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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고 글 쓰고 나누는 제 마음에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심(心)-마음을 따르라

우울한 날의 청량제 오 헨리

by 이승천(Lee Seung Chun) 2020. 5. 7.

우울한 날의 청량제 오 헨리

-우울한 날의 독서-

“나는 우울할 때 오 헨리(O Henry)를 읽는다.”라고 언급한 전기 작가가 있습니다. 오 헨리의 탁월한 해학성과 유머를 높이 산 표현으로, 그의 전기를 쓴 로버트 데이비드가 한 말입니다.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주는 문학 작품은 많이 있지만, 가슴 터지는 환한 웃음까지 함께 선사해주는 문학 작품은 찾기 힘들지요. 제게는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선사해 주는 작가로 오 헨리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오 헨리는 미국의 단편 소설을 휴머나이즈했다”고 말한 이도 있지요. 그의 또 다른 전기 작가인 알폰소 스미스입니다. 동료 ‘인간 가족’의 소중한 구성원에 대한 가슴 따뜻한 인간애와 그들의 한계와 약점을 깊은 동정과 애정의 시선으로 이해하는 것을 지향하는 오 헨리 문학의 본질을 꿰뚫은 적절한 평가였습니다.

 

전통과 계급이 존재한 유럽과는 달리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 세계를 표방한 미국에서는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지위가 별다른 의미를 띠지 않아야 마땅했지만, 자본주의 물결 속에 표류하고 있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미국 사회는 경제력이라는 지표가 새로운 지위나 신분을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빈부격차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던 것이지요. 바로 이 시기에 오 헨리는 부유한 이들보다는 그들에 의해 억압당하고 무시당하던, 평범한 소시민이나 저임금 노동자(예컨대, 화가, 타자수, 경리 직원, 세탁소 아가씨들, 백화점 점원 아가씨들) 및 사회 밑바닥을 떠도는 부랑자나 범법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오 헨리를 “보잘것없는 점원 아가씨들의 기사(騎士)”라고 부른 시인(베이첼 린지)이나 “뉴욕 백화점 카운터마다 오 헨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라고 일컬은 문학비평가(아서 B. 모리스)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예컨대,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의 수나 존시는 잡지 삽화를 그리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젊은 화가들입니다. “채광창이 있는 방”(The Skylight Room)의 미스 리슨과 “식탁에 찾아온 봄”(Springtime a la Carte)의 사라는 타자수입니다. 그리고 “손질 잘한 램프”(The Trimmed Lamp)의 루와 낸시는 백화점 상점 아가씨들이지요.

 

오 헨리 시대로부터 무려 100여 년이 흐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제게 그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그의 시대보다 더한 경제지상주의가 이 땅을,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 헨리는 빈부격차가 극명한 사회에 살아가면서도 그 사실에 대해 분개하거나 울분을 토하지 않고,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삶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기술해냅니다. 특히 빈한한 이들의 사정을 구체적인 숫자와 세밀한 상황 묘사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은 놀랄만한 일입니다. 당시의 물가나 집세나 급료 등을 자세하게 기록해 둔 덕에 당시 미국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지요. 이렇게 사실에 근거한 탄탄한 전달력이 기반을 이룬 수백 편의 단편 소설을 통해 오 헨리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Money isn't everything."-"마음과 손”<Hearts and Hands>)과 금전상의 풍족함보다 더 나은 어떤 것(“something better than prosperity”-“손질 잘한 램프”)이 존재한다는 점을 온 세상에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가난한 주인공들 중에서 부유해지는 일에 목숨을 거는 인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범죄를 통해 돈을 벌려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어설프게 범죄를 시도했다가 도리어 돈을 잃는 경우로 끝나거나(예: “붉은 추장의 몸값”<The Ransom of Red Chief>) 그동안 해오던 범죄를 그만 두려고 결심한 상황에서 그 범죄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난감한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예: “되살아난 개심”<A Retrieved Reformation>). 부유한 사람들이 누리는 여유롭고 품위 있는 삶을 동경한 나머지, 일정 기간 돈을 모아 잠시라도 그러한 사치를 누려보려는 인물은 등장해도(예: "낙원에 들른 손님"<Transients in Arcadia>), 그러한 삶 자체를 우상시하는 인물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종종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해서 돈을 낭비하는 가난한 인물이 눈에 띄긴 하지만(예: “손질 잘한 램프”의 루), 그들의 삶의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살아가는 다른 주연(낸시)의 삶의 방식을 더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할 뿐입니다. 돈만을 고려해서 결혼하려는 인물은 찾기 힘들지만, 부유하지 않으나 견실한 배우자를 찾고 기다렸다 만나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예: “손질 잘한 램프”의 낸시, “현자의 선물”<The Gift of the Magi>의 짐과 델러).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부유한 사람들도 당시나 현재의 세태와는 결을 달리 하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이도 눈에 띄지만(예: “채광창이 있는 방”의 파커 부인), 가난한 연인과 결혼해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이들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예: “구두쇠 연인”<Lickpenny Lover>의 어빙, “마녀의 빵”<Witches' Loaves>의 미스 마아더, “5월은 결혼의 달”<The Marry Month of May>의 쿨슨 영감). 자기 재산으로 남을 돕는 부자나(예: “물방앗간이 있는 예배당”<The Church with an Overshot-Wheel>의 에이브럼), 자기 몫이 될 수 있는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해주는(혹은 양도해주는 것을 기뻐하는) 인물도 종종 등장합니다(예: “1천 달러”<One Thousand Dollars>의 길리안, “악운의 충격”<The Shocks of Doom>의 아이드와 밸런스). 심지어 “악운의 충격”의 두 주인공은 심지어 돈을 많이 갖는 것을 악운(doom)으로 여기고 있지요.

