 하나님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자네들 뜻이 이루어지게나’라고 말해 줄 사람들.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택하지. 그런 자기 선택이 없다면 지옥도 있을 수 없지. 진지하고 지속적으로 기쁨을 원하는 영혼은 누구라도 그것을 놓치지 않을 거야. 찾는 자들은 찾게 되지.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게 되어 있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 없이 종교적인 행위로만 취해 살 가능성에 대해 루이스는 이 작품을 통해 선교 사업이라는 종교 행위에 드려지고 있는 이들에게도 의미 있는 경고를 주고 있는 셈입니다. 즉, 그들이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 너무 몰입된 나머지 그리스도께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 발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허락해 주신 건전한(‘정신이 온전한’) 선교 원리와 방식을 넘어서서 저희 영혼과 선교 대상자들의 영혼에 해를 끼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지경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점도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진정으로 하나님과 진리를 찾고 구하는 이들이 구원의 자리에 들어서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 행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과 다름 아닐 것입니다. 결국 선교사나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도 다른 영역에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살아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최우선 관심사로 두고 말씀 속에 계시된 건전한 원리와 방식을 따라 사역하면서 그 사역의 결과를 주님께 믿음으로 맡기는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