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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心)-마음을 따르라

참된 행복의 거처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1. 1. 8.

참된 행복의 거처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인간의 참된 행복의 거처가 되기에는 형편없는 장소이다."

(<...> other people’s heads are a wretched place to be the home of a man’s true happiness.) 

 

윌 듀랜트의 글을 읽던 중 접하게 된 쇼펜하우어의 명언입니다. 쇼펜하우어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다른 사람의 생각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논의하는 문맥에서 나온 한 구절입니다. 영웅이나 천재의 삶이라도 그 가치가 명성, 즉 세상의 갈채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같은 신세라고 주장하고 있지요.

 

왜 내 존재의 가치나 행복을 다른 사람의 생각에 의존하면 안 될까요? 우선은 다른 사람의 생각은 갈피를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도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통에 그 생각의 내용이나 향방을 종잡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진면목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작가인 서머셋 모옴이 자기 에세이집인 "서밍 업"(The Summing Up)에서 언급한 다음 문장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나에 관한 한 나는 내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일 내 삶 속의 모든 행동과 내 마음을 지나치는 모든 생각을 적어 둔다면, 세상은 나를 타락한 괴물로 여길 것이라는 점을 안다." (For my part I do not think I am any better or any worse than most people, but I know that if I set down every action in my life and every thought that has crossed my mind the world would consider me a monster of depravity.) 그는 이 문장이 포함된 문맥에서 비록 우리가 위대한 사람들이 허약하고, 부정직하고, 성적으로 사악하고, 무절제하다는 점을 발견하면 충격을 받지만, 사실상 인간들 사이에는 서로 차이점이 많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죄다 위대함과 천함, 미덕과 악덕, 고상함과 비열함이 뒤범벅된 존재"(They are all a hotchpotch of greatness and littleness, of virtue and vice, of nobility and baseness.)라고 주장하지요. 자기도 이런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소중한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뒤범벅된 생각 속에 두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겠지요.  

 

둘째로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신뢰하기 힘들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생각이 어떠한 확신에 근거하기보다는 시류에 따라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분명한 자기만의 가치관과 목적의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자기 관심사나 이익에 따라 얼마든지 생각을 바꾸기도 하고 급류에 휩쓸려 가는 나뭇가지처럼 몰아치는 세태의 흐름에 그저 따라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일전에 미국에서 벌어진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 의사당 난입 사태를 보세요.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 결과를 인증하는 과정을 진행 중인 국회에 무장 난입하여 의사당 내에서 온갖 난동을 벌인 것이 온 천하에 드러났지요. 비록 그 인원은 몇 백 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저지른 난동의 수준은 경악할 만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인명이 4명이나 희생당했습니다. 중대한 사실은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부추김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 이전에 그가 그날 지지자들이 워싱턴 DC로 모일 것을 권고했을 뿐 아니라, 그날 오전 백악관 앞에서도 대통령 선거 부정 혐의를 되뇌며 의회 인증 과정에서 선거 결과가 뒤집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상 이날 야기된 테러를 조장한 셈이지요. 그가 앞으로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미국인 중에는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를 조 바이든이  훔쳐간 것이라고 믿는 이가 무려 1/3 이상이나 된다는 점입니다. 공화당이나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선거 결과에 대해 아직도 이런 믿음을 품고 있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선거법에 따라 경합주에서 재검표하기도 하고 아무런 선거 부정의 증거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제기된 소송에 대해 수십 군데나 되는 법원에서 선거 결과를 그대로 인정했는데도 말이지요. 그저 자기가 좋아하고 인정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제공하는 오보(misinformation)나 허위정보(disinformation)에 휩쓸려 간 결과이겠지요.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셋째로는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의 사려가 깊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대부분 자신의 문제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경우도 자기 관심사나 이익과 연관될 경우로만 주로 한정됩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기 관심사나 이익에 대해서는 심오한 생각을 품습니다.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그 생각의 깊이를 더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는 성경의 계명을 두고,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의미라고 지적하는 경우를 자주 접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본성(에베소서 5:29-"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이라는 점을 간과한 심각한 오해지요. 자기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자기를 사랑하는 면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적어도 하루에 한 끼 이상은 자기를 먹이고, 자기 몸에 필요한 것을 입히고, 자기 몸이 따뜻하게 지나도록 배려합니다. 어디에 피가 조금이라도 나면 난리를 피우면서 그곳을 소독해 주고 연고를 발라주며 밴드를 붙이거나 붕대를 감아주지요. 사정이 좀 좋으면 자기 몸 힘나라고 보약도 먹이지 않나요? 이에 덧붙여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마태복음 28:22) 용서해 주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도 합니다(C. S. 루이스). 결국 "네 이웃을 내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고 배려해주고 돌보아주며 그들의 깊은 필요를 채워주라는 계명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명명백백한 실례가 바로 자기 눈앞에 있고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일평생 훈련하지만, 그것과 똑같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란 그렇게 자연스럽거나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지난 인류 역사가 보여줍니다. '이웃 사랑'이 아니라 '이웃 사용'의 역사였다는 것을요. 

 

사정이 이러한데도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사려 깊게 대해 주리라고 여기는 것은 난망한 일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보면 주인공 뫼르소의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 동네 사람들 중에 그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낸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뫼르소는 그때까지 동네 사람들이 그 일로 자기를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가 그 반응을 의아하게 여기지요. 자기는 어머니를 잘 모실만큼 충분한 돈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오래전부터 자기와 이야기를 나눌 게 없어 심심해하셨기 때문에 어머니를 위해 양로원에 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례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어머니를 자기 집안에서 모시는 것이 어머니를 위해서도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더 사정이 나은 요양원에 모시는 것을 두고 그 친지들이나 이웃들이 입방아를 찧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렇듯 다른 사람의 사정을 잘 관찰하고 그의 사정을 잘 살핀 상태에서 그에 대해 평가하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참 힘듭니다. 이런 사정들을 고려해보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고 도와주기 위해 내가 한 말의 진의나 내 처지에 대해서 심오하고 사려 깊은 생각을 품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희망사항'(wishful thinking)에 불과합니다. 

 

끝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은 내 자아나 가치에 궁극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암시에 민감한 존재로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허락할 때만 가능합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타인의 어떠한 말이나 생각도 내 생각에, 심지어 내 근본적인 가치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내게 실제적인 불이익이나 위해가 되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라인홀드 니버의 기도문(The Serenity Prayer)을 기억하고 실행해야겠지요. "하나님,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평정과,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rnce.) 그렇지만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내 생각은 자유롭고 내 가치는 변함없습니다. 내게는 어떤 환경하에서도 독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가 엄존하고, 내 가치는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내 안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와 가치는 어디서 말미암았을까요? 비록 부모님께서 나를 낳아주셨으나 나는 부모님께로부터 말미암지 않았습니다. 나는 부모님 너머의 존재, 초자연적인 존재, 신(神) 즉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내가 누리는 자유와 내 존재 가치의 근원입니다. 

 

진실이 이러하다면 내 행복이 비롯되는 원천이자 그것이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자명해집니다. 내 생명의 원천이자 내 생명의 귀착지인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당신 안에 살고 당신과 함께 동행하며 당신께로 돌아가는 게 내 인생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내 거처로 삼고 남은 평생 살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 내 행복을 두라는 초대나 권면이나 암시는 단호히 거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