 

결국 오 헨리는 자신의 단편 소설을 통해, 돈이 인생에 있어 주요한 환경상의 요소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 영향력의 한계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과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인간애와 진실의 힘이 존재한다는 점을 온 세상에 증거하고 있는 셈입니다. 100년 전 그 암울했던 시기를 사랑의 실천과 진정성 있는 삶으로 승부하려 했던 오 헨리의 작중 인물들의 해학과 유머 넘치는 삶의 방식이 그렇게 도전이 되면서도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2020년에 갑자기 불어 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광풍 속에서 우울하고 신산한 시기를 통과하는 우리 모두에게, 심금을 울리는 감동과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웃음을 선사해 줄 오 헨리를 권합니다.(작품의 한글 번역문은 '비채'<김욱동 역>의 것을 인용함)

 

-오 헨리와 결말의 의외성-

오 헨리의 독특한 면모는 한 마디로 유머와 위트와 페이소스이지만,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한결같이 경탄하는 점은 기발한 착상과 교묘한 플롯입니다. 김욱동 교수가 오 헨리가 단편소설에 끼친 가장 중요한 영향으로 꼽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지요. 플롯 중심의 프랑스 문학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플롯보다 작중 인물의 미묘한 성격이나 내적 갈등 묘사에 더 무게를 두는 러시아 문학 전통(예컨대, 투르게네프나 체호프나 고골리의 경우)과는 대조적으로, 이 프랑스 전통(예컨대, 플로베르나 모파상이나 포우)은 작중 인물의 외적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예리한 관찰, 생생한 세부 묘사, 명료하고 적확한 표현” 등을 무엇보다 강조하였습니다. 전자를 주관적 전통으로 부르고 후자를 객관적 전통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 헨리가 바로 이 객관적 전통을 완성한 단편소설의 대가로 꼽힌다는 것이지요.

 

확고한 플롯을 형성할 수 있는 구상력(構想力)의 바탕에다 풍부한 상상력을 가미할 수 있는 작가만이 발휘할 수 있는 비상한 면모에서 “결말의 의외성”(Twist ending 혹은 Unexpected ending)이라는 기교가 등장하게 됩니다. 잔잔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가다가 마지막에 가서 독자의 예상이나 기대를 뒤엎고 결말을 역전시켜 제시하는 기법이지요. 특히 작가로서의 그의 입지를 다져준 “4백만”(The Four Million)이라는 단편 소설집에서 이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서툴게 사용하면 진부해지고 기계적으로 보이기 십상인 이 기교가 오 헨리의 작품 속에서는 거의 언제나 개연성이 있고 논리적이며 자연스럽게 부각되어 있기에 많은 독자들이 환호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경찰관과 찬송가”(The Cop and the Anthem)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뉴욕 노숙자인 소피는 엄동설한 석 달을 블랙웰스 섬의 형무소에서 보내기를 계획합니다. 정신적 굴욕(“humiliation of spirit”)을 선사하는 자선기관보다는 신사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는(“not meddle unduly with a gentleman's private affairs”) 곳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 감옥으로 가려면 적당한 범죄를 저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급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식사를 한 후 돈 한 푼 없다고 하면 경찰관에게 인도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그곳 웨이터에게 거절당합니다. 6번가 모퉁이 상점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깬 후, 자기가 그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Don't you figure out that I might have had something to do with it?”)며 경찰에게 도전하지만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며 그 경찰관은 다른 사람 뒤를 쫓아 가 버리지요. 평범한 식당에서 커다란 비프스테이크, 핫케이크, 도넛, 파이를 먹어치우고는 경찰을 부르라(“Now, get busy and call a cop. And don't keep a gentleman waiting.”)고 했지만, 두 웨이터가 그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쳤을 뿐입니다. 심지어 경찰관 앞에서 어떤 여자에게 비열한 치한 역할(“the role of the despicable and execrated ‘masher’”)을 감행했으나, 도리어 그 여자가 자기에게 찰싹 달라붙는 일이 벌어졌을 뿐입니다. 마지막이라고 여기고 ‘풍기 문란’(“disorderly conduct”)이라는 카드를 시도했습니다. 술주정뱅이 노릇을 감행하면서 목청껏 고함을 지르고 온갖 추태를 다 부렸던 것이지요. 그것도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엔 어떤 신사의 실크 우산을 집어 들고 가는 가벼운 절도죄(“petit larceny”)에 그 신사를 모욕하는 죄(insult)까지 범하면서 감옥행을 시도했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매디슨 광장을 향해 돌아가는 도중에 낡은 교회 건물을 지나칠 때, 주일날 반주할 찬송가를 연습하는 오르간 연주자의 건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에 익히 알고 있던 그 찬송가는 소피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가자는 각오와 함께 이 세상에서 떳떳하게 인간 구실을 하기로 한(“be somebody in the world”) 것입니다. 바로 그때 자기 팔을 붙잡는 이가 있었지요. 경찰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Nothin'”)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튿날 아침 즉결 재판소(the Police Court)로 보내져서 판사의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섬에서 3개월간 금고형에 처함.”(“Three months on the Island.”)

 

무엇보다 인생의 끝이 중요하다는 점에 이의를 달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자주 회자되는 말처럼 끝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지요.("It's never over till it's over.") 이생의 마지막 날까지 체념하지 말 일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 헨리가 자신의 비기로 활용했던 “결말의 의외성”을 통해, 지금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더라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어떤 인물들의 삶의 한 시기에 대한 평가를 의외의 결말이라는 스냅숏으로 역전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인생은 각 시기마다 역전이 가능하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성공했다고 여겨 방심하지 말라는 뜻으로 제게는 읽힙니다. 60세쯤 살아보면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시각이 아닐까 합니다. 긍정적인 의미이건 부정적인 의미이건,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줄 몰랐다”는 말을 해야 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의외의 결말을 지어낸 이가 오 헨리라는 소설가인데 왜 난리냐구요? “진실이 들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소설 속에 존재한다”(“about the only chance for the truth to be told is in fiction.”)는 말도 그가 했다는군요. 소설(fiction)과 신화(myth)가 역사적인 기록보다 더 많은 진실을 계시한다는 명제는 많은 인문학자들의 확신입니다. 소설가의 말은 거짓부렁이가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영감의 산물로 존중하는 게 지혜입니다.

 

-오 헨리와 작품의 개연성-

오 헨리의 작품 속에 행운(luck)이나 우연스러운 일(chance)이 너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비판하는 평론가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들이 플롯의 우연성에 의존해서 전개될 뿐, 그 속에서 소설의 필수요소인 개연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채광창이 있는 방”과 같은 예가 있으니까요. 돈벌이가 되지 않아 탄광 갱도처럼 생긴 좁은 꼭대기 방을 세로 얻어 지내고 있던 프리랜서 타자수인 미스 리슨이, 일감을 찾기 힘들었던 기간 중 어느 날 저녁도 먹지 못한 채 그 방으로 돌아와 쓰러진 상황에서, 신고받고 출동하여 살려 준 앰뷸런스 의사 이름이 윌리엄(혹은 빌리) 잭슨, 즉 그녀가 자기 방 채광창을 통해 본 별에게 지어준 이름과 동명이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연성이 떨어지긴 해도 우리가 요즘 접하는 극적인 현실만큼 개연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미국 North Carolina 주 사람들이 얼마 전 우리나라 KBO리그 개막전을 보는 것은 물론 그 경기에서 “창원 NC 다이노스”를 응원하리라는 개연성을 어느 누가 추측이나 했겠습니까? NC 다이노스와 두 머리글자가 같다는 것 외에도, 미국 그 동네가 공룡 화석이 많이 발굴되는 지역으로 유명하다니 할 말이 없지요. 구단주인 엔씨소프트가 NC라는 이니셜을 ‘Next Company', ’Next Cinema', ‘Never-ending Change', ’New Changwon' 중 어디에서 따왔든지, ‘단디’(‘단디 해라’=야무지게 해라)와 ‘쎄리’(‘쎄리라’=때려라)라는 공룡 마스코트와 함께 더불어 우연하게 지은 이름 ‘NC 다이노스’는, 태평양 건너 저쪽 편에서 ‘NC 다이노스’의 팬으로 자부하는 이들의 화답과 응원 세례를 받고 있는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이런 극적 현실을 접하면서도 오 헨리 작품 대부분에 개연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고 봅니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평론가들이 예로 드는 작품 중 하나가 “백작과 결혼식 초대 손님”(The Count and the Wedding Guest)입니다. 그 작품 속에서 여주인공인 미스 콘웨이가 죽은 연인의 사진이라고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앤디 도너번의 친구 사진일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뉴욕 시에는 4백만이나 되는 사람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지적을 하는 평론가는 그 작품을 겉핥기로 읽은 것에 불과합니다. 앤디의 친구인 마이크 설리번은 “뉴욕 시에서 제일가는 거물”(the most important man in New York)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미스 콘웨이가 그 사진을 산 곳은 사진관이었으니, 그곳에서 키도 크고 몸집도 좋을(“a mile high and as broad as the East River”)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그 사람의 사진을 당시에 구할 수 있다는 것이 개연성이 희박한 일일까요? 그는 뉴욕 4백 만 인구 중의 장삼이사로 살아간 무명인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드는 것이, “물방앗간이 있는 예배당”입니다. 컴벌랜드 산맥에 있는 레이크랜즈라는 휴양지에서 에이브럼이라는 노신사가 20여 년 전에 잃어버린 딸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상기한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문제점은 이 부녀가 서로 만나는 것은 확률적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할 뿐 아니라, 딸인 미스 체스터가 4살 때 들은, 아래와 같은 아버지의 방아타령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아버지의 방아타령: "물레방아 돌고 돌아(The wheel goes round.)/곡식을 찧고(The grist is ground.)/가루 쓴 방아꾼은 즐겁기만 하네(The dusty miller's merry.)/하루 종일 콧노래 흥얼거리고(He sings all day,)/귀여운 아가 생각하노라면(While thinking of his dearie.)/고달픈 하루 일은 즐거운 놀이가 되네(His work is play,)"

 

딸의 응답: “아빠, 덤스(어릴 때 미스 체스터가 자기를 부른 이름)를 어서 집으로 데려다줘요.”(Da-da, come take Dums home.)

 

과연 그럴까요? 먼저 캠벌랜드에 있는 레이크랜즈라는 그 휴양지가 유명한 피서지의 안내서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그곳은 “적은 돈으로 시원한 산 공기를 마시려고 찾아오는 방문객들”("visitors who desire the mountain air at inexpensive rates")이 애용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유흥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휴양이 꼭 필요해서 온 사람들”(those who seek recreation as a necessity, as well as a pleasure)을 위한 적지였습니다. 미스 체스터가 일하던 애틀랜타의 백화점 지배인 부인이 그곳에서 한여름을 보낸 후에 그녀가 평소 좋아하던 미스 체스터에게 삼 주간 휴가를 보내도록 권하면서 보내 준 곳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애틀랜타에서의 거리=194마일=312킬로미터=부산과 서울 간 거리). 그 휴양지 숙소 주인에게 소개장까지 써 주어 편안한 쉼의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습니다. 미스 체스터가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not very strong <...> pale and delicate from an indoor life")을 알고 평생 처음 휴가를 얻은("the first vacation outing of her life") 그녀에게 추천해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그곳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계절("at their greatest beauty")인 가을이 되면 해마다 그 숙소를 찾아온 에이브럼과 만나게 된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극적인 해후라고 일컬을 수 있을지언정 개연성을 찾아볼 수 없다니요?

 

더구나 개연성 운운하는 그 평론가들은 자신들의 심리학 지식이 일천한 점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발달심리학자인 김근영 교수에 의하면, 유아기 기억상실에 관한 연구들을 종합해볼 때 자신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라고 회상하는 나이가, 서양인들은 평균적으로 약 3.5세, 동양인의 경우는 약 4세 정도라고 합니다. 미국인인 미스 체스터가 4살 때 아버지 에이브럼에게 들은 그 방아타령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게 왜 개연성이 없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그 방아타령은 날마다 방앗간에서 일하던 에이브럼이 하루를 마감하는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아내가 머리를 빗기고("brush her hair") 예쁜 앞치마를 입혀("put on a clean apron") 자기를 데리러 보낸 외동딸이 방앗간 문간에 나타나면, 온몸에 새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쓴("all white with the flour dust") 그가 딸을 향해 손을 흔들며 늘 읊조렸던 노래("wave his hand and sing an old miller's song")였으니까요. 바로 그때 어글레이어(미스 체스터의 어릴 적 이름)가 웃으면서 달려와, “아빠, 덤스를 어서 집으로 데려다줘요.”(“Da-da, come take Dums home.”)라고 소리쳤던 것이지요. 날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방앗간으로 올 때마다 아버지가 즐겁게 부르던 그 노래를 미스 체스터가 잊어버렸다는 게 도리어 개연성 없는 일이 아닐까요?

 

결국 이런 평가는 소설이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한다고 그 평론가들이 주관적으로 인정하는 개연성 수준이라는 잣대로 그의 작품을 재단한 것이라고 봅니다. 작품을 꼼꼼하게 충실히 읽는 기본 작업은 등한히 한 채, 그저 주관적이기만 한 자신의 잣대로 작가들의 작품을 판단하는 평론가들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되지요. 더구나 그들이 오 헨리 작품의 개연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리 인생에서 인과관계가 분명한 것들보다 그 관계가 불분명한 것들이 얼마나 더 많은지 모르고 있었을지도 궁금해집니다. 인과관계 판정에 대해 그렇게 자신감이 넘친다면, 그들이 앞으로, 잘 들어맞지도 않는 미래를 들먹거리는 미래학자들을 대신해서 미래에 대해 예언할 수도 있겠습니다. 짧은 지면의 한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심령을 위무하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단편 작가에게, 과연 얼마만큼의 개연성을 요구해야 만족스럽다는 말일까요? 정도의 차이에 그치는 단편 소설의 개연성 수준을 두고, 개연성 결여를 운운하는 것은 오 헨리나 그의 작품 내용이나 형식에 불만을 품고 그의 인기와 명성에 흠집 내기 위한 시도가 아닐까 합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를 족집게처럼 집어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실험실과 같은 극히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만, 그것도 실험집단(experimental group)과 통제집단(control group)을 운용하는 여건 하에서만 특정 원인과 특정 결과와의 연관성을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입장이 바로 근대 과학의 시발점이자 과학이 지켜야 할 자리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라면서 혹은 과학에 입각해서 사고한다면서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이 세상엔 적지 않습니다. 사이비 과학자들이고 미숙하고 경솔한 과학주의자들에 불과하지요. 과학의 장점과 함께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겸허하게 자신이 무지한 인문학적 영역과 초자연적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진정한 과학자 혹은 과학인들이 그립습니다. 문학의 세계가 마치 과학의 세계인 것처럼 착각하면서도 그 과학의 기본 원리조차 준수하지 않은 채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문학인들의 행태가 가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학의 개연성과 예술성은 과학으로 재단할 수 있는 영역일 수가 없습니다. 작가의 상상력과 영감의 세계이고, 그 상상력과 영감의 근원은 초자연적인 영역입니다. 속지 맙시다.

 

-오 헨리와 습관의 힘-

오 헨리는 문학 사조로 보자면 자연주의나 사실주의 전통 위에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대에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과는 달리 훈훈한 인간미와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을 장밋빛으로 묘사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 속에는 각자가 제어하기 힘든 요소가 있다는 점을 다각도로 묘사하면서 작중 인물들이 직면한 이런 비극적 상황을 ‘쥐덫’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이 표현은 인간의 행동이 생물학적인 요인 및 사회, 경제적 요인들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운명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습관이나 인습의 힘에 좌우되는 경우가 다분하다는 점을 가리킨다고 합니다(김욱동 교수).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오 헨리의 작품은 생물학적 결정론이나 사회 경제적 결정론에 반하는 인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외적인 환경보다 습관이나 인생관이나 세계관과 같은 내적인 자질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강력하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계시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두 작품만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손질 잘 한 램프”에는 결혼에 성공하는 연인 한 쌍과 견실한 결혼의 기회를 차버린 한 아가씨가 각각 다른 습관과 사고방식을 소유하고 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백화점 상점 직원인 낸시가 결혼하게 된 댄이라는 청년은 원래 세탁소에서 다리미질하는 친구 루의 애인("Lou's steady company")이었습니다. 주급 30달러를 받는 전기 기사("an electrician")로서, 도시에서 흔한 경박함이 없이("escaped the city's brand of frivolity) 기성복("ready-made suit")에 기성 넥타이("a ready-made necktie)를 매는 성실한 청년입니다. 일정한 길을 걸어가고 절대로 옆 골목으로 빠지는 일이 없는 젊은이이지요. 그런 댄의 단정하지만 멋없는 복장("neat but inelegant apparel)을 짜증스러운 듯이 곁눈질하는 이가 바로 애인 루입니다. 루는 주급 18달러 50센트를 받으며 편안하고 여유 있게 삽니다(6불은 방세와 식비, 나머지는 주로 치장에 씀). 화려하고 멋있는 것을 사고 고급 옷을 구입하는 것을 즐기지요. 당장 결혼하자는 댄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자유롭게 즐기며 사는 편을 고집합니다.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낸시는 주급 8달러와 조그만 침실로 만족하면서 그 대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백화점 점원 역할을 고집합니다. 그곳에서 훌륭한 물건을 접하면서 근사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배우는 편을 택한 것이지요. 급료가 적으니 16달러짜리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루와는 달리, 1달러 50센트를 들여 직접 만든 옷을 입기도 합니다. 낸시의 주관은 확고합니다. 에서처럼 자기를 팔거나 타고난 권리를 내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She is no traitor to herself, as Esau was; for she keeps her birthright <...>") 그것 대신 얻어먹는 죽이 언제나 시원찮았다는 것("the pottage she earns is often very scant")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엔가 바라는 남편 사냥감을 쏘아 맞히게 되겠지만, 다만 그 사냥감은 최고, 최상으로 여겨지는 것이어야 하며, 그 이하는 절대로 갖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었습니다.("Some day she would bring down the game that she wanted; but she promised herself it would be what seemed to her the biggest and the best, and nothing smaller.") 그러면서 힘차게 조촐한 음식을 먹고, 견실하고 흡족한 기분으로 싸구려 드레스의 디자인에 머리를 짜내면서도("ate her frugal meals and schemed over her cheap dresses with a determined and contented mind), 그녀는 언제나 신랑이 나타날 때를 대비하여 맞이할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kept her lamp trimmed and burning to receive the bridegroom when he should come"). “내가 바라는 건 진짜야, 아니면 하나도 필요 없어.”(Give me the real thing or nothing, if you please.) 그녀의 다부진 고백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루는 댄을 버리고 어떤 남자와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낙담한 댄과 만나 교제하던 중, 낸시는 댄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사냥감("the biggest catch in the world")이라고 확신하며 그와 결혼하기로 합니다. 떠난 지 석 달 만에 돌아온 루는 낸시와 만나 그녀와 댄이 결혼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게 되지요. 비싼 털가죽 외투를 입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루(“a woman with an expensive fur coat, and diamond-ringed hands”)가 심하게 흐느끼고(sobbing turbulently), 그 옆에서 여위고 검소한 옷차림을 한 낸시(a slender, plainly-dressed working girl)가 루를 달래는 것으로 이 작품은 끝을 맺습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배움의 기회보다는 돈을 더 선호하는 습관으로 길들여진 루는, 이미 자기 품으로 들어온 견실한 청년 댄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채 허영에 들떠 있다가 그 정체를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돌연 잠적해 버렸던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검소한 생활과 확고한 삶의 가치와 원리를 실행할 뿐 아니라 늘 배우기에 힘쓰는 습관으로 자기를 가꾸어 온 낸시는, 자기 기준에 미달하는, 부유하지만 미숙한 청혼자들을 물리치고 부유하지는 않지만 충실한 자세로 인생을 영위해가는 청년 댄의 진정성을 알아보고 선택합니다. 루와 낸시는 각자가 선택한 대로, 허영에 들뜬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습관과 확고한 가치관에 근거한 검소하고 견실한 습관이 맺은 열매를 곧바로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즉 각자의 습관이 결국엔 각자의 운명으로 변한 것이지요.

 

다른 한 작품인 “구두쇠 연인”에서는 메이지라는 여주인공이 자신의 좁은 세계관과 편견으로 굴러 들어온 복을 차 버리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녀는 유명 백화점 신사용 장갑 매장에서 일하는, 예쁘고(beautiful) 머리도 금발(deep-tinted blonde)인데다 빈틈없고(shrewdness) 약삭빠른(cunning) 아가씨였습니다. 마침 그 매장을 들른 백만장자이면서 화가이기도 하고 여행가인 어빙의 마음에 쏙 들어 그의 데이트 제안을 받게 되지요. 가능한 한 빨리 만나고 싶다면서 그가 그녀의 집이라도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자기 집은 다섯 식구가 살고 있다면서 난감해하고는 자기 집 근처 길모퉁이에서 만나자고 응대합니다. 그렇지만 데이트가 진행되고 만남이 이어지면서 급기야 어빙이 메이지에게 청혼을 하면서, 결혼 후에 “일이나 사업 따윈 모두 잊어버린 채 인생을 긴 휴가처럼 살기로 하자”(forget work and business, and life will be one long holiday)고 제안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여행한 곳들을 죽 읊으면서 세계 곳곳을 다니며 “외국의 진기한 풍경”(all the queer sights of foreign countries)을 모두 보자고 메이지에게 설명을 덧붙이지요. 그런데 이런 제안을 쌀쌀맞게 받으면서 집으로 돌아가겠다던 메이지가, 이튿날 그 근사한 친구(your swell friend)와 어떻게 되어 가냐고 묻는 백화점 친구 직원에게 한 말이 아래와 같습니다.

 

“아, 그 사람? (...) 이제 나하고는 끝장났어. 룰루, 그런데 말이야, 너 그 사람이 나더러 뭘 하자고 그랬는지 아니? (...) 나하고 결혼해서 말이야, 이 근처 코니 아일랜드 유원지로 신혼여행을 가자는 거지 뭐야!”

("Oh, him? <...> He ain't in it any more. Say, Lu, what do you think that fellow wanted me to do? <...> He wanted me to marry him and go down to Coney Island for a wedding tour!"

 

청혼하면서 멋진 결혼 생활 계획을 펼쳐 보인 백만장자 애인의 말을, 결혼한 후에 코니 아일랜드(미국 뉴욕 시 브루클린 구 남쪽에 있는 유원지)로 신혼여행가자는 구두쇠의 말로 이해한 메이지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녀가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에 대한 폭넓은 지식"(this wide knowledge of the human species)과 빈틈없고 약삭빠른 본성 때문이었습니다. 그 지식이란 이 세상에는 백화점에서 자기 장갑을 직접 사는 신사들과, 불행한 신사들을 위해 대신 장갑을 사주는 여인들이라는 두 부류의 인간만 존재한다는 세계관이었고, 자기는 장갑 사는 남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요. 그 결과 그녀는 백만장자의 호의를 구두쇠의 술책으로 간파하고는, 넝쿨 채 굴러들어 온 복을 힘껏 차 버린 것입니다.

 

미국에서 실용주의 철학을 주도하면서 심리학 이론을 펼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오 헨리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자기의 저서인 “심리학 원리”(The Principles of Psychology)의 한 장인 습관에 대해 쓸 때 오 헨리 작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김욱동 교수). 그 저서의 요약본 중에 등장하는 한 난외주가 바로 그 유명한 아래의 문장입니다. “Sow an action, and you reap a habit; sow a habit and you reap a character; sow a character and reap a destiny.”(행동을 심어라, 그러면 습관을 거둘 것이다. 습관을 심어라, 그러면 인격을 거둘 것이다. 인격을 심어라, 그러면 운명을 거둘 것이다.) 자아와 인격에 대해 윌리엄 제임스가 품고 있던 심리학의 요체이자 그의 인생관을 밝혀주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또한 그가 어릴 때 겪은 우울함(melancholy)과 “따분한 자기중심주의”(tedious egotism)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실재를 명확히 드러냄”(asserting of his own reality)으로써 인류 역사에 “흔적을 남기게 된”(leaving a trace) 제임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 과정을 요약한 것이기도 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습관이 인격이 되고 그 인격이 자신의 운명이 된다는 원리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습관은 저를 구원해 주었지만 어떤 습관은 저를 퇴보시켰습니다. 어떤 습관은 제가 주인이었지만 어떤 습관은 제가 그 노예였습니다. 얼마 전 동네 근처에 있는 산에서 산보를 하던 중에, 운동기구가 있는 장소에서 평행봉을 하는 데 여념이 없는 노인(?) 한 분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던 한 부부가 그분을 쳐다보자, 옆에 있던 그 노인의 친구 분이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저 형님은요, 나(72세)보다 나이가 8살이나 많은데요. 나보다 나이도 훨씬 젊어 보이고요. 병원에도 한 번 안 가고요. 뱃살 하나 없고 근육이 모두 딴딴해요. 젊은 사람들보다 평행봉이나 팔굽혀펴기도 더 잘 합니더. 저 하는 거 한 번 보이소!” 그 말을 듣고 멋쩍었는지 그 노인은 힘차게 발을 뻗어대던 평행봉에서 내려와, 자기를 쳐다보던 부부에게 한 마디 더 건넸습니다. “지금도 날마다 새벽에 저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지요. 여기서 평행봉하고 팔 굽혀 펴기도 하고. 병원에는 안 갑니더.” 그분을 부럽게 바라본 게 저나 그 부부뿐이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제임스가 선언한 원리를 삶 속에 적용해 감으로써 제 여생이 이전보다 더욱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전개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연극과 극작가-

오 헨리의 작품을 읽다 보면, 꼭 괄목할 성공을 거두지 못해도 사랑과 진실이 우리 인생을 관통하고 있다면 인생은 살만하다는 직관이 생깁니다. 버먼 영감이 예순이 넘도록 걸작 한 편 그리지는 못했어도 마치 실재와도 같은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 한 장을 그림으로써 존시의 생명을 구하고 자기 생애를 마감했다면, 그 잎새가 바로 그의 인생의 대작이고 그의 인생은 더없이 영광스러웠던 게 아닐까요?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각자가 가치 있는 일을 도모하는 진정성 있는 삶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조금 불편하고 궁색한 것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해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팔아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을 마련해준 "현자의 선물"의 짐과 델러는, 바로 희생적인 선물을 나눈 그 날이 있었기에 평생을 용기와 소망을 품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의 시기마다 결말은 열려 있고 그 결말도 외적 조건보다 내적 조건에 더 영향받고 있다면, 더욱 치열하게 실천적인 사랑과 진정성 있는 삶을 추구해갈 일입니다. 게다가 인생의 각 시기마다 어떤 결말이 전개되더라도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보다 더 위로가 되는 건 없을 것입니다. 모든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당신의 영감을 허락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인생이 연극이라면 극작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길지 않은 48년 동안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한 오 헨리가 구상한 인생도 이렇게 인간애와 희생과 감동이 넘치는 연극의 장인데, 영겁의 세계를 아우르시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우리 인생은 얼마나 사랑과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연극의 장으로 진행될까요?